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
전시보러 가서 액자에 주목해본 적 있으신가요?
미술관에 가면 작품과 함께 항상 액자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관객에게 액자는 그림만큼 주목받지 못하고 있어요. 언제나 그림을 꾸며주는 역할 정도로만 여겨지고, 그 공마저도 딱히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액자는 그림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였어요. 그림에 대한 시대의 시선을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는 존재였기 때문이죠. 오늘 다룰 이야기는 액자의 역사입니다.
[1] 액자의 시작, 제단화

그림을 둘러싼 네모난 틀을 액자로 규정한다면, 가장 그 원형에 가까운 것은 고대 이집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사후세계로 갔다가 다시 시신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되살아난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시신은 방부처리해서 미라로 만들고, 초상화를 그려 영혼이 몸을 잘 찾을 수 있게 했죠. 그리고 미라를 만들 때 정교한 작업을 했던 것처럼 초상화 역시 액자까지 만들어서 고이 보관했습니다. 이때의 액자는 어떤 실용적 목적보다는 제의적이고 장식적인 목적으로 제작되었죠.

이후에는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액자같은 요소를 사용했어요. 제단화에서 그 형태를 볼 수 있는데요. 제단화는 교회의 제단 뒤편을 장식하는 그림을 의미합니다. 예배나 미사를 드릴 때 더 성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하고, 그 안에 담겨있는 종교적 교리들을 신도들이 되새기면서 신앙심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으로 그려졌는데요. 제단화를 자세히 보면, 여러 개의 그림이 붙어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요. 이렇게 한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종교화는 좀 지루합니다. 종교의 교리나 성경의 내용이라는 것은 결국 동일하기 때문에, 아무리 잘 그린 그림이더라도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죠. 결국 내용은 똑같으니까요. 그렇다보니 종교화에서 중요한 건, 실력보다는 연출력이었어요. 연출을 통해 종교의 권위를 극대화할 수 있어야 했죠. 그리고 이런 니즈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 제단화였습니다.

Jean Bellegambe, The Cellier Altarpiece, 1511-12
제단화는 펼쳐서 보는 그림이에요. 교회가 원하는 니즈에 맞춰서 메인 그림 옆에 날개를 달아 그림의 수를 늘리고, 제단화를 열고 닫을 때마다 새로운 이미지가 보이도록 연출했죠. 이런 다이나믹을 극대화하기 위해 제단화 바깥쪽, 제단화가 닫혀있을 때 보이는 모습은 어두운 채도로 현세의 모습을 그렸고, 제단화 안쪽, 열렸을 때 보이는 부분은 화려한 색체의 신의 세계를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찬송가가 울려퍼질 때 제단화를 열어 종교의 웅장함과 경외감을 극대화했어요.
종교의 권위를 극대화하기 위한 니즈에서 출발한 제단화는 여러 개의 그림이 붙어있기 때문에 각 그림들이 독립적으로 보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액자와 비슷한 형태로 나무를 깎아 그림들을 분리했어요. 그리고 종교화의 웅장함, 경외감을 극대화할 수 있게 건축에서 활용하는 장식적인 기법들이 함께 적용했어요. 때문에 제단화 대부분의 액자 부분은 건축물을 보는듯 입체적으로 제작되어있는 걸 볼 수 있죠.
실제 건축 용어가 제단화에도 사용됩니다. 제단화의 그림과 그림 사이는 ‘기둥’을 의미하는 필라스터(pilaster)라 부르고, 제단화 윗부분 뾰족한 장식은 중세 성당의 첨탑을 의미하는 피나클(pinacle)이라 부르죠. 이를 통해 제단화는 일개 그림이 아닌, 그 자체로 신의 공간처럼 보이게 되었어요. 작품의 가치는 단순한 그림 그 이상으로 끌어올려졌죠. 그리고 이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합니다.

