미술품 수집은 매력적입니다. 작품을 구매해 집이나 사무공간 등에 두면 심미적 가치를 가져다 주죠. 그림이 있고 없음에 따라 공간의 분위기는 달라집니다. 더불어 작품을 구매하면, 그 작가에게 후원한다는 느낌도 듭니다. 초심자들은 대개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하기 마련인데, 신진 작가들에게는 작품 하나를 파는 것이 작품활동을 이어나갈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죠. 또한 미술품은 감가상각에서도 자유로운 편이기 때문에, 투자 대상으로도 아주 매력적입니다.
이처럼 미술품을 수집하는 이유는 정말 다양합니다. 그리고 구매하는 사람들도 다양하죠. 성별, 나이, 직업 모두 다른 사람들이 미술품을 수집하곤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술작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을 '컬렉터'라고 불러요. 그렇다면 1세대 컬렉터들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이유로, 컬렉팅을 시작했던 걸까요?
왼쪽부터 거트루드 스타인, 간송 전형필, 진 폴 게티
오늘 소개드릴 인물은 유럽, 한국, 미국에서 세기의 컬렉터로 꼽히는 사람들이에요. 물론 이들이 세계 최초의 컬렉터는 아닙니다. 다만, 미술시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890년 이후, 이 세 사람은 '뛰어난 안목으로 재능있는 예술가/작품에 투자해 예술계에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냈다는 공통점을 가져요. 그리고 '각기 다른 이유로 컬렉팅을 했다'는 차이점도 가집니다. 이 세 사람은 어떤 컬렉팅을 어떻게 해왔을까요?
거트루드 스타인: 예술의 흐름을 미국에서 유럽으로 되찾아온 여인
거트루드 스타인은 피카소와 헤밍웨이를 발굴한 미국 출신의 컬렉터입니다. 그리고 요즘 표현으로 밀하자면, N잡러이기도 해요. 본캐는 소설가였지만, 시인, 극작가, 그리고 미술품 수집가로도 활동했죠. 많은 N잡러가 그렇듯, 재능이 정말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문학적 통찰력도 뛰어났지만, 미술품을 감정하는 안목도 훌륭했죠.
30대가 된 1900년대에 스타인은 미국을 떠나 파리에 정착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예술 작품을 컬렉팅하고, 예술가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미술의 흐름은 뒤바뀌게 됩니다. 아주 오랫동안 예술의 중심지는 유럽으로 여겨졌는데요. 세계대전을 거치며 이는 미국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한동안 예술의 중심지는 미국처럼 여겨지기도 했죠. 이런 흐름 속, 스타인은 유럽으로 되돌아온 신진작가들의 작품을 구매하고, 후원하기 시작해요.
거트루드 스타인과 그의 스타인 살롱
당시 스타인이 구매한 작품의 작가로는 고갱, 세잔, 마티스, 피카소 등 거장의 작품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모은 작품들을 집에 하나씩 모아두었는데, 나중에는 작품이 너무 많아서 천장까지 작품이 걸릴 지경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의 집은 ‘스타인 갤러리'라고 불리게 되었는데요. 이 작품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며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스타인의 자택을 찾는 일이 많아졌어요. 그런데 당시 스타인은 소설가이자 시인으로서 문필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모든 창작활동이 그렇듯, 높은 집중력을 요하는 일인데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손님이 방해가 되자 스타인은 대책을 마련합니다. 토요일 저녁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 외에는 손님을 받지 않기로 한 것이죠.
그러면서 '스타인 갤러리'는 주말마다 '스타인 살롱'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살롱 문화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데. 당시 이곳의 출석 1위를 자랑했던 건 미술계 거장 피카소와 문학계 거장 헤밍웨이였다고 해요. 문인과 화가들이 모이는 자리다 보니 토론이 자주 일어났는데요. 헤밍웨이가 스타인과 ‘컬렉팅'에 대해 나눈 대화 중 인상적인 것이 있어 들고 왔어요.
-거트루드 스타인: 당신은 그림이든지 옷이든지 하나는 살 수 있어요. 다 살 수는 없어요. 입고 있는 옷차림이 유행에 좀 뒤쳐진다 해도 신경쓰지 말고 튼튼하고 편안한 옷을 사세요. 그러면 당신은 절약된 돈으로 그림을 살 수 있을 거에요.
