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유발한 초상화들 (feat. 찰스 3세, 호주 광산 거물)

2024-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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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3세와 최근 제작된 초상화 ⓒ CNN


최근, 찰스 3세의 즉위를 기념해 제작된 왕실 공식 초상화가 공개됐습니다. 작품은 찰스 3세가 근위대 제복을 입고,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정면을 바라보며 서있는 모습을 그려냈죠. 작품 크기는 세로 2.2미터, 가로 1.6미터로 사람보다 큰 사이즈이고, 이 캔버스에 상반신만 꽉 채워서 그려냈습니다. 그래서 구성적으로 매우 압도감 있게 연출한 걸 볼 수 있죠. 


하지만 이 작품은 논란이 되었습니다. 작품에 주로 사용된 '색깔' 때문이죠. 얼굴과 손을 제외한 모든 부분은 붉게 칠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얼굴과 손만 빨간 물속에서 동동 떠있는 것 같이 보여요. 그림의 확대 샷을 보면 이 붉은 물감도 상당히 거칠게 칠해져서, 추상표현주의 기법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들 정도입니다.

 

붉고 거칠게 칠해진 왕의 초상화. 이건 확실히 기존의 전통적인 왕실 초상화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요. 언론과 평단, 대중의 반응은 갈렸습니다. 언론은 대체로 부정적이었어요. 뉴욕타임스에서는 ‘왕의 온몸이 진홍색 바다에 잠겨 얼굴만 떠 있는 것 같다"라고 표현했죠. 


한편, 미술 평론가들은 ‘생동감 넘친다'라며 긍정적으로 보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매우 현대적인 방식의 초상화라 극찬하기도 했고요. 물론, ‘왕이 지옥에서 불타는 것 같다'거나, ‘대영제국이 낳은 식민지 유혈사태를 연상케 한다'라는 부정적 평가도 있었습니다. 


작품에 사용된 붉은 물감의 밝은 부분은 약간 주황빛을 띄고, 어두운 부분은 검붉은 빛을 띄어서 피와 매우 비슷합니다. 그렇다 보니, 대중의 평가도 ‘지옥불 같다'거나, '악마 같다', '끔찍하다', 심지어는 '진짜 피로 그렸을 거다' 같은 부정적인 느낌의 감상이 이어지고 있죠. 



초상화 공개 현장의 모습 ⓒ AP


작품을 의뢰한 찰스 3세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당시 작품을 공개하는 모습이 영상으로도 공개되었습니다. 찰스 3세가 직접 작품을 감싸고 있던 검은 장막을 걷어냈죠. 하지만 찰스 3세의 반응은 의연했어요. 그림을 잠시 응시하다가 웃으면서 그림을 그린 작가인 조나단 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죠. 


사실 찰스 3세는 이 그림이 제작되는 중간에 진행 과정을 몇 차례 확인했습니다. 작가인 조나단 여에 따르면, 처음 확인할 당시에 왕이 약간 놀라긴 했으나, 이윽고 미소를 지으면서 만족해했다고 해요. 또 찰스 왕이 초상화를 의뢰했을 때에도 ‘현대적인 초상화'를 원한다고 이야기했었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초상화의 모습에 되려 매력을 느꼈을 거라 보기도 합니다. 


찰스 3세의 초상화 ⓒ CNN


찰스 왕은 이 그림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어요. 4년간 총 네 번, 한 시간씩 초상화 작업을 위해 모델로 앉아있었죠. 또 그림을 보면 찰스 3세 오른쪽 어깨에 나비가 그려져 있는데, 이 역시 찰스 3세 본인이 직접 제안해 그려 넣은 거라고 합니다. 나비는 전통적으로 재탄생, 전환을 상징하는 도상인데요. 최근 왕위에 오른 찰스 3세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걸 보면, 찰스는 이 그림을 만족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에 조나단 여가 초상화를 그린 영국 왕비이자 찰스 3세의 아내인 카밀라도 이 자리에 참석했는데, 카밀라 역시 이 그림에 만족하면서, 조나단 여에게 “You got Him”이라며 아주 잘 포착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어요. 


전시된 초상의 모습 ⓒ Philip Mould’s Pall Mall gallery



하지만, 의뢰인의 마음엔 들었어도 사람들의 반응은 부정적인 것이 훨씬 많았어요. 작품의 주조색인 빨간색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어떤 문화권이든 상관없이 붉은색은 피의 색으로 여겨져요. 그리고 이 때문에 이중적인 해석이 가능하죠. 피라는 것은 전투 과정에서 생기게 되는 상처에서 나오기 때문에, 열정이나 정열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피의 양이 많아질수록 위험한 상황이 생기기에, 위험함, 공포를 상징하기도 해요. 인간 안에 내재된 본능적인 공포감을 유발하는 건데요. 그렇다 보니, 붉은색이 어떤 컬러와 함께 사용되느냐, 조합되느냐에 따라서 약간씩 이미지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흰색과 파랑이 함께 붙으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이미지를 갖게 돼요. 그래서 많은 국기가 흰색, 파랑, 빨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편, 노란색이나 주황색 같은 비슷한 따뜻한 계열의 색과 붙으면 풍요로운 대자연을 연상시키곤 합니다. 붉은 노을이나 가을의 자연 풍경을 떠올리게 만들죠.



