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백남준 작가의 작고 20주기입니다. 백남준은 서울 창신동의 부잣집 막내 아들로 태어나서 도쿄, 뮌헨, 뉴욕을 거쳐 비디오아트의 아버지가 된 인물이에요. 오늘날에는 K-Culture가 정말 많지만, 그 시초에는 백남준이 있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죠.
백남준 작가의 집안은 일제강점기에 섬유산업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덕분에 작가는 고등학교를 다닐 당시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는 피아노 연주를 배웠고, 피아니스트 이건우에게는 작곡을 배웁니다. 예술의 첫 시작은 음악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쭉 한 길로만 나아가진 않았습니다. 한국 전쟁 발발 전, 백남준의 가족은 일본으로 이주하는데요. 그렇게 1952년 도쿄대학교 문과부에 입학한 뒤, 미술사와 미학을 전공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음악에 있었어요. 그렇게 졸업 논문은 또 음악으로 선택합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였죠.
이때부터는 백남준이 마음을 굳힌듯 합니다. 졸업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나, 1956년부터 뮌헨대학교에서 음악 공부를 이어가요. 이 시기 음악계에서는 아주 파격적인 작품이 선보여지고 있었습니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였죠.
John Cage, 4'33" (In Proportional Notation) (1952/1953) ⓒ MoMA
이 작품은 피아니스트가 등장해서,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고 앉아있습니다. 곡이 진행되는 동안 피아노 소리 대신 의자가 삐그덕대는 소리, 왜인지 헛기침을 하는 관객의 소리, 허공에 떠다니는 공기의 흐름이 시공간을 채우죠. 존 케이지는 이를 통해 ‘침묵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백남준은 이 시도에 큰 충격을 받아요.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느냐 하면, ‘존 케이지를 만나기 전은 내 인생의 B.C(Before Cage)이고 그를 만난 후가 나의 A.D다’라고 이야기할 정도였어요. 그리고, 음악과 퍼포먼스, 미술의 경계를 부수는 시도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행위 음악: 음악과 퍼포먼스, 미술의 결합
백남준, 존 케이지, 그리고 데이빗 튜더 (1960)
그렇게 선보인 작품은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1959)였어요. 이 작품에서 백남준은 미리 녹음하고 편집한 릴테이프를 재생했는데요. 릴 테이프에는 클래식 음악부터 일상의 소음이 녹음되어 있었습니다. 클래식 음악으로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 독일 가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녹음되어있었고, 일상 소음으로는 비명, 유리 깨지는 소리, 수탉 울음, 복권 발표와 뉴스 등의 소리가 녹음되어 있었죠.
이 녹음이 재생되는 한편, 무대 위에는 피아노가 하나 놓여져 있었는데요. 이 피아노는 prepared piano(설치된 피아노)라고 부릅니다. 존 케이지가 1940년대 발명한 개념이죠. 설치된 피아노는 피아노 현 사이 사이에 나사, 고무, 종이, 동전 같은 이물질을 끼워서 음색 자체를 변형시켜둔 걸 볼 수 있어요.
백남준은 이 설치된 피아노를 고스란히 배치하며,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공연이 한참 진행되던 중, 백남준은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갑자기 부수는 퍼포먼스를 합니다. 이건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이면서 도전이기도 했어요. 그의 시도를 파괴했으니까요.
이 작품 이후 백남준은 아트테러리스트라고 불리게 되는데요. 이건 단순한 비난의 별명은 아니었어요. 도리어, 동시대 흐름을 잘 반영했다는 극찬이었죠. 이 작품이 선보여졌을 당시 독일, 정확히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백남준의 시선에서는 그 부흥의 아래에는 ‘나치 시대의 어두운 열정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느껴졌다고 해요.
그렇게 백남준은 작품을 통해 전쟁의 폭력적인 장면들을 노골적으로 재현했합니다. 녹음된 릴테이프에 고급문화를 상징하는 클래식과 함께, 비명이나 무언가 깨지는 소리를 넣은 것도 그런 이유죠. 그렇게 청년 백남준은 충격, 도발, 위트를 장착한 예술가로 독일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요.
