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의 날: 노동자를 그려낸 예술가와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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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림이 그려진 건 수천 년 된 일이지만, 근로자, 노동자를 그린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되었어요. 오랜 시간 동안 예술 작품에 그려질 수 있는 존재들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긴 기간 동안 그림에 그려지던 건, 주로 성경이나 신화 속 인물들이었어요. 르네상스 시기 접어들면서부터 인본주의 사상이 도래하며 인물이 그려지기 시작했는데, 대다수는 교황, 왕, 귀족들로 한정되었죠. 노동자 계급은 초상화를 의뢰할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탓에 그림에 담기기가 쉽지 않았는데요. 이런 흐름이 근대에 이르러서 조금씩 바뀌면서 다양한 노동자가 그림에 담기기 시작합니다. 

 

 

노동자를 그려낸 초창기 그림

Gustave Courbet, The Stonebreaker, 1849

Gustave Courbet, The Stonebreaker, 1849


우리가 맨 먼저 살펴볼 그림은, 1849년 그려진 구스타브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입니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돌을 깨는 인부 두 사람을 그렸어요. 그림을 검색해 보면, 왼쪽의 젊은 인부는 깨뜨린 돌을 포장해서 나르고 있고, 오른쪽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인부는 망치를 들고 돌을 깨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캔버스에 거의 꽉 차게 그려져 있는 모습이죠.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보았을 때는 크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그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처음 선보여졌을 당시 정치계, 미술계 양쪽에서 어마어마한 비난을 받았어요. 우선 정치적으로는, 이 그림이 그려진 당시 프랑스 상황을 살펴보아야 하는데요. 이 시기 프랑스는 1848년 일어난 2월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막 수립된 직후였고, 같은 해 6월 노동자들의 봉기가 군에 의해 진압되며 좌우 갈등이 팽팽하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흐름 속 인부들, 노동자를 그린 건 사회주의적 뉘앙스를 갖게 되었어요. 그림 속 인물을 보면,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아요. 이건 특정한 인물을 표현하려고 한 게 아니라, ‘노동자’라는 집단 자체를 묘사하려 한 연출로 읽히면서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도발로 해석되었습니다. 


쿠르베의 또다른 작품 Bonjour Monsieur Courbet, 1854, Musée Fabre 소장

쿠르베의 또다른 작품 Bonjour Monsieur Courbet, 1854, Musée Fabre 소장


한편, 미술 쪽에서도 비난이 있었어요. 이 그림은, 크기가 매우 큽니다. 세로 165센티, 가로 257센티. 웬만한 성인 여성만큼의 높이입니다. 당시에 이 정도 크기의 그림은 대부분 종교화, 신화화, 역사화 같은 그림들이었어요. 많은 이들에게 감상되고 전해져야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담아낸 것들을 아름답게 그려내곤 했는데요. 이 그림은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답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평론가들의 시선에선, 그림으로서의 가치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이죠. 

 


구스타브 쿠르베: 다루는 것 자체가 이슈, 사실주의적 노동자들

미술계에서 금기시하던 체모를 모두 그려낸 쿠르베의 누드화 Femme nue couchée, 1862, Private collection

미술계에서 금기시하던 체모를 모두 그려낸 쿠르베의 누드화 Femme nue couchée, 1862, Private collection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 이 작품은 독일 드레스덴에 소장되어 있다가 공습 시기 소실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신 고화질의 이미지가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요. 작품을 보면 붓질이 매우 거칠고, 자유로운 것을 볼 수 있어요. 이런 화풍은 훗날 인상주의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습니다. 그리고 사실주의에는 이런 단순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더 많은 내용이 담겨있어요.


우선 사실주의는 사실처럼 잘 그려서 사실주의가 아니라, 실제 현실을 담아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그림에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것이에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 매일 특별하진 않습니다. 사실주의 화풍도 그런 일상적 성격을 가져요.


Eugène Delacroix, Liberty Leading the People, 1830, Louvre Museum 소장

Eugène Delacroix, Liberty Leading the People, 1830, Louvre Museum 소장

Sandro Botticelli, The Birth of Venus, 1484–1486, Uffizi Gallery 소장

Sandro Botticelli, The Birth of Venus, 1484–1486, Uffizi Gallery 소장


과거 회화 작품을 보면 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있었습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나, <비너스의 탄생> 같은 그림들. 어마어마하게 드라마틱한 모습이죠. 하지만 쿠르베의 <돌을 깨는 사람들>은 이야기가 없음. 인부 두 사람이 돌을 깨는 것이 전부입니다. 시작도, 끝도, 절정도 없는 반복되는 일상을 담담하게 담아내면서, 회화에 늘 존재하던 서사적 시간성을 제거했죠. 


