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더 많은 이들과 예술을 나누기 위해 작품을 구입한 이도 있습니다. 바로 기네스북에 기록된 최고 부자이자, 위대한 수전노라 불린 진 폴 게티죠.
위대한 짠돌이 게티의 삶

진 폴 게티 ⓒ The Getty
진 폴 게티는 1966년,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 부자로 기록된 인물입니다. 당시 그의 재산은 한화 약 1조 7천억 원. 1966년이라는 시점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죠. 게티가 세상을 떠난 10년 후에는 무려 20억 달러(당시 한화 약 3조 원)의 재산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어요.
게티가 이렇게 거대한 자산을 모을 수 있었던 건 석유 사업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대학생 때부터 일찍이 석유업에 뛰어들었던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상당한 사업 수완과 배짱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번은 석유 탐사를 위한 황무지 개척에 천만 달러가 넘는 금액을 투자했는데, 4년이 넘도록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게티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여기에 3천만 달러를 더 투자해 6년 만에 유전을 발견했어요. 이 유전에서는, 1년간 2,500만 리터의 석유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덕분에 게티는 석유 부자가 될 수 있었죠. 600억 가까이 되는 돈을 투자하고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상황에서 6년간 기다릴 수 있는 강인한 배짱을 가진 진정한 사업가였습니다.
손자 납치 사건으로 드러난 극강의 짠돌이 기질

진 폴 게티 ⓒ The Getty
동시에 게티는 상당한 짠돌이이기도 했어요. 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손자 납치 사건입니다. 1973년, 당시 16살이던 게티의 손자 J. 폴 게티 3세가 로마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됐어요. 납치범들은 한화 약 250억 원 정도의 몸값을 요구했습니다.
게티의 아들은 그 돈을 주고 아들을 구하자고 간청했지만, 게티는 이를 거절했어요. 그리고 무려 4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끌었죠. 결국 손자의 잘린 귀가 집으로 배송되었고, 납치범들은 10일 안에 320만 달러를 보내라고 통보했어요.
하지만 게티는 여기에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긴 협상에 지친 납치범들은 300만 달러까지 몸값을 할인해 주기로 했지만, 게티는 여기에도 응하지 않았어요. 대신, 220만 달러까지는 지불할 생각이 있다고 역제안을 했습니다. 이 금액이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는 최고 금액이었기 때문이었죠.
덕분에 손자는 한쪽 귀가 잘린 채로 이탈리아에서 풀려나게 됐습니다. 후에 게티는 납치범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이유를 두 가지 언급했어요. 첫째는 범인들의 요구에 응하면 나머지 14명의 손자 손녀들이 또 언제 납치될지 모른다는 점 때문이었고, 둘째는 자신이 여기에 응하면 그런 범죄가 또다시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돈과 선택이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죠. 게티는 이렇게 사업가적인 강인한 배짱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손자의 목숨을 걸고 몸값을 할인받는 짠돌이적인 기질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 정도의 짠돌이로서는 의외의 모습으로, 미술품 컬렉팅에 몰입하기도 했습니다.
투자 목적에서 예술적 열정으로


게티뮤지엄 전경 ⓒ Getty Museum
게티는 1930년대부터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미국 부유층 사이에서는 유럽 미술 작품을 수집하는 것이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부를 축적한 록펠러가, 멜론가, 프릭가도 이미 훌륭한 컬렉션을 가지고 있었죠.
게티는 사업가로서 투자적인 관점으로 컬렉팅에 접근했어요. 1930년대는 대공황의 여파로 미술시장이 침체되어 있었는데, 이 덕분에 헐값에 작품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게티는 지금이 저점 매수하기 훌륭한 시기라 생각했고, 철저히 투자적 목적으로 컬렉팅을 시작했죠.
하지만 시장 상황이 안 좋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사들인 것은 아니었어요. 게티는 작품 하나를 두고 6개월간 가격 협상을 하기도 했고, 결국 반값으로 작품 가격을 깎아 컬렉팅을 하곤 했습니다. 역시나 그의 짠돌이 기질은 미술품 구매에서도 발휘되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미술작품의 아름다움을 알게 됐어요. 컬렉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수많은 미술사 서적을 독파하고, 전문가들과 교류하며 지식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미술 감상의 즐거움과 기쁨을 알게 된 겁니다. 이윽고 이 아름다움을 개인이 소유하기보다,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죠. 그리고 말년에 자신의 전 재산을 미술관 설립과 운영에 사용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게티뮤지엄의 탄생

게티뮤지엄 전경 ⓒ Getty Museum
사망 당시 게티가 남긴 재산은 약 60억 달러로,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한화 약 31조 원입니다. 너무 큰 금액이었기 때문에 모든 돈이 미술관 설립에 사용되진 못했고, 건축 비용에 1조 원을 들여서 설계했다고 해요.
