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의 역사: 예술가들은 언제, 왜, 어떻게 자화상을 그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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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Van Eyck, Portrait of a man (1433) © Public Domain


최초의 자화상이라 추정되는 건 얀 반 에이크의 <남자의 초상>입니다. 제목은 남자의 초상이지만, 아마 자화상일 거라 추정돼요. 그리고 자화상이 맞다면, 이게 최초의 자화상일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연구 중이에요. 때문에 작품을 소장한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작품 캡션에 'Self Portrait?'이라 물음표를 달아두었죠. 


미스테리한 작품이지만, 작품은 단순합니다. 빨간 색 터번을 쓴 남성을 그려냈죠. 구도 역시 얼굴부터 가슴까지 그려내며 전형적인 인물화, 초상화의 구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림은 세로 25cm, 가로 19cm로 A4 용지 보다는 조금 큰 사이즈입니다. 


이 자화상은 얀 반 에이크가 일종의 '명함'처럼 제작한 겁니다. 본인에게 작품을 의뢰할 고객에게 본인의 그림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돼요. 이건 그림의 액자에서 추론한 정보입니다. 액자를 보면, 상단과 하단에 글자가 적혀있는 걸 볼 수 있어요. 그리스어로 적힌 걸 번역하면, 상단의 문구는 'As Well as I Can', '내가 할 수 있는 한'이라는 내용입니다. 이건 얀 반 에이크가 그림을 그리는 모토였어요. 


하단의 문구는 단순해요. '얀 반 에이크, 1433년 10월 21일'이라는 내용입니다. 보통 그림에 정보를 새길 때에는 연도 정도만 적습니다. 많이 적어도 월 정도까지만 적어두죠. 하지만 얀 반 에이크는 일자까지 적었어요. 이건, 본인이 작업을 일 단위로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음을 어필하기 위함이었을 거라 추정돼요. 


상당히 자기 PR적인 목적을 가지고 그린 초상화는 에이크의 열정을 보여줍니다. 이 그림 덕분이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1433년 당시 얀 반 에이크는 엄청난 작품을 의뢰받았다고 해요. 세기의 명작이라 손꼽히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도 1434년 초에 그려졌죠. 



Jan Van Eyck, The Arnolfini Portrait (1434) © Public Domain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이 작품은 비밀스러운 요소가 가득합니다. 전세계 논문에 가장 많이 실린 작품 1위에 오르기도 했죠. 우리나라에서는 푸틴 닮은 남성이 있는 그림으로도 알려져 있고요. 작품은 남녀 두 명이 집 안에서 결혼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남녀 사이로는 거울이 하나 보이는데, 이 거울을 자세히 살펴보면 얀 반 에이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런데, 너무 작게 그렸습니다.  얀 반 에이크를 보려면 매우 자세히 살펴봐야 하죠. 


이렇게 작게 그린 건, 당시 화가들이 즐겨그리던 방법이었습니다. 이유는 여러가지로 추정돼요. 의뢰받아 그린 그림에 서명을 넣기 애매해서 등이 거론돼죠. 하지만 가장 유력한 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자화상은 14세기, 르네상스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어요. 르네상스는 '다시 태어나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이탈리아 말이에요. 이 시기 전까지 미술 작품은 '신'을 중심으로 그려졌습니다. 당시엔 글을 읽고 쓸줄 아는 사람이 적었기에, 신화 이야기나 종교의 교리를 쉽게 전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그림들이 이야기하는 교훈은 한 가지였습니다. '인간은 욕망을 감춰야 한다'는 것. 신의 노여움을 살 수 있으니, 먹고, 자고, 노는 것 등 욕망을 참고 자신을 수련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교훈은 곧 사람들의 불만을 일으키게 돼요. 이윽고 신 중심 사회에서 벗어나 이제는 인간 중심의 사회로 나아가자는 흐름이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사상의 변화가 나타나게 된 것이 르네상스 시기였어요.


