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가 사랑한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말처럼 전통을 깨는 충격적이고 명적인 작업을 다수 선보였죠. 온통 파란색으로 그려낸 청색시기 작품들, 아프리카 조각에서 영감받은 그림들, 여러 개의 시점을 하나의 화면 위에 구현한 입체파적 시도들까지. 덕분에 피카소는 30살 무렵, 세계 미술의 수도라 불린 프랑스 파리에서 입체주의의 창시자이자 거장으로 평가받기 시작해요.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평균 5~6년을 주기로 자신의 화풍을 통째로 갈아엎으며,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찾는 데 집중했죠. 그리고 평생 영감을 찾아 헤매던 피카소가 마침내 정착한 장르가 있었습니다. 바로 도자기였죠.
피카소 예술의 가장 큰 기점은 1907년 여름입니다. 이전까지는 청색시기를 거치며 어둡고 침울한 그림만을 그렸지만, 이 시기부터는 사랑하는 연인과 믿을 수 있는 동료들 덕분에 자신만의 예술에 집중하고 있었죠. 당시 25살이던 피카소는 몽마르트에 있던 자기 작업실에서 무려 9개월 가까이 수백 장의 습작을 거치며 하나의 작품에 매달렸어요. 가족, 후원자, 심지어 동료들에게도 이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죠.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피카소는 가장 가까운 친구와 동료를 불러모읍니다. 하지만 반응은 좋지 않았어요. 한 갤러리스트는 그림이 ‘완성되면’ 구매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미 다 완성된 것이었는데 말이죠.
피카소의 친구이자 화가였던 앙드레 드랭은 “가까운 미래에 이 그림 뒤에서 목을 맨 피카소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고, 앙리 마티스는 ‘현대미술 전체에 대한 모욕’이라며 분노합니다. 이 그림은 오늘날 피카소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이에요.
세로 2.44미터, 가로 2.34미터의 거대한 화면 위에 다섯 명의 여성이 서 있는데 그들의 얼굴은 아프리카 가면처럼 단순화되어 있고, 몸은 깨진 거울 조각처럼 각진 면으로 부서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상한 건 ‘시점’이었어요. 한 인물의 얼굴 안에 정면에서 본 코와, 옆에서 본 콧날이 동시에 있고, 앞으로 향한 가슴과, 옆으로 돌아간 엉덩이가 하나의 몸 위에 같이 그려져 있었거든요.
피카소에게 그림은 사진처럼 한 순간의 외형을 ‘박제’하는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사진은 하나의 렌즈(시점)로 한 순간을 포착하지만, 우리 눈은 두 개의 눈동자(시점)로 여러 시간에 걸쳐 대상을 파악합니다. 피카소는 이 시점과 시간의 조각들을 한 캔버스 안에 동시에 펼쳐 놓을 때 우리의 두 눈으로 보는 것 같은 생생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기존 미술 작품에서 볼 수 없는 파격적인 것이었어요. 이전까지의 작품은 하나의 시점으로 포착한 하나의 순간만 담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후, ‹아비뇽의 처녀들›을 시작으로 피카소는 그림에 다양한 시점을 담아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하나의 평면 위에 정면, 측면, 반측면 등 다양한 각도를 담아내며 그림 속 대상이 3차원임을 실감하게 했어요. 마치 다양한 면을 하나의 평면에 담은 ‘전개도’처럼요.
그리고 1911년 무렵, 파리의 평론가들이 이 새로운 화법에 이름을 붙입니다. ‘입체주의(Cubism)’
초기에는 여러 개의 시점을 하나의 캔버스에 올리는 입체파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강조하기 위해 주로 갈색·회색의 단색조로 작품을 처리했는데요. 이후 점차 다양한 컬러를 작품에 담아내기 시작하며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관을 빠르게 발전시킵니다. 잠시 신고전주의 화풍을 구사한 때도 있었지만, 이후 다시 입체파의 예술관으로 회귀하며 회화, 조각, 판화, 무대미술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본인의 예술을 고도화했죠.
1946년, 입체주의를 발명한 지 약 40년이 흐른 시점, 피카소는 64세였습니다. 이미 화가로서 부러울 것 없는 성공을 거둔 뒤였고 1937년 작 ‹게르니카›로 미술계라는 웅덩이에 큰 돌을 던지기도 했죠. 하지만 피카소는 계속 새로운 영감을 찾습니다.