초상화 공개 현장의 모습 ⓒ AP



그런데 붉은색이 검은색이나 어두운 갈색 등의 컬러와 조합되면, 말라붙은 피의 색이 되면서 위험, 경고 같은 부정적 의미로 해석되곤 해요. 이 초상화에서는 액자가 아주 짙은 검은색입니다. 그렇다 보니, 붉은색의 부정적 느낌을 너무 많이 강조하게 되어버려요. 처음 작품 이미지만 봤을 땐 괜찮았는데, 액자가 씌워진 모습을 보고 응? 했던 의견이 많았던 것도 그 이유입니다. 액자가 금색이나, 실버였다면 아마 다른 느낌을 자아냈을 거예요.


많은 예술가들은 액자는 물론이고, 의뢰받아 주문 제작하는 커미션 작품의 경우엔, 작품이 걸릴 벽의 색깔까지 고려해서 그림을 제작하곤 합니다. 특히나 왕실 초상화 같은 중요한 그림은 더더욱 그렇고요. 그럼에도 짙은 검은색 액자를 사용한 건, 붉은색이 지닌 부정적 이미지를 강조해요. 그림만 두고 봤을 때와 액자가 붙었을 때의 차이, 느껴지시나요? 여러분은 이 작품 어떻게 느끼셨나요?




이슈가 된 초상화와 라인하트 ⓒ The Guardian



한편, 최근 또 다른 맥락에서 이슈가 된 초상화가 있어요. 호주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으로 알려진 '지나 라인하트'의 이야기입니다. 지나는 총재산 220억 달러, 한화 약 3조의 재산을 보유한 걸로 추정되는 광산 거물인데요. 지난 5월 16일에 호주국립미술관에서 개막한 전시에 지나 라인하트의 초상화가 걸렸습니다. 그리고 당사자인 라인하트는 전시에서 자기 그림을 빼달라고 요청했어요. 이유는, 그림을 그린 호주 원주민 출신 예술가, '빈센트 나마티라'가 묘사한 자신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해당 전시는 라인 하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리더, 아이콘들의 초상화가 있었어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지미 헨드릭스, 앞서 언급된 찰스 3세 같은 다양한 인물들의 초상화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물들이 약간 왜곡되어 그려졌어요. 이들의 얼굴에 있는 특징을 강조해서 그려서 언뜻 캐리커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그린 이유는 현대 원주민의 관점에서 역사와 권력, 리더십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위함이었다고 하는데요.

 

이번에 화제가 된 지나 라인하트의 경우, 이마를 실제보다 더 넓고 크게 그렸고, 코도 살짝 삐뚤어져 있고, 이중턱을 매우 강조해서 그린 모습입니다. 당사자가 충분히 불쾌해할 수 있는 그림으로 보여요. 하지만 예술가는 그저 본인 작업을 했을 뿐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원주민의 관점에서 리더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자 기획한 작품인데요.



빈센트 나마티라와 전시된 작품 ⓒ 호주국립미술관



이 이슈의 첫 번째 쟁점은 초상권 문제입니다. 나마티라는 상대방의 동의를 받지 않고 초상화를 그렸어요. 이건, 초상권 침해가 될 수 있는데요. 유명인의 경우에는 약간 적용 범위가 다릅니다. 일반인의 경우엔 초상을 그려서 전시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유명인의 경우에는 이걸 판매해서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게 없으면 초상권 침해를 주장하기 어렵습니다. 


또 다른 쟁점은 실제 얼굴보다 의도적으로 못나게 그렸다는 거예요. 여기서 지나 라인하트가 불쾌함을 느끼고 그림을 내려달라 요청한 건데요. 이건 예술의 영역인지라 ‘일부러 못생기게 그렸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어렵고, 이것으로 명예 훼손을 주장하기에도 판단 기준이 모호합니다.


그래서 라인하트는 법적으로 해결하기보다, 전시에서 작품을 빼달라고 요청했어요. 하지만 미술관은 거부했습니다. "예술작품에 대한 대중의 다양한 논의와 비평을 위해서"라고 하는데요. 이에 대해서 비난도 있었어요. 작품은 누가 봐도 지나 라인하트를 그린 그림이고, 그림에 ‘지나'라고 이름까지 새겨두었습니다. 본인이 본인 그림 내려달라는데 거부한 것은 너무하다는 의견이 있었죠.



호주국립미술관 전경 ⓒ Thennicke



더군다나 놀라운 건, 전시를 진행한 호주국립미술관이 라인하트에게 후원을 받는 곳이라는 거예요. 해외 미술관은 후원자들에게 자금 지원을 받고, 전시를 기획하거나 작품을 큐레이션함에 있어 의견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의 전시 철거는 거부했어요. 


이에 대해 호주국립시각예술협회 측은 “라인하트는 작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권리가 있지만, 단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미술관에 그림을 철회화도록 압력을 가할 권한은 없다"라고 밝혔습니다. 당사자의 불쾌함보다, 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더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죠.



의뢰를 통해 만들어졌지만 사람들을 당황케한 초상화와, 허락 없이 만들어져 당사자를 불쾌하게 한 초상화. 두 개의 다른 맥락을 지닌 초상화는 최근 이슈가 되며, 예술가의 작품관과 당사자의 반응 등을 두고 다양한 갑론을박이 이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 작품, 어떻게 느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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