이 과정에서 예술가의 역할도 달라집니다. 과거에는 이미 있는 신, 성경 이야기를 그림화하는 기술자의 역할이었다면, 르네상스 시기에 접어들면서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본인의 예술을 선보이는 예술가가 된 것이죠. 하지만, 변화가 일어나는 과도기였기에 자화상을 그리는 건 다소 소극적이었습니다. 



Raphael, The School of Athens (1509) © Public Domain


대표적인 건 라파엘로의 그림이에요. 라파엘로는 르네상스의 3대 거장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가 손꼽히죠.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에 역시 소극적 형태의 자화상이 담겨있습니다. 


이 그림은 상당한 사이즈를 자랑합니다. 세로 폭이 5m, 가로 폭이 7.7m나 되죠. 큰 사이즈의 그림에는 50명 남짓한 인물이 등장해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가들이 있고, 그 외에도 피타고라스나 유클리드 같은 수학자, 자연과학자, 예술가 등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중엔 라파엘로도 담겨 있어요.


라파엘로는 관객 기준으로 그림 오른쪽 아래, 제일 구석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벽에 붙어 있는데다 기둥 끝자락에 있어 관객의 눈길을 받기 쉽지 않은 자리에 있죠. 특이점이 있다면, 그림 속 인물 중 유일하게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자기 신분을 숨긴 채, 그림 속에 군중과 함께 그려낸 소극적인 자화상을 '입회 자화상'이라 부릅니다. 예술가의 역할이 커지긴 했지만 스스로를 그리긴 애매했던 분위기 속, 자신을 은근하게 드러내는 방식이었죠. 또 당시 그림을 의뢰하거나 구매하는 사람들은 굳이 화가의 초상화를 구매하고 싶어하진 않았기에, 이런 소극적 형태의 자화상은 인기를 끕니다. 



Albrecht Dürer, Self Portrait (1500) © Public Domain


이후 1500년에 접어들면서 분위기는 조금 달라져요. 점차 본인을 부각하는 자화상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죠. 대표적인 것이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입니다. 오늘날 뒤러는 자화상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많은 자화상을 남겼는데요. 이 작품에서는 스스로를 신처럼 그려냅니다. 크게 세 가지 요소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죠.


첫째로는 자세입니다. 보통 인물화는 정면을 응시하기보다, 살짝 몸을 틀어 측면을 보여줘요. 맨 처음 살펴본 얀 반 에이크의 자화상이 전형적인 예시죠.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화는 대부분 종교화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가 그렇게 그려졌어요. 종종 왕이나 왕비정도까지는 그렇게 그려졌고요. 하지만 뒤러는 정면 구도를 선택하며 본인을 신격화합니다.


둘째로 봐야할 것은 작품에 적은 글이에요. 뒤러는 본인 얼굴 옆쪽으로 라틴어 글자를 적어두었는데, 이걸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 알브레히트 뒤러는 스물 여덟의 나를 내가 가진 색깔 그대로 그렸다'. 신처럼 본인을 그렸으면서, 있는 그대로 그렸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상당한 자신감의 표출이에요. 


이 문장은 다른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해석하면, '나의 예술적 재능을 신에게 부여받았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죠. 본인이 가진 실력이 천상계 급이라는 의미를 담아, 어떤 해석으로 봐도 화가로서 자신감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작품에 한 서명이에요. 오늘날엔 서명이 있는 작품이 익숙하지만, 과거엔 아니었습니다. 뒤러가 한 서명이 예술가가 남긴 최초의 서명이죠. 르네상스 시기 전까지 예술가는 기술자로 여겨졌기에, 누가 그림을 그렸는지는 중요치 않았어요. 그래서 화가들은 굳이 서명을 하지 않았죠. 하지만 뒤러는 넘치는 자기애를 글 뿐만 아니라 서명으로도 표현합니다. 



Rambrandt, Self Portrait (1642)


자화상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예술가는 렘브란트입니다. 렘브란트는 젊은 시절부터 노인이 된 후까지 자화상만 무려 100점이나 그렸던 인물이에요. 이건 자기애라기보다, 일종의 자기 기록이었습니다. 변화해가는 자신의 상황을 그림에 고스란히 담아낸 덕분이죠. 그래서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그림으로 쓴 자서전'이라고도 불려요.