그렇게 64세가 되던 1946년 여름, 새로운 영감을 찾아 작업실 문을 닫고 휴가를 떠납니다. 그리고 연인과 함께 남프랑스의 작은 도자기 마을, 발로리스(Vallauris)로 가요. 발로리스는 로마 시대부터 분홍빛 황토를 이용해 도자기를 빚어온 마을이었어요. 마을 전체가 도공들의 가마와 흙냄새로 가득한 곳이었는데요.
피카소는 마을 연례 도자기 전시를 보러 갔다가 연인의 제안으로 ‘마두라(Madoura) 공방’에서 도예를 처음 체험하게 돼요. 공방에 준비된 점토판 위에 즉흥적으로 형상 몇 개를 새겨보았죠. 그리고 그날을 마지막으로 휴가를 마치고 파리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1년 뒤인 1947년 여름, 다시 발로리스를 찾았을 때, 피카소는 자기가 무심코 새기고 간 그 작은 작업들이 가마에 구워져 ‘작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순간 피카소는 도예에 완전히 빠져버려요. 그날부터 1971년까지 약 25년간 마두라 공방 한켠에서 도자기 작업을 이어가게 되죠.
그 사이 피카소가 만든 도예 작품은 약 4,000여 점에 달합니다. 말년 25년 동안 한 명의 화가가 만들어낸 숫자치곤 좀 놀라울 정도죠. 그렇다면 왜 도예였을까요?
피카소 본인이 직접 답을 남긴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도자기들을 들여다보면, 몇 가지 단서를 발견할 수 있어요. 첫째는, 3차원이라는 매력입니다. 피카소는 입체주의를 창시한 작가입니다. 하나의 사물을 여러 시점에서 본 모습을 한 캔버스 위에 동시에 펼쳐 놓는 화법이었죠.
그리고 둘째로는, 일상적인 매력 덕분입니다. 피카소는 평생 ‘예술이 미술관에만 갇혀 있는 것’을 답답해 했어요. 판화를 많이 만든 이유도, 책 삽화 작업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결국 ‘더 많은 사람이 작품을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죠. 도자기는 그 정점이었습니다. 접시는 식탁 위에 올라가고, 화병은 거실에 놓이고
주전자는 차를 따를 때 쓰여요. 피카소는 이 일상의 기물들에 자신의 회화 세계를 그대로 옮겨 놓습니다.
피카소 도예에는 피카소의 세계가 담겨있습니다. 도자기에 그려지고 새겨진 요소는 모두 피카소와 아주 가까운 것들이었어요. 도자기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주제는 ‘얼굴’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이건희 컬렉션의 피카소 도예 112점 중, 무려 31점이 얼굴을 주제로 한 작품이기도 한데요.
이 얼굴 시리즈에는 흥미로운 디테일이 있어요. 대부분의 얼굴이 한쪽 눈은 정면, 다른 쪽 눈은 측면에서 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입니다. 도자기에서도 자신이 평생 추구해온 여러 시점을 동시에 재현하는 입체파적 시도를 멈추지 않았던 건데요. 다만 캔버스에서처럼 비장하지 않고 좀 더 가볍고, 위트있는 톤으로 선보입니다.
이걸 잘 볼 수 있는 것이 투우를 소재로 한 도자기에요. 피카소가 나고 자란 스페인은 투우의 성지입니다. 그리고 피카소 역시 평생 투우를 사랑했어요. 남프랑스의 아를, 님으로 직접 투우 경기를 보러 다녔고, 그 장면들을 도자기 접시 위에 끊임없이 새겨 넣었죠.
이 작품에서는 화병의 둥근 표면을 따라 투우장의 긴박한 장면과 열광하는 관중들의 실루엣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높이 31센티의 화병 주위를 직접 돌며 감상하면 도자기의 형태적 특징을 입체파적으로 활용해 스토리텔링하는 피카소의 연출력을 느낄 수 있죠.
또 피카소의 도자기에는 여인도 자주 등장합니다. 사실 피카소의 작품 세계에서 여인은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자주 변주된 주제 중 하나인데요. 이 작품은 피카소가 마두라 공방에서 마주친 직원, 자클린 로크를 그린 도자기입니다.