-헤밍웨이: 하지만 제대로 된 양복 한 벌 사지 않는다 해도, 제가 갖고 싶은 피카소의 그림을 살 만큼의 돈은 없을 겁니다.
-거트루드 스타인: 아니에요. 피카소는 이미 당신에게 맞는 값이 아니죠. 당신 또래 즉 말하자면.. 당신의 나이와 비슷한 또래의 그림을 사세요. 젊은이들 가운데는 언제나 좋은 화가가 있기 마련이죠.
이 내용은 헤밍웨이의 1920년대 회고록 <헤밍웨이, 파리에서의 7년>의 내용을 발췌한 것인데요. 컬렉팅을 인간 생활의 필수재인 의,식,주 중 하나인 옷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 정말 흥미롭습니다. 가격을 고려해 좋은 화가를 찾으라는 말 역시, 최근 컬렉터들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신진작가들의 작품에 주목하는 것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어요.
© Thoughtco
사실 스타인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이름있는 예술가의 작품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수집 대상은 굉장히 다양했어요. 르누아르, 세잔 같은 인상주의 화가부터 피카소 같은 입체파 화가, 야수파를 이끈 마티스, 공연 포스터 작업으로 유명한 툴루즈 로트렉 등 다양했던 것이 특징인데요. 스타인의 컬렉팅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그의 살롱 때문도 아니고, 그의 물려받은 재산 덕분이 아닌, 그가 새로운 작가들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후원했다는 데 있습니다.
거트루드 스타인과 피카소가 그린 그의 초상 © NPR
모든 새로운 것이 그렇듯, 신진 작가와 새로운 사조는 주목받기보다 비난받기 쉽습니다. 스타인은 그런 예술가들의 작품을 알아보고, 당시로서는 무명인 그들의 작품을 구매하고 후원한 덕분에 그들이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죠. 특히 스타인이 각별히 애정을 보였던 것은 1차 대전 이후에 미국에 환멸을 느끼고 파리로 건너온 젊은 미국 문필가들이었는데요. 위대한 개츠비를 쓴 스콧 피츠 제럴드와 헤밍웨이에게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스타인입니다. 그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들의 특징을 규정하고, 그들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예술가의 입지를 다지게 해준 것이죠. 헤밍웨이는 후에 그의 장편소설 데뷔작인 <해는 다시 떠오른다>에서 이 표현을 인용하기도 했고요.
뿐만 아니라 피카소는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화를 직접 그리기도 했었는데요. 예술가들이 컬렉터의 말을 자신의 작품에 인용하고, 그의 그림을 그려 남긴 걸 보면, 정말 예술가들에게 든든한 후원자이자 컬렉터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화재를 되찾기 위해 전 재산을 쓴, 우리나라 1등 부자 "간송 전형필"
간송 전형필은 한국의 교육자이자 문화재 수집가에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유출되는 국보급 문화재 (서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 등)를 수집해서 한국에 남긴 인물이죠.
흔히 컬렉터의 종류를 세가지 정도로 나누곤 합니다. 소장 그 자체에 기쁨을 느끼는 컬렉터,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컬렉터, 마지막은 ‘사명감'으로 진행하는 컬렉터.
간송 전형필은 그 마지막 케이스인데요. 그가 한국의 막대한 국보급 문화재를 수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유산으로 물려받은 부유한 재산 덕분이었습니다. 전형필이 24살이 되던 해, 조부모와 부모, 삼촌 등 친척이 거의 동시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요. 어린 나이에 양가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게 되며 '하늘이 내린 백만장자'라는 이야기도 듣게 됩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정말 흔들리기 쉬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 셈인데요. 다행히 전형필은 대학에서 인생을 바꿀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세창이죠. 그가 간송 전형필에 남긴 말이 있습니다.
우리 조선은 꼭 독립되네. 동서고금에 문화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는 없고,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지.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문화 유적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고 하는 것일세.
이후 전형필은 문화재를 감식하는 눈을 기르면서 일본인의 손에 흘러들어가거나, 훼손될 위기에 처한 문화재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 붓기 시작합니다.