‘내가 하면 안될 건 뭔가?’ TV를 활용한 예술의 시작
Nam June Paik, Zen for TV (1963, executed 1981) ⓒ MoMA
이후 백남준은 작품에 또 시대성을 반영한 시도를 하기로 해요. 이 시기에는 TV가 새로운 매체로서 막 등장하고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백남준은 머지않아 누군가가 TV를 활용한 예술을 선보일거라고 직감해요. 그러면서도 그 주인공이 자신은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하면 안될건 뭔가?’라는 의문이 들었고,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투자해서 TV를 구입해요.
백남준,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 전시포스터, 1963, 에릭 안테르시 컬렉션 ⓒ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 중 입으로 듣는 음악퍼포먼스, (1963)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위 작품은 모조페니스를 입에 물고 바늘을 레코드에 얹고 고막의 진동을 속귀로 전달받는 관객참여형 작품으로 성(性)을 소재한 점도 흥미롭다. ⓒ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 중 텔레비전 방 바리타지 인화흑백사진 (1963)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 백남준아트센터
그렇게 1963년 3월, 13대의 TV를 활용한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 전시를 엽니다. 1963년도에 티비 13대를 산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지만, 백남준의 시도는 아주 도발적이었어요. TV는 악기가 되고, 악기는 조각이 되고, 조각은 영상이 되는 순환이 일어나게 만들었죠.
이 시도는 백남준이라는 인물의 캐릭터 빌딩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음악을 공부하다가 대학교 때 미학 전공을 하고, 졸업 논문은 음악으로 썼던 백남준의 젊은 시절이 음악을 활용한 퍼포먼스 아트로 완성된 것처럼 느껴졌죠. 그리고 오늘날에는 백남준이 평생에 걸쳐 추구한 '경계 부수기'가 가장 우아하게 구현된 시도였다고도 평가받습니다.
음악, 미술, 그리고 종교에 대한 통념을 깨부수다
Nam June Paik: Moon Is the Oldest TV. 2023. Directed by Amanda Kim ⓒ MoMA
1974년 작 <TV 부처>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습니다. 백남준은 계속해서 작품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해왔던 작가였어요. 그리고 아이디어나 재료를 얻기 위해, 골동품 가게도 자주 방문했는데요. 어느날 한 번은, 골동품 가게에서 1만 달러를 주고 부처상을 구매합니다. 이때 아내가 많이 구박했다고 해요. ‘허접한 불상을 사는데 1만 달러나 썼느냐’는 것이었죠. 당시의 1만 달러면 오늘날 가치로는 1억이 훌쩍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놀라운 점은, 이 불상을 구매한 뒤 작업실 한켠에 그냥 방치해두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이 불상이 있다는 것도 잊혀져 가고 있었죠. 백남준 작가는 새로운 작품 구상하고 있었어요. 큰 공간에 티비 모니터를 천장에 가득 채워 달아둘 생각이었는데, 그 큰 공간을 채울 티비를 다 구하지 못했습니다.
Nam June Paik, TV Buddha (1974/2002) collection of the Nam June Paik Art Center
Nam June Paik and his Buddha TV, 1974, at Projects: Nam June Paik (August 29-October 10, 1977),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1977, photo: Eric Kroll
Nam June Paik, Gold TV Buddha (2005) ⓒ Nam June Paik Estate. Photo: Paula Abreu Pita, Brooklyn Museum
이 일을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방치해둔 불상이 떠올랐어요. 백남준은 큰 전시공간에 카메라, 티비, 불상을 설치합니다. 그리고 <TV 부처>라고 이름을 붙여요. 작품을 보면, 부처가 티비를 보고 있고, 티비 화면에는 부처의 얼굴이 송출되고 있는 걸 볼 수 있는데요. 이 작품도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종교적 구도자면서 동양적 지혜의 상징인 부처가, 현대문명의 상징인 티비를 본다는 점이 시각적으로 새로웠던 것이죠. 또 화면 속 자신에게 빠져든듯 나르시스적인 태도도 위트있게 느껴졌습니다. 비평가들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동양의 명상세계를 잘 접목시켰다고 찬사하면서, 또한번 백남준이 성공적으로 경계를 부수었다고 평가했어요.
