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빈센트 반 고흐의 <꽃 피는 아몬드 나무>(1890)

Vincent van Gogh, Almond blossom, 1890
이 작품은 고흐 작품 중 가장 전성기라고 평가받는 1890년에 그려진 작품이에요. 당시 고흐는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찾아서, 프랑스 남부 시골 도시인 ‘아를’로 갔습니다. 아를은 이전까지 고흐가 활동하던 프랑스 도심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자아내는 곳이었어요. 고흐가 남긴 편지에 따르면, 햇빛의 질감까지도 도심과는 달랐다고 하죠.
고흐는 이곳에서 아름다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자연 풍경을 그리곤 했는데요. 그중에서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 <꽃 피는 아몬드 나무>입니다. 작품은 민트색 배경에, 하얀 꽃이 핀 초록색 아몬드 나무를 캔버스에 꽉 채워 그린 모습이에요. 고흐 작품 중에서는 드물게 따뜻한 색인 노랑, 빨강, 주황이 거의 쓰이지 않은 작품입니다. 작품의 주조색은 민트, 초록, 흰색이죠. 그렇다보니 차가운 계열의 색이 많이 쓰였다 볼 수 있는데요.
실제로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는 3월 중순이었습니다. 아직 봄이 찾아오기 전이었고 심지어 추웠죠. 당시 고흐가 쓴 편지를 보면, “여기는 엄청 얼어붙고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다. 바람이 많이 불고 하늘이 험악한 표정을 짓는다”는 내용이 담겨있어요. 추운 겨울날, 차가운 색깔로 그려낸 그림인 건데요. 그런데 그림을 보다 보면, 왠지 모를 따뜻함이 느껴지는듯 합니다.
고흐의 아몬드 나무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 반 고흐
아몬드 나무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이 나무에 고흐의 감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같은 해인 1890년 1월 31일, 고흐의 동생 테오는 편지로 자신의 아들이 태어났음을 알렸습니다. 아들 이름은 빈센트 빌렘 반 고흐. 형의 이름인 빈센트를 따서 아들의 이름을 지었죠.
테오는 편지에 이렇게 덧붙여요. “우리는 아이를 형의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이 아이가 형처럼 결단력있고 용감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고흐는 굉장히 큰 감동을 느낍니다. 사실 이 당시에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았어요. 고흐는 그래서 테오의 아들 역시, 아버지 이름을 따서 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내용을 답장으로 쓰기도 했는데요. 그렇게 내심 기쁜 마음을 감추며 '하지만 이름을 이미 내 것으로 짓기로 결정한 만큼, 아이를 위해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어떤 것을 그릴까 고민하던 중, 아직 추운 봄날에 먼저 싹을 틔우고 심지어 꽃이 피기 시작한, 강인함이 느껴지는 아몬드 나무를 그리기로 합니다. 그리고 아들의 침실에 작품을 걸어달라고 이야기했죠. 고흐의 아몬드 나무에는 사랑하는 동생 태오의 아들이 태어난 것에 대한 기쁨과, 자신의 이름을 붙여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있었습니다.

Cypresses, 1889 / The Pink Orchard also Orchard with Blossoming Apricot Trees, 1888

View of Arles, Flowering Orchards, 1889 / Wheat Field with Cypresses, 1889

Road with Cypress and Star, 1890
이 작품은 고흐의 다른 예술 작품과 비교해도 특별합니다. 사실 이 아몬드 나무를 그리기 전후로도 고흐는 다양한 나무를 그리곤 했어요. 살구나무, 복숭아 나무, 배나무, 사이프러스 나무 등 아를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나무들을 그렸죠. 그리고 그 나무들과 이 아몬드 나무는 느낌이 굉장히 다릅니다.
그동안에 고흐가 나무를 그릴 때는 풍경도 같이 그렸어요. 하늘과 땅이 같이 그림에 그려지며 전체 풍경이 조망되었죠. 작품의 주인공인 나무 역시, 기둥 부분부터 가지까지 전체적으로 그림 안에 다 담기게 그렸는데요. 반면 이 아몬드나무를 그릴 때 만큼은 나뭇가지에만 집중했습니다. 덕분에 추운 날씨에 피어나는 새싹과 꽃이 아주 잘 보여요. 이런 식으로 캔버스 안에 꽉 채워서 대상을 그리는 화면 구성은, 일본 목판화인 우키요에에서 영감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우키요에서 중요한 건 평면성이에요. 이를 위해서 공간의 깊이감이 느껴지게 전체 풍경을 그리기보다, 대상의 부분을 확대하고, 배경은 단색으로 채색하곤 했습니다. 고흐도 이런 기법을 본인 작품에 적용하면서 그 화풍을 따라하곤 했는데요. 이런 화면 구성 덕분에 아몬드 나무가 가지고 있는 강인한 느낌, 추운 날씨에 꽃을 피운 생명력이 더욱 잘 전달되면서 오늘날 고흐 작품 중에서도 탄탄한 팬층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 여겨집니다.
[2] 클로드 모네의 <지베르니에 있는 정원으로 가는 길>(1902)