1940년대 일제가 조선어 사용 금지했던 시기, 전형필은 훈민정음 혜레본 원본을 사들여요. 당시 판매자가 '천원'에 팔겠다고 했지만, 전형필은 귀한 물건은 제값을 치러야 한다며 당시 집 10채 값인 '만원'을 주고 천원은 수고비로 더해 주었다고 해요. 이는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77억 정도의 가치를 갖죠.
뿐만 아니라, 당시 기와집 400채 값으로 영국인인 존 개츠비에게 고려청자와 조선 청화 백자 20여점을 구입하기도 합니다. 이 청자와 백자의 가치는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1200억원 정도라고 하는데요. 이 외에도 이미 일본으로 넘어간 작품 중 신윤복의 그림을 찾아오거나, 광복 후에도 전국에 흩어진 문화재를 정리해 보존하는 일을 진행하는 등 사명감으로 작품을 수집했습니다.
전형필의 아호인 '간송'을 따 만들어진 간송미술관.
그렇게 전형필이 모은 미술품과 문화재는 '보화각'이라는 곳에 모아 전시되는데요. 이후 1938년, 보화각이 간송미술관이 되며. 국내 최초의 사립 미술관으로 자리잡습니다. 간송미술관은 서울특별시 3대 사립 박물관 중, 가장 중요한 곳으로 꼽히기도 해요.
이 미술관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역시 소장품입니다. 국보 12점, 보물 32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이 있는데요. 잘 알려진 것은 훈민정음 혜례본, 신윤복의 미인도, 겸재 정선의 작품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간송미술관은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에요. 문화재의 보호와 연구에 중점을 두고 있어 관람이 많이 까다롭기 때문인데요. 개방기간은 1년에 단 두 번으로, 5월과 10월 하순에만 2주 정도 개방합니다. 이 시기가 되면 언론에서 한번씩 기사를 내며 다루니 소식이 올라오면 꼭 방문해보시길! 추천드려요. 관람료는 무료입니다.
© biography.com
'게티 이미지 뱅크' 들어본 사람? 게티 가문의 설립자이자, 예술품 수집광 "진 폴 게티"
진 폴 게티. 이름 들어보셨나요? 게티는 1966년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 부자로 기록되기도 한 인물입니다. 석유사업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이 석유업에 뛰어들어 24살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이후 항공, 호텔업 등 다양한 사업을 성공시키면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고 해요. 이 백만장자 이야기가 예술계에서 주목받은 이유는, 게티가 '미술품 컬렉팅'에 온 인생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 Getty Center
게티는 1930년대부터 미술품 수집을 시작했어요. 이 시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게티가 어마어마한 짠돌이였기 때문이죠. 실제로 게티는 자신의 집에 놀러온 손님들이 전화를 사용하면서 요금이 많이 나오자, 직접 공중전화를 설치해 유료로 전화를 하게 했다고 해요. 옷이나 가구 같은 것들을 새로 사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고요. (후에 게티의 손자가 이는 헛소문이었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무튼 이런 게티가 미술품을 1930년대부터 시작했던 이유는, 당시 경제 공황으로 미술시장이 침체되어 있어서 헐값에 작품을 수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그 시기 많은 예술품을 수집했고, 그 종류도 정말 다양합니다. 고대 그리스 예술작품부터 현대예술 작품까지 시대도 폭넓죠.
(좌) 게티뮤지엄 설계 중 진 폴 게티의 모습, (우) 현재 게티뮤지엄의 모습 © Getty Center
이후 게티는 자신의 전 재산을 게티 박물관 설립에 사용하라는 유언을 남기는데요. 사망 이후 게티가 남긴 재산은 약 60억 달러였고,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한화 약 31조원이라고 합니다. 게티가 남긴 엄청난 금액으로 설계된 미술관이 바로 LA에 있는 '게티 뮤지엄'이에요.
LA 게티뮤지엄은 1997년 개관되었습니다. LA 여행 필수 코스로 손꼽히기도 하는 관광 명소인데요. 미 서부에서 가장 많은 미술품을 소장한 박물관으로, 연간 180만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죠.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 상당히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40만 제곱이 넘는 대지에 시설공사비만 한화로 약 1조원이 들어갔다고 해요. 건축 기간만 해도 13년.
