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chelangelo, The Creation of Adam, 1511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에는 <천지창조>가 담긴 천장화가 있고, 미술사에 많은 변화를 불러온 작품인 <최후의 심판> 벽화가 있습니다. 두 작품 다 하이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직접 제작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인데요.
얼마 전,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 <최후의 심판>이 30년 만에 복원 작업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방문객으로 인해 작품에 쌓인 미세한 먼지와 염분을 제거하는, 주기적으로 진행되는 복원 작업이죠.

이번에 복원 작업에 들어가는 <최후의 심판(Day of Judgement)>, 1550
이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선, 벽화는 다른 회화 작품처럼 액자로 보호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는 매년 60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방문합니다. 이렇게 많은 관객이 흘린 땀 같은 것들이 공기 중의 먼지와 흡착해 서서히 작품에 미세한 층을 만드는데요. 이는 점점 작품을 흐릿해 보이게 만듭니다. 그래서, 30년 정도의 세월 동안 작품의 유지보수 작업을 위한 복원 작업을 진행하곤 하죠.
이 작업은 26명의 전문가가 동시에 진행해서, 부활절 전인 4월 초까지 빠르게 마무리 지을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우선, 그때까지 방문하게 될 관객은 비계와 인부들에 둘러싸인 작품을 봐야 합니다. 그럼에도, 명작의 보존 장면을 볼 수 있는 게 수십 년마다 한 번밖에 없는 일이니만큼, 이 또한 특별한 경험이 될 것으로 보여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벽화를 가질 수 있던 이유

Botticelli, Trials of Moses, 1481-82
시스티나 성당은 1473년 처음 지어졌어요. 그리고 시스티나는 시작부터 비범했습니다. 교황권의 권위와 위신을 과시하는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부로 지어지게 되었거든요. 덕분에 성당엔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같은 최정상급 초기 르네상스 화가들의 벽화를 새겼습니다. 이들이 남긴 벽화는 지금도 성당 양쪽 벽면에 새겨져 있어요.
이후 1492년에는 시스티나 성당이 콘클라베가 열리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콘클라베는 교황을 선출하는 비밀회의를 의미해요. 추기경 선거인단 중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은 사람이 교황으로 선출되는데, 그만큼의 표를 얻은 사람이 없으면 다시 투표를 진행합니다. 완전한 비밀 투표이기 때문에, 투표 결과도 연기를 통해 알려요. 선출이 안 되었으면 검은 연기를 피우고, 선출되었으면 흰 연기를 피웁니다.

영화 <콘클라베>에서는 시스티나 성당에서 진행되는 콘클라베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렇게 콘클라베가 시스티나 성당에서 열리기 시작한 건, 19세기부터가 본격적이었다고 알려져 있어요. 르네상스 때까지는 콘클라베가 열리기도 했지만, 선거인단 추기경의 숙소나 집결 공간으로 쓰였죠. 그렇다면 조금 평범한 공간이었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목적으로 지어진 교황의 궁정 안 공간이었기 때문에, 극소수의 인원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교황청 관료, 바티칸 거주 성직자, 공무원 정도만이 이용할 수 있었고 그 수는 약 200명 정도로 매우 적었죠.
시스티나 성당,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품다