세계를 연결한 문화 테러리스트
조지 오웰의 1984 첫 번째 에디션 커버 / 조지 오웰
이후 백남준은 굵직한 커리어를 남깁니다. 가장 대표적인 건,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이라는 작품을 발표한 것이었어요. 작품의 제목에 있는 ‘오웰’은 소설 <1984>(1949)를 쓴 조지 오웰을 의미합니다. 오웰은 이 소설에서 미디어 감시와 전쟁이 끊이지 않는 미래 사회를 그려냈어요. 그리고 소설을 작성하던 시점 기준, 35년 뒤인 1984년이 되면, 텔레비전이라는 물건이 ‘빅 브라더’의 눈이 되어 모든 개인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디스토피아가 올 거라고 예언했죠.
그리고 찾아온 1984년, 조지 오웰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백남준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을 통해 답장을 보냅니다. “오웰 씨, 안녕하세요. 당신은 절반만 맞았어요. TV가 사람을 감시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을 연결하는 다리도 될 수 있거든요.”
A still from Good Morning Mr. Orwell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 작품은 1984년 1월 1일 미국공영방송 WNET 뉴욕 스튜디오와 프랑스 퐁피두센터를 위성으로 연결해 한국, 독일, 일본 등으로 생중계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라이브 쇼였습니다. 뉴욕과 파리. 5,800킬로미터쯤 떨어진 두 도시를, 인공위성을 통해 실시간으로 연결한 거예요. 한쪽 사회자가 새해 인사를 건네면, 지구 반대편 사회자가 그걸 받아 화답하는, 지금 우리에겐 익숙한 장면이 1984년의 인류에게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광경이었습니다. 당시 기술로는 구현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거든요.
1980년대 위성은 냉전의 산물이자 거대한 국가적 자본을 투입한 하이테크놀로지의 결정체로, 이러한 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몇몇 방송국과 나사(NASA) 정도였어요. 그리고 백남준은 위성 방송 시스템을 대륙 간 서로 다른 문화를 연결할 수 있는 기술로 구상했습니다. 국가와 나사만 만질 수 있던 그 위성을, 예술가 한 명이 "사람들을 연결하는 데 써보겠다"고 끌어내린 거예요.
A still from Good Morning Mr. Orwell (1984)
그리고 출연진이 정말 화려했습니다.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외에도 머스 커닝햄, 샬럿 무어만, 로리 앤더슨, 이브 몽탕 등 당대의 예술계 인사들이 한데 모여 동시에 공연을 벌였고, 뉴욕 공영방송 WNET의 주조정실에서 실시간으로 이 영상을 편집하여 송신했어요. 백남준은 요셉 보이스와 존 케이지가 서로 친분이 있으면서도 한 번도 함께 공연을 한 적이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위성을 통해 요셉 보이스와 존 케이지가 함께 공연할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한 사람은 파리에, 한 사람은 뉴욕에 있는데, 위성으로 둘을 한 화면에 묶어 '평생 못 했던 합동 공연'을 성사시킨 겁니다. 위성을 그냥 기술로 쓴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는 도구로 쓴 거죠.
그렇게 작품엔 100여 명의 예술가가 참여해 대중예술과 아방가르드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음악, 미술, 퍼포먼스, 패션쇼, 코미디를 선보였고, 서울을 포함해 전세계에서 약 2,500만 명이 보고 반했습니다. 1984년에 한 예술가의 작품을 2,500만 명이 동시에 봤다는 기록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것이었어요. 작품은 한국에서도 상영됩니다. 한국 시간으로 1984년 1월 1일 정오에 KBS를 통해 생중계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백남준의 이름이 한국에 역수출되며 1984년 6월 22일, 백남준은 34년 만에 고국의 초대를 받아 귀국합니다.
