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가져간 것이 곧 예술" 얀스 하닝

20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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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s Haaning, Take Money and Run (2021) Courtesy Kunsten Museum


2021년 9월, 미술관에 수상한 작품이 등장합니다. 텅 빈 캔버스에 얇은 액자. 언뜻 화이트 보드 같은 이 작품은 얀스 하닝의 2021년 작, <돈을 갖고 튀어라>에요. 캔버스 옆쪽에는 이 작품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간략한 비화가 적혀있고, 작품 앞쪽으로는 작품이 담겨 온 종이 박스가 그대로 놓여져 있습니다. 한참 전시중인 미술관 치고는 혼란스러운 모습. 하지만 이 모든 건 의도된 연출이었어요.



사건의 시작: 원래 작품

Jens Haaning, Recent Danish History and Other Artworks (2011)


이 작품, <돈을 갖고 튀어라>는 덴마크 쿤스텐 현대미술관이 1억 넘는 돈을 주고 얀스 하닝에게 의뢰한 작업이었습니다. 원래 미술관이 의뢰한 작품은 얀스 하닝의 2011년 작품 <Recent Danish History and Other Artworks>으로,  커다란 액자에 지폐가 열 맞춰 나란히 놓여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요. 작품에 사용된 돈은 모두 실제 현금입니다. 


해당 국가의 평균 소득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면서 국가의 경쟁력을 시각적으로 보여준 작품이죠. 다른 나라 버전으로도 여러 점 제작된 적 있었습니다. 


Work it Out 전시 전경 (2021) Courtesy Kunsten Museum


미술관은 하닝에게 이 작품을 또 한번 제작할 것을 요청해요. 당시 기획 중이던 전시, <Work it Out>에 선보이기 위함이었는데요. 이 전시는 ‘노동의 미래’를 주제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존에 ‘노동’을 주제로 작업을 했던 예술가를 모아 이 전시 주제에 맞춰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도록 요청했죠. 그중 한 명이 얀스 하닝이었습니다.


나라별 평균 소득을 다룬 하닝의 작품은 전시와 잘 맞아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미술관측은 하닝에게 덴마크의 평균 소득을 담은 작품과 오스트리아의 평균 소득을 담은 작품 총 두 점을 제작해달라고 요청하죠. 


덴마크의 평균 소득은  (약 97,800달러) 한화 약 1억 1천만 원,오스트리아의 평균 소득은 (약 29,000달러) 약 3천만 원이었습니다. 두 개의 작품을 통해 양국 간의 임금 격차를 보여주고 급여의 중요성을 언급하려 했죠. 그리고 미술관은 작품 제작을 위한 금액 1억 원을 하닝의 계좌로 이체합니다. 이 금액은 작품 의뢰 비용과는 별개로, 작품 제작을 위한 ‘재료’를 전달한 것이었죠. 하닝은 본인 작품에 항상 실제 현금을 부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금액은 2022년 1월, 전시가 종료되면 돌려주기로 되어있었습니다. 



배신: 돈을 들고 튀어라

그림이 도착했던 당시의 사진 Courtesy Kunsten Museum


이후 작업이 완료되고 미술관에 도착한 박스엔, 텅 빈 캔버스 두 개가 있었습니다. 현금 1억은 행방은 찾을 수 없었죠. 얀스 하닝은 작품과 함께 이메일을 보냅니다. 


“전시회 주제에 맞게 새롭고, 더 나은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건 미술관이 의뢰한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며,

이 작품의 제목은 <돈을 갖고 튀어라>입니다”


하닝이 이런 작품을 만든 건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미술관이 요청한 예전 작업을 만들려면, 미술관이 보내준 돈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었다고 해요. 덴마크와 오스트리아의 평균 임금을 합친 금액은 1억 4천만 원. 하지만 미술관은 1억만 보냈습니다. 하닝이 봤을 때, 미술관은 충분한 돈을 지불하지 않았죠.


Jens Haaning, Take Money and Run (2021) Courtesy Kunsten Museum


그래서 하닝은 이걸 이용하기로 해요. 전시 주제가 노동을 다루고 있는 만큼, 노동자로서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를 담기로 하죠.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 탓에 재료비로 지급된 돈을 먹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작품을 통해 보여준 겁니다. 


즉, 이 작품은 예술계 매커니즘을 비판하고, 노동자로서의 예술가가 겪는 부조리를 이야기한 작품이었던 것이죠. 미술관의 의견은 두 가지로 갈립니다. ‘예술가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과, ‘우리 사기 당한 거다’라는 입장.



전시 강행: 예술인가, 도둑질인가?

Jens Haaning, Take Money and Run (2021) Courtesy Kunsten Museum


미술관은 우선, 작품을 예정대로 전시하기로 합니다. 예술가의 의견을 존중하는듯 했지만, 이것이 계약 위반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

언론과 활발한 인터뷰를 진행했죠. "미술관이 준 돈을 예술이란 이름으로 먹튀한 예술가"라는 자극적인 스토리 덕분에 전시는 흥행했지만, 미술관 측의 입장은 강경했습니다. 쿤스텐 미술관 관장은 한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 해요.


“작가가 어떤 의도였든지 간에, 우리 미술관 스탭과 나를 자극한 작품이다.

우선 전시는 진행하지만, 전시가 종료되고 나면 작가는

작품 재료로 지급된 돈 1억을 돌려줘야 할 것이다”


얀스 하닝 Courtesy Artsy


전시가 종료되는 시점은 2022년 1월 16일. 이때까지 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을 언급했습니다. 관장의 인터뷰는 얀스 하닝에 대한 일종의 경고였어요. 하닝은 이에 대해 라디오 인터뷰로 답변하죠.


