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는 오직 한 가지의 색채만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색채'다."
- Marc Chagall (1887 - 1985)
샤갈은 평생 여러 곳으로 거처를 옮겨다니며 작품활동을 한 화가예요. 러시아에서 작품활동을 처음 시작해, 이후 프랑스, 미국으로 수차례 옮겨다녔죠. 한편 그의 고향은 벨라루스 지역입니다. 그러다보니 벨라루스, 러시아, 프랑스 각 나라에서는 샤갈을 서로 자기네 나라 예술가라고 주장하기도 해요. 아래는 샤갈이 시기별로 작품활동을 하던 지역입니다.
샤갈이 평생에 걸쳐 계속해서 거주지를 옮겨다닌 걸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샤갈'하면, 대부분 '프랑스'화가로 알고 있습니다. 샤갈의 프랑스 사랑이 엄청난 덕분이었는데요. 샤갈의 풀네임인 '마르크 샤갈' 역시 프랑스식 이름입니다.
그의 원래 본명은 '모이셰 자하로비치 샤갈'이었습니다. 러시아식 이름이었죠. 그런데 1910년, 23살 때 프랑스에 처음 방문하고, 샤갈은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식인 마르크 샤갈로 바꾸었어요.
또 샤갈이 가장 오랜 시간 머무른 지역 역시 프랑스였습니다. 샤갈은 98세까지 살았는데요, 그 중 60년을 프랑스에서 보냈어요.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낸 곳 역시 프랑스였죠. 샤갈의 무덤도 현재 프랑스에 있습니다.
샤갈의 인생에는 세 명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샤갈의 작품에 등장해 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역할을 했어요. 위 사진 속 인물은 그의 첫번째 아내이자 가장 잘 알려진 여인, '벨라'입니다. 샤갈과 8살 차이가 났던 부잣집 여인인데요. 샤갈이 벨라를 처음 만났을 때, 벨라는 겨우 14살이었지만, 샤갈은 자신이 벨라와 결혼할 걸 알았다고 해요.
반면 샤갈은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생선가게 종업원이었고, 어머니는 야채가게 종업원으로 일했죠. 때문에 벨라 집안에서는 샤갈과의 결혼을 엄청나게 반대했다고 해요. 벨라가 성인이 되고, 샤갈이 예술가로 성공한 후에도 집안에서는 계속 반대를 했는데요. 6년 간의 노력 끝에 샤갈은 벨라와 결혼하게 됩니다.
Marc Chagall, Birthday, 1915 © 2021 Artists Rights Society
이 작품은 샤갈이 벨라의 결혼을 승낙받은 후 남긴 그림이에요.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벨라와 지그시 눈을 감은 샤갈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요. 이처럼 샤갈은 벨라에 대한 사랑을 그림으로 자주 표현했습니다. 이들은 30여 년간 부부생활을 이어가다가, 벨라가 인후염으로 사망하며 부부생활을 마쳤어요. 벨라가 사망하는 순간까지도 샤갈은 그의 사랑을 이어나갔죠.
당시 샤갈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오직 한 가지의 색채만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색채'다."
벨라가 세상을 떠난 이후, 벨라와 샤갈 사이에 태어난 딸이었던 '이다'는 재빨리 새로운 여자를 샤갈의 집에 들입니다. 샤갈이 작품활동을 하는 데 가장 필요한 건 '사랑'이라는 걸 잘 알고있었기 때문인데요. 벨라 이후 샤갈이 사랑했던 두 여인 역시 샤갈의 그림에 사랑의 색채를 더해주며, 그가 작품활동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도와주었어요.
샤갈은 또 엄청난 질투의 화신이었습니다. 샤갈의 질투심이 드러났던 에피소드 3가지를 들려드릴게요.
① 앞서 언급했듯 샤갈은 거주지를 자주 옮겼는데요. 간혹 옮긴 집에 다른 예술가의 작품이 걸려있으면, 바로 내다 버렸습니다. 자신의 집에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거는 것 조차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② 또 샤갈은 같은 시기 활동했던 예술가들에 대한 질투심도 엄청났어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티스와 피카소죠. 당시 샤갈은 성공한 화가로서 부와 명예를 쥐고 있었지만, '피카소-마티스-샤갈' 3강 구도로 여겨지기보다는, 마티스-피카소의 2강 구도로 사람들은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샤갈은 이들의 인기를 체감할 수 있는 파리 중심지에 들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해요.