Courtesy of Nam June Paik Art Center Ⓒ Estate of Peter Moore / VAGA, New York
18살에 한국을 떠나 일본, 독일, 미국을 떠돌던 사람이, 위성으로 전 세계를 연결하는 작품을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것도 34년 만에요. 자기가 만든 '연결의 기술'이, 정작 자기 자신을 고향과 다시 연결해준 셈입니다.
비디오 아트의 거장, 금의환향하다
백남준, 다다익선, 1988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또 1988년에는 88올림픽을 기념해 <다다익선>이라는 작품을 제작합니다. <다다익선>은 브라운관 티비를 높이 18.5미터로 높게 쌓아올린 작품이에요. 작품에 활용된 티비만 1003개나 되었죠. 1003개라는 숫자는 10월 3일, 개천절을 상징하는 숫자는 것입니다. 한국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한 장치에요.
그리고 이 작품이 국가적인 행사였던 88올림픽 시즌에 맞춰서 공개되면서 한국의 예술적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작품이 선보여지고 15년 뒤인 2003년, 문제가 발생합니다. 브라운관 티비가 하나둘씩 고장나기 시작했던 거죠. 아무래도 티비 1003대가 층층이 쌓여있으니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건데요. 이에 백남준 작가는 2003년부터 직접 모니터를 대대적으로 교체하기 시작합니다.
Courtesy of Nam June Paik Art Center Ⓒ Gianni Melotti
그러던 중 2006년, 백남준 작가가 세상을 떠나게 돼요. <다다익선>은 계속 망가졌습니다. 이윽고 작품을 어떻게 해야할 지 논의가 생기기 시작해요. 이 부품을 교체하는 게 맞냐, 아니면 작가가 세상을 떠났으니 그냥 두는게 맞냐가 팽팽히 대립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백남준 작가와 <다다익선>의 기술적 부분 협업을 하고 수리도 함께 했던 이정성 대표의 의견이 반영되기로 해요.
이정성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백 선생님은 늘 그 시대에 제일 좋고 적합한 모니터를 쓰면 된다고 했다. (...) 모니터는 작가가 편집한 비디오를 틀기 위한 장치다. 작가의 정신이 모니터에 있는 건 아니다.” 그렇게 2018년, <다다익선>은 작동을 전면 중단하고 4년간 복원 작업을 거쳐 2022년 대중에게 재공개됩니다. 1003대의 브라운관 TV 중 737대가 각지에서 수급한 부품으로 수리되었고, 266대의 TV는 평면 디스플레이, LCD 모니터로 교체되었어요. 이 일로 백남준 작가의 다른 브라운관 TV 작품도 수리와 교체가 진행되면서, 그의 예술은 오늘날의 관객에게까지 온전히 전달되고 있습니다.
백남준 작고 20주기, 전시들
백남준 아트센터 전경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을 맞이해, 이를 기억하며 서울과 경기에서 다양한 전시가 진행중입니다. 경기 용인에 있는 백남준 아트센터에서는 2개의 상설 전시를 통해 작가의 작품 선보이고 있고, 오는 7월 16일에 〈백남준의 행성> 특별 전시 진행 예정이에요.