“내가 그들의 돈을 가져간 것, 그 자체가 예술이다.

그들은 나에게 작품을 의뢰했고, 비용을 줬다

나는 그들과 논의해 작품을 기획했고, 만들어 냈다

이건 절도가 아니라, 직업 예술가로서 할 일을 한 것이다

계약의 위반도 작품의 일부이다”


하닝의 인터뷰는 돈을 돌려주지 않을 거라는 뉘앙스를 풍겼습니다. 돈을 훔쳤다고는 볼 수 없으며, 미술관이 계획한 것보다 10배, 100배는 나은 작품을 만들었다고. 뭐가 문제냐고 덧붙였죠.

노동의 역설을 주제로 치열한 논쟁을 벌인 미술관과 예술가. 이들의 분쟁이 이어지면서

숨겨진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사건의 전말: 짜고 치는 고스톱

미술관 측이 하닝과 나눈 이메일 Courtesy Kunsten Museum


사실 이 일련의 사건에는 밝혀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습니다. 작품 제작 중, 얀스 하닝이 미술관 측에 남긴 파격 선언이었죠. 미술관이 의뢰한 작품이 아닌,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들이 의뢰한 작품과 전혀 다른 작품이다.

돈은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들은 속은 것처럼 행동해주면 된다"


Work it Out 전시 전경 (2021) Courtesy Kunsten Museum


미술관은 이 이야기에 동의합니다. 어차피 작품 제작 계약을 하면서, ‘전시 종료 후 현금은 돌려받는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또, ‘예술가에게 속아 넘어간 미술관’이라는 소재가 마케팅적으로 괜찮은 가십거리라고 봤습니다. 협의한 내용은 숨기고, 텅 빈 캔버스가 왔다는 식으로 보도를 하면, 작가가 돈을 받고 튀었다는 자극적인 마케팅이 가능할 거라고 본 것이죠. 일종의 짜고친 판이 뒤에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미술관은 언론에 소식을 계속 전하면서 전시를 홍보하고, 오픈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나리오대로 이 작업은 많은 논란과 관심을 얻게 된 것이죠. 하지만 하닝이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남긴 말은 이들이 짠 판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였어요. 진짜로 돈을 가져가겠다는 건 계약 위반이었죠. 그렇게 2022년 1월 17일, 미술관은 얀스 하닝에게 민사 소송을 제기합니다.


Jens Haaning, Recent Danish History and Other Artworks (2011)


얀스 하닝은 법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본인 작품의 예술성을 내세워 돈을 안 돌려줘도 된다는 걸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어요. 


“나처럼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가진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했으면 좋겠다.

형편 없는 직장에서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 속,

일하기 위해 오히려 돈을 써야하는 상황이라면, 기회가 왔을 때 부숴버려라”


기득권에 저항하는 예술가의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뱅크시의 경우 미술시장 권력 피라미드 끝에 있는 경매회사에 저항하기 위해 경매 현장에서 본인 작품을 갈아버린 적이 있었죠. 이는 많은 아트러버뿐만 아니라 미술계 전체에게 엄청난 열광과 지지를 받으며 뱅크시의 예술세계를 공고히 한 사례였습니다. 


Jens Haaning Courtesy Artsy


하닝 역시 미술계 기득권인 미술관의 부조리에 저항해 노동자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저항을 예술을 통해 선보였죠.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재료비를 받아 챙겨야 합리적인 작품 제작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이 말만 들으면 하닝이 열정페이를 받으며 근근이 일한 것 같지만 사실 미술관 측에서는 충분한 돈을 지급했습니다. 전시 전 약 5천 유로, 한화 약 700만 원의 선금을 지불했고, 전시 수익도 작가에게 분배해주기로 했죠. 이미 이전에 덴마크에서 예술가 노동 조건에 대한 논쟁이 수 차례 있었기에 쿤스텐 미술관은 시각예술가 협회(BKF)와 협력해 공정한 계약을 보장하고 예술가의 최저 임금에 맞춰 임금을 지불했던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계약서였습니다. 계약서 상에는 분명 돈을 돌려준다는 내용이 있었죠. 하닝의 주장은 예술이라는 이름만을 내세우기엔 논리가 부족한 지점이 많았습니다. 결국 사건 발생 2년 정도만인 2023년 9월, 오랜 법적 싸움 끝에 판결이 납니다. 얀스 하닝의 패소였죠. 다만 미술관이 문제가 있는 작품에 조치를 취한 게 아니라, 5개월 간 전시했기 때문에 400만 원 정도의 금액은 빼고 상환하기로 합니다. 결과적으로 하닝은 미술관 측에 9600만 원 가량을 배상해야 했죠. 


Jens Haaning, Take Money and Run (2021) Courtesy Kunsten Museum


충분치 않은 임금에 텅 빈 캔버스를 보낸 예술가, 얀스 하닝의 작품은 여전히 쿤스텐 미술관에 전시중입니다. 예술이라는 이름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보여준 사건이었죠. 

여러분은 얀스 하닝의 저항, 혹은 도발, 혹은 객기가 담긴 작품,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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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king money is art, and working is art

and good business is the best art.


돈을 버는 것이 예술이고,
일하는 것이 예술이며,
좋은 비즈니스야말로 최고의 예술이다.


- 앤디 워홀 Andy Warhol, 1928-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