피카소는 평생 셀 수 없이 많은 여인과 연애를 했고, 그중 작품 세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남긴 ‘공식 뮤즈’로 알려진 건 7명, 그중 결혼까지 한 여인은 올가와 자클린, 두 명인데요. 자클린 로크는 피카소의 두 번째 아내이자 마지막 연인으로 피카소가 400여 점의 작품에 가장 많이 그린 모델이자 피카소의 마지막을 함께한 평생의 뮤즈였습니다. 피카소는 그런 자클린을 전통적이고 영구적인 형태로 박제했어요. 밝은 유약과 대비되는 검은색 파티나(Patinated, 부식 기법) 배경을 사용하여 자클린의 윤곽선을 고대 로마의 카메오 조각이나 동전처럼 극적이고 영구적인 형태로 부각했죠.
피카소 도예의 진짜 묘미는 회화·판화·조각의 요소가 하나의 도자기 안에 동시에 응축돼 있다는 점이에요. 접시 한 장을 들면 회화처럼 그림이 있고, 판화처럼 음각·양각이 새겨져 있고 조각처럼 표면이 입체적으로 튀어나와 있습니다. 피카소가 평생 따로 다뤄온 모든 매체가 이 작은 흙 한 덩어리에 자연스럽게 모이고 있는 거죠.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 한국에서 만나다
평생 영감을 찾아 헤매던 천재 예술가는 그렇게 도자기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피카소 도예 컬렉션이 2026년 가을 한국 관객을 찾아온다고 해요. 강원도 고성에 문을 여는 럭셔리 회원제 리조트 ‘그랜드 켄싱턴‘, 그 첫 번째 지점인 설악비치에서 피카소 도예 컬렉션 110점을 전시하기로 결정한 거예요.
감사하게도 작품이 공개되기 전, 가장 먼저 방문해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누리게 되었는데요.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몇 점 소개드려보려고 합니다.
첫째로는 <아울로스 연주자>에요. 피카소가 도자기를 만들게 된 곳, 발로리스로 떠날 당시 세상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이제 막 끝난 후였습니다. 피카소는 발로리스에서 흙을 만지며 새로운 예술적 생명력을 느꼈어요. 그리고 이를 작품에 표현했는데요. 그 새로운 예술적 생명력이 가장 잘 담긴 작품이 바로 <아울로스 연주자>입니다. 작품은 피카소 도자기 카탈로그의 첫 페이지를 장식할 정도로 의미깊은 작업이에요.
아울로스는 한국에선 쌍관피리라고 부르는 고대 그리스 악기인데요. 피카소는 아울로스를 부는 음악가를 즐겨 그리곤 했어요. 전쟁에서 살아남은 예술가가 느낀 삶의 기쁨, 그리고 억눌렸던 자유를 분출하는 투영이었죠. 이런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은 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한 번 더 흥미로운 결정이 등장합니다. 그랜드 켄싱턴 설악비치는 오직 회원만 머물 수 있는 럭셔리 회원제 리조트예요. ‘회원제’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 그대로 프라이빗하고 격조 있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피카소 도예 전시관 300평은 ‘개방형’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해요. 리조트 투숙객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지역 주민, 일반 관람객도 볼 수 있도록 한 거죠.
이랜드파크 측은 ‘아트앤컬처 리조트’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설명하면서 ‘지역사회와의 상생’과 ‘문화 향유의 확장’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피카소도 도자기를 만들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미술관과 부유한 컬렉터 외의 사람들도, 내 작품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
약 8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한 그룹이 그 컬렉션을 ‘회원제 리조트만의 혜택’이 아니라, ‘누구든 와서 볼 수 있는 개방형 전시’로 풀어내는 모습은 피카소가 도자기로 전한 이야기에 대한 답처럼 느껴졌어요.