천장화가 그려지기 전인 1480년대 서쪽 벽 예배당의 모습을 복원한 모습
시스티나는 이처럼 특별한 의미를 담아 특별하게 지어지고 사용된 공간이었지만, 완공 35년이 지난 1508년, 천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원래 성당 천장에는 별무늬 장식이 있었어요. 당시 성당을 그린 그림을 보면, 생각보다 단순한 형태로 그려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당시 교황이던 율리오 2세는 천장이 훼손된 김에, 아예 새로운 천장화를 제작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조각가로 손꼽히던 미켈란젤로에게 일을 맡겨요.
조각가인 미켈란젤로에게 천장화를 맡긴 건 지극히 감정적인 이유에서 비롯됐습니다. 사건은 미켈란젤로가 30살이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요. 당시 미켈란젤로는 조각가로서 엄청난 명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4살에 선보인 <피에타>고, 29살에 선보인 <다비드> 덕분이었는데요. 율리오 2세는 서른 살의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영묘 작업을 맡기기로 합니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40점의 조각이 포함된 방대한 규모의 무덤 설계안을 제출해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1504) 전시 전경 © The Art Newspaper
이 영묘 작업은 서른 살 미켈란젤로의 유작이 될 수도 있는 의뢰였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전작인 <다비드>는 미켈란젤로가 ‘3년간 노예처럼 몰두해 제작했다’라고 말했는데요. 40점이면, 평생을 노예처럼 몰두해도 다 못 끝낼 분량이었어요. 그럼에도, 미켈란젤로와 교황 모두 이 작업을 해 보기로 합니다. 그렇게 미켈란젤로는 영묘에 쓸 대리석을 찾으러 열심히 다녔어요. 그리고 8개월 만에 영묘에 쓸 대리석을 구한 뒤 돌아온 바티칸에서, 율리오 2세가 갑자기 영묘 작업을 취소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건, 미켈란젤로를 견제하던 동료 예술가들이 꾸민 일이었어요. 율리오 2세의 참모로 있던 그들은 미켈란젤로가 계속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영묘 작업을 중단하게끔 계략을 꾸밉니다. 귀가 얇은 데다가 감정적이던 교황은 이 계략에 쉽게 넘어가 버렸고요. 소식을 들은 미켈란젤로는 분노에 차서 로마를 떠나버려요. 그리고 다시 돌아가길 거부합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떠돌았는데, 사람들은 교황의 뜻을 거스른 예술가를 데리고 있기를 꺼렸어요.
이윽고 많은 이들의 노력 끝에 극적으로 교황과 미켈란젤로의 만남이 다시 이뤄집니다. 그리고 교황은 새로운 소식을 전해요. 영묘 작업은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취소하는 것을 유지하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작업을 의뢰하겠다는 것이었죠. 이건 언뜻 교황의 자비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이는 벌이나 다름없었습니다.

Michelangelo, Pietà, 1498-1499
미켈란젤로는 과거부터 회화를 경멸해 왔어요. ‘원시인이 동굴 벽화를 그리기 이전에, 인간은 돌에 무늬를 새겼고, 이것이 조각의 기원’이라며 조각이 가장 뛰어난 예술이라고 주장했죠. 그리고, 그림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을 그린 것이라며 깎아내립니다. 종종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자신의 본업은 언제나 조각이라고 여겼어요.
이런 미켈란젤로의 면모를 교황도, 교황의 참모로 있던 화가들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들은 덫을 놓았습니다. 이 의뢰를 거절하면 교황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게 될 테고, 의뢰를 받아들이면 졸작을 내놓을 것이 뻔한 상황을 만든 거죠. 사실 미켈란젤로에게는 선택지가 없다시피 했습니다. 이미 교황의 심기를 거슬렀기에, 천장화를 그리기로 해요.
피, 땀, 분노로 만든 4년 간의 결실

시스티나 성당화를 그리는 모습을 그린 미켈란젤로의 그림
미켈란젤로는 악으로, 깡으로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오롯이 혼자 천장화를 제작합니다. 교황이 배려 차원에서 제공한 프레스코화 전문가의 도움도 전혀 받질 않았죠. 아주 제한적인 일만 하는 단 몇 명만의 조수들만 데리고 천장화 작업을 해냈습니다. 이 시기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시를 쓰기도 했는데요. 이 시의 내용을 보면, ‘내 수염은 하늘을 향해 자라고, 목덜미는 척추에 움푹 붙었고, 내 모습은 기괴하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비참한 처지에 놓였고, 그림은 내 수치다’라고까지 이야기하죠.
교황도 미켈란젤로에게 조금 미안하다고 느꼈는지, 작품 제작의 전권을 허용합니다. 교황이 의뢰한 작품 중, 예술가가 온전히 자유를 얻은 사례는 시스티나 천장화가 최초라고 알려져 있어요.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그 누구도 진행 과정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교황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고요.


시스티나 천장화의 모습과 작품이 담은 성경 이야기

Raphael, 교황 율리오 2세의 초상, 1511
그런데 당시 교황은 60대 후반으로 꽤 고령이었습니다. 천장화가 완성되기 전에 자기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 때문에, 미켈란젤로를 재촉하거나 몰래 작품을 보려고 하기도 했는데요. 다급한 교황과 지친 예술가의 감정싸움은 극에 달하며, 미켈란젤로의 말대답, 그리고 교황의 폭행으로 번지기도 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1512년 10월, 천장화가 마침내 완성됩니다.
천장화는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로 시작해, 메시아가 도래하는 시점까지의 과정을 순서대로 크게 아홉 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미켈란젤로는 그 주변부도 성경의 내용을 담은 그림으로 채우며, 웅장한 모습을 연출했죠. 교황 역시 천장화를 보고 만족했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작품이 완성되고 4개월 뒤 세상을 떠났어요. 학자들은 천장화로 벌을 준 교황이, 몇 개월 밖에 천장화를 누리지 못한 벌을 받은 것이라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24년 뒤 채워진 시스티나의 중심, 최후의 심판