Pathway in Monet's Garden at Giverny (1902)
모네는 수련 시리즈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술가입니다. 수련 시리즈는 모네가 직접 가꾼 정원의 수련을 그린 거에요. 모네는 자신의 정원을 사랑했고, 정말 많이 그림으로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중 오늘 소개할 그림은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으로 가는 길>(1902)이에요. 제목에서 볼 수 있듯, 모네의 정원으로 진입하는 길을 그려낸 그림입니다.
작품을 보면 정면으로 길이 길게 뻗어있고, 양 옆으로는 빨간색, 주황색, 보라색의 꽃들이 길을 따라서 길게 쭉 심어져 있어요. 그리고 그 위쪽으로는 무성한 나무들이 있어서, 나무와 꽃으로 만든 터널을 걷는 느낌이 듭니다. 또 그 사이사이로 햇빛이 내려앉아서, 좋은 날씨에, 아름다운 풍경을 직접 거니는 듯한 느낌도 드는데요. 조경에 관심이 많지 않은 분들이 보더라도, '정성껏 가꾼 정원이구나'가 느껴지는 작품이에요. 모네는 실제로, 정원사만 8명을 둘 정도로 정원 가꾸기에 진심이었던 예술가였습니다.
정원에 진심이었던 예술가, 모네

모네의 정원 가꾸기, 그 시작은 18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모네는 파리 도심에서 75키로미터나 떨어진 지베르니 지역으로 이주했어요. 그리고 이곳에서 그림 외에 몰두할 수 있는, 새로운 취미를 찾고자 정원 가꾸기를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버려진 사과 농장을 구입해서 소박하게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는데, 점점 재미를 붙이면서 다양한 레퍼런스를 찾기 시작했다고 해요. 영국식 정원, 일본식 정원, 네덜란드 튤립 밭도 참고하며 정원 꾸미기에 몰두합니다.
정원 가꾸기를 시작하고 6년 뒤에는, 정원 근처의 또다른 빈 땅을 매입하는데요. 이때는 파리 당국의 허가를 받아서, 근처 강에서 물을 끌어다가 인공 연못까지 조성해요. 그리고 이곳에 일본식 다리도 설치하고, 다양한 식물을 심으면서 본격적으로 더 크게 꾸미기 시작합니다. 당시 모네가 심은 식물로는 버드나무, 대나무, 진달래, 아네모네, 양귀비, 장미, 옥양목, 멕시코 월하향, 은행나무, 수련 등이 있다고 해요.

Water Lilies and the Japanese Bridge, 1897–1899

Jardin de pivoines, 1887
당시 모네가 심었던 것들엔 외국에서 들여온 품종도 많았습니다. 이때문에 주변 농민들의 불만도 상당했다고 해요. 이 식물들이 어떤 생태적 변화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도 모네는 묵살하고,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이후에는 당시 돈 4만 프랑을 들여서 온실을 만들고 난방 시스템도 갖춰요. 4만 프랑이면 한화로는 7천만 원 정도 되는데요. 1900년대 초라는 걸 감안하면 매우 큰 금액입니다. 그만큼 정원에 진심이었다는 것을 볼 수 있죠.
그리고 이렇게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만든 정원을 그림에도 그리기 시작해요. 원래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던 이유는, 철저히 '취미'였습니다. 그림 그리다 지쳤을 때 활력을 얻고자 시작했었던 건데요. 그러던 어느날 문득 정원을 가꾸던 중에 고개를 들어보니, 너무 아름답다는 걸 발견했다고 해요. 그리고 그 이후부터 정원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고. 오늘날 사랑받는 수련 작업까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3] 조셉 보이스의 <참나무 7천 그루>(1982)