그리고, 백남준 작가의 유해가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 있어요. 백남준 작가가 잠들어있는 봉은사 법왕루는 그의 어린시절 추억이 깃들어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는 작가의 사진과 그의 데드마스크가 함께 설치되어 있기도 하니, 그의 예술세계를 헤아려보며 방문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heruing2026-05-28 02:59
개인적으로 백남준 작가님의 시도는 현대미술이 지닌 '의미를 바탕으로 한 표현'과 맞닿아있다고 생각하는데, 요즘에는 그 의미와 상징성이 퇴색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 주제도 유튜브에 업로드 해주시면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부잣집 막내아들, 예술에 발을 들이다
Photograph by Elliott Erwitt / Magnum
올해는 백남준 작가의 작고 20주기입니다. 백남준은 서울 창신동의 부잣집 막내 아들로 태어나서 도쿄, 뮌헨, 뉴욕을 거쳐 비디오아트의 아버지가 된 인물이에요. 오늘날에는 K-Culture가 정말 많지만, 그 시초에는 백남준이 있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죠.
백남준 작가의 집안은 일제강점기에 섬유산업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덕분에 작가는 고등학교를 다닐 당시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는 피아노 연주를 배웠고, 피아니스트 이건우에게는 작곡을 배웁니다. 예술의 첫 시작은 음악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쭉 한 길로만 나아가진 않았습니다. 한국 전쟁 발발 전, 백남준의 가족은 일본으로 이주하는데요. 그렇게 1952년 도쿄대학교 문과부에 입학한 뒤, 미술사와 미학을 전공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음악에 있었어요. 그렇게 졸업 논문은 또 음악으로 선택합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였죠.
이때부터는 백남준이 마음을 굳힌듯 합니다. 졸업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나, 1956년부터 뮌헨대학교에서 음악 공부를 이어가요. 이 시기 음악계에서는 아주 파격적인 작품이 선보여지고 있었습니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였죠.
John Cage, 4'33" (In Proportional Notation) (1952/1953) ⓒ MoMA
이 작품은 피아니스트가 등장해서,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고 앉아있습니다. 곡이 진행되는 동안 피아노 소리 대신 의자가 삐그덕대는 소리, 왜인지 헛기침을 하는 관객의 소리, 허공에 떠다니는 공기의 흐름이 시공간을 채우죠. 존 케이지는 이를 통해 ‘침묵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백남준은 이 시도에 큰 충격을 받아요.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느냐 하면, ‘존 케이지를 만나기 전은 내 인생의 B.C(Before Cage)이고 그를 만난 후가 나의 A.D다’라고 이야기할 정도였어요. 그리고, 음악과 퍼포먼스, 미술의 경계를 부수는 시도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행위 음악: 음악과 퍼포먼스, 미술의 결합
백남준, 존 케이지, 그리고 데이빗 튜더 (1960)
그렇게 선보인 작품은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1959)였어요. 이 작품에서 백남준은 미리 녹음하고 편집한 릴테이프를 재생했는데요. 릴 테이프에는 클래식 음악부터 일상의 소음이 녹음되어 있었습니다. 클래식 음악으로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 독일 가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녹음되어있었고, 일상 소음으로는 비명, 유리 깨지는 소리, 수탉 울음, 복권 발표와 뉴스 등의 소리가 녹음되어 있었죠.
이 녹음이 재생되는 한편, 무대 위에는 피아노가 하나 놓여져 있었는데요. 이 피아노는 prepared piano(설치된 피아노)라고 부릅니다. 존 케이지가 1940년대 발명한 개념이죠. 설치된 피아노는 피아노 현 사이 사이에 나사, 고무, 종이, 동전 같은 이물질을 끼워서 음색 자체를 변형시켜둔 걸 볼 수 있어요.
백남준은 이 설치된 피아노를 고스란히 배치하며,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공연이 한참 진행되던 중, 백남준은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갑자기 부수는 퍼포먼스를 합니다. 이건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이면서 도전이기도 했어요. 그의 시도를 파괴했으니까요.
이 작품 이후 백남준은 아트테러리스트라고 불리게 되는데요. 이건 단순한 비난의 별명은 아니었어요. 도리어, 동시대 흐름을 잘 반영했다는 극찬이었죠. 이 작품이 선보여졌을 당시 독일, 정확히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백남준의 시선에서는 그 부흥의 아래에는 ‘나치 시대의 어두운 열정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느껴졌다고 해요.
