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eorg Baselitz, Finger Painting-Nude, 1972 © Georg Baselitz.
1969년의 어느 날, 한 독일 화가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말고 캔버스를 위아래로 뒤집었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죽을 때까지 그림을 거꾸로 그렸어요.
지난 4월 30일 세상을 떠난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이야기입니다. 바젤리츠는 1938년 1월 23일, 독일 작센주의 작은 마을인 도이치바젤리츠에서 태어났습니다. 도이치바젤리츠는, 인구가 수백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어요. 당시 바젤리츠의 이름은 한스-게오르크 케른이었습니다. 훗날 화가로 활동할 때 자신의 이름을 태어난 지역명에서 따와 바젤리츠라 붙였죠. 그렇게 본인이 나고 자란 지역을 활동명으로 삼은 이유가 있었어요. 나고 자란 도이치바젤리츠의 모습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Georg Baselitz, The Falcon, 1971 © Georg Baselitz.
바젤리츠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전쟁을 겪었어요. 바젤리츠가 한 살이 되던 해 가을에 전쟁이 시작되어서, 일곱 살이 되던 해에는 베를린이 함락되고 제3 제국이 무너졌죠. 당시 바젤리츠가 살던 작센 주는 소련의 점령 지구가 되고, 곧이어 동독으로 귀속됩니다. 그렇다 보니, 어린 바젤리츠가 본 세상은 늘 파괴된 풍경들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바젤리츠는 꿈을 꾸었습니다. 바로, 미술에 대한 꿈이었죠.
그렇게 18살이 되던 해, 동베를린의 미술학교에 입학하는데요. 1950년대 동독은 소련의 모델을 본뜬 독재 체제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미술학교에서도 학생들의 창의력을 위한 수업보다는 사회주의적 메시지를 작품에 담게끔 교육했어요.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건, 국가에 대한 저항으로 여겨질 정도였죠. 그런데 바젤리츠는 좀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학기 만에 퇴학당해요. 퇴학 사유는 한 줄로 적혀있었습니다. ‘사회 정치적 미숙(gesellschaftspolitische Unreife)’.

Georg Baselitz, The Big Night Down the Drain, 1962-63 © Georg Baselitz.
바젤리츠가 추구하던 예술이 딱딱하고 경직된 동독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던 건데요. 이후 바젤리츠는 서독으로 넘어갑니다. 서독은 분위기가 달랐어요. 정치 경제적으로 빠르게 안정을 찾았고, 서구 대중문화도 유입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바젤리츠는 오히려 한물간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여겨져요.
당시 서독은 미국에서 건너온 추상표현주의, 그리고 이제 막 시작되고 있던 팝아트가 주목받던 타이밍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 바젤리츠가 추구하던 예술은 다소 한물간 것처럼 느껴졌죠. 바젤리츠는 동독에서는 허락받지 못하고, 서독에서는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어린 바젤리츠가 추구하던 예술

Georg Baselitz, The Painter in His Bed, 2022 © Georg Baselitz. Photo: Jochen Likkemann

Georg Baselitz, Bedroom, 1975 © Georg Baselitz.
당시 바젤리츠가 추구하던 예술은, 장르로 구분하자면 표현주의 예술이었습니다. 표현주의는 화가의 감정을 많이 표현하는 예술이에요. <절규>로 유명한 뭉크가 대표적인 표현주의 예술가이고, 반 고흐도 후기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모두에 해당하는 작가입니다. 이들 작품을 보면 풍경을 그릴 때에도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 같은 풍경이 아니라, 무언가 휘몰아치듯이, 두꺼운 붓질에 강렬한 색을 쓴걸 볼 수 있는데요. 당시 동독에서는 이런 표현주의 사조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엄격히 규제했어요. 일례로, 1937년에는 나치에 의해서 퇴폐미술전이 열렸습니다. 이때 전시에는 ‘사회적 분위기를 흐리는 퇴폐적 작품들’이 선별되었는데, 여기에 표현주의 작품들이 다수 있었어요. 그리고 전후에도 표현주의가 가진 진한 개성이 사회주의가 요구하는 집단성과는 충돌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 바젤리츠가 하고 싶었던 예술은 표현주의보다도 조금 더 마이너한 장르에 속해 있었습니다. 민속미술이나 아동미술, 혹은 정신병을 앓는 환자가 그린 그림 같은, 아마추어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투박한 특징이 두드러진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죠. 그렇다 보니 동독에서는 지나치게 개성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배척받고 퇴학까지 당했던 것이죠.