Joseph Beuys, “7000 Oaks”, 1982–1987
이 작품은 실제로 7천 그루의 참나무를 심는 대규모 공공 예술 프로젝트입니다. 일종의 퍼포먼스적인 성격도 있는데요. 당연히 다른 퍼포먼스 아트처럼 짧은 시간에 하지는 못했고, 5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진행습니다. 그리고 이 5년이라는 시간은 의미가 있어요.
당시 이 작품을 선보였던 곳은, 독일의 카셀 지역이었습니다. 카셀에서는 5년에 한 번씩 현대미술 전시회인 ‘도큐멘타’라는 행사를 열어요. 도큐멘타의 시작은 1955년이었습니다. 나치 치하에서 독일 대중이 접할 수 없던 현대 미술을 기록하고자 전시를 열며 출발했죠. 처음에는 나치가 퇴폐미술로 규정했던 야수파, 입체파, 형이상학적 회화를 주로 선보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아방가르드한 시도를 하는 현대미술 작품들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실험적인 예술이 펼쳐지는 장으로 여겨져요.
이 선구적이고, 파격적인 도큐멘타 행사에 조셉 보이스가 <참나무 7천 그루>라는 작품을 선보입니다. 도큐멘타가 시작하는 날부터 시작해서, 다음 도큐멘타가 진행되는 날, 즉 5년 뒤에 끝나게끔 기획했죠. 이 프로젝트엔 카셀 지역의 주민, 학생들, 시민 단체들도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5년 뒤 도큐멘타가 또 열리던 해에 이 프로젝트가 끝났어요. (안타까운 것은, 이 프로젝트가 끝나기 1년 전인 1986년에 조셉 보이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거에요. 그래서 마지막 7천 번째 나무는 조셉 보이스의 아들이 심었습니다.)
보이스가 참나무로 전한 메시지

Joseph Beuys, “7000 Oaks”, 1982–1987
이 작품은 조셉 보이스가 평생 추구해온 예술적 가치관을 담고 있습니다. 조셉 보이스는 ‘우리의 삶 자체가 예술 작품이고,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창조적 행위다’라고 주장했어요. 예술의 일상성을 강조했던 건데요. 그러면서 '가장 좋은 예술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예술이고, 그것이 사회적 변화까지 이끌어낼 수 있다면 매우 훌륭한 예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참나무 7천 그루>를 통해서 조셉 보이스는 일종의 ‘사회적 조각’을 선보이고자 했어요. 지역 주민들이 예술가와 함께 나무를 심는 일상적인 행위를 하면서, 이것이 조각 작품처럼 영구적으로 남고, 도시 재생과 생태계 복원까지 일으키는 사회적 변화까지 목표로 한 것이죠.
보이스는 이 행위가 단순한 봉사활동이 아닌 예술로 여겨지기 위해서 몇 가지 장치를 더했습니다. 우선, 참나무를 고른 것 자체가 예술적 의도 담고 있어요. 참나무는 켈트 신화에서 신성한 나무로 여겨지는 존재이자, 성장과 재생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보이스는 참나무와 함께, 작은 현무암 기둥을 옆에 나란히 심어요. 이 현무암 기둥은 지질학적 시간과 인간 문명의 흔적을 상징합니다.
이 작품이 완성된 모습을 보면, 길가에 참나무가 쭉 심어져 있고, 참나무 옆에 현무암 기둥이 함께 심어진 걸 볼 수 있는데요. 이 현무암 기둥의 크기가 묘비의 비석만해서, 독특한 운치가 느껴집니다.