③ 샤갈이 활동하던 당시, 예술가들 사이엔 '작품을 서로 교환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일종의 관습이었는데요. 샤갈은 다른 화가들과 작품을 교환하지 않았었다고 해요.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작품은 '로댕'의 조각상, '조르주 브라크'의 정물화,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작업이었는데요. 세 예술가 모두 유명한 인물이지만, 샤갈은 이 작품이 본인의 취향에 맞아서 소장한게 아니라, 그들이 주겠다고 사정해서 마지못해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샤갈의 이런 질투심은 좋게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한편으론 샤갈이 작품을 계속 만들어나갈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했어요.
👀 그렇다면, 샤갈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아요.
Marc Chagall, Au dessus de la ville, 1924
앞서 언급했듯, 샤갈은 굉장히 장수했던 화가였어요. 작품 활동도 일찍 시작해 남긴 작품 수도 많죠. 하지만 샤갈의 화풍엔 거의 변화가 없었어요. 샤갈 그림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따뜻한 색감'과 '추상적인 형태'는 데뷔 초 5년 만에 완성되었다는 평가를 많이 받죠. 그리고 그 이후에 나온 모든 작업은 그 방식의 반복이었다고 봐도 무리가 없는데요. 그의 작품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있는지, 그의 인생을 통해 알아보아요.
[1] 초기
샤갈은 매우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시장 상인 밑에서 일을 했었죠. 게다가 샤갈은 9형제 중에서 장남이었습니다. 형제들에게 많은 걸 양보했어야 했죠. 때문에 매우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요. 게다가 샤갈은 유대인이었습니다. 당시 엄청난 차별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죠.
한편, 미술에 소질이 있어 23살에 프랑스로 넘어가 미술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요. 당시 프랑스는 두 명의 예술가가 꽉 잡고 있었습니다. 큐비즘의 대표주자인 피카소와 야수파의 대표 주자인 마티스였죠. 이들이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파리에서, 샤갈은 이들의 특징을 모두 담아내 자신만의 화풍을 성립합니다.
샤갈은 또 엄청난 질투의 화신이었습니다. 샤갈의 질투심이 드러났던 에피소드 3가지를 들려드릴게요.
① 앞서 언급했듯 샤갈은 거주지를 자주 옮겼는데요. 간혹 옮긴 집에 다른 예술가의 작품이 걸려있으면, 바로 내다 버렸습니다. 자신의 집에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거는 것 조차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② 또 샤갈은 같은 시기 활동했던 예술가들에 대한 질투심도 엄청났어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티스와 피카소죠. 당시 샤갈은 성공한 화가로서 부와 명예를 쥐고 있었지만, '피카소-마티스-샤갈' 3강 구도로 여겨지기보다는, 마티스-피카소의 2강 구도로 사람들은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샤갈은 이들의 인기를 체감할 수 있는 파리 중심지에 들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해요.
③ 샤갈이 활동하던 당시, 예술가들 사이엔 '작품을 서로 교환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일종의 관습이었는데요. 샤갈은 다른 화가들과 작품을 교환하지 않았었다고 해요.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작품은 '로댕'의 조각상, '조르주 브라크'의 정물화,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작업이었는데요. 세 예술가 모두 유명한 인물이지만, 샤갈은 이 작품이 본인의 취향에 맞아서 소장한게 아니라, 그들이 주겠다고 사정해서 마지못해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샤갈의 이런 질투심은 좋게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한편으론 샤갈이 작품을 계속 만들어나갈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했어요.
Marc Chagall, Birthday, 1915 © 2021 Artists Rights Society
샤갈은 또 엄청난 질투의 화신이었습니다. 샤갈의 질투심이 드러났던 에피소드 3가지를 들려드릴게요.
① 앞서 언급했듯 샤갈은 거주지를 자주 옮겼는데요. 간혹 옮긴 집에 다른 예술가의 작품이 걸려있으면, 바로 내다 버렸습니다. 자신의 집에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거는 것 조차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② 또 샤갈은 같은 시기 활동했던 예술가들에 대한 질투심도 엄청났어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티스와 피카소죠. 당시 샤갈은 성공한 화가로서 부와 명예를 쥐고 있었지만, '피카소-마티스-샤갈' 3강 구도로 여겨지기보다는, 마티스-피카소의 2강 구도로 사람들은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샤갈은 이들의 인기를 체감할 수 있는 파리 중심지에 들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해요.