© Getty Center
소장 작품도 화려합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예술작품부터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거쳐서 현대 미술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데요. 이 오랜 시기의 작품을 게티 미술관은 네개 전시관에 나누어 전시된다고 해요. 그 중 가장 인기 있는 곳은 1800년대 이후 작품이 모인 '서쪽 전시관'이에요. 이곳엔 빈센트 반 고흐나 폴 고갱, 마네, 렘브란트, 프라고나르, 윌리엄 터너 등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데요. 이 중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작품은 고흐의 <아이리스>, 렘브란트의 <웃는 자화상>이라고 하네요. 이 외에도 차량으로 40분 거리에 있는 게티 빌라로 가면 고대 예술 작품들까지도 만나볼 수 있는데요.
그런데 이 미술관은 단순히 돈 많은 미술 애호가가 만든 결과물은 아닙니다. 앞서 게티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전 재산을 '미술관 설립에 써달라'고 이야기했다 했는데요. 그 이유는 미술관을 통해 교육적, 예술적 사명과 의무를 수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때문에 엄청난 규모를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입장료를 받지 않고 있죠.
© Getty Center
더불어 게티는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소장품을 접할 수 있도록 인터넷에 작품과 정보를 아카이빙했습니다. 인터넷이 상용화되기 전부터 미술정보 표준화 작업을 진행해온 것인데요. 후에는 이를 타 미술관에도 적용해서 온라인 학술 카탈로그를 제작했다고 해요. 이 모든 자료들은 온라인에서 무료로 오픈할 수 있고 공유도 가능합니다. 이쯤 되면, 정말 돈 많은 부자의 취미생활이 아니라, 예술에 누구보다 진심인 컬렉터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Editor's Comment.
살아있는 예술가 중 가장 부자이며, 영향력 있다고 여겨지는 '데미안 허스트'. 그는 이런 말을 남겼어요. "예술은 비평보다 구매자가 필요하다." 이 말은 기존의 많은 예술 비평가와 예술계 권위자들에게 충격을 안겼습니다. 비평이 없는 예술은 쉽게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아트 컬렉팅이 많은 이유로 각광받는 요즘, 예술이 계속될 수 있는 것은 컬렉터들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비평은 어쩌면 예술가들을 위한 것이 아닌, 비평가 본인들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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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데미언 허스트가 '박제상어'를 만든 이유
② 미술관은 어떻게 돈을 벌까?
③ '찐' 컬렉터들의 컬렉팅 팁 10가지
미술품 수집은 매력적입니다. 작품을 구매해 집이나 사무공간 등에 두면 심미적 가치를 가져다 주죠. 그림이 있고 없음에 따라 공간의 분위기는 달라집니다. 더불어 작품을 구매하면, 그 작가에게 후원한다는 느낌도 듭니다. 초심자들은 대개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하기 마련인데, 신진 작가들에게는 작품 하나를 파는 것이 작품활동을 이어나갈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죠. 또한 미술품은 감가상각에서도 자유로운 편이기 때문에, 투자 대상으로도 아주 매력적입니다.
이처럼 미술품을 수집하는 이유는 정말 다양합니다. 그리고 구매하는 사람들도 다양하죠. 성별, 나이, 직업 모두 다른 사람들이 미술품을 수집하곤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술작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을 '컬렉터'라고 불러요. 그렇다면 1세대 컬렉터들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이유로, 컬렉팅을 시작했던 걸까요?
왼쪽부터 거트루드 스타인, 간송 전형필, 진 폴 게티
오늘 소개드릴 인물은 유럽, 한국, 미국에서 세기의 컬렉터로 꼽히는 사람들이에요. 물론 이들이 세계 최초의 컬렉터는 아닙니다. 다만, 미술시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890년 이후, 이 세 사람은 '뛰어난 안목으로 재능있는 예술가/작품에 투자해 예술계에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냈다는 공통점을 가져요. 그리고 '각기 다른 이유로 컬렉팅을 했다'는 차이점도 가집니다. 이 세 사람은 어떤 컬렉팅을 어떻게 해왔을까요?
거트루드 스타인: 예술의 흐름을 미국에서 유럽으로 되찾아온 여인
거트루드 스타인은 피카소와 헤밍웨이를 발굴한 미국 출신의 컬렉터입니다. 그리고 요즘 표현으로 밀하자면, N잡러이기도 해요. 본캐는 소설가였지만, 시인, 극작가, 그리고 미술품 수집가로도 활동했죠. 많은 N잡러가 그렇듯, 재능이 정말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문학적 통찰력도 뛰어났지만, 미술품을 감정하는 안목도 훌륭했죠.