Joseph Beuys, “7000 Oaks”, 1982–1987
성장과 재생을 상징하는 참나무와 함께 인간 문명의 흔적을 상징하는 현무암 기둥을 심으며, 보이스는 인류가 파괴한 자연을 다시 인류의 힘으로 재생시키는 시도를 보여줬어요. 물론, 이런 식의 시도가 있어도 ‘이게 어떻게 예술이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들 정도로 일상적인 모습들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 조셉 보이스가 추구하는 바였어요. 또 카셀 도큐멘타는 다양한 예술에 대해 열린 자세를 취하는 전시였기 때문에, 도큐멘타의 취지와도 작품의 의도는 잘 맞아 떨어집니다. 덕분에 이 프로젝트는 이후 뉴욕 등 다른 도시로 확장되면서 글로벌 환경 운동으로 발전하기도 했어요.
이 작품이 처음 선보여지고 벌써 44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산불이 일어나고, 생태계가 위협받고 있죠. 여전히 우리는 보이스가 미술계에 쏘아 올린 화살이 날아가고 있음을 목도하는 세상에 삽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곧 예술이다'라는 말은 다소 허황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보이스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보이스의 작품은 아름다운 것만이 예술이 아닌, 의미있는 것이 예술임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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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빈센트 반 고흐의 <꽃 피는 아몬드 나무>(1890)
Vincent van Gogh, Almond blossom, 1890
이 작품은 고흐 작품 중 가장 전성기라고 평가받는 1890년에 그려진 작품이에요. 당시 고흐는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찾아서, 프랑스 남부 시골 도시인 ‘아를’로 갔습니다. 아를은 이전까지 고흐가 활동하던 프랑스 도심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자아내는 곳이었어요. 고흐가 남긴 편지에 따르면, 햇빛의 질감까지도 도심과는 달랐다고 하죠.
고흐는 이곳에서 아름다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자연 풍경을 그리곤 했는데요. 그중에서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 <꽃 피는 아몬드 나무>입니다. 작품은 민트색 배경에, 하얀 꽃이 핀 초록색 아몬드 나무를 캔버스에 꽉 채워 그린 모습이에요. 고흐 작품 중에서는 드물게 따뜻한 색인 노랑, 빨강, 주황이 거의 쓰이지 않은 작품입니다. 작품의 주조색은 민트, 초록, 흰색이죠. 그렇다보니 차가운 계열의 색이 많이 쓰였다 볼 수 있는데요.
실제로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는 3월 중순이었습니다. 아직 봄이 찾아오기 전이었고 심지어 추웠죠. 당시 고흐가 쓴 편지를 보면, “여기는 엄청 얼어붙고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다. 바람이 많이 불고 하늘이 험악한 표정을 짓는다”는 내용이 담겨있어요. 추운 겨울날, 차가운 색깔로 그려낸 그림인 건데요. 그런데 그림을 보다 보면, 왠지 모를 따뜻함이 느껴지는듯 합니다.
고흐의 아몬드 나무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 반 고흐
아몬드 나무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이 나무에 고흐의 감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같은 해인 1890년 1월 31일, 고흐의 동생 테오는 편지로 자신의 아들이 태어났음을 알렸습니다. 아들 이름은 빈센트 빌렘 반 고흐. 형의 이름인 빈센트를 따서 아들의 이름을 지었죠.
테오는 편지에 이렇게 덧붙여요. “우리는 아이를 형의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이 아이가 형처럼 결단력있고 용감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고흐는 굉장히 큰 감동을 느낍니다. 사실 이 당시에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았어요. 고흐는 그래서 테오의 아들 역시, 아버지 이름을 따서 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내용을 답장으로 쓰기도 했는데요. 그렇게 내심 기쁜 마음을 감추며 '하지만 이름을 이미 내 것으로 짓기로 결정한 만큼, 아이를 위해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어떤 것을 그릴까 고민하던 중, 아직 추운 봄날에 먼저 싹을 틔우고 심지어 꽃이 피기 시작한, 강인함이 느껴지는 아몬드 나무를 그리기로 합니다. 그리고 아들의 침실에 작품을 걸어달라고 이야기했죠. 고흐의 아몬드 나무에는 사랑하는 동생 태오의 아들이 태어난 것에 대한 기쁨과, 자신의 이름을 붙여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있었습니다.