안타깝게도 게티는 미술관이 완공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의 뮤지엄에 방문해 보지 못했는데요. 그럼에도 게티뮤지엄은 오늘날 전설적인 미술관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 미술사 책을 옮겨놓은 듯한 교육적 큐레이션과 (2)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위한 미술관이라는 점 때문이죠.
미술사 책을 옮겨놓은 듯한 교육적 큐레이션
게티뮤지엄은 과거 클래식한 고전 작품을 볼 수 있는 게티 빌라와 근현대 예술을 볼 수 있는 게티 센터로 나누어져 있어요. 이중 게티 빌라가 1974년에 가장 먼저 설립된 미술관입니다.
게티 빌라 Getty Villa (1974)

게티빌라 전경 ⓒ Getty Museum
게티 빌라는 아름다운 정원과 고대 궁전 같은 양식이 돋보이는 건물이에요. 과거 화산 폭발로 묻힌 고대 빌라 '빌라 데이 파피리'를 정교하게 재현한 양식을 하고 있는데, 당시 이 빌라가 완전히 발굴되지 않은 탓에 건축가들은 발굴된 부분을 바탕으로 나머지 부분은 상상해 설계했습니다. 덕분에 고대와 현대가 어우러진 창의적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있죠.
정원 역시 고대 로마 스타일로 디자인했어요. 고고학자들이 발굴 과정에서 발견한 실제 식물 화석과 씨앗을 바탕으로 재현하듯이 정원을 디자인했죠. 그리고 이 고대 건축 양식에 걸맞게 선보이는 작품도 고대 조각품 위주로 큐레이션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에트루리아 유물이 주로 전시 중인데요. 소장품의 양도 방대해요. BC 6500년에서 AD 400년에 걸쳐 4만 4천여 점이나 소장하고 있죠. 게티빌라에서는 이 소장품을 시대순으로 선보입니다.
고대 소장품과 고대 양식으로 꽉 채운 게티 빌라는 그 자체로 하나의 콘텐츠이지만, 게티는 이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어요. 게티는 개관 당시 이미 82살로 게티 빌라에 가기엔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게티 빌라가 개관하고 2년 후, 자신의 재산을 미술관에 모두 써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죠.
이 유언을 집행하기 위해, 새로운 미술관 개발이 시작됐습니다. 게티 빌라는 위치가 로스앤젤레스 시내에서 너무 멀어 관객이 찾아오는 데도 불편했고, 소장품의 양 대비 공간이 작은 편이었습니다. 그렇게 전시 공간도 늘리고, 접근성도 개선하기 위한 새로운 미술관 건축이 진행됐어요. 23년이라는 긴 시간 끝에 1997년 개관한 것이 바로 게티 센터입니다.
게티 센터 Getty Center (1997)

게티뮤지엄 전경 ⓒ Getty Museum
게티 센터는 오늘날 '게티뮤지엄'하면 떠올릴 수 있는 대표적인 건물입니다. 미술관 입구에서 트램을 타고 1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5분간 이동하면 여러 건물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게티 센터에 도착해요. 이곳은 게티 빌라보다 훨씬 더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게티 센터는 지진이 잦은 로스앤젤레스의 특성을 고려한 특별한 내진 설계를 적용했어요. 건물과 지반이 별도로 움직이는 베이스 아이솔레이션 시스템을 적용해, 지진이 발생하면 건물과 지반이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방식이죠. 또한 화재에 대비한 시설도 완벽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378만 리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탱크 덕분에 자체적으로 화재 진압이 가능하고, 건물 전체에 고성능 자동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어 있어요.

고흐의 아이리스, 렘브란트의 웃는 자화상 ⓒ Getty Museum
게티 센터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간은 1800년대 이후 작품이 모인 서쪽 전시관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마네, 렘브란트, 프라고나르, 윌리엄 터너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어요. 특히 고흐의 <아이리스>와 렘브란트의 <웃는 자화상>이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죠.