Michelangelo, 최후의 심판(Day of Judgement), 1550
미켈란젤로는 천장화 작업을 하며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로부터 24년이라는 시간이 더 지난 뒤, 당시 교황이던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를 교황 전속 최고 건축가이자 화가, 그리고 조각가로 임명하는 교서를 내려요. 그렇게 미켈란젤로는 60대의 나이에, 또 한 번 교황의 의뢰를 받게 됩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조금은 잔인하게도, 또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 작업을 맡겨요. 천장화보다는 훨씬 난도가 낮았지만, 미켈란젤로는 고령의 화가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작업 속도가 조금 느렸어요. 천장화는 단 4년 만에 완성했지만, 벽화 작업은 5~6년이나 걸렸죠. 당시 미켈란젤로는 비계에서 떨어지며 다리를 심하게 다치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작업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렇게 1541년, 세로 14미터, 가로 12미터의 대형 벽화가 공개됩니다. 작품은 제목처럼, 성경 속 최후의 심판 순간을 담고 있어요. 그림 정중앙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옥좌에 앉아 심판을 내리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요. 이 모습이 당시 성직자들에게는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다른 종교화처럼 수염이 있지도 않고, 젊은 남자로 묘사된 데다가, 맨살이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시스티나 성당 벽화 복원 작업 현장의 모습 © The Catholic Register
작품을 본 교황은 그림이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며, 옷을 덧그릴 것을 명하기도 했는데요. 미켈란젤로는 명령에 이렇게 전해달라 요청합니다. “교황 성하께 이는 사소한 일이며 쉽게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전하시오. 성하께서는 오직 세상을 바로 잡으시면 되오. 그림을 바로 잡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니”
그렇게 미켈란젤로는 죽을 때까지 그림을 수정하지 않았어요. 결국,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가 옷을 덧그리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죠.
최후의 심판, 작품이 남긴 영향

시스티나 천장화와 벽화의 모습, 사진: Antoine Taveneaux
작품을 보고 놀란 건 성직자뿐만이 아니었어요. 당대 화가들 역시, 그림을 보고 놀랐습니다. 대신, 부정적 방향이 아닌 긍정적 방향의 반응이었어요. 벽화가 완성된 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화가가 몰려들어 그림의 여러 부분을 베껴갑니다. 당대 화가들은 작품 속 인물의 근육 묘사나 몸짓 등이 전에 볼 수 없던 역동성을 담아낸 새로운 시도라는 점을 높게 샀습니다. 이 시기 르네상스 화가들의 전기를 쓴 조르주 바사리는 “이 천상의 작품 앞에 서면, 감각이 마비되며 이전의 작품들이 어떠했는지, 이후에 만들어질 작품들이 어떠할지를 자문할 수 있을 뿐”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죠.
이후 미켈란젤로가 시도한 과감하고 역동적인 묘사는 바로크 회화의 탄생에 영향을 줍니다. 바로크 회화는 종교 개혁 이후, 구교와 신교로 나뉜 상황에서 구교가 신교에 맞서 신도를 모으고 그들의 신앙심을 고취할 목적으로 극적인 요소가 강조된 그림을 주문하며 발전한 장르예요.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을 통해 보여준 역동적이고 극적인 요소는 이 장르의 탄생에 많은 영감이 되었다고 평가받죠.