그렇게 백남준은 작품을 통해 전쟁의 폭력적인 장면들을 노골적으로 재현했합니다. 녹음된 릴테이프에 고급문화를 상징하는 클래식과 함께, 비명이나 무언가 깨지는 소리를 넣은 것도 그런 이유죠. 그렇게 청년 백남준은 충격, 도발, 위트를 장착한 예술가로 독일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요.
‘내가 하면 안될 건 뭔가?’ TV를 활용한 예술의 시작
Nam June Paik, Zen for TV (1963, executed 1981) ⓒ MoMA
이후 백남준은 작품에 또 시대성을 반영한 시도를 하기로 해요. 이 시기에는 TV가 새로운 매체로서 막 등장하고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백남준은 머지않아 누군가가 TV를 활용한 예술을 선보일거라고 직감해요. 그러면서도 그 주인공이 자신은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하면 안될건 뭔가?’라는 의문이 들었고,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투자해서 TV를 구입해요.
백남준,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 전시포스터, 1963, 에릭 안테르시 컬렉션 ⓒ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 중 입으로 듣는 음악퍼포먼스, (1963)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위 작품은 모조페니스를 입에 물고 바늘을 레코드에 얹고 고막의 진동을 속귀로 전달받는 관객참여형 작품으로 성(性)을 소재한 점도 흥미롭다. ⓒ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 중 텔레비전 방 바리타지 인화흑백사진 (1963)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 백남준아트센터
그렇게 1963년 3월, 13대의 TV를 활용한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 전시를 엽니다. 1963년도에 티비 13대를 산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지만, 백남준의 시도는 아주 도발적이었어요. TV는 악기가 되고, 악기는 조각이 되고, 조각은 영상이 되는 순환이 일어나게 만들었죠.
이 시도는 백남준이라는 인물의 캐릭터 빌딩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음악을 공부하다가 대학교 때 미학 전공을 하고, 졸업 논문은 음악으로 썼던 백남준의 젊은 시절이 음악을 활용한 퍼포먼스 아트로 완성된 것처럼 느껴졌죠. 그리고 오늘날에는 백남준이 평생에 걸쳐 추구한 '경계 부수기'가 가장 우아하게 구현된 시도였다고도 평가받습니다.
음악, 미술, 그리고 종교에 대한 통념을 깨부수다
Nam June Paik: Moon Is the Oldest TV. 2023. Directed by Amanda Kim ⓒ MoMA
1974년 작 <TV 부처>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습니다. 백남준은 계속해서 작품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해왔던 작가였어요. 그리고 아이디어나 재료를 얻기 위해, 골동품 가게도 자주 방문했는데요. 어느날 한 번은, 골동품 가게에서 1만 달러를 주고 부처상을 구매합니다. 이때 아내가 많이 구박했다고 해요. ‘허접한 불상을 사는데 1만 달러나 썼느냐’는 것이었죠. 당시의 1만 달러면 오늘날 가치로는 1억이 훌쩍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놀라운 점은, 이 불상을 구매한 뒤 작업실 한켠에 그냥 방치해두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이 불상이 있다는 것도 잊혀져 가고 있었죠. 백남준 작가는 새로운 작품 구상하고 있었어요. 큰 공간에 티비 모니터를 천장에 가득 채워 달아둘 생각이었는데, 그 큰 공간을 채울 티비를 다 구하지 못했습니다.
