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 속에서 별을 그린 화가, 816억의 주인공이 되다 ⭐ 호안 미로 경매 신기록

2026-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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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n Miró, Sans titre (Soirée snob chez la princesse)

Joan Miró, Sans titre (Soirée snob chez la princesse)

호안 미로 © Fundació Joan Miró, Barcelona

호안 미로 © Fundació Joan Miró, Barcelona


경매장의 호가판 숫자가 5,353만 달러에서 멈췄습니다. 우리 돈으로 약 816억 원. 지난 5월 18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오른 호안 미로의 1924년 작 ‹마담 K의 초상(Portrait de Madame K.)›이 받아 든 값이에요. 


추정가의 두 배가 넘었고, 미로의 종전 최고가를 한 번에 44퍼센트나 끌어올린 금액이었습니다. 미술 시장이 들썩일 만했죠. 오늘은 이 한 점의 그림에서 출발해, ‘별의 화가’라 불리던 호안 미로의 세계를 다시 들여다보려고 해요.


마담 K, 누구의 초상인가

Joan Miró, Portrait de Madame K. (1924)

Joan Miró, Portrait de Madame K. (1924) © Successió Miró / ADAGP, Paris


작품을 들여다보면 제목은 ‘초상’이지만, 그림 속에서 사람의 얼굴을 찾기란 쉽지 않은 걸 볼 수 있습니다. 캔버스 위에는 가느다란 선과 동그라미, 정체를 알 수 없는 도형들이 떠다닐 뿐이에요. 초현실주의 화가 미로의 특징이 한껏 묻어나는 화면이죠. 미로는 여기에 유화 물감과 목탄, 색깔 있는 왁스 크레용까지 섞어 쓰며 세로 116센티미터, 가로 91센티미터의 화면을 채웠습니다. 


추정가는 2,500만 달러, 한화로 약 381억 원 안팎이었는데요. 뚜껑을 열어 보니 두 배가 넘는 5,353만 달러, 약 816억 원에 낙찰됐어요. 미로의 종전 최고가는 2012년 소더비 경매에서 ‹회화(파란 별)›가 세운 3,704만 달러, 약 564억 원이었는데, 이번에 단숨에 1,650만 달러를 더 얹으며 작가 자신의 기록을 갈아치운 셈입니다.


가격의 비밀

크리스티 경매장의 모습 ⓒ Christie’s

크리스티 경매장의 모습 ⓒ Christie’s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읽힙니다. 첫째는 미술사적인 의의예요. ‹마담 K의 초상›은 미로가 화풍을 통째로 바꾸던 1924년에 그린 작품입니다. 그 전까지 미로는 풀 한 포기까지 꼼꼼히 옮기는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어요. 그런데 바로 그해, 앙드레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며 초현실주의가 공식 출범합니다. 다른 사조들이 슬그머니 번져 나간 것과 달리, 초현실주의는 ‘우리,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하고 깃발을 꽂은 흔치 않은 경우였죠. 그만큼 시도가 새로웠고 동료 화가들에게 미친 영향도 컸는데, 그 영향권 안에 미로도 있었습니다.


미로가 특히 끌린 건 초현실주의자들의 ‘자동기술법’이었어요. 이름 그대로,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 손이 가는 대로 그려 내는 기법입니다. 미로가 이 기법에 빠져든 데에는 가슴 아픈 사정도 있었어요. 당시 미로는 가난으로 끼니를 자주 걸렀고, 굶주림이 심해지면 환영까지 봤다고 합니다. 그렇게 본 환영을 무의식의 흐름대로 종이에 옮겼다가 조금이라도 먹어 정신이 또렷한 날에 다시 꼼꼼히 그림으로 완성했죠. 그렇게 미로의 추상이 시작됐고, 그 출발점에 선 작품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마담 K의 초상›이에요. 한 사조의 대표 기법과 작가의 개인사가 한 화면에서 만난 그림이니 특별할 수밖에요.