렘브란트는 젊은 시절 일찍이 성공한 예술가입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그림으로 돈도 많이 벌었죠. 그래서 그의 청년기 자화상을 보면, 금으로 된 장신구를 착용하거나, 과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모습을 볼 수 있어요. 당시엔 렘브란트에게 돈이나 성공이 큰 의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Rambrandt, Self Portrait (1669)


그런데 중년기에 접어들면서 이 풍요로움이 사라지게 돼요. 개인사 때문이었습니다. 렘브란트의 부모님, 자식, 아내가 순서대로 세상을 떠나며 렘브란트의 인생은 급격히 달라지게 돼죠. 연속적으로 가까운 이들이 세상을 떠나자, 렘브란트는 심리적으로 무너지는 경험을 합니다. 결국 파산까지 했고요. 


이후 그려진 노년기 자화상은 젊은 시절의 자신만만함이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자조하듯 담담한 눈빛을 하고 있죠. 복장도 많이 남루해졌고요. 이처럼 렘브란트는 자신의 심리 상태나, 시기별로 추구하던 가치를 자화상에 그려내며 자신의 인생을 기록하듯 그려냈어요. 



Frida Kahlo, Wounded Deer (1946)


자화상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프리다 칼로죠. 칼로 역시 자신의 상황을 자화상을 통해 담아냈는데요, 비극적이라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인생을 살았습니다. 10대 때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신체 장애를 얻었고, 30번의 수술을 진행했지만 평생 휠체어 생활을 해야 했죠. 


이후 21살 연상의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했지만 리베라는 엄청난 바람둥이였어요. 칼로의 여동생과도 불륜을 저질렀죠. 이 스트레스로 칼로는 수 차례 유산을 겪게 됩니다. 칼로의 그림 중 <상처 입은 사슴>은 그의 상처를 잘 보여줘요. 화살 9개를 맞고 피흘리며 주저앉은 사슴을 그렸는데, 사슴의 얼굴은 프리다 칼로를 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상처받은 자신을 표현한 겁니다. 


삶에서 겪은 아픔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려내, 프리다 칼로는 초현실주의 작가로 분류되곤 합니다. 하지만 칼로는 스스로를 '누구보다 현실을 그리는 작가'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서 동시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어 그림이 치유가 된다고 언급합니다. 



반 고흐의 자화상 © The Art Newspaper


초상화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화가, 마지막으로는 반 고흐를 들 수 있습니다. 반 고흐가 작품 활동을 한 시간은 10년 남짓으로 매우 짧아요. 그럼에도 남긴 그림이 2,000점이나 될 정도로 다작했습니다. 그 중에서 자화상은 36점이나 돼요. 2천 점 중에 36점이면 적은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미술사에서 고흐보다 자화상을 많이 그린 사람은 렘브란트 정도 밖에 없다고 합니다. 


고흐가 자화상을 많이 그린 데에는 어쩔 수 없는 이유도 있었어요. 모델을 쓰기에는 우리 모두가 알듯, 반 고흐가 너무 가난했습니다. 또 친구에게 모델을 부탁하기엔 고흐 성격이 너무 괴팍했어요. 그렇다 보니, 술집이나 카페에서 손님을 그린 것 말고는 인물화를 그린 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고흐는 불가피하게 자화상을 많이 그렸는데, 앞서 살펴본 렘브란트처럼 자기 기록 목적으로 그린 것도 있습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에도 자화상을 그렸고, 본인의 귀를 자른 후에도 붕대로 감싼 귀가 잘 보이게 자화상을 그렸어요. 이렇게나 많이 그렸지만,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엔 이런 내용을 담았습니다. "나를 알기 어려운 것처럼, 그림 중에서도 자화상을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흐는 살아있는 동안 예술가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자신을 그려냈습니다. 어쩌면 이런 노력이 오늘날 고흐를 세계적인 예술가로 올려놓은 이유가 아닐까 떠올려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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