The Ghent Altarpiece (1432) by Hubert and Jan van Eyck
1432년 제작된 겐트 제단화는 제단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데요. 원래 이 작품은 성 바프 대성당의 소장품이었어요. 그런데 1816년, 성당은 재정난을 이유로 작품 매각 공고를 냅니다. 그리고 공고 두 달만에 작품이 판매되었죠. 작품을 구매한 건 베를린 왕립 미술관이었는데요. 미술관 관장은 구매 후, 이 작품을 쪼개라고 지시합니다. 액자 형태로 나뉘어진 패널을 각각 분리하는 건 물론이고, 양면으로 그림이 그려져있는 패널화 특성을 고려해 앞면과 뒷면까지 쪼개라는 지시를 내린 건데요.
충격적이지만, 미술관 입장에서는 이렇게 하면 전시하기도 편하고 소장품 개수도 늘어나게 되니 일석이조였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쪼갠 것에 대한 반응은 매우 안좋았어요. 작품들이 액자 형태로 나뉘어져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개별적인 작품이 아닌 하나의 작품이었기 때문이죠. 후에 이게 문제시되면서 오늘날에는 다시 작품을 복원한 상태인데요. 이 일화는 액자의 탄생이 가져온 양면성을 보여줍니다. 작품의 가치를 끌어올림과 동시에,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며 파괴로 이어진 사례로 손꼽히죠.

마찬가지로 조각조각 나뉜 중세 제단화의 모습, 우피치 미술관
이후 액자는 패널화가 아닌, 단일한 작품에도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액자가 본격적으로 그림에 활용되기 시작한 건, 르네상스가 미술계를 한 차례 뒤바꾼 뒤인 17세기였어요.
[2] 르네상스

Louis Beroud, Salle Ruben musee du Louvre, 1904
이때는 기존 그림 주문자였던 교회 뿐만 아니라 왕실, 귀족 등 많은 부와 명예를 지닌 이들이 그림을 주문하곤 했습니다. 이들은 본인의 부와 명예를 강조하기 위해 작품을 최대한 근사하게 전시하고자 했어요. 액자는 작품이 가진 가치를 더 끌어올릴 수 있는 장치였기에, 자연스레 활용되기 시작하는데요. 이때에는 액자에 실용적인 목적이 더해집니다. 작품을 좀더 편하게 운송하고, 더 잘 보존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게 된 건데요. 이를 기록으로 남긴 예술가가 루벤스에요.
루벤스는 프랑스 왕실의 의뢰를 받고 작품을 제작하기로 합니다. 왕실 측에서는 그림 사이즈가 크니, 궁정 안에서 제작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요. 루벤스는 이를 거절해요. 궁정 안에 있는 것 자체가 엄청난 피로를 유발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본인 작업실에서 그림을 제작하는데요. 하지만 작품을 작업실에서 궁정으로 옮기는 것도 꽤나 피곤한 일이었어요. 그림 사이즈가 매우 컸기 때문입니다.

Peter Paul Rubens, Self-Portrait, 1622
이 시기 큰 사이즈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은 두 가지였어요. 루벤스가 제안받은 것처럼 전시될 공간에서 그리는 것과, 작업실에서 제작한 후 옮기는 것이었죠. 하지만 당시의 운송수단으로 큰 사이즈의 그림을 옮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안한게, 나무틀에 천을 고정시켜서 그림을 그리고 난 뒤, 그림을 잘 말려서 다시 떼내고, 이 천을 둘둘 말아 운송하는 방법이었어요. 그렇다보니, 작품을 설치할 때에는 다시 그림이 그려진 천을 팽팽하게 당겨서 설치해야 했는데요. 액자가 있으면 팽팽하게 당긴 천을 고정하기가 쉬웠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작품을 원래 모양으로도 만들수 있고 또 잘 보존할 수 있는 액자의 중요성은 높아지게 되었죠. 루벤스 역시 작업실에서 그린 그림을 천 부분만 떼어내, 마차에 실어서 궁정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요. 이 시기 루벤스가 작품 운송을 위해 지인과 나눈 편지를 보면, ‘그림 가장자리에는 생략해도 상관 없는 디테일을 그려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림이 샤시(chassis)에 걸릴 때 접힐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적어두었어요.