30대가 된 1900년대에 스타인은 미국을 떠나 파리에 정착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예술 작품을 컬렉팅하고, 예술가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미술의 흐름은 뒤바뀌게 됩니다. 아주 오랫동안 예술의 중심지는 유럽으로 여겨졌는데요. 세계대전을 거치며 이는 미국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한동안 예술의 중심지는 미국처럼 여겨지기도 했죠. 이런 흐름 속, 스타인은 유럽으로 되돌아온 신진작가들의 작품을 구매하고, 후원하기 시작해요.
거트루드 스타인과 그의 스타인 살롱
당시 스타인이 구매한 작품의 작가로는 고갱, 세잔, 마티스, 피카소 등 거장의 작품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모은 작품들을 집에 하나씩 모아두었는데, 나중에는 작품이 너무 많아서 천장까지 작품이 걸릴 지경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의 집은 ‘스타인 갤러리'라고 불리게 되었는데요. 이 작품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며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스타인의 자택을 찾는 일이 많아졌어요. 그런데 당시 스타인은 소설가이자 시인으로서 문필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모든 창작활동이 그렇듯, 높은 집중력을 요하는 일인데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손님이 방해가 되자 스타인은 대책을 마련합니다. 토요일 저녁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 외에는 손님을 받지 않기로 한 것이죠.
그러면서 '스타인 갤러리'는 주말마다 '스타인 살롱'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살롱 문화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데. 당시 이곳의 출석 1위를 자랑했던 건 미술계 거장 피카소와 문학계 거장 헤밍웨이였다고 해요. 문인과 화가들이 모이는 자리다 보니 토론이 자주 일어났는데요. 헤밍웨이가 스타인과 ‘컬렉팅'에 대해 나눈 대화 중 인상적인 것이 있어 들고 왔어요.
-거트루드 스타인: 당신은 그림이든지 옷이든지 하나는 살 수 있어요. 다 살 수는 없어요. 입고 있는 옷차림이 유행에 좀 뒤쳐진다 해도 신경쓰지 말고 튼튼하고 편안한 옷을 사세요. 그러면 당신은 절약된 돈으로 그림을 살 수 있을 거에요.
-헤밍웨이: 하지만 제대로 된 양복 한 벌 사지 않는다 해도, 제가 갖고 싶은 피카소의 그림을 살 만큼의 돈은 없을 겁니다.
-거트루드 스타인: 아니에요. 피카소는 이미 당신에게 맞는 값이 아니죠. 당신 또래 즉 말하자면.. 당신의 나이와 비슷한 또래의 그림을 사세요. 젊은이들 가운데는 언제나 좋은 화가가 있기 마련이죠.
이 내용은 헤밍웨이의 1920년대 회고록 <헤밍웨이, 파리에서의 7년>의 내용을 발췌한 것인데요. 컬렉팅을 인간 생활의 필수재인 의,식,주 중 하나인 옷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 정말 흥미롭습니다. 가격을 고려해 좋은 화가를 찾으라는 말 역시, 최근 컬렉터들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신진작가들의 작품에 주목하는 것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어요.
© Thoughtco
사실 스타인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이름있는 예술가의 작품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수집 대상은 굉장히 다양했어요. 르누아르, 세잔 같은 인상주의 화가부터 피카소 같은 입체파 화가, 야수파를 이끈 마티스, 공연 포스터 작업으로 유명한 툴루즈 로트렉 등 다양했던 것이 특징인데요. 스타인의 컬렉팅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그의 살롱 때문도 아니고, 그의 물려받은 재산 덕분이 아닌, 그가 새로운 작가들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후원했다는 데 있습니다.
거트루드 스타인과 피카소가 그린 그의 초상 © NPR
모든 새로운 것이 그렇듯, 신진 작가와 새로운 사조는 주목받기보다 비난받기 쉽습니다. 스타인은 그런 예술가들의 작품을 알아보고, 당시로서는 무명인 그들의 작품을 구매하고 후원한 덕분에 그들이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죠. 특히 스타인이 각별히 애정을 보였던 것은 1차 대전 이후에 미국에 환멸을 느끼고 파리로 건너온 젊은 미국 문필가들이었는데요. 위대한 개츠비를 쓴 스콧 피츠 제럴드와 헤밍웨이에게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스타인입니다. 그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들의 특징을 규정하고, 그들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예술가의 입지를 다지게 해준 것이죠. 헤밍웨이는 후에 그의 장편소설 데뷔작인 <해는 다시 떠오른다>에서 이 표현을 인용하기도 했고요.