한편, 서독에서는 이제 ‘구상화는 한물갔다’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어요. 구상화란, 뭘 그린 건지 알아볼 수 있는 모든 그림을 의미합니다. 인물화도 구상화이고, 풍경화도 구상화, 정물화도 구상화죠. 그리고 이 시기엔 미국에서 추상화, 정확히는 추상표현주의 회화가 인기를 끌고 있다 보니, 약간 투박한 화풍이긴 하지만 구상화의 성격을 가진 바젤리츠의 그림은 한물간 것으로 치부되었습니다.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영웅들 연작, 1938, © Georg Baselitz 2016, 사진: Rheinisches Bildarchiv Köln, Schlier, Britta, 2008.
하지만 바젤리츠는 뚝심 있게 자신의 예술을 이어가요.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림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전시 중이던 작품이 압수당하기도 했죠. 그렇게 바젤리츠는 잠시 이탈리아 피렌체로 유학을 떠납니다. 이때 바젤리츠는 자신의 본명인 케른을 버리고, 본인이 태어난 지역명인 바젤리츠라는 활동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하기도 했어요.
바젤리츠라는 지역에서 화가 바젤리츠가 성장하던 당시에는,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바젤리츠는 피렌체에서 접한 르네상스의 대작들에 영감받아서,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들을 영웅처럼 웅장하게 그리기 시작해요. 그림들은 멋졌지만, 미술계에서는 평이 갈렸습니다. 이미 전쟁은 끝났고, 군인은 패잔병이고, 영웅 없는 시대에 영웅으로 그려진 패자들의 초상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바로 이 지점에 바젤리츠가 의도한 부분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작품은 직관적으로 와닿지는 못했어요. 그러던 중 바젤리츠의 작품이 명료해지는 계기가 생깁니다. 1969년, 바젤리츠가 31살이 되던 해였어요.
거꾸로 된 그림의 시작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작업실, 2019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gosian. Photo by Ealan Wingate.
당시 바젤리츠는 여느 때처럼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불현듯 캔버스를 위아래로 뒤집어요. 그리고 그 순간, 그림에 독일의 역사적 이야기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전까지는 본인이 구상화, 어떤 인물이나 풍경을 그리게 되면 사람들은 이 인물이 군인인지, 실향민인지 따져보고, 이 풍경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폈다고 해요. 그런데 그림을 거꾸로 뒤집는 순간, 역사적인 맥락은 사라지고 붓의 두께, 색의 느낌이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날부터 바젤리츠는 거꾸로 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요. 그렇게 본인 작품에 그 어떤 역사적, 정치적 맥락도 담아내지 않고, 본인이 추구하던 예술을 할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바젤리츠의 예술이 인정받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어요. 10년 정도가 걸렸습니다. 바젤리츠는 그 시간 동안, 본인 작품을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요. 우선, 거꾸로 된 그림을 1969년에 처음 그리고, 그해 가을에 바로 전시했습니다. 이때 전시한 갤러리는 이전에 바젤리츠가 ‘너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그림을 압수당했던 갤러리이기도 했는데요. 이번에는 압수까진 당하지 않았지만, 반응은 안 좋았습니다. 1960년대 말 미술계는 이제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행위예술 같은 장르들이 실험적인 작품을 내놓고 있던 타이밍이었어요. 모두다 비회화 작품들이었죠. 이 시기 미술계 내부적으로는 ‘회화는 끝났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베를린 CFA에서 열린 바젤리츠의 전시 “Hommage à Georg Baselitz” 전경 Photo: courtesy of CFA, Berlin.
그런데 이 타이밍에 독일 화가가, 거꾸로 된 회화를 내놓은 건 시의성에서 한참 벗어난 것처럼 여겨졌어요. 그렇다 보니 대다수 평론가의 반응은 안 좋았는데, 일부 소수 큐레이터가 바젤리츠의 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렇게 바젤리츠는 독일 안에서 꾸준히 활동을 해나가게 되었죠. 그리고 1980년, 기회가 찾아옵니다. 바젤리츠가 거꾸로 된 그림을 내놓은 지 11년 만에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대표로 작품을 선보이게 되었어요.

Georg Baselitz, Modell für eine Skulptur (Model for a Sculpture) , 1979 – 1980 © Museum Ludwig, Cologne
당시 바젤리츠가 선보인 건, 조각 작품이었습니다. 한 팔이 어색한 각도로 들려있는 인체 조각이었는데, 이 자세 때문에 나치식 경례가 아니냐는 논란이 생겨요. 그리고 바젤리츠의 예술관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조각이 가진 투박함, 바닥 부분이 정면으로 보이는 구도 등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 맥락으로 해석되는 걸 거부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집니다. 이렇게 비로소 바젤리츠의 예술관이 전해지기 시작해요.