복원 작업이 진행된 후 천장화의 모습
또, 예술가가 교황이라는 절대 권력의 명령에 저항해, 작품을 죽을 때까지 수정하지 않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밀고 나간 최초의 시도라는 점은 예술가의 개성과 관점이 강조된 이후 미술사적 경향의 시작점이라고도 평가받습니다.
이처럼 <최후의 심판>은 여러 층위에서 오늘날의 미술사에까지 많은 영향을 남긴 작품입니다. 이런 작품이 더 오래 보존되기 위해 복원 작업에 들어간다고 하니, 추후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생긴다면 이 이야기를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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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angelo, The Creation of Adam, 1511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에는 <천지창조>가 담긴 천장화가 있고, 미술사에 많은 변화를 불러온 작품인 <최후의 심판> 벽화가 있습니다. 두 작품 다 하이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직접 제작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인데요.
얼마 전,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 <최후의 심판>이 30년 만에 복원 작업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방문객으로 인해 작품에 쌓인 미세한 먼지와 염분을 제거하는, 주기적으로 진행되는 복원 작업이죠.
이번에 복원 작업에 들어가는 <최후의 심판(Day of Judgement)>, 1550
이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선, 벽화는 다른 회화 작품처럼 액자로 보호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는 매년 60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방문합니다. 이렇게 많은 관객이 흘린 땀 같은 것들이 공기 중의 먼지와 흡착해 서서히 작품에 미세한 층을 만드는데요. 이는 점점 작품을 흐릿해 보이게 만듭니다. 그래서, 30년 정도의 세월 동안 작품의 유지보수 작업을 위한 복원 작업을 진행하곤 하죠.
이 작업은 26명의 전문가가 동시에 진행해서, 부활절 전인 4월 초까지 빠르게 마무리 지을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우선, 그때까지 방문하게 될 관객은 비계와 인부들에 둘러싸인 작품을 봐야 합니다. 그럼에도, 명작의 보존 장면을 볼 수 있는 게 수십 년마다 한 번밖에 없는 일이니만큼, 이 또한 특별한 경험이 될 것으로 보여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벽화를 가질 수 있던 이유
Botticelli, Trials of Moses, 1481-82
시스티나 성당은 1473년 처음 지어졌어요. 그리고 시스티나는 시작부터 비범했습니다. 교황권의 권위와 위신을 과시하는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부로 지어지게 되었거든요. 덕분에 성당엔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같은 최정상급 초기 르네상스 화가들의 벽화를 새겼습니다. 이들이 남긴 벽화는 지금도 성당 양쪽 벽면에 새겨져 있어요.
이후 1492년에는 시스티나 성당이 콘클라베가 열리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콘클라베는 교황을 선출하는 비밀회의를 의미해요. 추기경 선거인단 중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은 사람이 교황으로 선출되는데, 그만큼의 표를 얻은 사람이 없으면 다시 투표를 진행합니다. 완전한 비밀 투표이기 때문에, 투표 결과도 연기를 통해 알려요. 선출이 안 되었으면 검은 연기를 피우고, 선출되었으면 흰 연기를 피웁니다.
영화 <콘클라베>에서는 시스티나 성당에서 진행되는 콘클라베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렇게 콘클라베가 시스티나 성당에서 열리기 시작한 건, 19세기부터가 본격적이었다고 알려져 있어요. 르네상스 때까지는 콘클라베가 열리기도 했지만, 선거인단 추기경의 숙소나 집결 공간으로 쓰였죠. 그렇다면 조금 평범한 공간이었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목적으로 지어진 교황의 궁정 안 공간이었기 때문에, 극소수의 인원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교황청 관료, 바티칸 거주 성직자, 공무원 정도만이 이용할 수 있었고 그 수는 약 200명 정도로 매우 적었죠.
시스티나 성당,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품다
천장화가 그려지기 전인 1480년대 서쪽 벽 예배당의 모습을 복원한 모습
시스티나는 이처럼 특별한 의미를 담아 특별하게 지어지고 사용된 공간이었지만, 완공 35년이 지난 1508년, 천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원래 성당 천장에는 별무늬 장식이 있었어요. 당시 성당을 그린 그림을 보면, 생각보다 단순한 형태로 그려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당시 교황이던 율리오 2세는 천장이 훼손된 김에, 아예 새로운 천장화를 제작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조각가로 손꼽히던 미켈란젤로에게 일을 맡겨요.