그리고 작품은 노동자를 그렸다는 점에서 <돌 깨는 사람들>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이나 <만종>과 비교되기도 하는데요. 밀레의 농민은 황금빛 석양에 종교적 경건함을 연출하고, 전원적인 분위기를 담아냈습니다. 부르주아 관객이 ‘아름답게’ 소비할 수 있는 그림들이죠. 하지만 쿠르베의 인부는 어떤 아름다운 연출도 없이 흙빛 그대로 제시했어요. 그래서 ‘밀레는 농민을 시로 만들었고, 쿠르베는 그 시조차 거부했다’고 대조되기도 하죠.


Jean-François Millet, The Gleaners, 1857. Musée d'Orsay 소장

Jean-François Millet, The Gleaners, 1857. Musée d'Orsay 소장

Jean-François Millet, The Angelus, 1857–1859, Musée d'Orsay 소장

Jean-François Millet, The Angelus, 1857–1859, Musée d'Orsay 소장


쿠르베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어요. ‘천사 그림을 원한다면 내 앞에 천사를 데려오라’는 말입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려 한 작가의 고집스러운 예술관이 느껴지는 문장입니다. 이런 쿠르베의 예술관은, 사실주의라는 장르를 탄생시키며 오늘날 가장 생생한 노동자를 그린 그림으로 손꼽히게 했어요. 

 

 

빈센트 반 고흐: 박애주의적 시선으로 바라본 노동자들

Vincent van Gogh, The Potato Eaters, 1885, Van Gogh Museum 소장

Vincent van Gogh, The Potato Eaters, 1885, Van Gogh Museum 소장


고흐는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기 직전, 목사가 되겠다는 목표로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동료 전도사들과 갈등이 생기며, 누구와도 소통할 필요 없고, 혼자서 일할 수 있는 직업인 화가가 되기로 해요. 대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박애주의를 그림에 담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고흐의 초기작을 보면, 농민, 노동자 등 사회적으로 부유함과는 거리가 먼,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인물들을 그려내곤 했는데요. 그런 고흐가 그린 인부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 2점 있습니다. 


첫째로는 고흐의 활동 초기인 1885년 그려진 <감자 먹는 사람들>이에요. 이 그림을 보면, 다섯 명의 농부 가족이 식사하는 걸 볼 수 있는데요. 일반적인 인물화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대개 인물화는 얼굴을 가장 많이 공들이고, 다음으로 손, 다음으로 옷 묘사에 신경 쓰는데요.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남긴 편지에서 이들의 ‘손’을 강조하려고 노력했다고 언급해요. 그림 속 농부들의 손을 보면 매우 거친 걸 보여주는데, 고흐는 ‘감자를 집어먹는 손으로 땅을 파서, 정직하게 자기 음식을 벌어먹은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Vincent van Gogh, The Red Vineyard, 1888, Pushkin Museum of Fine Arts 소장

Vincent van Gogh, The Red Vineyard, 1888, Pushkin Museum of Fine Arts 소장


나머지 한 점은 고흐 생전에 유일하게 판매된 작품으로 기록된, <붉은 포도밭>입니다. 붉게 단풍이 물든 포도밭에서 인부들이 허리 굽혀 포도를 따고 있는 모습을 그렸죠. 당시 고흐는 아를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은 폴 고갱과 함께 늦은 오후 산책을 나섰다고 하는데요. 그날 그들은 늦은 가을 햇빛 아래, 한창 포도를 따고 있는 농민들을 마주칩니다. 당시 고흐가 있던 아를 지역의 포도 수확은 보통 9월이면 끝났지만, 그해는 작황이 풍성해 10월까지 이어졌다고 해요. 고흐는 그 풍경을 눈에 하나하나 담은 뒤, 11월에 기억에 의지해 이 그림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14개월 뒤, 400프랑에 판매되었어요. 당시 이 그림을 산 건 안나 보흐라는 벨기에 화가였습니다. 고흐의 친한 친구로 알려진 외젠 보흐의 친누나였다고 하는데요. 안나 보흐는 전위적인 미술을 했던 탓에 돈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자신보다 더 힘든 상황에 있는 동료 화가들의 작품을 구매하며 지지하고 연대했습니다. 그렇게 고흐의 작품도 사게 되었다고 하죠. 그림으로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던, 예술가이기 전에 노동자였던 이들이 서로 도운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아름답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케테 콜비츠: 비극의 주인공이 된 노동자들