Peter Paul Rubens, Portrait of Marie de Medici, 1622
샤시는 당시에도 창문틀을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액자를 부르는 명칭은 카드르(cadre)라는 것이 따로 있었죠. 사실 샤시와 액자의 역할은 똑같습니다. 둘둘 말았던 그림을 다시 팽팽하게 펴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죠. 차이점은 ‘이동성’에 있어요. 액자는 벽에 걸 수도 있고 뗄 수도 할 수 있지만, 샤시는 진짜 창문틀처럼 액자 째로 벽에 붙여 고정시켜 버려요.
과거에는 샤시가 액자보다 성행했습니다. 당시까지는 작품 주문이 귀족들의 의뢰로 주로 이뤄졌고, 누군가 구매한 작품을 다른 사람이 다시 구매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굳이 이동을 고려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이런 흐름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샤시보다 액자가 더 큰 인기를 끌게 된 계기가 생겼죠.
[3] 17세기, 액자의 대중화

Painting by Louis Béroud depicting copyists in the Louvre
1792년, 프랑스 혁명정부가 들어서고 왕실 소장품의 국유화가 진행되면서, 수만 점의 그림들이 대중들에게 선보여집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오늘날 전시 모습처럼 작품을 전시하지 않았어요. 보여줄 작품이 너무 많다 보니, 전시장 천장과 바닥을 제외한 모든 벽면에 작품이 꽉차게 배치했죠. 그리고 빼곡한 디스플레이에 문제가 생깁니다. 각기 다른 작품이 마치 붙어있는, 하나의 작품처럼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던 거죠.
게다가 그림끼리 너무 딱 붙어있다보니, 모서리 부분이 훼손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어요. 결국 학예사들은 액자를 이용해서 작품과 작품의 경계를 만들고, 작품을 보호하기로 하는데요. 과정에서 엄청난 액자가 필요해지게 됩니다. 왕실 소장품 수만 점이 다 국유화되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직접 액자 제작 사업을 공모하기 까지 이르게 되었죠. 당시 이 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한 곳은 수티라는 곳이었어요.

루브르 박물관의 액자들
수티는 파리의 대표 전시회 살롱전에도 액자를 공급하던 명성이 있는 액자 제작 업체였는데요. 국유화로 대중에게 선보여질 작품들의 액자 제작을 맡으며, 이시기 엄청난 액자를 제작합니다. 오늘날 루브르에 걸려있는 작품들의 액자 대부분이 이 시기 수티에서 제작한 액자들이죠. 그리고 오늘날 다른 미술관에서 우리가 접하는 화려한 액자들도 수티의 액자를 참고해 만들어진 것이 많습니다.
이 액자들을 보면, 금칠이 되어서 화려한 것도 많고, 섬세하게 나무를 깎아서 장식적으로 만든, 조각 수준의 액자도 매우 많아요. 그중에는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할 만큼 그림보다 화려한 액자도 있고요. 과거 제단화가 당시의 건축 양식에서 따와 액자 문양을 만든 것처럼, 동시대의 유행하던 장식 문양을 화려하게 담아내면서 이시기의 액자도 뜨겁고 아름답게 발전했기 때문인데요.

Charles Angrand, Interior View of the Museum of Rouen, 1880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면서, 칸트나 데리다 같은 철학자들의 논의도 이어졌습니다. 액자도 작품의 일부로 봐야한다거나, 반대로 액자가 예술가의 창의성을 저해한다는 등의 의견을 내놓으며 액자에 대한 논쟁을 이어가기도 했죠. 그만큼 이 시기 액자들은 ‘미학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어요.
당시 만들어진 액자들은 대부분 그림보다 액자 틀이 높아 그림이 움푹 들어가 보이는 구조를 하고 있는데요. 이는 그림이 현실과 분리된 가상의 영역임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런 액자들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귀하다 평가받는 그림들에 주로 사용됐어요. 종교화나, 역사화, 왕실 초상화 같은 작품들에 이런 액자들이 주로 사용되었죠.

Cornelis Norbertus Gysbrechts, Trompe l'oeil. A Cabinet in the Artist's Studio, 1670-1671
반면, 평범한 일상을 그린 동시대의 화가들의 작품에는 납작한 액자들이 활용됩니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첫째로, 평범한 그림들에 사용하는 액자는 나라에서 규정해둔 형태가 있었습니다. 금색, 검정색, 나무색만 허용했죠. 화가들은 어쩔 수 없이 평범하고 납작한 액자를 활용해야 했는데요. 반면 주체적으로 평범한 액자를 쓴 시도도 있었습니다. 바로 인상주의 작가들의 케이스죠.
인상주의자들은 액자와 그림의 높이를 같게 해, 벽과 자연스럽게 융화시키는 평면 액자를 선호했습니다. 납작한 액자를 쓰면 그림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고, 덕분에 색채를 온전히 보여줄 수 있었어요. 또 장식이 적은 액자는 제작비가 저렴해 돈없고 인정받지 못하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좋은 선택지이기도 했고요. 인상주의 화가들은 액자를 통해 더 다양한 시도를 하기도 했는데요. 그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도전을 했던 건, 인상주의자들의 큰 어른, 카미유 피사로였습니다.
[4] 인상주의자들의 액자