이번 경매 출품작 추정가와 낙찰가 분석 도표이번 경매 출품작 추정가와 낙찰가 분석 도표

이번 경매 출품작 추정가와 낙찰가 분석 도표 © HENI News


둘째는 소장 이력입니다. 그림이 경매에 오를 때는 ‘프로비넌스(provenance)’라 불리는 소장 이력이 무척 중요하게 여겨져요. 손을 거쳐 온 내력이 또렷하면 위작일 가능성이 줄고, 이름난 컬렉터가 가졌던 작품이라면 그만큼 값이 뛰기 때문이죠. ‹마담 K의 초상›의 옛 주인은 미국 출판 거물 S.I. 뉴하우스였습니다. ‹보그›와 ‹뉴요커›를 펴낸 ‘콘데 나스트’의 주인이자,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컬렉터였죠. 이 작품이 나온 날 뉴하우스가 모은 명작들이 한 경매에 함께 풀렸는데, 그날 하루 매출만 6억 3,080만 달러, 우리 돈 약 9,800억 원을 넘겼어요. 같은 경매에서 브랑쿠시의 조각 ‹다나이드›가 1억 760만 달러에 팔리며 작가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고요. 미술 시장이 얼어붙었다는 말이 무색하게, 최상급 블루칩 작가에게는 오히려 돈이 몰리는 흐름이 또렷합니다.


회계 사무원이 화가가 되기까지

1935년, 42세의 호안 미로 Photo: Carl Van Vechten

1935년, 42세의 호안 미로 Photo: Carl Van Vechten © Fundació Joan Miró, Barcelona


그렇다면 이 그림을 그린 호안 미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미로는 1893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시계를 다루고 금을 세공하던 손재주 좋은 장인이었는데, 정작 아들만큼은 자신과 달리 안정된 일을 하길 바랐다고 해요. 그래서 미로는 상업학교에 다녔고, 열일곱 살 무렵엔 회계 사무원으로 취직합니다. 그림과는 꽤 먼 출발이었던 셈이죠. 


그런데 얼마 못 가 크게 앓아 몸져눕고 말아요. 신경쇠약에 장티푸스까지 겹치자 일을 그만두고, 가족의 시골 농장이 있던 몬트로치(Montroig)로 내려가 요양하게 됩니다. 들판과 흙, 농가의 평범한 사물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 회복기가 인생을 바꿨어요. ‘나는 결국 그림을 그려야 하는 사람’이라고 마음을 굳힌 미로는, 1920년 스물일곱의 나이로 파리로 건너갑니다. 당시 파리는 피카소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모여든 세계 미술의 중심이었죠.


헤밍웨이가 빚까지 내서 산 그림

Joan Miró, The Farm (1921–1922)

Joan Miró, The Farm (1921–1922) © Successió Miró / ADAGP, Paris /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파리 초기의 미로는 요양 시절 눈에 담아 둔 고향 풍경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 대표작이 ‹농장(The Farm)›이에요. 아버지가 소유했던 몬트로치의 농장을 담은 그림인데, 스페인에서 붓을 들어 파리에서 마무리했죠. 1년 넘게 매달린 끝에 풀 한 포기, 농기구 하나까지 또렷하게 살려 냈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그림에도 소장 이력이 따라붙는다는 점이에요. 뜻밖에도 이 그림을 산 사람이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였거든요. 두 사람은 같은 권투장에서 운동하던 사이였는데, 헤밍웨이는 키 크고 다부진 체격인 반면 미로는 작고 말라서 직접 맞붙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을 두고는 작은 일화도 전해져요. 같은 그림을 탐내던 친구 에번 시프먼과 헤밍웨이가 주사위를 굴려 임자를 정했고, 운 좋게 헤밍웨이가 이겼다고 하죠. 그는 빚까지 내서 5,000프랑에 ‹농장›을 손에 넣었고, 첫 아내 해들리의 생일 선물로 건넸습니다. 택시 지붕을 열고 그림을 실어 오는데 큰 캔버스가 돛처럼 바람을 받아, 기사에게 천천히 가 달라 부탁했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어요. 


훗날 헤밍웨이는 이렇게 평했습니다. “스페인에 있을 때 느끼는 모든 것, 그리고 떠나 있어 갈 수 없을 때 느끼는 모든 것이 담겼다. 이 상반된 둘을 함께 그려 낸 사람은 미로뿐이다.” 그 말처럼 스페인과 프랑스의 정서가 묘하게 포개진 그림입니다.