조각가인 미켈란젤로에게 천장화를 맡긴 건 지극히 감정적인 이유에서 비롯됐습니다. 사건은 미켈란젤로가 30살이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요. 당시 미켈란젤로는 조각가로서 엄청난 명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4살에 선보인 <피에타>고, 29살에 선보인 <다비드> 덕분이었는데요. 율리오 2세는 서른 살의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영묘 작업을 맡기기로 합니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40점의 조각이 포함된 방대한 규모의 무덤 설계안을 제출해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1504) 전시 전경 © The Art Newspaper
이 영묘 작업은 서른 살 미켈란젤로의 유작이 될 수도 있는 의뢰였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전작인 <다비드>는 미켈란젤로가 ‘3년간 노예처럼 몰두해 제작했다’라고 말했는데요. 40점이면, 평생을 노예처럼 몰두해도 다 못 끝낼 분량이었어요. 그럼에도, 미켈란젤로와 교황 모두 이 작업을 해 보기로 합니다. 그렇게 미켈란젤로는 영묘에 쓸 대리석을 찾으러 열심히 다녔어요. 그리고 8개월 만에 영묘에 쓸 대리석을 구한 뒤 돌아온 바티칸에서, 율리오 2세가 갑자기 영묘 작업을 취소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건, 미켈란젤로를 견제하던 동료 예술가들이 꾸민 일이었어요. 율리오 2세의 참모로 있던 그들은 미켈란젤로가 계속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영묘 작업을 중단하게끔 계략을 꾸밉니다. 귀가 얇은 데다가 감정적이던 교황은 이 계략에 쉽게 넘어가 버렸고요. 소식을 들은 미켈란젤로는 분노에 차서 로마를 떠나버려요. 그리고 다시 돌아가길 거부합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떠돌았는데, 사람들은 교황의 뜻을 거스른 예술가를 데리고 있기를 꺼렸어요.
이윽고 많은 이들의 노력 끝에 극적으로 교황과 미켈란젤로의 만남이 다시 이뤄집니다. 그리고 교황은 새로운 소식을 전해요. 영묘 작업은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취소하는 것을 유지하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작업을 의뢰하겠다는 것이었죠. 이건 언뜻 교황의 자비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이는 벌이나 다름없었습니다.
Michelangelo, Pietà, 1498-1499
미켈란젤로는 과거부터 회화를 경멸해 왔어요. ‘원시인이 동굴 벽화를 그리기 이전에, 인간은 돌에 무늬를 새겼고, 이것이 조각의 기원’이라며 조각이 가장 뛰어난 예술이라고 주장했죠. 그리고, 그림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을 그린 것이라며 깎아내립니다. 종종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자신의 본업은 언제나 조각이라고 여겼어요.
이런 미켈란젤로의 면모를 교황도, 교황의 참모로 있던 화가들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들은 덫을 놓았습니다. 이 의뢰를 거절하면 교황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게 될 테고, 의뢰를 받아들이면 졸작을 내놓을 것이 뻔한 상황을 만든 거죠. 사실 미켈란젤로에게는 선택지가 없다시피 했습니다. 이미 교황의 심기를 거슬렀기에, 천장화를 그리기로 해요.
피, 땀, 분노로 만든 4년 간의 결실
시스티나 성당화를 그리는 모습을 그린 미켈란젤로의 그림
미켈란젤로는 악으로, 깡으로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오롯이 혼자 천장화를 제작합니다. 교황이 배려 차원에서 제공한 프레스코화 전문가의 도움도 전혀 받질 않았죠. 아주 제한적인 일만 하는 단 몇 명만의 조수들만 데리고 천장화 작업을 해냈습니다. 이 시기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시를 쓰기도 했는데요. 이 시의 내용을 보면, ‘내 수염은 하늘을 향해 자라고, 목덜미는 척추에 움푹 붙었고, 내 모습은 기괴하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비참한 처지에 놓였고, 그림은 내 수치다’라고까지 이야기하죠.
교황도 미켈란젤로에게 조금 미안하다고 느꼈는지, 작품 제작의 전권을 허용합니다. 교황이 의뢰한 작품 중, 예술가가 온전히 자유를 얻은 사례는 시스티나 천장화가 최초라고 알려져 있어요.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그 누구도 진행 과정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교황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고요.
시스티나 천장화의 모습과 작품이 담은 성경 이야기
Raphael, 교황 율리오 2세의 초상, 1511
그런데 당시 교황은 60대 후반으로 꽤 고령이었습니다. 천장화가 완성되기 전에 자기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 때문에, 미켈란젤로를 재촉하거나 몰래 작품을 보려고 하기도 했는데요. 다급한 교황과 지친 예술가의 감정싸움은 극에 달하며, 미켈란젤로의 말대답, 그리고 교황의 폭행으로 번지기도 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1512년 10월, 천장화가 마침내 완성됩니다.