Käthe Kollwitz, The March of the Weavers in Berlin, 1897

Käthe Kollwitz, The March of the Weavers in Berlin, 1897


케테 콜비츠는 독일 민중미술의 어머니라 불리는 여성 화가입니다. 그가 민중미술을 다루게 된 데는 계기가 있었어요. 우선, 제1차 세계대전 때 아들을 잃었습니다. 자원입대한 둘째 아들이 전쟁에 나갔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었는데요. 이후 제2차대전 때에는 손자가 전쟁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이런 사건들을 계기로 콜비츠는 노동자, 군인 같은 평범한 인물들의 모습을 담은 민중미술 작품을 그려나가요. 그리고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작품은 1897년 작, <직조공 봉기>입니다.


이 그림은 콜비츠가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 베를린의 극장에서 본 연극 <직조공들>을 보고 영감받아 그리게 된 그림이에요. 연극 <직조공들>은 이슈가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연극이 만들어지기 50년 전, 독일 프로이센의 직조 공장 직원들이 낮은 임금과 부당한 처우에 저항하며 폭동을 일으켜요. 이 폭동은 오늘날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탄생 신호’로 여겨지고 있는데요. 당시 진압을 위해 프로이센 군대가 출동해, 직조공들을 향해 발포하면서 11명이 사망합니다. 이후, 이 사건은 시로, 소설로, 연극으로 만들어지게 돼요. 


베를린 경찰은 이런 작품들을 모두 검열했습니다. 연극 <직조공들>도 공연 금지 조치를 받았고, 이런 검열에도 회원제 사설 극장에서 비밀리에 상연되었죠. 콜비츠는 이 연극을 보고 집에 돌아와, 전까지 그리던 그림을 모두 중단하고 직조공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케테 콜비츠의 직조공 연작, 1893–1897

케테 콜비츠의 직조공 연작, 1893–1897

케테 콜비츠의 직조공 연작, 1893–1897

케테 콜비츠의 직조공 연작, 1893–1897


콜비츠는 직조공 이야기를 여섯 점의 연작으로 제작했어요. 가난에 지친 가족의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시작해서, 가난 때문에 이 가족 중 아이가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내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술집에 직조공들이 모여 봉기를 모의하는 그림, 이들이 마침내 행진하는 그림, 그리고 돌격하는 그림과 군의 발포 이후의 처참한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마무리하죠.


너무 잔인하고 처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콜비츠의 그림은 그래서 더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당시 직조공들의 이야기를 다룬 예술 작품들은, 직조공들의 승리로 마무리 지으며 해피엔딩을 추구하곤 했는데요. 콜비츠는 그들의 비참한 현실이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노동자 계급을 동정의 대상이 아닌 비극의 주체로 그린 최초의 본격적 시도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1898년, 콜비츠가 31살이 되던 해 베를린 대전시회에 출품되는데요. 당시 콜비츠는 무명에 가까운 화가였지만, 금메달 수여를 제안받습니다. 


1927년의 케테 콜비츠. 사진: Hugo Erfurth

1927년의 케테 콜비츠. 사진: Hugo Erfurth


그런데 이 수상 소식에 황제 빌헬름 2세가 개입해요. ‘여성에게 메달을 주는 건 도가 지나친 일이다’라는 이유를 들었는데요. 당시 사람들은 이게 성차별주의적인 데다가 작품의 내용에 대한 검열이 들어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시민의 반응 덕분에 작품은 이듬해 드레스덴 미술관에 전시되게 되었어요. 그리고 미술관 관장은 작센 왕(독일은 황제가 있고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에 또 왕이 있는 구조입니다.)에게 콜비츠의 금메달 수여를 다시 건의합니다. 이윽고 군주는 이를 받아들여요.


그렇게 콜비츠는 황제가 아닌 왕에게 메달을 받게 되는데요. 오늘날에는 당시 콜비츠가 황제에게서 메달을 한번 빼앗긴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습니다. 만약 황제에게 메달을 받았더라면, 체제 안에서 길들여진 화가로 여겨질 수 있었을 테지만, 오히려 이런 이야기가 그의 작품이 가진 날카로움을 더 잘 보여줄 수 있었고, 대중의 공감대를 얻은 걸 잘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죠.




빋피 이정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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