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문학적인 예술가, 에드바르 뭉크 😱

Edvard Munch, The Scream (1893) ⓒ Public Domain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모티프 '절규'. 절규는 앤디 워홀 등 예술가 뿐만 아니라, 영화, 애니메이션, 티브이 프로그램, 사진 등 다양한 매체에서 패러디된 모티프입니다. 또 절규는 뭉크가 애착을 가지고 여러 번 그린 모티프이기도 한데요. 그중에서도 파스텔로 그려진 절규는 2012년 소더비 경매에서 1400억 원에 이르는 사상 최고가로 낙찰되기도 했죠.


현대 문화에 가장 영향력 있는 아이콘인 절규는 에드바르 뭉크의 단연 대표작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우리는 뭉크를 절규로만 기억해선 안됩니다. 그의 작품엔 절규를 넘어선 더 많은 가치들이 담겨있기 때문이죠.



뭉크의 어린 시절: 죽음에 대한 공포

에드바르 뭉크와 자화상(1895) ⓒ Getty Images, ⓒ Public Domain



뭉크는 표현주의의 대표 화가입니다. 표현주의는 작가의 생각이나 느낌을 시각적으로 두드러지게 표현한 장르에요. ‘예술로 승화했다’는 문장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장르죠. 뭉크가 예술로 승화한 가장 큰 감정은, 죽음에 대한 공포였습니다.


뭉크는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열네 살 때에는 엄마 역할을 대신하던 누나를 잃었어요. 두 사람 다 폐결핵이었죠. 어린 나이에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으며, 뭉크는 죽음을 두려워하게 돼요. 언제든 자신도 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Edvard Munch, Death Mother and Child (1899) ⓒ Public Domain



실제로 뭉크는 류머티즘과 열병, 불면증 등 병에 시달리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허약한 아이이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가정환경도 좋지 않았다는 거예요. 뭉크의 아버지는 아내를 떠나보낸 뒤 우울증을 겪으면서, 종교에 깊게 빠져들게 됩니다. 이후 빈민가에서 의료봉사 생활을 이어가요. 그렇다 보니 집에는 늘 돈이 없었습니다. 팍팍한 생활에 힘들어질 때면, 아버지는 자식들을 미친 듯이 꾸짖으면서 벌을 주곤 했죠.


어린 시절 겪은 엄마와 누나의 죽음, 자신의 육체적 허약함, 가난, 아버지의 폭력까지 더해지면서 뭉크의 어린 시절은 암울함 그 자체였습니다. 이런 뭉크를 구원해 준 유일한 존재는 바로 그림이었어요.



뭉크의 이모 카렌 비욜스타드 / Edvard Munch, Karen Bjølstad (1888)


뭉크의 이모인 카렌 비욜스타드는 화가였는데요. 뭉크의 뛰어난 그림 실력을 알아보고 자신의 재료를 나눠쓰며 그림에 빠져드는 걸 도왔습니다. 그렇게 왕립 미술공예학교에 입학해 공부하게 되었죠. 입학 첫해 뭉크는 경매에 소품 세 점을 출품했는데, 그중 두 점이 팔릴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뭉크 스캔들: 베를린 분리파를 탄생시키다

뭉크의 초기작 / Edvard Munch, Small Lake with Boat (1880)



이후 뭉크는 본인 작품에 확신을 가지고 작품을 이어가게 돼요. 학교에서 인체의 구조와 그림의 기본기를 익힌 뭉크는, 이후 본인의 감정을 작품으로 승화하는 표현주의적인 작품을 그려냅니다. 하지만 이 그림들은 반응이 좋지 않았어요. 뭉크가 있던 노르웨이는 아직 보수적인 미술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에 뭉크는 더 다양한 논의가 일어나던 베를린으로 향합니다.


뭉크의 그림은 조금 어둡고 투박했지만, 그의 감정은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어요. 당시 베를린 평단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립니다. 아카데믹한 평론가와 노화가들은 뭉크의 작품에 부정적이었어요. <병든 아이 The Sick Child> 그림을 보고 손 부분이 게살 수프 속 덩어리 같다 비난했죠. 



Edvard Munch, The Sick Child (1907) / The Night Wanderer (1923-1924) ⓒ The Munch Museum / The Munch-Ellingsen Group



반면 젊은 화가들은 뭉크를 지지합니다. 당시 기준으로서는 아방가르드하고 새로운 느낌을 자아냈기 때문이죠. 결국 뭉크 개인전의 폐쇄를 놓고 회원 총회가 열렸습니다. 표결 결과는 폐쇄 찬성 120표, 반대 105표. 결국 베를린에서 열린 뭉크 전시는 8일 만에 중단되었죠.