천장화는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로 시작해, 메시아가 도래하는 시점까지의 과정을 순서대로 크게 아홉 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미켈란젤로는 그 주변부도 성경의 내용을 담은 그림으로 채우며, 웅장한 모습을 연출했죠. 교황 역시 천장화를 보고 만족했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작품이 완성되고 4개월 뒤 세상을 떠났어요. 학자들은 천장화로 벌을 준 교황이, 몇 개월 밖에 천장화를 누리지 못한 벌을 받은 것이라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24년 뒤 채워진 시스티나의 중심, 최후의 심판
Michelangelo, 최후의 심판(Day of Judgement), 1550
미켈란젤로는 천장화 작업을 하며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로부터 24년이라는 시간이 더 지난 뒤, 당시 교황이던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를 교황 전속 최고 건축가이자 화가, 그리고 조각가로 임명하는 교서를 내려요. 그렇게 미켈란젤로는 60대의 나이에, 또 한 번 교황의 의뢰를 받게 됩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조금은 잔인하게도, 또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 작업을 맡겨요. 천장화보다는 훨씬 난도가 낮았지만, 미켈란젤로는 고령의 화가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작업 속도가 조금 느렸어요. 천장화는 단 4년 만에 완성했지만, 벽화 작업은 5~6년이나 걸렸죠. 당시 미켈란젤로는 비계에서 떨어지며 다리를 심하게 다치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작업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렇게 1541년, 세로 14미터, 가로 12미터의 대형 벽화가 공개됩니다. 작품은 제목처럼, 성경 속 최후의 심판 순간을 담고 있어요. 그림 정중앙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옥좌에 앉아 심판을 내리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요. 이 모습이 당시 성직자들에게는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다른 종교화처럼 수염이 있지도 않고, 젊은 남자로 묘사된 데다가, 맨살이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시스티나 성당 벽화 복원 작업 현장의 모습 © The Catholic Register
작품을 본 교황은 그림이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며, 옷을 덧그릴 것을 명하기도 했는데요. 미켈란젤로는 명령에 이렇게 전해달라 요청합니다. “교황 성하께 이는 사소한 일이며 쉽게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전하시오. 성하께서는 오직 세상을 바로 잡으시면 되오. 그림을 바로 잡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니”
그렇게 미켈란젤로는 죽을 때까지 그림을 수정하지 않았어요. 결국,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가 옷을 덧그리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죠.
최후의 심판, 작품이 남긴 영향
시스티나 천장화와 벽화의 모습, 사진: Antoine Taveneaux
작품을 보고 놀란 건 성직자뿐만이 아니었어요. 당대 화가들 역시, 그림을 보고 놀랐습니다. 대신, 부정적 방향이 아닌 긍정적 방향의 반응이었어요. 벽화가 완성된 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화가가 몰려들어 그림의 여러 부분을 베껴갑니다. 당대 화가들은 작품 속 인물의 근육 묘사나 몸짓 등이 전에 볼 수 없던 역동성을 담아낸 새로운 시도라는 점을 높게 샀습니다. 이 시기 르네상스 화가들의 전기를 쓴 조르주 바사리는 “이 천상의 작품 앞에 서면, 감각이 마비되며 이전의 작품들이 어떠했는지, 이후에 만들어질 작품들이 어떠할지를 자문할 수 있을 뿐”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죠.
이후 미켈란젤로가 시도한 과감하고 역동적인 묘사는 바로크 회화의 탄생에 영향을 줍니다. 바로크 회화는 종교 개혁 이후, 구교와 신교로 나뉜 상황에서 구교가 신교에 맞서 신도를 모으고 그들의 신앙심을 고취할 목적으로 극적인 요소가 강조된 그림을 주문하며 발전한 장르예요.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을 통해 보여준 역동적이고 극적인 요소는 이 장르의 탄생에 많은 영감이 되었다고 평가받죠.
복원 작업이 진행된 후 천장화의 모습
또, 예술가가 교황이라는 절대 권력의 명령에 저항해, 작품을 죽을 때까지 수정하지 않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밀고 나간 최초의 시도라는 점은 예술가의 개성과 관점이 강조된 이후 미술사적 경향의 시작점이라고도 평가받습니다.
이처럼 <최후의 심판>은 여러 층위에서 오늘날의 미술사에까지 많은 영향을 남긴 작품입니다. 이런 작품이 더 오래 보존되기 위해 복원 작업에 들어간다고 하니, 추후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생긴다면 이 이야기를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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