뿐만 아니라 피카소는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화를 직접 그리기도 했었는데요. 예술가들이 컬렉터의 말을 자신의 작품에 인용하고, 그의 그림을 그려 남긴 걸 보면, 정말 예술가들에게 든든한 후원자이자 컬렉터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화재를 되찾기 위해 전 재산을 쓴, 우리나라 1등 부자 "간송 전형필"
간송 전형필은 한국의 교육자이자 문화재 수집가에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유출되는 국보급 문화재 (서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 등)를 수집해서 한국에 남긴 인물이죠.
흔히 컬렉터의 종류를 세가지 정도로 나누곤 합니다. 소장 그 자체에 기쁨을 느끼는 컬렉터,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컬렉터, 마지막은 ‘사명감'으로 진행하는 컬렉터.
간송 전형필은 그 마지막 케이스인데요. 그가 한국의 막대한 국보급 문화재를 수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유산으로 물려받은 부유한 재산 덕분이었습니다. 전형필이 24살이 되던 해, 조부모와 부모, 삼촌 등 친척이 거의 동시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요. 어린 나이에 양가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게 되며 '하늘이 내린 백만장자'라는 이야기도 듣게 됩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정말 흔들리기 쉬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 셈인데요. 다행히 전형필은 대학에서 인생을 바꿀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세창이죠. 그가 간송 전형필에 남긴 말이 있습니다.
우리 조선은 꼭 독립되네. 동서고금에 문화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는 없고,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지.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문화 유적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고 하는 것일세.
이후 전형필은 문화재를 감식하는 눈을 기르면서 일본인의 손에 흘러들어가거나, 훼손될 위기에 처한 문화재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 붓기 시작합니다.
1940년대 일제가 조선어 사용 금지했던 시기, 전형필은 훈민정음 혜레본 원본을 사들여요. 당시 판매자가 '천원'에 팔겠다고 했지만, 전형필은 귀한 물건은 제값을 치러야 한다며 당시 집 10채 값인 '만원'을 주고 천원은 수고비로 더해 주었다고 해요. 이는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77억 정도의 가치를 갖죠.
뿐만 아니라, 당시 기와집 400채 값으로 영국인인 존 개츠비에게 고려청자와 조선 청화 백자 20여점을 구입하기도 합니다. 이 청자와 백자의 가치는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1200억원 정도라고 하는데요. 이 외에도 이미 일본으로 넘어간 작품 중 신윤복의 그림을 찾아오거나, 광복 후에도 전국에 흩어진 문화재를 정리해 보존하는 일을 진행하는 등 사명감으로 작품을 수집했습니다.
전형필의 아호인 '간송'을 따 만들어진 간송미술관.
그렇게 전형필이 모은 미술품과 문화재는 '보화각'이라는 곳에 모아 전시되는데요. 이후 1938년, 보화각이 간송미술관이 되며. 국내 최초의 사립 미술관으로 자리잡습니다. 간송미술관은 서울특별시 3대 사립 박물관 중, 가장 중요한 곳으로 꼽히기도 해요.