Camille Pissaro, Self-Portrait, 1874
피사로는 같은 시기 활동한 인상주의자들보다 나이도 많았고, 성품도 온화한 편이었던 화가였어요. 그래서 인상주의자들이 존경하고 존중하던 화가였죠. 피사로의 또다른 특징은 색을 아주 잘 쓴다는 점이에요. 인상주의자 중에서도 손꼽히는 색감을 구사했죠. 색채학에 대한 지식도 있었고, 타고난 감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감각은 그림을 넘어 액자에까지 적용돼요.
1877년, 피사로는 하얀색 프레임의 액자를 살롱전에 처음 선보입니다. 비평가들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액자에 혹평을 쏟아냈죠. 하지만 피사로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옥수수색, 복숭아색, 라일락색 같은 파스텔톤의 액자를 만들어서 작품을 선보입니다. 이건 단순히 ‘새로운 액자를 써야겠다’하고 쓴 건 아니었고, 작품에 활용된 메인 색깔의 보색을 선정해 만들어낸 시도였어요. 일례로 핑크빛 작품이면 초록색 액자를, 푸른 빛 작품이면 노란색 액자를 쓰는 식이었죠. 이것이 당시 활동하던 인상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줍니다.

Vincent van Gogh, Mountains at Saint-Remy, 1889
클로드 모네, 에드가 드가, 폴 고갱, 메리 카사트 같은 작가들이 이런 색깔 있는 액자들을 저마다 제작해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이런 파스텔톤의 액자들은 ‘인상주의자들의 액자’라고 불리게 됩니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반 고흐도 액자의 색과 질감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그림과 어울리는 액자를 직접 만들기도 했죠. 하지만 고흐의 액자는 오늘날 딱 하나만 전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엔 다른 인상주의자들의 액자도 찾아볼 수 없어요. 여기엔 추정만이 남아있습니다.
당시 인상주의자들이 작품만으로도 핍박받았었던 존재였기 때문에 더 비난의 여지가 될만한 액자를 떼버렸을 것이라는 추정과, 인상주의자 내부에서 어떤 논의가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죠.

©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액자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습니다. 하지만 인상주의가 색채와 형태의 변화를 불러오며 미술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처럼, 액자에 대한 도전도 이후 다양한 액자를 탄생시켰어요. 액자의 형태도, 장식의 디테일도 매우 다양해졌죠.
[5] 이후의 액자들

Frida Kahlo, Diego and Frida, 1929-1944
일례로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작품 <디에고와 프리다>(1929-1944)에서 조개로 장식한 액자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결혼 15주년을 기념하며 디에고에게 선물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었어요. 얼굴의 반은 디에고로, 나머지 반은 칼로로 그려 이혼 후 다시 함께하게된 이들의 사랑이 단단하게 결합되길 염원했죠. 그리고 봉헌화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액자를 제작합니다.
봉헌화는 신에게 무언가를 염원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을 의미하는데요. 이 액자에 남녀를 상징하는 조개와 소라, 그리고 사랑과 열정을 상징하는 빨간 돌로 꾸며 이들의 사랑이 변치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냈어요. 이처럼 액자는 작품을 보조하는 수단을 넘어, 작품의 의미를 극대화하는 장치로 활용됩니다.

오늘날에는 더 다양한 형태의 액자가 등장하고 있어요. 과거의 액자를 파괴하면서 새로운 예술의 시작을 알리거나, 칼로의 작품처럼 액자에 은유적인 요소를 더해 작품의 의미를 극대화하거나, 액자 안에 파쇄기를 넣어 전례없는 작품을 탄생시키는 등 다양한 액자가 예술의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있죠. 또 점점 화려해지는 액자는 회화를 조각의 영역으로, 조각을 회화의 영역으로 끌고오며 더 다채로운 예술의 탄생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작품의 웅장함을 더하기 위해, 또 때로는 작품 그 자체에 집중시키기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온 액자들.
앞으로의 액자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까요?