이렇게 게티뮤지엄은 마치 미술사 책을 옮겨놓은 듯 교육적인 큐레이션을 선보이는데, 과거의 유산을 잘 보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사업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위한 미술관
미술관의 역할은 크게 5가지가 있어요. 전시, 연구, 수집, 보존, 교육이죠. 게티뮤지엄은 이 역할을 아주 잘 해내고 있는 미술관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게티가 남긴 막대한 유산 덕이 컸어요.
- 게티 트러스트 J.Paul Getty Trust
게티 트러스트는 자신의 유산을 미술관에 쓰라는 게티의 유언에 따라 1982년 세워진 기관이에요. 게티 사망 당시 약 7억 달러(한화 약 1조 230억 원) 가량을 받았고, 2023년 기준 90억 달러(한화 약 13조 1,535억 원)의 자산을 가지고 있죠. 연간 미술관 운영에 5천억 원가량을 사용하는 덕분에 게티 뮤지엄은 여유로운 자금으로 미술관의 5대 의무를 수행할 수 있었어요.
게티뮤지엄은 게티연구소(Getty Research Institute)와 게티 보존 연구소(Getty Conservation Institute)를 운영하고 있어요. 게티연구소는 100만 권 이상의 장서와 2백만 장이 넘는 사진을 소장하고 있으며, 예술사 연구, 학술활동 지원, 도서관 운영, 디지털 자료 보유, 방문 프로그램 등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게티 보존 연구소는 예술품 및 문화유산 보존 기술 연구 개발, 전 세계 보존 프로젝트 지원, 보존 분야 교육 및 훈련 등을 제공하고 있죠.
게티뮤지엄은 꾸준히 명작을 수집해왔습니다. 대표적으로 1987년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경매에 낙찰된 빈센트 반 고흐의 <붓꽃 Irises, 1889>을 소장하고 있어요. 이 작품은 고흐가 생 레미의 정신 병원에서 그린 작품으로, 현재 게티 센터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게티 재단(Getty Foundation)은 예술 관련 보조금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박물관 큐레이터십, 예술사 연구, 보존 프로젝트 등을 지원하고 있어요. 특히 '퍼시픽 스탠더드 타임(Pacific Standard Time)'과 같은 대규모 문화 이니셔티브를 주도하며 예술 교육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게티뮤지엄은 미술관을 통해 교육적, 예술적 사명과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와 컬렉션을 자랑함에도 입장료를 받지 않고 있어요. 또한 더 많은 사람이 소장품을 접할 수 있도록 인터넷에 작품과 정보를 아카이빙하고 있죠. 인터넷이 상용화되기 전부터 미술정보 표준화 작업을 진행했고, 후에는 이를 타 미술관에도 적용해 온라인 학술 카탈로그를 제작했습니다. 이 모든 자료들은 온라인에서 무료로 접근할 수 있고 공유도 가능해요.
짠돌이의 역설, 관대한 유산

ⓒ Getty Museum
이전에 손자 납치 사건 때 게티는 본인이 몸값을 주고 손주를 데려오면, 자신의 다른 손주들뿐만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의 자식이나 손주가 납치당할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영향력을 가짐을 잘 알고 있었던 거죠. 미술품 컬렉팅에 있어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잘 알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운영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대미술의 악동이라 불리는 데미안 허스트는 "예술은 비평보다 구매자가 필요하다"라는 말을 남겼어요. 진 폴 게티의 미술품 컬렉팅은 처음에는 취미의 영역이었을지라도, 이후 자신의 작품을 모든 사람들과 나누는 시도는 인류를 위한 사명과도 같았습니다.

게티뮤지엄 전경 ⓒ Getty Museum
게티는 일생 동안 특유의 짠돌이 기질 탓에, '수전노'라고 불리기도 했어요. 하지만 자신이 평생에 걸쳐 모은 미술품을 무료로 개방한 시도와, 예술 교육에 누구보다 적극적인 태도는 그를 '위대하다'라고 불리게 만들어준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짠돌이가 남긴 예술적 사명은 오늘날 게티뮤지엄을 통해 전 세계인에게 예술의 감동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돈을 쓰기 가장 인색했던 사람이 인류의 예술적 유산을 위해 가장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게티의 이러한 모순된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것은 단순한 미술관이 아닌, 예술을 통한 영감과 교육의 가치인 것 같습니다.