이후 미로는 사물을 점점 단순한 기호로 줄여 나갑니다. ‹경작지›, ‹사냥꾼› 같은 작품에서는 들판과 사람이 별, 눈, 새 같은 부호로 바뀌어 화면 위를 떠다니기 시작해요. 이 무렵 미로가 남긴 유명한 말이 “나는 회화를 암살하고 싶다(assassinate painting)”입니다. 포부치곤 서슬이 퍽 시퍼런 말이죠. 섬뜩하게 들리지만, 그가 부수려 한 건 그림 자체가 아니라 ‘그림이란 응당 이래야 한다’는 통념이었어요. 당시 미로는 미술 작품이 부유한 계층의 교양과 취향을 떠받치는 장식처럼 쓰인다고 느꼈고, 그 점잖고 익숙한 회화의 문법을 깨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원근법이나 인물의 비례 같은, 금과옥조로 여겨지던 규칙들을 거부하고 별과 새, 달, 여인, 눈동자 같은 자기만의 상형문자를 캔버스에 흩뿌렸죠.


Joan Miró, Harlequin’s Carnival (1924–1925)

Joan Miró, Harlequin’s Carnival (1924–1925) © Successió Miró / ADAGP, Paris / Albright-Knox Art Gallery, Buffalo


낯선 시도였던 만큼 미술계의 호응은 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미로는 멈추지 않고 앙드레 브르통이 이끄는 초현실주의 그룹에 합류했고, 굶주림이 부른 환영을 자동기술법으로 화면에 옮겨 갔어요. 이 무렵 그린 ‹할리퀸의 카니발›이 대표작입니다. 작은 방 안에서 음표와 곤충, 정체불명의 생물들이 한데 춤추는 듯한 그림인데, 가난하던 시절 굶주린 채 방에서 보던 환영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지죠. 이때부터 미로는 동료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초현실주의의 리더 앙드레 브르통은 그를 두고 ‘초현실주의자 중에서 가장 초현실주의자다운 예술가’라며 극찬했어요. 다만 미술계와 시장의 부름은,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전쟁의 한가운데서 그린 밤하늘

Joan Miró, Constellations 연작 중 (1940–1941) © Successió Miró / ADAGP, Paris

Joan Miró, Constellations 연작 중 (1940–1941) © Successió Miró / ADAGP, Paris


미로는 어느 한 무리에 완전히 속하기를 꺼린 사람이었어요. 초현실주의에 매료된 뒤에는 살바도르 달리를 그룹에 소개할 만큼 활동에 적극적이었지만, 정작 초현실주의자들이 내놓는 정치적 선언과는 거리를 뒀고 평생 자기 길을 따로 팠습니다. 그러던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지고, 곧이어 2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덮쳤어요. 미로는 불안 속에서 작은 종이에 밤하늘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별과 여인, 새가 촘촘히 얽힌 우주의 화면으로 전쟁의 공포를 바꿔 낸 ‹별자리(Constellations)› 연작이에요. 미로 예술의 정수로 꼽히는 이 연작을 계기로, 마침내 그의 세계가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1941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미로의 대규모 회고전을 열어 주면서 그는 유럽의 초현실주의자를 넘어 20세기 미술의 중심인물로 공인됐어요. 이 전시를 계기로 미국 미술계는 스페인 작가 미로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합니다. 미로는 커진 명성을 발판 삼아 작업의 규모를 키워 갔어요. 회화에 머물던 손길을 도자기로, 청동 조각으로 넓혔고, 공항과 빌딩 벽에 거대한 벽화를 그리기도 했죠. 나이가 들수록 형태는 더 큼직해졌고, 색은 더 선명해졌습니다. 말년에는 고향 카탈루냐로 돌아가 자기 미술관을 직접 세웠는데, 1975년 바르셀로나에 문을 연 ‘호안 미로 미술관(Fundació Joan Miró)’이 그곳이에요. 젊은 작가들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 구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83년 성탄절, 미로는 지중해의 섬 마요르카에서 아흔의 나이로 눈을 감았어요.


호안 미로 미술관, 바르셀로나 © Fundació Joan Miró, Barcelona

호안 미로 미술관, 바르셀로나 © Fundació Joan Miró, Barcelona


회계 사무원으로 출발해 화가가 되고, 굶주림 속에서 회화의 전통을 부수고, 전쟁의 한가운데서 밤하늘을 그린 사람. 세상을 떠난 지 43년이 된 올해까지도 그의 별과 새는 경매장의 호가판을 흔들고 있습니다. 굶주린 밤에 본 환영이, 끝내 816억 원짜리 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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