©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
전시보러 가서 액자에 주목해본 적 있으신가요?
미술관에 가면 작품과 함께 항상 액자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관객에게 액자는 그림만큼 주목받지 못하고 있어요. 언제나 그림을 꾸며주는 역할 정도로만 여겨지고, 그 공마저도 딱히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액자는 그림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였어요. 그림에 대한 시대의 시선을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는 존재였기 때문이죠. 오늘 다룰 이야기는 액자의 역사입니다.
[1] 액자의 시작, 제단화
그림을 둘러싼 네모난 틀을 액자로 규정한다면, 가장 그 원형에 가까운 것은 고대 이집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사후세계로 갔다가 다시 시신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되살아난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시신은 방부처리해서 미라로 만들고, 초상화를 그려 영혼이 몸을 잘 찾을 수 있게 했죠. 그리고 미라를 만들 때 정교한 작업을 했던 것처럼 초상화 역시 액자까지 만들어서 고이 보관했습니다. 이때의 액자는 어떤 실용적 목적보다는 제의적이고 장식적인 목적으로 제작되었죠.
이후에는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액자같은 요소를 사용했어요. 제단화에서 그 형태를 볼 수 있는데요. 제단화는 교회의 제단 뒤편을 장식하는 그림을 의미합니다. 예배나 미사를 드릴 때 더 성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하고, 그 안에 담겨있는 종교적 교리들을 신도들이 되새기면서 신앙심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으로 그려졌는데요. 제단화를 자세히 보면, 여러 개의 그림이 붙어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요. 이렇게 한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종교화는 좀 지루합니다. 종교의 교리나 성경의 내용이라는 것은 결국 동일하기 때문에, 아무리 잘 그린 그림이더라도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죠. 결국 내용은 똑같으니까요. 그렇다보니 종교화에서 중요한 건, 실력보다는 연출력이었어요. 연출을 통해 종교의 권위를 극대화할 수 있어야 했죠. 그리고 이런 니즈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 제단화였습니다.
Jean Bellegambe, The Cellier Altarpiece, 1511-12
제단화는 펼쳐서 보는 그림이에요. 교회가 원하는 니즈에 맞춰서 메인 그림 옆에 날개를 달아 그림의 수를 늘리고, 제단화를 열고 닫을 때마다 새로운 이미지가 보이도록 연출했죠. 이런 다이나믹을 극대화하기 위해 제단화 바깥쪽, 제단화가 닫혀있을 때 보이는 모습은 어두운 채도로 현세의 모습을 그렸고, 제단화 안쪽, 열렸을 때 보이는 부분은 화려한 색체의 신의 세계를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찬송가가 울려퍼질 때 제단화를 열어 종교의 웅장함과 경외감을 극대화했어요.
종교의 권위를 극대화하기 위한 니즈에서 출발한 제단화는 여러 개의 그림이 붙어있기 때문에 각 그림들이 독립적으로 보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액자와 비슷한 형태로 나무를 깎아 그림들을 분리했어요. 그리고 종교화의 웅장함, 경외감을 극대화할 수 있게 건축에서 활용하는 장식적인 기법들이 함께 적용했어요. 때문에 제단화 대부분의 액자 부분은 건축물을 보는듯 입체적으로 제작되어있는 걸 볼 수 있죠.
실제 건축 용어가 제단화에도 사용됩니다. 제단화의 그림과 그림 사이는 ‘기둥’을 의미하는 필라스터(pilaster)라 부르고, 제단화 윗부분 뾰족한 장식은 중세 성당의 첨탑을 의미하는 피나클(pinacle)이라 부르죠. 이를 통해 제단화는 일개 그림이 아닌, 그 자체로 신의 공간처럼 보이게 되었어요. 작품의 가치는 단순한 그림 그 이상으로 끌어올려졌죠. 그리고 이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합니다.
The Ghent Altarpiece (1432) by Hubert and Jan van Eyck
1432년 제작된 겐트 제단화는 제단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데요. 원래 이 작품은 성 바프 대성당의 소장품이었어요. 그런데 1816년, 성당은 재정난을 이유로 작품 매각 공고를 냅니다. 그리고 공고 두 달만에 작품이 판매되었죠. 작품을 구매한 건 베를린 왕립 미술관이었는데요. 미술관 관장은 구매 후, 이 작품을 쪼개라고 지시합니다. 액자 형태로 나뉘어진 패널을 각각 분리하는 건 물론이고, 양면으로 그림이 그려져있는 패널화 특성을 고려해 앞면과 뒷면까지 쪼개라는 지시를 내린 건데요.