찰스 사치, 필립 호프먼, 데이비드 게펜
컬렉터들은 제각기 다양한 이유로 미술품을 구매합니다. 현대미술 컬렉터이자 사치갤러리의 대표 찰스 사치는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작품을 구매한다고 고백했고, 연평균 47% 수익을 자랑하는 파인아트펀드의 CEO 필립 호프먼은 "투자 수익을 위해" 컬렉팅한다고 말했죠. 자산 9조 9천억 원의 현대미술 컬렉터 데이비드 게펜은 "행복하기가 돈 벌기보다 어렵다"라며 자신의 행복과 평온을 위해 미술 작품을 사들인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더 많은 이들과 예술을 나누기 위해 작품을 구입한 이도 있습니다. 바로 기네스북에 기록된 최고 부자이자, 위대한 수전노라 불린 진 폴 게티죠.
위대한 짠돌이 게티의 삶
진 폴 게티 ⓒ The Getty
진 폴 게티는 1966년,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 부자로 기록된 인물입니다. 당시 그의 재산은 한화 약 1조 7천억 원. 1966년이라는 시점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죠. 게티가 세상을 떠난 10년 후에는 무려 20억 달러(당시 한화 약 3조 원)의 재산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어요.
게티가 이렇게 거대한 자산을 모을 수 있었던 건 석유 사업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대학생 때부터 일찍이 석유업에 뛰어들었던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상당한 사업 수완과 배짱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번은 석유 탐사를 위한 황무지 개척에 천만 달러가 넘는 금액을 투자했는데, 4년이 넘도록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게티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여기에 3천만 달러를 더 투자해 6년 만에 유전을 발견했어요. 이 유전에서는, 1년간 2,500만 리터의 석유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덕분에 게티는 석유 부자가 될 수 있었죠. 600억 가까이 되는 돈을 투자하고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상황에서 6년간 기다릴 수 있는 강인한 배짱을 가진 진정한 사업가였습니다.
손자 납치 사건으로 드러난 극강의 짠돌이 기질
진 폴 게티 ⓒ The Getty
동시에 게티는 상당한 짠돌이이기도 했어요. 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손자 납치 사건입니다. 1973년, 당시 16살이던 게티의 손자 J. 폴 게티 3세가 로마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됐어요. 납치범들은 한화 약 250억 원 정도의 몸값을 요구했습니다.
게티의 아들은 그 돈을 주고 아들을 구하자고 간청했지만, 게티는 이를 거절했어요. 그리고 무려 4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끌었죠. 결국 손자의 잘린 귀가 집으로 배송되었고, 납치범들은 10일 안에 320만 달러를 보내라고 통보했어요.
하지만 게티는 여기에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긴 협상에 지친 납치범들은 300만 달러까지 몸값을 할인해 주기로 했지만, 게티는 여기에도 응하지 않았어요. 대신, 220만 달러까지는 지불할 생각이 있다고 역제안을 했습니다. 이 금액이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는 최고 금액이었기 때문이었죠.
덕분에 손자는 한쪽 귀가 잘린 채로 이탈리아에서 풀려나게 됐습니다. 후에 게티는 납치범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이유를 두 가지 언급했어요. 첫째는 범인들의 요구에 응하면 나머지 14명의 손자 손녀들이 또 언제 납치될지 모른다는 점 때문이었고, 둘째는 자신이 여기에 응하면 그런 범죄가 또다시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돈과 선택이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죠. 게티는 이렇게 사업가적인 강인한 배짱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손자의 목숨을 걸고 몸값을 할인받는 짠돌이적인 기질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 정도의 짠돌이로서는 의외의 모습으로, 미술품 컬렉팅에 몰입하기도 했습니다.
투자 목적에서 예술적 열정으로
게티뮤지엄 전경 ⓒ Getty Museum
게티는 1930년대부터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미국 부유층 사이에서는 유럽 미술 작품을 수집하는 것이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부를 축적한 록펠러가, 멜론가, 프릭가도 이미 훌륭한 컬렉션을 가지고 있었죠.
게티는 사업가로서 투자적인 관점으로 컬렉팅에 접근했어요. 1930년대는 대공황의 여파로 미술시장이 침체되어 있었는데, 이 덕분에 헐값에 작품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게티는 지금이 저점 매수하기 훌륭한 시기라 생각했고, 철저히 투자적 목적으로 컬렉팅을 시작했죠.