이 결과로 베를린의 평단은 두 갈래로 나뉘면서 베를린 분리파가 생기게 됩니다. 젊은 예술가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예술을 선보였어요. 점차 베를린 내 예술의 분위기가 달라지게 됩니다. 이후 1년 만에 뭉크는 본인이 쏘아 올린 공 덕분에 베를린에서 반발 없이 개인전을 또 진행할 수 있었죠.



절규의 탄생: 감정에 온전히 집중하다

Edvard Munch, The Scream (1893, 1895, 1893)



급진적이고 새로운 예술을 선보인 뭉크는, 일종의 트렌드세터 같은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자신의 감정을 그림에 어떻게 표현할지 다각도로 치밀하게 연구한 덕분이죠. 이를 잘 볼 수 있는 것이 1893년 탄생한 뭉크의 대작 <절규>입니다.


변형이 무려 50종이나 되는 절규는 철저히 뭉크의 감정에 기반해서 만들어졌어요. 1891년 뭉크가 적은 일기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두 친구와 함께 걷고 있었고, 

해는 막 서산에 지고 있었는데 약간 우울한 기분이었다.


돌연히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으며 탈진된 듯 느껴져 난간에 몸을 의지했다.


검은색에 가까운 진한 파란색 협만과 도시 위에 피의 불길이 넘실거렸고, 

친구들은 계속 걷고 있었지만 나는 그냥 서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끊임없는 절규가 자연을 관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뭉크는 신경 쇠약,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상당히 불안한 심리 상태에 있었던 건데요. 뭉크는 당시 펼쳐진 풍경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검은색에 가까운 협만, 피같이 넘실거리는 붉은 노을. 이 시각적 충격을 뭉크는 자연의 절규라 표현했어요. 문학적으로 설명하면, 시각적 심상을 청각적 심상으로 전환한 것이죠.


그래서 작품의 제목인 절규도 사실, 그림 속 인물이 아닌 '자연'이 내지르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당시 뭉크가 느낀 불안감을 극대화해 표현한 것이죠.



Edvard Munch, The Scream (1895) ⓒ Oli Scarff/Getty Images



50여 개의 변형이 있는 절규 중에서도, 뭉크의 감정을 가장 잘 표현했다 평가받는 건 1895년 제작된 파스텔 버전입니다. 우선 풍경을 보면, 길은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반면 협만과 하늘은 이와 대비되는 매우 혼란스러운 선으로 묘사되어 있죠. 


뒤편의 두 인물도 뭉크를 대변한다 평가받습니다. 다른 버전의 절규를 보면 인물들이 서있거나 걸어가는 듯한 모습인데, 이 그림에서는 걸어가는 인물과 난간에 기대듯 서있는 인물로 묘사되어 시간 순서대로 풍경에 충격받은 뭉크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라 보는 의견도 있죠.



Edvard Munch, The Scream (1895) ⓒ Oli Scarff/Getty Images



이건 뭉크가 적어둔 노트의 모습과도 동일합니다. 뭉크는 노트에서 길을 가다 피오르를 바라보고, 죽을 듯 피곤해 난간에 기대고, 그다음 자연의 절규를 들었다고 묘사했기 때문이죠. 또 재밌는 요소로는 인물의 양쪽 콧구멍 색깔도 다르다는 점이 있는데요. 이 또한 표현적 특성을 강조한 거라 볼 수 있습니다. 작품은 덕분에 2012년 소더비 경매에서 1400억 원에 판매되기도 했어요.



<생의 프리즈>: 삶과 사랑과 죽음

Edvard Munch, The Dance of Life (1925)



이처럼 뭉크는 자신이 느낀 감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했던 화가였는데요. 어린 시절 겪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자신의 정신적 고통으로 인한 두려움을 표현한 그림들은 이후 이어진 <생의 프리즈>연작에서 집대성됩니다.


1900년 뭉크가 그린 <생명의 춤>을 보면, 무도회장에서 춤추는 인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이건 뭉크가 평생 동안 그려온 감정들을 담고 있어요. 그림 속 세 여인은 각각 사랑, 불안, 죽음을 상징합니다.


왼쪽 정숙한 옷차림을 한 여인은 순결함과 순수함을 의미해요. 순수하고 이상적인 사랑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차용한 거죠. 가운데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치명적인 유혹, 관능성을 상징합니다. 뭉크 그림에서 흡혈귀로 묘사되던 여인과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해 볼 수 있죠. 왼편의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침묵하고 인내하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뭉크가 가장 많이 이입한 존재이자 자신을 투영한 존재인데요. 이 여인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Edvard Munch, Madonna (1894)



각 여인들은 각각 뭉크가 그림에서 자주 표현했던 감정들인데요. 이처럼 뭉크의 작품은 그림 속 대상 하나하나에 함의가 있어, 매우 문학적인 특징을 띱니다. 뭉크에 대한 첫 번째 논문을 쓴 프시비세프스키는 ‘뭉크는 화가로는 드물게 고도의 문학적 소양을 갖고 있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이 그림 속 여인들이 상징하는 감정은 마치 문학 작품을 보듯 연결돼요. 사랑이 불안을 낳고, 불안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죠. 이렇게 뭉크는 본인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문학적으로 표현해냅니다.