1949년의 파블로 피카소 Photo: Gjon Mili/Life Picture Collection/Shutterstock
피카소가 사랑한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말처럼 전통을 깨는 충격적이고 명적인 작업을 다수 선보였죠. 온통 파란색으로 그려낸 청색시기 작품들, 아프리카 조각에서 영감받은 그림들, 여러 개의 시점을 하나의 화면 위에 구현한 입체파적 시도들까지. 덕분에 피카소는 30살 무렵, 세계 미술의 수도라 불린 프랑스 파리에서 입체주의의 창시자이자 거장으로 평가받기 시작해요.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평균 5~6년을 주기로 자신의 화풍을 통째로 갈아엎으며,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찾는 데 집중했죠. 그리고 평생 영감을 찾아 헤매던 피카소가 마침내 정착한 장르가 있었습니다. 바로 도자기였죠.
입체주의의 탄생
피카소의 몽마르뜨 언덕 작업실 (1910) © Christies
피카소 예술의 가장 큰 기점은 1907년 여름입니다. 이전까지는 청색시기를 거치며 어둡고 침울한 그림만을 그렸지만, 이 시기부터는 사랑하는 연인과 믿을 수 있는 동료들 덕분에 자신만의 예술에 집중하고 있었죠. 당시 25살이던 피카소는 몽마르트에 있던 자기 작업실에서 무려 9개월 가까이 수백 장의 습작을 거치며 하나의 작품에 매달렸어요. 가족, 후원자, 심지어 동료들에게도 이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죠.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피카소는 가장 가까운 친구와 동료를 불러모읍니다. 하지만 반응은 좋지 않았어요. 한 갤러리스트는 그림이 ‘완성되면’ 구매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미 다 완성된 것이었는데 말이죠.
피카소의 친구이자 화가였던 앙드레 드랭은 “가까운 미래에 이 그림 뒤에서 목을 맨 피카소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고, 앙리 마티스는 ‘현대미술 전체에 대한 모욕’이라며 분노합니다. 이 그림은 오늘날 피카소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이에요.
Pablo Picasso, 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 Museum of Modern Art
세로 2.44미터, 가로 2.34미터의 거대한 화면 위에 다섯 명의 여성이 서 있는데 그들의 얼굴은 아프리카 가면처럼 단순화되어 있고, 몸은 깨진 거울 조각처럼 각진 면으로 부서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상한 건 ‘시점’이었어요. 한 인물의 얼굴 안에 정면에서 본 코와, 옆에서 본 콧날이 동시에 있고, 앞으로 향한 가슴과, 옆으로 돌아간 엉덩이가 하나의 몸 위에 같이 그려져 있었거든요.
그렇다면 피카소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요?
Pablo Picasso, Weeping Woman (1937) © Tate Modern
피카소에게 그림은 사진처럼 한 순간의 외형을 ‘박제’하는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사진은 하나의 렌즈(시점)로 한 순간을 포착하지만, 우리 눈은 두 개의 눈동자(시점)로 여러 시간에 걸쳐 대상을 파악합니다. 피카소는 이 시점과 시간의 조각들을 한 캔버스 안에 동시에 펼쳐 놓을 때 우리의 두 눈으로 보는 것 같은 생생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기존 미술 작품에서 볼 수 없는 파격적인 것이었어요. 이전까지의 작품은 하나의 시점으로 포착한 하나의 순간만 담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후, ‹아비뇽의 처녀들›을 시작으로 피카소는 그림에 다양한 시점을 담아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하나의 평면 위에 정면, 측면, 반측면 등 다양한 각도를 담아내며 그림 속 대상이 3차원임을 실감하게 했어요. 마치 다양한 면을 하나의 평면에 담은 ‘전개도’처럼요.
Pablo Picasso, La Femme au Violon (1911) © Museum of Modern Art
그리고 1911년 무렵, 파리의 평론가들이 이 새로운 화법에 이름을 붙입니다. ‘입체주의(Cubism)’
초기에는 여러 개의 시점을 하나의 캔버스에 올리는 입체파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강조하기 위해 주로 갈색·회색의 단색조로 작품을 처리했는데요. 이후 점차 다양한 컬러를 작품에 담아내기 시작하며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관을 빠르게 발전시킵니다. 잠시 신고전주의 화풍을 구사한 때도 있었지만, 이후 다시 입체파의 예술관으로 회귀하며 회화, 조각, 판화, 무대미술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본인의 예술을 고도화했죠.