충격적이지만, 미술관 입장에서는 이렇게 하면 전시하기도 편하고 소장품 개수도 늘어나게 되니 일석이조였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쪼갠 것에 대한 반응은 매우 안좋았어요. 작품들이 액자 형태로 나뉘어져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개별적인 작품이 아닌 하나의 작품이었기 때문이죠. 후에 이게 문제시되면서 오늘날에는 다시 작품을 복원한 상태인데요. 이 일화는 액자의 탄생이 가져온 양면성을 보여줍니다. 작품의 가치를 끌어올림과 동시에,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며 파괴로 이어진 사례로 손꼽히죠.
마찬가지로 조각조각 나뉜 중세 제단화의 모습, 우피치 미술관
이후 액자는 패널화가 아닌, 단일한 작품에도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액자가 본격적으로 그림에 활용되기 시작한 건, 르네상스가 미술계를 한 차례 뒤바꾼 뒤인 17세기였어요.
[2] 르네상스
Louis Beroud, Salle Ruben musee du Louvre, 1904
이때는 기존 그림 주문자였던 교회 뿐만 아니라 왕실, 귀족 등 많은 부와 명예를 지닌 이들이 그림을 주문하곤 했습니다. 이들은 본인의 부와 명예를 강조하기 위해 작품을 최대한 근사하게 전시하고자 했어요. 액자는 작품이 가진 가치를 더 끌어올릴 수 있는 장치였기에, 자연스레 활용되기 시작하는데요. 이때에는 액자에 실용적인 목적이 더해집니다. 작품을 좀더 편하게 운송하고, 더 잘 보존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게 된 건데요. 이를 기록으로 남긴 예술가가 루벤스에요.
루벤스는 프랑스 왕실의 의뢰를 받고 작품을 제작하기로 합니다. 왕실 측에서는 그림 사이즈가 크니, 궁정 안에서 제작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요. 루벤스는 이를 거절해요. 궁정 안에 있는 것 자체가 엄청난 피로를 유발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본인 작업실에서 그림을 제작하는데요. 하지만 작품을 작업실에서 궁정으로 옮기는 것도 꽤나 피곤한 일이었어요. 그림 사이즈가 매우 컸기 때문입니다.
Peter Paul Rubens, Self-Portrait, 1622
이 시기 큰 사이즈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은 두 가지였어요. 루벤스가 제안받은 것처럼 전시될 공간에서 그리는 것과, 작업실에서 제작한 후 옮기는 것이었죠. 하지만 당시의 운송수단으로 큰 사이즈의 그림을 옮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안한게, 나무틀에 천을 고정시켜서 그림을 그리고 난 뒤, 그림을 잘 말려서 다시 떼내고, 이 천을 둘둘 말아 운송하는 방법이었어요. 그렇다보니, 작품을 설치할 때에는 다시 그림이 그려진 천을 팽팽하게 당겨서 설치해야 했는데요. 액자가 있으면 팽팽하게 당긴 천을 고정하기가 쉬웠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작품을 원래 모양으로도 만들수 있고 또 잘 보존할 수 있는 액자의 중요성은 높아지게 되었죠. 루벤스 역시 작업실에서 그린 그림을 천 부분만 떼어내, 마차에 실어서 궁정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요. 이 시기 루벤스가 작품 운송을 위해 지인과 나눈 편지를 보면, ‘그림 가장자리에는 생략해도 상관 없는 디테일을 그려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림이 샤시(chassis)에 걸릴 때 접힐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적어두었어요.
Peter Paul Rubens, Portrait of Marie de Medici, 1622
샤시는 당시에도 창문틀을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액자를 부르는 명칭은 카드르(cadre)라는 것이 따로 있었죠. 사실 샤시와 액자의 역할은 똑같습니다. 둘둘 말았던 그림을 다시 팽팽하게 펴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죠. 차이점은 ‘이동성’에 있어요. 액자는 벽에 걸 수도 있고 뗄 수도 할 수 있지만, 샤시는 진짜 창문틀처럼 액자 째로 벽에 붙여 고정시켜 버려요.
과거에는 샤시가 액자보다 성행했습니다. 당시까지는 작품 주문이 귀족들의 의뢰로 주로 이뤄졌고, 누군가 구매한 작품을 다른 사람이 다시 구매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굳이 이동을 고려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이런 흐름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샤시보다 액자가 더 큰 인기를 끌게 된 계기가 생겼죠.