③ 샤갈이 활동하던 당시, 예술가들 사이엔 '작품을 서로 교환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일종의 관습이었는데요. 샤갈은 다른 화가들과 작품을 교환하지 않았었다고 해요.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작품은 '로댕'의 조각상, '조르주 브라크'의 정물화,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작업이었는데요. 세 예술가 모두 유명한 인물이지만, 샤갈은 이 작품이 본인의 취향에 맞아서 소장한게 아니라, 그들이 주겠다고 사정해서 마지못해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샤갈의 이런 질투심은 좋게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한편으론 샤갈이 작품을 계속 만들어나갈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이 시기 남긴 작업이 바로 <나와 마을>입니다. 이 작품은 샤갈이 겨우 24살 때 그린 그림이에요. 당시 이 그림은 엄청난 화제작이었는데요. 이 그림에서는 형태를 조각내던 큐비즘, 그리고 화려하고 강렬한 색감의 야수파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샤갈의 그림이 장르상 큐비즘이나 야수파,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샤갈은 자신의 그림이 특정 사조로 평가받는 걸 꺼렸다고 해요. 특히 입체파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건방진 입체파 화가들..."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죠. 샤갈은 평생 동안, 어느 화풍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2] 중기
이후 샤갈은 러시아와 파리를 오가며 계속해서 작품활동을 이어나갑니다. 샤갈 특유의 화풍은 러시아와 파리, 모두에서 인기와 명성을 가져다 주었죠. 덕분에 샤갈은 30세의 젊은 나이에 미술학교 교장 자리에 오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기쁨도 잠시, 1933년에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가 되며 유대인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1937년에는 '퇴폐미술전'을 열어 유대인 예술가를 탄압하기도 했죠. 이에 샤갈은 작품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가족과 미국으로 이주합니다. 당시 미국에는 탄압을 피해 넘어온 유럽 예술가가 많았어요. 몬드리안, 페르낭 레제, 앙드레 브르통 등 다야했죠. 덕분에 이 시기 뉴욕은 현대미술의 성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퇴폐미술전(頹廢美術展)'이란?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행해진, 현대 미술을 탄핵하기 위한 전람회. 독일 국내의 미술관, 화랑, 개인 컬렉션에서 압수한 20세기의 모든 전위 미술 작품이 그 대상이었다. 특히 표현주의 회화에 엄격하여 이 유파가 행한 색채의 해방, 형태의 의도적 왜곡, 추상 표현 등의 여러 실험이 비(非)독일적인 타락, 퇴폐라고 지목되어, 그 미술가는 제작을 금지당했고 작품은 몰수되었다. 비방 투의 플래카드와 팸플릿이 난무했던 이 전람회는 1937년 뮌헨 및 베를린을 시발로 하여 독일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였다. -세계미술용어사전 |
1946년, 샤갈의 개인전이 진행된 MoMA
미국에서도 샤갈은 특유의 화풍으로 명성을 이어나가게 되는데요.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생활을 해왔음에도, 샤갈은 미국 만큼은 '잠깐 머무르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절대 영어를 배우지 않으려 했어요. 언제든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죠. 그러던 와중, 미국에서 인기가 점점 높아지게 되었고, 샤갈의 예상과 달리 7년이나 머물며 유수의 미술관에서 전시를 진행합니다. 당시 뉴욕 현대미술관 개인전, 시카고 미술관 전시 등을 진행했었죠.
[3] 말기
이후 63세가 되어서야 샤갈은 프랑스로 다시 돌아옵니다. 샤갈이 선택한 곳은 도심에서 떨어진 고즈넉한 프로방스의 저택이었어요. 당시 프로방스 지역에는 마티스와 피카소도 살고 있었습니다. 샤갈의 인생을 이야기하다 보면, 마티스와 피카소가 자주 언급되는데요. 의외로 이들이 실제로 만난 건 당시가 처음이었다고 해요.