말년: 삶이 나아질수록 악화된 뭉크의 정신과 건강

에드바르 뭉크와 툴라 라르센의 모습 ⓒ Getty Images



어린 나이에 경험한 죽음과 폭력의 경험은 뭉크의 예술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요. 이런 부정적인 인간 경험은 뭉크가 중년에 접어들어서도 이어집니다.


서른아홉 살이 되던 해, 뭉크가 사랑했던 여인 툴라 라르센은 뭉크와 결혼하길 원했는데요. 결혼을 원치 않던 뭉크에게 라르센은 권총 협박을 하기까지 이르게 됩니다. 권총을 두고 옥신각신하던 중 라르센의 손에 있던 총이 발사되면서, 뭉크의 왼쪽 가운뎃손가락을 관통했어요. 



Edvard Munch, Self-Portrait Against a Green Background and Caricature Portrait of Tulla Larsen (1905) ⓒ The Munch Museum

Edvard Munch, The Death of Marat (1907)



사건 이후 뭉크의 정신건강은 악화됩니다. 피해 망상에 시달리면서 술집에서 세 번이나 폭행 사건을 저지르게 되죠. 또 여자에게 쫓긴다고 생각하거나, 친구 중 누군가 자기를 헤치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망상이 들 때면 뭉크는 술을 마시곤 했는데요. 술은 정신 건강뿐만 아니라 육체적 건강까지 헤치게 되면서, 갈 곳 없던 뭉크는 결국 그림으로 다시 도피합니다.



Edvard Munch, Shore with Red House (1904)



당시 뭉크가 주로 그리던 건 자연이었어요. 자연을 그릴 때만큼은 고통이 사라지고 온전히 평화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죠. 또 점차 밝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면서 그 평화를 만끽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달라진 뭉크 작품의 분위기에 그를 야수파 작가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어요. 


뭉크의 삶은 피폐해졌지만, 그의 화풍에 매료된 사람들은 늘어납니다. 독일의 표현주의적 특성과 프랑스의 야수파적 특성을 모두 지닌 20세기 예술의 선구자로 여겨지게 되었죠.



Edvard Munch, Workers on their Way Home (1913–14)



그의 그림이 고향인 노르웨이는 물론, 독일, 미국 등 전 세계적으로 전시되면서 뭉크는 많은 부를 쌓게 됩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1931년 뭉크가 68세가 되던 해, 뭉크의 엄마 역할을 하던 이모 카렌이 사망한 것이죠.


이모의 사망은 다시 한번 가족을 잃는 고통을 안겨줍니다. 그리고 뭉크의 피해 망상은 다시 재발되었죠. 적의를 갖고 주변인을 대했고, 집에 틀어박혀 편지로만 모든 용무를 처리했습니다. 또 드물게 외출을 한 날에는 누군가 자신을 헤칠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계했고요.



Edvard Munch, Self-Portrait. Between the Clock and the Bed (1940–1943) ⓒ The Munch Museum



이 시기에는 뭉크의 시력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는데요. 1940년, 77세가 되던 해에는 실명 수준으로 눈이 나빠졌습니다. 뭉크는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죠. 뭉크의 많은 작품이 미술관에 소장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뭉크는 1944년 1월 23일, 감기로 인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당시 자신의 유산을 고향 오슬로에 증여했는데요. 그의 집에는 유화 약 1200점, 판화 만 5400점, 수채화와 드로잉 450여 점이나 있었다고 하죠.



Edvard Munch, Seperation, (1896)

Edvard Munch, The Sun (1910-11) ⓒ The Munch Museum



삶의 평생 뭉크는 인간관계와 정신적, 육체적 문제로 고통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은 늘 뭉크를 그림으로 도망치게 했죠. 그렇게 그림에 승화해낸 자신의 감정은 2만여 점의 작품으로 탄생하며, 뭉크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냈습니다.


오랜 미술사에서 예술의 가장 큰 가치가 모방과 재현이던 시절, 개인의 내밀한 감정을 표현하는데 집중한 뭉크의 작품은

미술사에 가장 혁명적인 시도로 꼽힙니다.


가장 문학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한 뭉크의 예술세계, 여러분은 어떤 걸 느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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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believe in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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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1887 - 19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