이 미술관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역시 소장품입니다. 국보 12점, 보물 32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이 있는데요. 잘 알려진 것은 훈민정음 혜례본, 신윤복의 미인도, 겸재 정선의 작품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간송미술관은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에요. 문화재의 보호와 연구에 중점을 두고 있어 관람이 많이 까다롭기 때문인데요. 개방기간은 1년에 단 두 번으로, 5월과 10월 하순에만 2주 정도 개방합니다. 이 시기가 되면 언론에서 한번씩 기사를 내며 다루니 소식이 올라오면 꼭 방문해보시길! 추천드려요. 관람료는 무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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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 이미지 뱅크' 들어본 사람? 게티 가문의 설립자이자, 예술품 수집광 "진 폴 게티"
진 폴 게티. 이름 들어보셨나요? 게티는 1966년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 부자로 기록되기도 한 인물입니다. 석유사업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이 석유업에 뛰어들어 24살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이후 항공, 호텔업 등 다양한 사업을 성공시키면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고 해요. 이 백만장자 이야기가 예술계에서 주목받은 이유는, 게티가 '미술품 컬렉팅'에 온 인생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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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는 1930년대부터 미술품 수집을 시작했어요. 이 시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게티가 어마어마한 짠돌이였기 때문이죠. 실제로 게티는 자신의 집에 놀러온 손님들이 전화를 사용하면서 요금이 많이 나오자, 직접 공중전화를 설치해 유료로 전화를 하게 했다고 해요. 옷이나 가구 같은 것들을 새로 사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고요. (후에 게티의 손자가 이는 헛소문이었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무튼 이런 게티가 미술품을 1930년대부터 시작했던 이유는, 당시 경제 공황으로 미술시장이 침체되어 있어서 헐값에 작품을 수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그 시기 많은 예술품을 수집했고, 그 종류도 정말 다양합니다. 고대 그리스 예술작품부터 현대예술 작품까지 시대도 폭넓죠.
(좌) 게티뮤지엄 설계 중 진 폴 게티의 모습, (우) 현재 게티뮤지엄의 모습 © Getty Center
이후 게티는 자신의 전 재산을 게티 박물관 설립에 사용하라는 유언을 남기는데요. 사망 이후 게티가 남긴 재산은 약 60억 달러였고,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한화 약 31조원이라고 합니다. 게티가 남긴 엄청난 금액으로 설계된 미술관이 바로 LA에 있는 '게티 뮤지엄'이에요.
LA 게티뮤지엄은 1997년 개관되었습니다. LA 여행 필수 코스로 손꼽히기도 하는 관광 명소인데요. 미 서부에서 가장 많은 미술품을 소장한 박물관으로, 연간 180만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죠.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 상당히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40만 제곱이 넘는 대지에 시설공사비만 한화로 약 1조원이 들어갔다고 해요. 건축 기간만 해도 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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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작품도 화려합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예술작품부터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거쳐서 현대 미술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데요. 이 오랜 시기의 작품을 게티 미술관은 네개 전시관에 나누어 전시된다고 해요. 그 중 가장 인기 있는 곳은 1800년대 이후 작품이 모인 '서쪽 전시관'이에요. 이곳엔 빈센트 반 고흐나 폴 고갱, 마네, 렘브란트, 프라고나르, 윌리엄 터너 등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데요. 이 중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작품은 고흐의 <아이리스>, 렘브란트의 <웃는 자화상>이라고 하네요. 이 외에도 차량으로 40분 거리에 있는 게티 빌라로 가면 고대 예술 작품들까지도 만나볼 수 있는데요.
그런데 이 미술관은 단순히 돈 많은 미술 애호가가 만든 결과물은 아닙니다. 앞서 게티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전 재산을 '미술관 설립에 써달라'고 이야기했다 했는데요. 그 이유는 미술관을 통해 교육적, 예술적 사명과 의무를 수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때문에 엄청난 규모를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입장료를 받지 않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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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게티는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소장품을 접할 수 있도록 인터넷에 작품과 정보를 아카이빙했습니다. 인터넷이 상용화되기 전부터 미술정보 표준화 작업을 진행해온 것인데요. 후에는 이를 타 미술관에도 적용해서 온라인 학술 카탈로그를 제작했다고 해요. 이 모든 자료들은 온라인에서 무료로 오픈할 수 있고 공유도 가능합니다. 이쯤 되면, 정말 돈 많은 부자의 취미생활이 아니라, 예술에 누구보다 진심인 컬렉터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Editor's Comment.
살아있는 예술가 중 가장 부자이며, 영향력 있다고 여겨지는 '데미안 허스트'. 그는 이런 말을 남겼어요. "예술은 비평보다 구매자가 필요하다." 이 말은 기존의 많은 예술 비평가와 예술계 권위자들에게 충격을 안겼습니다. 비평이 없는 예술은 쉽게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아트 컬렉팅이 많은 이유로 각광받는 요즘, 예술이 계속될 수 있는 것은 컬렉터들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비평은 어쩌면 예술가들을 위한 것이 아닌, 비평가 본인들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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