Nam June Paik, TV Buddha (1974/2002) collection of the Nam June Paik Art Center
Nam June Paik and his Buddha TV, 1974, at Projects: Nam June Paik (August 29-October 10, 1977),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1977, photo: Eric Kroll
Nam June Paik, Gold TV Buddha (2005) ⓒ Nam June Paik Estate. Photo: Paula Abreu Pita, Brooklyn Museum
이 일을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방치해둔 불상이 떠올랐어요. 백남준은 큰 전시공간에 카메라, 티비, 불상을 설치합니다. 그리고 <TV 부처>라고 이름을 붙여요. 작품을 보면, 부처가 티비를 보고 있고, 티비 화면에는 부처의 얼굴이 송출되고 있는 걸 볼 수 있는데요. 이 작품도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종교적 구도자면서 동양적 지혜의 상징인 부처가, 현대문명의 상징인 티비를 본다는 점이 시각적으로 새로웠던 것이죠. 또 화면 속 자신에게 빠져든듯 나르시스적인 태도도 위트있게 느껴졌습니다. 비평가들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동양의 명상세계를 잘 접목시켰다고 찬사하면서, 또한번 백남준이 성공적으로 경계를 부수었다고 평가했어요.
세계를 연결한 문화 테러리스트
조지 오웰의 1984 첫 번째 에디션 커버 / 조지 오웰
이후 백남준은 굵직한 커리어를 남깁니다. 가장 대표적인 건,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이라는 작품을 발표한 것이었어요. 작품의 제목에 있는 ‘오웰’은 소설 <1984>(1949)를 쓴 조지 오웰을 의미합니다. 오웰은 이 소설에서 미디어 감시와 전쟁이 끊이지 않는 미래 사회를 그려냈어요. 그리고 소설을 작성하던 시점 기준, 35년 뒤인 1984년이 되면, 텔레비전이라는 물건이 ‘빅 브라더’의 눈이 되어 모든 개인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디스토피아가 올 거라고 예언했죠.
그리고 찾아온 1984년, 조지 오웰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백남준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을 통해 답장을 보냅니다. “오웰 씨, 안녕하세요. 당신은 절반만 맞았어요. TV가 사람을 감시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을 연결하는 다리도 될 수 있거든요.”
A still from Good Morning Mr. Orwell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 작품은 1984년 1월 1일 미국공영방송 WNET 뉴욕 스튜디오와 프랑스 퐁피두센터를 위성으로 연결해 한국, 독일, 일본 등으로 생중계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라이브 쇼였습니다. 뉴욕과 파리. 5,800킬로미터쯤 떨어진 두 도시를, 인공위성을 통해 실시간으로 연결한 거예요. 한쪽 사회자가 새해 인사를 건네면, 지구 반대편 사회자가 그걸 받아 화답하는, 지금 우리에겐 익숙한 장면이 1984년의 인류에게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광경이었습니다. 당시 기술로는 구현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거든요.
1980년대 위성은 냉전의 산물이자 거대한 국가적 자본을 투입한 하이테크놀로지의 결정체로, 이러한 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몇몇 방송국과 나사(NASA) 정도였어요. 그리고 백남준은 위성 방송 시스템을 대륙 간 서로 다른 문화를 연결할 수 있는 기술로 구상했습니다. 국가와 나사만 만질 수 있던 그 위성을, 예술가 한 명이 "사람들을 연결하는 데 써보겠다"고 끌어내린 거예요.
A still from Good Morning Mr. Orwell (1984)
그리고 출연진이 정말 화려했습니다.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외에도 머스 커닝햄, 샬럿 무어만, 로리 앤더슨, 이브 몽탕 등 당대의 예술계 인사들이 한데 모여 동시에 공연을 벌였고, 뉴욕 공영방송 WNET의 주조정실에서 실시간으로 이 영상을 편집하여 송신했어요. 백남준은 요셉 보이스와 존 케이지가 서로 친분이 있으면서도 한 번도 함께 공연을 한 적이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위성을 통해 요셉 보이스와 존 케이지가 함께 공연할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한 사람은 파리에, 한 사람은 뉴욕에 있는데, 위성으로 둘을 한 화면에 묶어 '평생 못 했던 합동 공연'을 성사시킨 겁니다. 위성을 그냥 기술로 쓴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는 도구로 쓴 거죠.