왜 ‘도자기’였을까
1949년, 발로리스에서의 피카소 Gjon Mili/Life Picture Collection/Shutterstock
1946년, 입체주의를 발명한 지 약 40년이 흐른 시점, 피카소는 64세였습니다. 이미 화가로서 부러울 것 없는 성공을 거둔 뒤였고 1937년 작 ‹게르니카›로 미술계라는 웅덩이에 큰 돌을 던지기도 했죠. 하지만 피카소는 계속 새로운 영감을 찾습니다.
그렇게 64세가 되던 1946년 여름, 새로운 영감을 찾아 작업실 문을 닫고 휴가를 떠납니다. 그리고 연인과 함께 남프랑스의 작은 도자기 마을, 발로리스(Vallauris)로 가요. 발로리스는 로마 시대부터 분홍빛 황토를 이용해 도자기를 빚어온 마을이었어요. 마을 전체가 도공들의 가마와 흙냄새로 가득한 곳이었는데요.
피카소는 마을 연례 도자기 전시를 보러 갔다가 연인의 제안으로 ‘마두라(Madoura) 공방’에서 도예를 처음 체험하게 돼요. 공방에 준비된 점토판 위에 즉흥적으로 형상 몇 개를 새겨보았죠. 그리고 그날을 마지막으로 휴가를 마치고 파리로 돌아갔어요.
© 2023 Estate of Pablo Picasso/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그리고 1년 뒤인 1947년 여름, 다시 발로리스를 찾았을 때, 피카소는 자기가 무심코 새기고 간 그 작은 작업들이 가마에 구워져 ‘작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순간 피카소는 도예에 완전히 빠져버려요. 그날부터 1971년까지 약 25년간 마두라 공방 한켠에서 도자기 작업을 이어가게 되죠.
그 사이 피카소가 만든 도예 작품은 약 4,000여 점에 달합니다. 말년 25년 동안 한 명의 화가가 만들어낸 숫자치곤 좀 놀라울 정도죠. 그렇다면 왜 도예였을까요?
피카소 본인이 직접 답을 남긴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도자기들을 들여다보면, 몇 가지 단서를 발견할 수 있어요. 첫째는, 3차원이라는 매력입니다. 피카소는 입체주의를 창시한 작가입니다. 하나의 사물을 여러 시점에서 본 모습을 한 캔버스 위에 동시에 펼쳐 놓는 화법이었죠.
© 2023 Estate of Pablo Picasso/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하지만 캔버스는 결국 평면이에요. 앞에서 본 얼굴과, 옆에서 본 얼굴을 한 화면에 같이 그려도 그건 ‘평면 위에 표현된 입체’일 뿐이었습니다. 도자기는 달랐어요. 손잡이는 진짜 손잡이가 되고 화병의 목은 진짜로 사람의 목이 됩니다.
피카소는 새 모양 화병을 만들 때, 화병의 손잡이를 새의 날개로 만들고 동시에 그 손잡이를 사람의 팔로 보이게 처리했어요. 평면이라면 ‘이게 새냐, 사람이냐’ 사이에서 그치는 그림이 도자기 위에서는 360도로 돌려보며 답을 바꿔볼 수 있게 되는 거죠.
© Succession Picasso / DACS, London 2023
그리고 둘째로는, 일상적인 매력 덕분입니다. 피카소는 평생 ‘예술이 미술관에만 갇혀 있는 것’을 답답해 했어요. 판화를 많이 만든 이유도, 책 삽화 작업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결국 ‘더 많은 사람이 작품을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죠. 도자기는 그 정점이었습니다. 접시는 식탁 위에 올라가고, 화병은 거실에 놓이고
주전자는 차를 따를 때 쓰여요. 피카소는 이 일상의 기물들에 자신의 회화 세계를 그대로 옮겨 놓습니다.
피카소가 도예에 대해 남긴 짧은 코멘트 중 하나입니다.
© Succession Picasso / DACS, London 2023
그리고 셋째는, 자유로움이에요. 20세기 도자 역사에서 피카소의 도예는 ‘유희적 도예(playful ceramics)’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돼요. 피카소가 이 작업을 할 때 스스로를 어떤 규범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풀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화가로서의 피카소는 늘 ‘세상을 흔드는 작품을 다음에 또 내놔야 한다’는 부담을 짊어진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도예 작업실에서는 달랐습니다. 손에 흙을 묻히고, 망가지면 던지고, 구워서 나온 결과가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짓이겨버렸죠.