하지만 시장 상황이 안 좋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사들인 것은 아니었어요. 게티는 작품 하나를 두고 6개월간 가격 협상을 하기도 했고, 결국 반값으로 작품 가격을 깎아 컬렉팅을 하곤 했습니다. 역시나 그의 짠돌이 기질은 미술품 구매에서도 발휘되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미술작품의 아름다움을 알게 됐어요. 컬렉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수많은 미술사 서적을 독파하고, 전문가들과 교류하며 지식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미술 감상의 즐거움과 기쁨을 알게 된 겁니다. 이윽고 이 아름다움을 개인이 소유하기보다,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죠. 그리고 말년에 자신의 전 재산을 미술관 설립과 운영에 사용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게티뮤지엄의 탄생
게티뮤지엄 전경 ⓒ Getty Museum
사망 당시 게티가 남긴 재산은 약 60억 달러로,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한화 약 31조 원입니다. 너무 큰 금액이었기 때문에 모든 돈이 미술관 설립에 사용되진 못했고, 건축 비용에 1조 원을 들여서 설계했다고 해요.
안타깝게도 게티는 미술관이 완공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의 뮤지엄에 방문해 보지 못했는데요. 그럼에도 게티뮤지엄은 오늘날 전설적인 미술관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 미술사 책을 옮겨놓은 듯한 교육적 큐레이션과 (2)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위한 미술관이라는 점 때문이죠.
미술사 책을 옮겨놓은 듯한 교육적 큐레이션
게티뮤지엄은 과거 클래식한 고전 작품을 볼 수 있는 게티 빌라와 근현대 예술을 볼 수 있는 게티 센터로 나누어져 있어요. 이중 게티 빌라가 1974년에 가장 먼저 설립된 미술관입니다.
게티 빌라 Getty Villa (1974)
게티빌라 전경 ⓒ Getty Museum
게티 빌라는 아름다운 정원과 고대 궁전 같은 양식이 돋보이는 건물이에요. 과거 화산 폭발로 묻힌 고대 빌라 '빌라 데이 파피리'를 정교하게 재현한 양식을 하고 있는데, 당시 이 빌라가 완전히 발굴되지 않은 탓에 건축가들은 발굴된 부분을 바탕으로 나머지 부분은 상상해 설계했습니다. 덕분에 고대와 현대가 어우러진 창의적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있죠.
정원 역시 고대 로마 스타일로 디자인했어요. 고고학자들이 발굴 과정에서 발견한 실제 식물 화석과 씨앗을 바탕으로 재현하듯이 정원을 디자인했죠. 그리고 이 고대 건축 양식에 걸맞게 선보이는 작품도 고대 조각품 위주로 큐레이션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에트루리아 유물이 주로 전시 중인데요. 소장품의 양도 방대해요. BC 6500년에서 AD 400년에 걸쳐 4만 4천여 점이나 소장하고 있죠. 게티빌라에서는 이 소장품을 시대순으로 선보입니다.
고대 소장품과 고대 양식으로 꽉 채운 게티 빌라는 그 자체로 하나의 콘텐츠이지만, 게티는 이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어요. 게티는 개관 당시 이미 82살로 게티 빌라에 가기엔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게티 빌라가 개관하고 2년 후, 자신의 재산을 미술관에 모두 써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죠.
이 유언을 집행하기 위해, 새로운 미술관 개발이 시작됐습니다. 게티 빌라는 위치가 로스앤젤레스 시내에서 너무 멀어 관객이 찾아오는 데도 불편했고, 소장품의 양 대비 공간이 작은 편이었습니다. 그렇게 전시 공간도 늘리고, 접근성도 개선하기 위한 새로운 미술관 건축이 진행됐어요. 23년이라는 긴 시간 끝에 1997년 개관한 것이 바로 게티 센터입니다.
게티 센터 Getty Center (1997)
게티뮤지엄 전경 ⓒ Getty Museum
게티 센터는 오늘날 '게티뮤지엄'하면 떠올릴 수 있는 대표적인 건물입니다. 미술관 입구에서 트램을 타고 1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5분간 이동하면 여러 건물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게티 센터에 도착해요. 이곳은 게티 빌라보다 훨씬 더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게티 센터는 지진이 잦은 로스앤젤레스의 특성을 고려한 특별한 내진 설계를 적용했어요. 건물과 지반이 별도로 움직이는 베이스 아이솔레이션 시스템을 적용해, 지진이 발생하면 건물과 지반이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방식이죠. 또한 화재에 대비한 시설도 완벽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378만 리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탱크 덕분에 자체적으로 화재 진압이 가능하고, 건물 전체에 고성능 자동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어 있어요.