이 때 샤갈은 피카소와 각별하게 지내며 많은 예술적 영향을 받습니다. 피카소가 도자기 작업을 하던 공방을 다니며 그의 작업을 따라하기도 했죠. 이런 일이 반복되자 화가 난 피카소는 어느 날, 샤갈이 작업 중이던 도자기를 본인이 완성해 버리고 '샤갈풍'이라는 이름을 붙여 전시에 내놓습니다. 이후 이 둘의 사이는 완전히 앙숙이 되었죠. 샤갈은 피카소 이야기가 나오면 "그 스페인 놈"이라 칭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 각자의 예술적 재능은 극찬했다고 해요.
샤갈은 피카소와 가깝게 지내다 멀어졌지만, 마티스와는 또 가깝게 지내지 않았습니다. 한편 그의 작업을 틈틈이 지켜보았죠. 그리고 마티스의 성당 모자이크 작업 등을 따라하기도 했어요. 당시 샤갈은 60대의 고령이었지만, 도자기나 모자이크 작업 등 다양한 장르로 작업을 확장하며 이후 30여 년을 작품활동에 몰입했어요.
💰 마르크 샤갈, 작품 가치는?
연간작품 판매량 | 경매 낙찰률 | 작품 평균 가격 | 최고 낙찰 가격 |
30 | 80.7% | 12억 7.800만원 | 364억 2천만원
|
*출처: Artsy, 최근 36개월 기준 (2022)
이 작품은 샤갈이 벨라의 결혼을 승낙받은 후 남긴 그림이에요.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벨라와 지그시 눈을 감은 샤갈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요. 이처럼 샤갈은 벨라에 대한 사랑을 그림으로 자주 표현했습니다. 이들은 30여 년간 부부생활을 이어가다가, 벨라가 인후염으로 사망하며 부부생활을 마쳤어요. 벨라가 사망하는 순간까지도 샤갈은 그의 사랑을 이어나갔죠.
당시 샤갈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오직 한 가지의 색채만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색채'다."
벨라가 세상을 떠난 이후, 벨라와 샤갈 사이에 태어난 딸이었던 '이다'는 재빨리 새로운 여자를 샤갈의 집에 들입니다. 샤갈이 작품활동을 하는 데 가장 필요한 건 '사랑'이라는 걸 잘 알고있었기 때문인데요. 벨라 이후 샤갈이 사랑했던 두 여인 역시 샤갈의 그림에 사랑의 색채를 더해주며, 그가 작품활동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도와주었어요.
샤갈은 평생 여러 곳으로 거처를 옮겨다니며 작품활동을 한 화가예요. 러시아에서 작품활동을 처음 시작해, 이후 프랑스, 미국으로 수차례 옮겨다녔죠. 한편 그의 고향은 벨라루스 지역입니다. 그러다보니 벨라루스, 러시아, 프랑스 각 나라에서는 샤갈을 서로 자기네 나라 예술가라고 주장하기도 해요. 아래는 샤갈이 시기별로 작품활동을 하던 지역입니다.
샤갈이 평생에 걸쳐 계속해서 거주지를 옮겨다닌 걸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샤갈'하면, 대부분 '프랑스'화가로 알고 있습니다. 샤갈의 프랑스 사랑이 엄청난 덕분이었는데요. 샤갈의 풀네임인 '마르크 샤갈' 역시 프랑스식 이름입니다.
그의 원래 본명은 '모이셰 자하로비치 샤갈'이었습니다. 러시아식 이름이었죠. 그런데 1910년, 23살 때 프랑스에 처음 방문하고, 샤갈은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식인 마르크 샤갈로 바꾸었어요.
또 샤갈이 가장 오랜 시간 머무른 지역 역시 프랑스였습니다. 샤갈은 98세까지 살았는데요, 그 중 60년을 프랑스에서 보냈어요.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낸 곳 역시 프랑스였죠. 샤갈의 무덤도 현재 프랑스에 있습니다.
샤갈의 인생에는 세 명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샤갈의 작품에 등장해 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역할을 했어요. 위 사진 속 인물은 그의 첫번째 아내이자 가장 잘 알려진 여인, '벨라'입니다. 샤갈과 8살 차이가 났던 부잣집 여인인데요. 샤갈이 벨라를 처음 만났을 때, 벨라는 겨우 14살이었지만, 샤갈은 자신이 벨라와 결혼할 걸 알았다고 해요.