실제로 마두라 공방의 사진들을 보면, 가만히 서서 진지하게 작업하는 노년의 피카소보다 웃는 얼굴로 점토를 만지는 피카소가 훨씬 자주 등장해요. 피카소의 도예는 거장의 의무에서 잠시 해방된 한 인간의 놀이터였던 셈입니다.
피카소의 도자기 안에 담긴 세계
© Succession Picasso / DACS, London 2023
피카소 도예에는 피카소의 세계가 담겨있습니다. 도자기에 그려지고 새겨진 요소는 모두 피카소와 아주 가까운 것들이었어요. 도자기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주제는 ‘얼굴’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이건희 컬렉션의 피카소 도예 112점 중, 무려 31점이 얼굴을 주제로 한 작품이기도 한데요.
이 얼굴 시리즈에는 흥미로운 디테일이 있어요. 대부분의 얼굴이 한쪽 눈은 정면, 다른 쪽 눈은 측면에서 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입니다. 도자기에서도 자신이 평생 추구해온 여러 시점을 동시에 재현하는 입체파적 시도를 멈추지 않았던 건데요. 다만 캔버스에서처럼 비장하지 않고 좀 더 가볍고, 위트있는 톤으로 선보입니다.
이걸 잘 볼 수 있는 것이 투우를 소재로 한 도자기에요. 피카소가 나고 자란 스페인은 투우의 성지입니다. 그리고 피카소 역시 평생 투우를 사랑했어요. 남프랑스의 아를, 님으로 직접 투우 경기를 보러 다녔고, 그 장면들을 도자기 접시 위에 끊임없이 새겨 넣었죠.
이 작품에서는 화병의 둥근 표면을 따라 투우장의 긴박한 장면과 열광하는 관중들의 실루엣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높이 31센티의 화병 주위를 직접 돌며 감상하면 도자기의 형태적 특징을 입체파적으로 활용해 스토리텔링하는 피카소의 연출력을 느낄 수 있죠.
또 피카소의 도자기에는 여인도 자주 등장합니다. 사실 피카소의 작품 세계에서 여인은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자주 변주된 주제 중 하나인데요. 이 작품은 피카소가 마두라 공방에서 마주친 직원, 자클린 로크를 그린 도자기입니다.
피카소는 평생 셀 수 없이 많은 여인과 연애를 했고, 그중 작품 세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남긴 ‘공식 뮤즈’로 알려진 건 7명, 그중 결혼까지 한 여인은 올가와 자클린, 두 명인데요. 자클린 로크는 피카소의 두 번째 아내이자 마지막 연인으로 피카소가 400여 점의 작품에 가장 많이 그린 모델이자 피카소의 마지막을 함께한 평생의 뮤즈였습니다. 피카소는 그런 자클린을 전통적이고 영구적인 형태로 박제했어요. 밝은 유약과 대비되는 검은색 파티나(Patinated, 부식 기법) 배경을 사용하여 자클린의 윤곽선을 고대 로마의 카메오 조각이나 동전처럼 극적이고 영구적인 형태로 부각했죠.
피카소 도예의 진짜 묘미는 회화·판화·조각의 요소가 하나의 도자기 안에 동시에 응축돼 있다는 점이에요. 접시 한 장을 들면 회화처럼 그림이 있고, 판화처럼 음각·양각이 새겨져 있고 조각처럼 표면이 입체적으로 튀어나와 있습니다. 피카소가 평생 따로 다뤄온 모든 매체가 이 작은 흙 한 덩어리에 자연스럽게 모이고 있는 거죠.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 한국에서 만나다
평생 영감을 찾아 헤매던 천재 예술가는 그렇게 도자기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피카소 도예 컬렉션이 2026년 가을 한국 관객을 찾아온다고 해요. 강원도 고성에 문을 여는 럭셔리 회원제 리조트 ‘그랜드 켄싱턴‘, 그 첫 번째 지점인 설악비치에서 피카소 도예 컬렉션 110점을 전시하기로 결정한 거예요.
감사하게도 작품이 공개되기 전, 가장 먼저 방문해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누리게 되었는데요.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몇 점 소개드려보려고 합니다.