[3] 17세기, 액자의 대중화
Painting by Louis Béroud depicting copyists in the Louvre
1792년, 프랑스 혁명정부가 들어서고 왕실 소장품의 국유화가 진행되면서, 수만 점의 그림들이 대중들에게 선보여집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오늘날 전시 모습처럼 작품을 전시하지 않았어요. 보여줄 작품이 너무 많다 보니, 전시장 천장과 바닥을 제외한 모든 벽면에 작품이 꽉차게 배치했죠. 그리고 빼곡한 디스플레이에 문제가 생깁니다. 각기 다른 작품이 마치 붙어있는, 하나의 작품처럼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던 거죠.
게다가 그림끼리 너무 딱 붙어있다보니, 모서리 부분이 훼손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어요. 결국 학예사들은 액자를 이용해서 작품과 작품의 경계를 만들고, 작품을 보호하기로 하는데요. 과정에서 엄청난 액자가 필요해지게 됩니다. 왕실 소장품 수만 점이 다 국유화되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직접 액자 제작 사업을 공모하기 까지 이르게 되었죠. 당시 이 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한 곳은 수티라는 곳이었어요.
루브르 박물관의 액자들
수티는 파리의 대표 전시회 살롱전에도 액자를 공급하던 명성이 있는 액자 제작 업체였는데요. 국유화로 대중에게 선보여질 작품들의 액자 제작을 맡으며, 이시기 엄청난 액자를 제작합니다. 오늘날 루브르에 걸려있는 작품들의 액자 대부분이 이 시기 수티에서 제작한 액자들이죠. 그리고 오늘날 다른 미술관에서 우리가 접하는 화려한 액자들도 수티의 액자를 참고해 만들어진 것이 많습니다.
이 액자들을 보면, 금칠이 되어서 화려한 것도 많고, 섬세하게 나무를 깎아서 장식적으로 만든, 조각 수준의 액자도 매우 많아요. 그중에는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할 만큼 그림보다 화려한 액자도 있고요. 과거 제단화가 당시의 건축 양식에서 따와 액자 문양을 만든 것처럼, 동시대의 유행하던 장식 문양을 화려하게 담아내면서 이시기의 액자도 뜨겁고 아름답게 발전했기 때문인데요.
Charles Angrand, Interior View of the Museum of Rouen, 1880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면서, 칸트나 데리다 같은 철학자들의 논의도 이어졌습니다. 액자도 작품의 일부로 봐야한다거나, 반대로 액자가 예술가의 창의성을 저해한다는 등의 의견을 내놓으며 액자에 대한 논쟁을 이어가기도 했죠. 그만큼 이 시기 액자들은 ‘미학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어요.
당시 만들어진 액자들은 대부분 그림보다 액자 틀이 높아 그림이 움푹 들어가 보이는 구조를 하고 있는데요. 이는 그림이 현실과 분리된 가상의 영역임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런 액자들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귀하다 평가받는 그림들에 주로 사용됐어요. 종교화나, 역사화, 왕실 초상화 같은 작품들에 이런 액자들이 주로 사용되었죠.
Cornelis Norbertus Gysbrechts, Trompe l'oeil. A Cabinet in the Artist's Studio, 1670-1671
반면, 평범한 일상을 그린 동시대의 화가들의 작품에는 납작한 액자들이 활용됩니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첫째로, 평범한 그림들에 사용하는 액자는 나라에서 규정해둔 형태가 있었습니다. 금색, 검정색, 나무색만 허용했죠. 화가들은 어쩔 수 없이 평범하고 납작한 액자를 활용해야 했는데요. 반면 주체적으로 평범한 액자를 쓴 시도도 있었습니다. 바로 인상주의 작가들의 케이스죠.
인상주의자들은 액자와 그림의 높이를 같게 해, 벽과 자연스럽게 융화시키는 평면 액자를 선호했습니다. 납작한 액자를 쓰면 그림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고, 덕분에 색채를 온전히 보여줄 수 있었어요. 또 장식이 적은 액자는 제작비가 저렴해 돈없고 인정받지 못하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좋은 선택지이기도 했고요. 인상주의 화가들은 액자를 통해 더 다양한 시도를 하기도 했는데요. 그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도전을 했던 건, 인상주의자들의 큰 어른, 카미유 피사로였습니다.
[4] 인상주의자들의 액자
Camille Pissaro, Self-Portrait, 1874