반면 샤갈은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생선가게 종업원이었고, 어머니는 야채가게 종업원으로 일했죠. 때문에 벨라 집안에서는 샤갈과의 결혼을 엄청나게 반대했다고 해요. 벨라가 성인이 되고, 샤갈이 예술가로 성공한 후에도 집안에서는 계속 반대를 했는데요. 6년 간의 노력 끝에 샤갈은 벨라와 결혼하게 됩니다.
Marc Chagall, Birthday, 1915 © 2021 Artists Rights Society
이 작품은 샤갈이 벨라의 결혼을 승낙받은 후 남긴 그림이에요.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벨라와 지그시 눈을 감은 샤갈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요. 이처럼 샤갈은 벨라에 대한 사랑을 그림으로 자주 표현했습니다. 이들은 30여 년간 부부생활을 이어가다가, 벨라가 인후염으로 사망하며 부부생활을 마쳤어요. 벨라가 사망하는 순간까지도 샤갈은 그의 사랑을 이어나갔죠.
당시 샤갈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오직 한 가지의 색채만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색채'다."
벨라가 세상을 떠난 이후, 벨라와 샤갈 사이에 태어난 딸이었던 '이다'는 재빨리 새로운 여자를 샤갈의 집에 들입니다. 샤갈이 작품활동을 하는 데 가장 필요한 건 '사랑'이라는 걸 잘 알고있었기 때문인데요. 벨라 이후 샤갈이 사랑했던 두 여인 역시 샤갈의 그림에 사랑의 색채를 더해주며, 그가 작품활동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도와주었어요.
샤갈은 또 엄청난 질투의 화신이었습니다. 샤갈의 질투심이 드러났던 에피소드 3가지를 들려드릴게요.
① 앞서 언급했듯 샤갈은 거주지를 자주 옮겼는데요. 간혹 옮긴 집에 다른 예술가의 작품이 걸려있으면, 바로 내다 버렸습니다. 자신의 집에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거는 것 조차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② 또 샤갈은 같은 시기 활동했던 예술가들에 대한 질투심도 엄청났어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티스와 피카소죠. 당시 샤갈은 성공한 화가로서 부와 명예를 쥐고 있었지만, '피카소-마티스-샤갈' 3강 구도로 여겨지기보다는, 마티스-피카소의 2강 구도로 사람들은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샤갈은 이들의 인기를 체감할 수 있는 파리 중심지에 들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해요.
③ 샤갈이 활동하던 당시, 예술가들 사이엔 '작품을 서로 교환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일종의 관습이었는데요. 샤갈은 다른 화가들과 작품을 교환하지 않았었다고 해요.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작품은 '로댕'의 조각상, '조르주 브라크'의 정물화,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작업이었는데요. 세 예술가 모두 유명한 인물이지만, 샤갈은 이 작품이 본인의 취향에 맞아서 소장한게 아니라, 그들이 주겠다고 사정해서 마지못해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샤갈의 이런 질투심은 좋게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한편으론 샤갈이 작품을 계속 만들어나갈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했어요.
👀 그렇다면, 샤갈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아요.
Marc Chagall, Au dessus de la ville, 1924
앞서 언급했듯, 샤갈은 굉장히 장수했던 화가였어요. 작품 활동도 일찍 시작해 남긴 작품 수도 많죠. 하지만 샤갈의 화풍엔 거의 변화가 없었어요. 샤갈 그림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따뜻한 색감'과 '추상적인 형태'는 데뷔 초 5년 만에 완성되었다는 평가를 많이 받죠. 그리고 그 이후에 나온 모든 작업은 그 방식의 반복이었다고 봐도 무리가 없는데요. 그의 작품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있는지, 그의 인생을 통해 알아보아요.
[1] 초기
샤갈은 매우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시장 상인 밑에서 일을 했었죠. 게다가 샤갈은 9형제 중에서 장남이었습니다. 형제들에게 많은 걸 양보했어야 했죠. 때문에 매우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요. 게다가 샤갈은 유대인이었습니다. 당시 엄청난 차별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죠.
한편, 미술에 소질이 있어 23살에 프랑스로 넘어가 미술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요. 당시 프랑스는 두 명의 예술가가 꽉 잡고 있었습니다. 큐비즘의 대표주자인 피카소와 야수파의 대표 주자인 마티스였죠. 이들이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파리에서, 샤갈은 이들의 특징을 모두 담아내 자신만의 화풍을 성립합니다.