그리고 이 시기, 다시 회화 작품에 주목하는 흐름도 생깁니다. 10년 넘게 ‘회화는 죽었다’고 평가받아 왔는데, 이때도 회화를 해오던 작가들은 계속 있었습니다. 바젤리츠도 그랬고요. 회화는 오랜 전통을 가진 장르였지만, 이 시기에서만큼은 마이너한 장르였어요. 그리고 미술에서 비주류는 주목받곤 합니다. 얼마 안 가, 자신만의 예술관을 가진 회화 작가들을 모아 런던의 로열 아카데미에서 <회화의 새로운 정신(A New Spirit in Painting)>이라는 전시가 열려요.

Georg Baselitz, Adieu, 1982 © Georg Baselitz
당시 이 전시에는 바젤리츠를 비롯해 프랜시스 베이컨 같은, 회화로 잘 알려진 작가들이 다수 참여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겹치면서 1980년대 중반부터 바젤리츠가 비로소 평단과 시장의 인정을 받게 돼요. 그리고 1995년에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게 되는데요. 이 전시는 이후 미국을 순회하게 되었고, 바젤리츠는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바젤리츠가 미술계의 인정을 받기까지 10년 정도가 걸렸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미술계는 바젤리츠가 인정받기까지 10년이 걸린 게 아니라, 시대가 바젤리츠의 어법을 따라잡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평가하기도 해요.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사진 © The Art Newspaper
바젤리츠는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전에도, 받은 후에도 거꾸로 그림을 그리며 붓질과 색감이 잘 드러나는 예술관을 묵묵히 추구해 왔습니다. 그가 평생 거꾸로 그린 이유는 세상을 전복하려는 도발이 아니라, 그림이 역사로 환원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였죠.
지난 4월 작가가 세상을 떠난 가운데, 그의 예술은 계속 동시대 관객에게 전해지고 있어요. 현재 진행 중인 베니스 비엔날레에는 그의 신작이 선보여지고, 오는 8월 우리나라의 세화미술관에서 20년 만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릴 예정이죠. 이번 기회에 그의 예술을 다시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Georg Baselitz, Finger Painting-Nude, 1972 © Georg Baselitz.
1969년의 어느 날, 한 독일 화가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말고 캔버스를 위아래로 뒤집었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죽을 때까지 그림을 거꾸로 그렸어요.
지난 4월 30일 세상을 떠난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이야기입니다. 바젤리츠는 1938년 1월 23일, 독일 작센주의 작은 마을인 도이치바젤리츠에서 태어났습니다. 도이치바젤리츠는, 인구가 수백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어요. 당시 바젤리츠의 이름은 한스-게오르크 케른이었습니다. 훗날 화가로 활동할 때 자신의 이름을 태어난 지역명에서 따와 바젤리츠라 붙였죠. 그렇게 본인이 나고 자란 지역을 활동명으로 삼은 이유가 있었어요. 나고 자란 도이치바젤리츠의 모습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Georg Baselitz, The Falcon, 1971 © Georg Baselitz.
바젤리츠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전쟁을 겪었어요. 바젤리츠가 한 살이 되던 해 가을에 전쟁이 시작되어서, 일곱 살이 되던 해에는 베를린이 함락되고 제3 제국이 무너졌죠. 당시 바젤리츠가 살던 작센 주는 소련의 점령 지구가 되고, 곧이어 동독으로 귀속됩니다. 그렇다 보니, 어린 바젤리츠가 본 세상은 늘 파괴된 풍경들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바젤리츠는 꿈을 꾸었습니다. 바로, 미술에 대한 꿈이었죠.
그렇게 18살이 되던 해, 동베를린의 미술학교에 입학하는데요. 1950년대 동독은 소련의 모델을 본뜬 독재 체제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미술학교에서도 학생들의 창의력을 위한 수업보다는 사회주의적 메시지를 작품에 담게끔 교육했어요.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건, 국가에 대한 저항으로 여겨질 정도였죠. 그런데 바젤리츠는 좀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학기 만에 퇴학당해요. 퇴학 사유는 한 줄로 적혀있었습니다. ‘사회 정치적 미숙(gesellschaftspolitische Unreife)’.
Georg Baselitz, The Big Night Down the Drain, 1962-63 © Georg Baselitz.