그렇게 작품엔 100여 명의 예술가가 참여해 대중예술과 아방가르드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음악, 미술, 퍼포먼스, 패션쇼, 코미디를 선보였고, 서울을 포함해 전세계에서 약 2,500만 명이 보고 반했습니다. 1984년에 한 예술가의 작품을 2,500만 명이 동시에 봤다는 기록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것이었어요. 작품은 한국에서도 상영됩니다. 한국 시간으로 1984년 1월 1일 정오에 KBS를 통해 생중계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백남준의 이름이 한국에 역수출되며 1984년 6월 22일, 백남준은 34년 만에 고국의 초대를 받아 귀국합니다.
Courtesy of Nam June Paik Art Center Ⓒ Estate of Peter Moore / VAGA, New York
18살에 한국을 떠나 일본, 독일, 미국을 떠돌던 사람이, 위성으로 전 세계를 연결하는 작품을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것도 34년 만에요. 자기가 만든 '연결의 기술'이, 정작 자기 자신을 고향과 다시 연결해준 셈입니다.
비디오 아트의 거장, 금의환향하다
백남준, 다다익선, 1988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또 1988년에는 88올림픽을 기념해 <다다익선>이라는 작품을 제작합니다. <다다익선>은 브라운관 티비를 높이 18.5미터로 높게 쌓아올린 작품이에요. 작품에 활용된 티비만 1003개나 되었죠. 1003개라는 숫자는 10월 3일, 개천절을 상징하는 숫자는 것입니다. 한국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한 장치에요.
그리고 이 작품이 국가적인 행사였던 88올림픽 시즌에 맞춰서 공개되면서 한국의 예술적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작품이 선보여지고 15년 뒤인 2003년, 문제가 발생합니다. 브라운관 티비가 하나둘씩 고장나기 시작했던 거죠. 아무래도 티비 1003대가 층층이 쌓여있으니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건데요. 이에 백남준 작가는 2003년부터 직접 모니터를 대대적으로 교체하기 시작합니다.
Courtesy of Nam June Paik Art Center Ⓒ Gianni Melotti
그러던 중 2006년, 백남준 작가가 세상을 떠나게 돼요. <다다익선>은 계속 망가졌습니다. 이윽고 작품을 어떻게 해야할 지 논의가 생기기 시작해요. 이 부품을 교체하는 게 맞냐, 아니면 작가가 세상을 떠났으니 그냥 두는게 맞냐가 팽팽히 대립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백남준 작가와 <다다익선>의 기술적 부분 협업을 하고 수리도 함께 했던 이정성 대표의 의견이 반영되기로 해요.
이정성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백 선생님은 늘 그 시대에 제일 좋고 적합한 모니터를 쓰면 된다고 했다. (...) 모니터는 작가가 편집한 비디오를 틀기 위한 장치다. 작가의 정신이 모니터에 있는 건 아니다.” 그렇게 2018년, <다다익선>은 작동을 전면 중단하고 4년간 복원 작업을 거쳐 2022년 대중에게 재공개됩니다. 1003대의 브라운관 TV 중 737대가 각지에서 수급한 부품으로 수리되었고, 266대의 TV는 평면 디스플레이, LCD 모니터로 교체되었어요. 이 일로 백남준 작가의 다른 브라운관 TV 작품도 수리와 교체가 진행되면서, 그의 예술은 오늘날의 관객에게까지 온전히 전달되고 있습니다.
백남준 작고 20주기, 전시들
백남준 아트센터 전경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을 맞이해, 이를 기억하며 서울과 경기에서 다양한 전시가 진행중입니다. 경기 용인에 있는 백남준 아트센터에서는 2개의 상설 전시를 통해 작가의 작품 선보이고 있고, 오는 7월 16일에 〈백남준의 행성> 특별 전시 진행 예정이에요.
그리고, 백남준 작가의 유해가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 있어요. 백남준 작가가 잠들어있는 봉은사 법왕루는 그의 어린시절 추억이 깃들어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는 작가의 사진과 그의 데드마스크가 함께 설치되어 있기도 하니, 그의 예술세계를 헤아려보며 방문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