샤갈은 또 엄청난 질투의 화신이었습니다. 샤갈의 질투심이 드러났던 에피소드 3가지를 들려드릴게요.
① 앞서 언급했듯 샤갈은 거주지를 자주 옮겼는데요. 간혹 옮긴 집에 다른 예술가의 작품이 걸려있으면, 바로 내다 버렸습니다. 자신의 집에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거는 것 조차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② 또 샤갈은 같은 시기 활동했던 예술가들에 대한 질투심도 엄청났어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티스와 피카소죠. 당시 샤갈은 성공한 화가로서 부와 명예를 쥐고 있었지만, '피카소-마티스-샤갈' 3강 구도로 여겨지기보다는, 마티스-피카소의 2강 구도로 사람들은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샤갈은 이들의 인기를 체감할 수 있는 파리 중심지에 들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해요.
③ 샤갈이 활동하던 당시, 예술가들 사이엔 '작품을 서로 교환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일종의 관습이었는데요. 샤갈은 다른 화가들과 작품을 교환하지 않았었다고 해요.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작품은 '로댕'의 조각상, '조르주 브라크'의 정물화,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작업이었는데요. 세 예술가 모두 유명한 인물이지만, 샤갈은 이 작품이 본인의 취향에 맞아서 소장한게 아니라, 그들이 주겠다고 사정해서 마지못해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샤갈의 이런 질투심은 좋게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한편으론 샤갈이 작품을 계속 만들어나갈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했어요.
Marc Chagall, Birthday, 1915 © 2021 Artists Rights Society
샤갈은 또 엄청난 질투의 화신이었습니다. 샤갈의 질투심이 드러났던 에피소드 3가지를 들려드릴게요.
① 앞서 언급했듯 샤갈은 거주지를 자주 옮겼는데요. 간혹 옮긴 집에 다른 예술가의 작품이 걸려있으면, 바로 내다 버렸습니다. 자신의 집에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거는 것 조차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② 또 샤갈은 같은 시기 활동했던 예술가들에 대한 질투심도 엄청났어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티스와 피카소죠. 당시 샤갈은 성공한 화가로서 부와 명예를 쥐고 있었지만, '피카소-마티스-샤갈' 3강 구도로 여겨지기보다는, 마티스-피카소의 2강 구도로 사람들은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샤갈은 이들의 인기를 체감할 수 있는 파리 중심지에 들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해요.
③ 샤갈이 활동하던 당시, 예술가들 사이엔 '작품을 서로 교환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일종의 관습이었는데요. 샤갈은 다른 화가들과 작품을 교환하지 않았었다고 해요.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작품은 '로댕'의 조각상, '조르주 브라크'의 정물화,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작업이었는데요. 세 예술가 모두 유명한 인물이지만, 샤갈은 이 작품이 본인의 취향에 맞아서 소장한게 아니라, 그들이 주겠다고 사정해서 마지못해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샤갈의 이런 질투심은 좋게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한편으론 샤갈이 작품을 계속 만들어나갈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이 시기 남긴 작업이 바로 <나와 마을>입니다. 이 작품은 샤갈이 겨우 24살 때 그린 그림이에요. 당시 이 그림은 엄청난 화제작이었는데요. 이 그림에서는 형태를 조각내던 큐비즘, 그리고 화려하고 강렬한 색감의 야수파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샤갈의 그림이 장르상 큐비즘이나 야수파,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샤갈은 자신의 그림이 특정 사조로 평가받는 걸 꺼렸다고 해요. 특히 입체파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건방진 입체파 화가들..."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죠. 샤갈은 평생 동안, 어느 화풍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2] 중기
이후 샤갈은 러시아와 파리를 오가며 계속해서 작품활동을 이어나갑니다. 샤갈 특유의 화풍은 러시아와 파리, 모두에서 인기와 명성을 가져다 주었죠. 덕분에 샤갈은 30세의 젊은 나이에 미술학교 교장 자리에 오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기쁨도 잠시, 1933년에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가 되며 유대인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1937년에는 '퇴폐미술전'을 열어 유대인 예술가를 탄압하기도 했죠. 이에 샤갈은 작품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가족과 미국으로 이주합니다. 당시 미국에는 탄압을 피해 넘어온 유럽 예술가가 많았어요. 몬드리안, 페르낭 레제, 앙드레 브르통 등 다야했죠. 덕분에 이 시기 뉴욕은 현대미술의 성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퇴폐미술전(頹廢美術展)'이란?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행해진, 현대 미술을 탄핵하기 위한 전람회. 독일 국내의 미술관, 화랑, 개인 컬렉션에서 압수한 20세기의 모든 전위 미술 작품이 그 대상이었다. 특히 표현주의 회화에 엄격하여 이 유파가 행한 색채의 해방, 형태의 의도적 왜곡, 추상 표현 등의 여러 실험이 비(非)독일적인 타락, 퇴폐라고 지목되어, 그 미술가는 제작을 금지당했고 작품은 몰수되었다. 비방 투의 플래카드와 팸플릿이 난무했던 이 전람회는 1937년 뮌헨 및 베를린을 시발로 하여 독일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였다.