바젤리츠가 추구하던 예술이 딱딱하고 경직된 동독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던 건데요. 이후 바젤리츠는 서독으로 넘어갑니다. 서독은 분위기가 달랐어요. 정치 경제적으로 빠르게 안정을 찾았고, 서구 대중문화도 유입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바젤리츠는 오히려 한물간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여겨져요.
당시 서독은 미국에서 건너온 추상표현주의, 그리고 이제 막 시작되고 있던 팝아트가 주목받던 타이밍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 바젤리츠가 추구하던 예술은 다소 한물간 것처럼 느껴졌죠. 바젤리츠는 동독에서는 허락받지 못하고, 서독에서는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어린 바젤리츠가 추구하던 예술
Georg Baselitz, The Painter in His Bed, 2022 © Georg Baselitz. Photo: Jochen Likkemann
Georg Baselitz, Bedroom, 1975 © Georg Baselitz.
당시 바젤리츠가 추구하던 예술은, 장르로 구분하자면 표현주의 예술이었습니다. 표현주의는 화가의 감정을 많이 표현하는 예술이에요. <절규>로 유명한 뭉크가 대표적인 표현주의 예술가이고, 반 고흐도 후기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모두에 해당하는 작가입니다. 이들 작품을 보면 풍경을 그릴 때에도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 같은 풍경이 아니라, 무언가 휘몰아치듯이, 두꺼운 붓질에 강렬한 색을 쓴걸 볼 수 있는데요. 당시 동독에서는 이런 표현주의 사조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엄격히 규제했어요. 일례로, 1937년에는 나치에 의해서 퇴폐미술전이 열렸습니다. 이때 전시에는 ‘사회적 분위기를 흐리는 퇴폐적 작품들’이 선별되었는데, 여기에 표현주의 작품들이 다수 있었어요. 그리고 전후에도 표현주의가 가진 진한 개성이 사회주의가 요구하는 집단성과는 충돌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 바젤리츠가 하고 싶었던 예술은 표현주의보다도 조금 더 마이너한 장르에 속해 있었습니다. 민속미술이나 아동미술, 혹은 정신병을 앓는 환자가 그린 그림 같은, 아마추어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투박한 특징이 두드러진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죠. 그렇다 보니 동독에서는 지나치게 개성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배척받고 퇴학까지 당했던 것이죠.
한편, 서독에서는 이제 ‘구상화는 한물갔다’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어요. 구상화란, 뭘 그린 건지 알아볼 수 있는 모든 그림을 의미합니다. 인물화도 구상화이고, 풍경화도 구상화, 정물화도 구상화죠. 그리고 이 시기엔 미국에서 추상화, 정확히는 추상표현주의 회화가 인기를 끌고 있다 보니, 약간 투박한 화풍이긴 하지만 구상화의 성격을 가진 바젤리츠의 그림은 한물간 것으로 치부되었습니다.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영웅들 연작, 1938, © Georg Baselitz 2016, 사진: Rheinisches Bildarchiv Köln, Schlier, Britta, 2008.
하지만 바젤리츠는 뚝심 있게 자신의 예술을 이어가요.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림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전시 중이던 작품이 압수당하기도 했죠. 그렇게 바젤리츠는 잠시 이탈리아 피렌체로 유학을 떠납니다. 이때 바젤리츠는 자신의 본명인 케른을 버리고, 본인이 태어난 지역명인 바젤리츠라는 활동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하기도 했어요.
바젤리츠라는 지역에서 화가 바젤리츠가 성장하던 당시에는,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바젤리츠는 피렌체에서 접한 르네상스의 대작들에 영감받아서,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들을 영웅처럼 웅장하게 그리기 시작해요. 그림들은 멋졌지만, 미술계에서는 평이 갈렸습니다. 이미 전쟁은 끝났고, 군인은 패잔병이고, 영웅 없는 시대에 영웅으로 그려진 패자들의 초상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바로 이 지점에 바젤리츠가 의도한 부분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작품은 직관적으로 와닿지는 못했어요. 그러던 중 바젤리츠의 작품이 명료해지는 계기가 생깁니다. 1969년, 바젤리츠가 31살이 되던 해였어요.
거꾸로 된 그림의 시작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작업실, 2019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gosian. Photo by Ealan Wingate.