피사로는 같은 시기 활동한 인상주의자들보다 나이도 많았고, 성품도 온화한 편이었던 화가였어요. 그래서 인상주의자들이 존경하고 존중하던 화가였죠. 피사로의 또다른 특징은 색을 아주 잘 쓴다는 점이에요. 인상주의자 중에서도 손꼽히는 색감을 구사했죠. 색채학에 대한 지식도 있었고, 타고난 감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감각은 그림을 넘어 액자에까지 적용돼요.
1877년, 피사로는 하얀색 프레임의 액자를 살롱전에 처음 선보입니다. 비평가들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액자에 혹평을 쏟아냈죠. 하지만 피사로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옥수수색, 복숭아색, 라일락색 같은 파스텔톤의 액자를 만들어서 작품을 선보입니다. 이건 단순히 ‘새로운 액자를 써야겠다’하고 쓴 건 아니었고, 작품에 활용된 메인 색깔의 보색을 선정해 만들어낸 시도였어요. 일례로 핑크빛 작품이면 초록색 액자를, 푸른 빛 작품이면 노란색 액자를 쓰는 식이었죠. 이것이 당시 활동하던 인상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줍니다.
Vincent van Gogh, Mountains at Saint-Remy, 1889
클로드 모네, 에드가 드가, 폴 고갱, 메리 카사트 같은 작가들이 이런 색깔 있는 액자들을 저마다 제작해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이런 파스텔톤의 액자들은 ‘인상주의자들의 액자’라고 불리게 됩니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반 고흐도 액자의 색과 질감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그림과 어울리는 액자를 직접 만들기도 했죠. 하지만 고흐의 액자는 오늘날 딱 하나만 전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엔 다른 인상주의자들의 액자도 찾아볼 수 없어요. 여기엔 추정만이 남아있습니다.
당시 인상주의자들이 작품만으로도 핍박받았었던 존재였기 때문에 더 비난의 여지가 될만한 액자를 떼버렸을 것이라는 추정과, 인상주의자 내부에서 어떤 논의가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죠.
©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액자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습니다. 하지만 인상주의가 색채와 형태의 변화를 불러오며 미술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처럼, 액자에 대한 도전도 이후 다양한 액자를 탄생시켰어요. 액자의 형태도, 장식의 디테일도 매우 다양해졌죠.[5] 이후의 액자들
Frida Kahlo, Diego and Frida, 1929-1944
일례로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작품 <디에고와 프리다>(1929-1944)에서 조개로 장식한 액자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결혼 15주년을 기념하며 디에고에게 선물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었어요. 얼굴의 반은 디에고로, 나머지 반은 칼로로 그려 이혼 후 다시 함께하게된 이들의 사랑이 단단하게 결합되길 염원했죠. 그리고 봉헌화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액자를 제작합니다.
봉헌화는 신에게 무언가를 염원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을 의미하는데요. 이 액자에 남녀를 상징하는 조개와 소라, 그리고 사랑과 열정을 상징하는 빨간 돌로 꾸며 이들의 사랑이 변치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냈어요. 이처럼 액자는 작품을 보조하는 수단을 넘어, 작품의 의미를 극대화하는 장치로 활용됩니다.
오늘날에는 더 다양한 형태의 액자가 등장하고 있어요. 과거의 액자를 파괴하면서 새로운 예술의 시작을 알리거나, 칼로의 작품처럼 액자에 은유적인 요소를 더해 작품의 의미를 극대화하거나, 액자 안에 파쇄기를 넣어 전례없는 작품을 탄생시키는 등 다양한 액자가 예술의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있죠. 또 점점 화려해지는 액자는 회화를 조각의 영역으로, 조각을 회화의 영역으로 끌고오며 더 다채로운 예술의 탄생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작품의 웅장함을 더하기 위해, 또 때로는 작품 그 자체에 집중시키기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온 액자들.
앞으로의 액자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