-세계미술용어사전
1946년, 샤갈의 개인전이 진행된 MoMA
미국에서도 샤갈은 특유의 화풍으로 명성을 이어나가게 되는데요.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생활을 해왔음에도, 샤갈은 미국 만큼은 '잠깐 머무르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절대 영어를 배우지 않으려 했어요. 언제든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죠. 그러던 와중, 미국에서 인기가 점점 높아지게 되었고, 샤갈의 예상과 달리 7년이나 머물며 유수의 미술관에서 전시를 진행합니다. 당시 뉴욕 현대미술관 개인전, 시카고 미술관 전시 등을 진행했었죠.
[3] 말기
이후 63세가 되어서야 샤갈은 프랑스로 다시 돌아옵니다. 샤갈이 선택한 곳은 도심에서 떨어진 고즈넉한 프로방스의 저택이었어요. 당시 프로방스 지역에는 마티스와 피카소도 살고 있었습니다. 샤갈의 인생을 이야기하다 보면, 마티스와 피카소가 자주 언급되는데요. 의외로 이들이 실제로 만난 건 당시가 처음이었다고 해요.
이 때 샤갈은 피카소와 각별하게 지내며 많은 예술적 영향을 받습니다. 피카소가 도자기 작업을 하던 공방을 다니며 그의 작업을 따라하기도 했죠. 이런 일이 반복되자 화가 난 피카소는 어느 날, 샤갈이 작업 중이던 도자기를 본인이 완성해 버리고 '샤갈풍'이라는 이름을 붙여 전시에 내놓습니다. 이후 이 둘의 사이는 완전히 앙숙이 되었죠. 샤갈은 피카소 이야기가 나오면 "그 스페인 놈"이라 칭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 각자의 예술적 재능은 극찬했다고 해요.
샤갈은 피카소와 가깝게 지내다 멀어졌지만, 마티스와는 또 가깝게 지내지 않았습니다. 한편 그의 작업을 틈틈이 지켜보았죠. 그리고 마티스의 성당 모자이크 작업 등을 따라하기도 했어요. 당시 샤갈은 60대의 고령이었지만, 도자기나 모자이크 작업 등 다양한 장르로 작업을 확장하며 이후 30여 년을 작품활동에 몰입했어요.
💰 마르크 샤갈, 작품 가치는?
*출처: Artsy, 최근 36개월 기준 (2022)
이 작품은 샤갈이 벨라의 결혼을 승낙받은 후 남긴 그림이에요.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벨라와 지그시 눈을 감은 샤갈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요. 이처럼 샤갈은 벨라에 대한 사랑을 그림으로 자주 표현했습니다. 이들은 30여 년간 부부생활을 이어가다가, 벨라가 인후염으로 사망하며 부부생활을 마쳤어요. 벨라가 사망하는 순간까지도 샤갈은 그의 사랑을 이어나갔죠.
당시 샤갈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오직 한 가지의 색채만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색채'다."
벨라가 세상을 떠난 이후, 벨라와 샤갈 사이에 태어난 딸이었던 '이다'는 재빨리 새로운 여자를 샤갈의 집에 들입니다. 샤갈이 작품활동을 하는 데 가장 필요한 건 '사랑'이라는 걸 잘 알고있었기 때문인데요. 벨라 이후 샤갈이 사랑했던 두 여인 역시 샤갈의 그림에 사랑의 색채를 더해주며, 그가 작품활동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도와주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