첫째로는 <아울로스 연주자>에요. 피카소가 도자기를 만들게 된 곳, 발로리스로 떠날 당시 세상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이제 막 끝난 후였습니다. 피카소는 발로리스에서 흙을 만지며 새로운 예술적 생명력을 느꼈어요. 그리고 이를 작품에 표현했는데요. 그 새로운 예술적 생명력이 가장 잘 담긴 작품이 바로 <아울로스 연주자>입니다. 작품은 피카소 도자기 카탈로그의 첫 페이지를 장식할 정도로 의미깊은 작업이에요.
아울로스는 한국에선 쌍관피리라고 부르는 고대 그리스 악기인데요. 피카소는 아울로스를 부는 음악가를 즐겨 그리곤 했어요. 전쟁에서 살아남은 예술가가 느낀 삶의 기쁨, 그리고 억눌렸던 자유를 분출하는 투영이었죠. 이런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은 또 있습니다
1946년, 부엉이 '우부'와 함께 있는 피카소 © MICHEL SIMA/BRIDGEMAN IMAGES
<얼룩 무늬 올빼미> 이 작품에 표현된 올빼미는 피카소의 남프랑스 시절을 상징하는 중요한 모티프에요. 오늘날 피카소 미술관이 된 앙티브의 그리말디 성에 머물 당시, 피카소는 상처입은 올빼미 우부(Ubu)를 구조해 작업실에서 함께 생활했는데요.
피카소는 화병의 목 부분을 잘라 뒤집어 점토가 굳기전에 각 부분을 접합했습니다. 그렇게 올빼미의 모습을 도자기로 형상화했죠. 거장의 따뜻한 시선과 특유의 유머감각을 엿볼 수 있는 걸작입니다. 그리고 이런 유머는 계속 이어져요.
<회색 바탕 위의 세 물고기> 이 작품은 접시 형태의 도자기 위에 먹음직스럽게 물고기를 그려넣었습니다. 음식을 담는 그릇 위에 실제 물고기를 그리면서 실제와 환영의 경계를 머무는 시각적 장난을 친 것이죠. 지중해의 따뜻한 공기와 여유가 느껴지는 경쾌한 작품입니다.
그랜드 켄싱턴 설악비치에서는 이 작품들을 포함해 총 110점의 피카소 도예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이 컬렉션은 이랜드그룹이 무려 30년 동안 꾸준히, 묵묵히 모아 온 결과물이라고 해요. 단일 작가의 도예 컬렉션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죠.
© Succession Picasso / DACS, London 2023
그리고 이 지점에서 한 번 더 흥미로운 결정이 등장합니다. 그랜드 켄싱턴 설악비치는 오직 회원만 머물 수 있는 럭셔리 회원제 리조트예요. ‘회원제’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 그대로 프라이빗하고 격조 있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피카소 도예 전시관 300평은 ‘개방형’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해요. 리조트 투숙객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지역 주민, 일반 관람객도 볼 수 있도록 한 거죠.
이랜드파크 측은 ‘아트앤컬처 리조트’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설명하면서 ‘지역사회와의 상생’과 ‘문화 향유의 확장’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피카소도 도자기를 만들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미술관과 부유한 컬렉터 외의 사람들도, 내 작품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
약 8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한 그룹이 그 컬렉션을 ‘회원제 리조트만의 혜택’이 아니라, ‘누구든 와서 볼 수 있는 개방형 전시’로 풀어내는 모습은 피카소가 도자기로 전한 이야기에 대한 답처럼 느껴졌어요.
1947년, 발로리스에서 피카소 © Succession Picasso / DACS, London 2023
피카소 도예 컬렉션은 그 출발점이고 앞으로도 다양한 미술 작품을 리조트 안에서 다룰 예정이라고 합니다. 64세의 피카소가 마두라 공방의 문을 두드린 그 순간에서 시작해 30년에 걸쳐 한국으로 건너온 110점의 도자기까지. 오늘 이야기는 좀 긴 시간 위에 펼쳐졌는데요.
다행히 2026년 가을부터는 그게 한국에서, 그것도 강원도 동해 바닷가에서 가능해질 예정이에요. 국내 여행을 떠날 계획이 있는 분들, 또는 여행지에서 미술관에 꼭 방문하곤 하시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들러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