고흐의 아이리스, 렘브란트의 웃는 자화상 ⓒ Getty Museum
게티 센터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간은 1800년대 이후 작품이 모인 서쪽 전시관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마네, 렘브란트, 프라고나르, 윌리엄 터너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어요. 특히 고흐의 <아이리스>와 렘브란트의 <웃는 자화상>이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죠.
이렇게 게티뮤지엄은 마치 미술사 책을 옮겨놓은 듯 교육적인 큐레이션을 선보이는데, 과거의 유산을 잘 보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사업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위한 미술관
미술관의 역할은 크게 5가지가 있어요. 전시, 연구, 수집, 보존, 교육이죠. 게티뮤지엄은 이 역할을 아주 잘 해내고 있는 미술관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게티가 남긴 막대한 유산 덕이 컸어요.
게티 트러스트는 자신의 유산을 미술관에 쓰라는 게티의 유언에 따라 1982년 세워진 기관이에요. 게티 사망 당시 약 7억 달러(한화 약 1조 230억 원) 가량을 받았고, 2023년 기준 90억 달러(한화 약 13조 1,535억 원)의 자산을 가지고 있죠. 연간 미술관 운영에 5천억 원가량을 사용하는 덕분에 게티 뮤지엄은 여유로운 자금으로 미술관의 5대 의무를 수행할 수 있었어요.
게티뮤지엄은 게티연구소(Getty Research Institute)와 게티 보존 연구소(Getty Conservation Institute)를 운영하고 있어요. 게티연구소는 100만 권 이상의 장서와 2백만 장이 넘는 사진을 소장하고 있으며, 예술사 연구, 학술활동 지원, 도서관 운영, 디지털 자료 보유, 방문 프로그램 등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게티 보존 연구소는 예술품 및 문화유산 보존 기술 연구 개발, 전 세계 보존 프로젝트 지원, 보존 분야 교육 및 훈련 등을 제공하고 있죠.
게티뮤지엄은 꾸준히 명작을 수집해왔습니다. 대표적으로 1987년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경매에 낙찰된 빈센트 반 고흐의 <붓꽃 Irises, 1889>을 소장하고 있어요. 이 작품은 고흐가 생 레미의 정신 병원에서 그린 작품으로, 현재 게티 센터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게티 재단(Getty Foundation)은 예술 관련 보조금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박물관 큐레이터십, 예술사 연구, 보존 프로젝트 등을 지원하고 있어요. 특히 '퍼시픽 스탠더드 타임(Pacific Standard Time)'과 같은 대규모 문화 이니셔티브를 주도하며 예술 교육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게티뮤지엄은 미술관을 통해 교육적, 예술적 사명과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와 컬렉션을 자랑함에도 입장료를 받지 않고 있어요. 또한 더 많은 사람이 소장품을 접할 수 있도록 인터넷에 작품과 정보를 아카이빙하고 있죠. 인터넷이 상용화되기 전부터 미술정보 표준화 작업을 진행했고, 후에는 이를 타 미술관에도 적용해 온라인 학술 카탈로그를 제작했습니다. 이 모든 자료들은 온라인에서 무료로 접근할 수 있고 공유도 가능해요.
짠돌이의 역설, 관대한 유산
ⓒ Getty Museum
이전에 손자 납치 사건 때 게티는 본인이 몸값을 주고 손주를 데려오면, 자신의 다른 손주들뿐만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의 자식이나 손주가 납치당할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영향력을 가짐을 잘 알고 있었던 거죠. 미술품 컬렉팅에 있어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잘 알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운영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대미술의 악동이라 불리는 데미안 허스트는 "예술은 비평보다 구매자가 필요하다"라는 말을 남겼어요. 진 폴 게티의 미술품 컬렉팅은 처음에는 취미의 영역이었을지라도, 이후 자신의 작품을 모든 사람들과 나누는 시도는 인류를 위한 사명과도 같았습니다.
게티뮤지엄 전경 ⓒ Getty Museum
게티는 일생 동안 특유의 짠돌이 기질 탓에, '수전노'라고 불리기도 했어요. 하지만 자신이 평생에 걸쳐 모은 미술품을 무료로 개방한 시도와, 예술 교육에 누구보다 적극적인 태도는 그를 '위대하다'라고 불리게 만들어준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짠돌이가 남긴 예술적 사명은 오늘날 게티뮤지엄을 통해 전 세계인에게 예술의 감동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돈을 쓰기 가장 인색했던 사람이 인류의 예술적 유산을 위해 가장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게티의 이러한 모순된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것은 단순한 미술관이 아닌, 예술을 통한 영감과 교육의 가치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