당시 바젤리츠는 여느 때처럼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불현듯 캔버스를 위아래로 뒤집어요. 그리고 그 순간, 그림에 독일의 역사적 이야기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전까지는 본인이 구상화, 어떤 인물이나 풍경을 그리게 되면 사람들은 이 인물이 군인인지, 실향민인지 따져보고, 이 풍경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폈다고 해요. 그런데 그림을 거꾸로 뒤집는 순간, 역사적인 맥락은 사라지고 붓의 두께, 색의 느낌이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날부터 바젤리츠는 거꾸로 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요. 그렇게 본인 작품에 그 어떤 역사적, 정치적 맥락도 담아내지 않고, 본인이 추구하던 예술을 할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바젤리츠의 예술이 인정받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어요. 10년 정도가 걸렸습니다. 바젤리츠는 그 시간 동안, 본인 작품을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요. 우선, 거꾸로 된 그림을 1969년에 처음 그리고, 그해 가을에 바로 전시했습니다. 이때 전시한 갤러리는 이전에 바젤리츠가 ‘너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그림을 압수당했던 갤러리이기도 했는데요. 이번에는 압수까진 당하지 않았지만, 반응은 안 좋았습니다. 1960년대 말 미술계는 이제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행위예술 같은 장르들이 실험적인 작품을 내놓고 있던 타이밍이었어요. 모두다 비회화 작품들이었죠. 이 시기 미술계 내부적으로는 ‘회화는 끝났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베를린 CFA에서 열린 바젤리츠의 전시 “Hommage à Georg Baselitz” 전경 Photo: courtesy of CFA, Berlin.
그런데 이 타이밍에 독일 화가가, 거꾸로 된 회화를 내놓은 건 시의성에서 한참 벗어난 것처럼 여겨졌어요. 그렇다 보니 대다수 평론가의 반응은 안 좋았는데, 일부 소수 큐레이터가 바젤리츠의 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렇게 바젤리츠는 독일 안에서 꾸준히 활동을 해나가게 되었죠. 그리고 1980년, 기회가 찾아옵니다. 바젤리츠가 거꾸로 된 그림을 내놓은 지 11년 만에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대표로 작품을 선보이게 되었어요.
Georg Baselitz, Modell für eine Skulptur (Model for a Sculpture) , 1979 – 1980 © Museum Ludwig, Cologne
당시 바젤리츠가 선보인 건, 조각 작품이었습니다. 한 팔이 어색한 각도로 들려있는 인체 조각이었는데, 이 자세 때문에 나치식 경례가 아니냐는 논란이 생겨요. 그리고 바젤리츠의 예술관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조각이 가진 투박함, 바닥 부분이 정면으로 보이는 구도 등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 맥락으로 해석되는 걸 거부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집니다. 이렇게 비로소 바젤리츠의 예술관이 전해지기 시작해요.
그리고 이 시기, 다시 회화 작품에 주목하는 흐름도 생깁니다. 10년 넘게 ‘회화는 죽었다’고 평가받아 왔는데, 이때도 회화를 해오던 작가들은 계속 있었습니다. 바젤리츠도 그랬고요. 회화는 오랜 전통을 가진 장르였지만, 이 시기에서만큼은 마이너한 장르였어요. 그리고 미술에서 비주류는 주목받곤 합니다. 얼마 안 가, 자신만의 예술관을 가진 회화 작가들을 모아 런던의 로열 아카데미에서 <회화의 새로운 정신(A New Spirit in Painting)>이라는 전시가 열려요.
Georg Baselitz, Adieu, 1982 © Georg Baselitz
당시 이 전시에는 바젤리츠를 비롯해 프랜시스 베이컨 같은, 회화로 잘 알려진 작가들이 다수 참여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겹치면서 1980년대 중반부터 바젤리츠가 비로소 평단과 시장의 인정을 받게 돼요. 그리고 1995년에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게 되는데요. 이 전시는 이후 미국을 순회하게 되었고, 바젤리츠는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바젤리츠가 미술계의 인정을 받기까지 10년 정도가 걸렸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미술계는 바젤리츠가 인정받기까지 10년이 걸린 게 아니라, 시대가 바젤리츠의 어법을 따라잡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평가하기도 해요.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사진 © The Art Newspaper
바젤리츠는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전에도, 받은 후에도 거꾸로 그림을 그리며 붓질과 색감이 잘 드러나는 예술관을 묵묵히 추구해 왔습니다. 그가 평생 거꾸로 그린 이유는 세상을 전복하려는 도발이 아니라, 그림이 역사로 환원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였죠.
지난 4월 작가가 세상을 떠난 가운데, 그의 예술은 계속 동시대 관객에게 전해지고 있어요. 현재 진행 중인 베니스 비엔날레에는 그의 신작이 선보여지고, 오는 8월 우리나라의 세화미술관에서 20년 만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릴 예정이죠. 이번 기회에 그의 예술을 다시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