Cypresses, 1889 / The Pink Orchard also Orchard with Blossoming Apricot Trees, 1888
View of Arles, Flowering Orchards, 1889 / Wheat Field with Cypresses, 1889
Road with Cypress and Star, 1890
이 작품은 고흐의 다른 예술 작품과 비교해도 특별합니다. 사실 이 아몬드 나무를 그리기 전후로도 고흐는 다양한 나무를 그리곤 했어요. 살구나무, 복숭아 나무, 배나무, 사이프러스 나무 등 아를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나무들을 그렸죠. 그리고 그 나무들과 이 아몬드 나무는 느낌이 굉장히 다릅니다.
그동안에 고흐가 나무를 그릴 때는 풍경도 같이 그렸어요. 하늘과 땅이 같이 그림에 그려지며 전체 풍경이 조망되었죠. 작품의 주인공인 나무 역시, 기둥 부분부터 가지까지 전체적으로 그림 안에 다 담기게 그렸는데요. 반면 이 아몬드나무를 그릴 때 만큼은 나뭇가지에만 집중했습니다. 덕분에 추운 날씨에 피어나는 새싹과 꽃이 아주 잘 보여요. 이런 식으로 캔버스 안에 꽉 채워서 대상을 그리는 화면 구성은, 일본 목판화인 우키요에에서 영감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우키요에서 중요한 건 평면성이에요. 이를 위해서 공간의 깊이감이 느껴지게 전체 풍경을 그리기보다, 대상의 부분을 확대하고, 배경은 단색으로 채색하곤 했습니다. 고흐도 이런 기법을 본인 작품에 적용하면서 그 화풍을 따라하곤 했는데요. 이런 화면 구성 덕분에 아몬드 나무가 가지고 있는 강인한 느낌, 추운 날씨에 꽃을 피운 생명력이 더욱 잘 전달되면서 오늘날 고흐 작품 중에서도 탄탄한 팬층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 여겨집니다.
[2] 클로드 모네의 <지베르니에 있는 정원으로 가는 길>(1902)
Pathway in Monet's Garden at Giverny (1902)
모네는 수련 시리즈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술가입니다. 수련 시리즈는 모네가 직접 가꾼 정원의 수련을 그린 거에요. 모네는 자신의 정원을 사랑했고, 정말 많이 그림으로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중 오늘 소개할 그림은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으로 가는 길>(1902)이에요. 제목에서 볼 수 있듯, 모네의 정원으로 진입하는 길을 그려낸 그림입니다.
작품을 보면 정면으로 길이 길게 뻗어있고, 양 옆으로는 빨간색, 주황색, 보라색의 꽃들이 길을 따라서 길게 쭉 심어져 있어요. 그리고 그 위쪽으로는 무성한 나무들이 있어서, 나무와 꽃으로 만든 터널을 걷는 느낌이 듭니다. 또 그 사이사이로 햇빛이 내려앉아서, 좋은 날씨에, 아름다운 풍경을 직접 거니는 듯한 느낌도 드는데요. 조경에 관심이 많지 않은 분들이 보더라도, '정성껏 가꾼 정원이구나'가 느껴지는 작품이에요. 모네는 실제로, 정원사만 8명을 둘 정도로 정원 가꾸기에 진심이었던 예술가였습니다.
정원에 진심이었던 예술가, 모네
지베르니에 있는 클로드 모네의 작업실
모네의 정원 가꾸기, 그 시작은 18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모네는 파리 도심에서 75키로미터나 떨어진 지베르니 지역으로 이주했어요. 그리고 이곳에서 그림 외에 몰두할 수 있는, 새로운 취미를 찾고자 정원 가꾸기를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버려진 사과 농장을 구입해서 소박하게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는데, 점점 재미를 붙이면서 다양한 레퍼런스를 찾기 시작했다고 해요. 영국식 정원, 일본식 정원, 네덜란드 튤립 밭도 참고하며 정원 꾸미기에 몰두합니다.
정원 가꾸기를 시작하고 6년 뒤에는, 정원 근처의 또다른 빈 땅을 매입하는데요. 이때는 파리 당국의 허가를 받아서, 근처 강에서 물을 끌어다가 인공 연못까지 조성해요. 그리고 이곳에 일본식 다리도 설치하고, 다양한 식물을 심으면서 본격적으로 더 크게 꾸미기 시작합니다. 당시 모네가 심은 식물로는 버드나무, 대나무, 진달래, 아네모네, 양귀비, 장미, 옥양목, 멕시코 월하향, 은행나무, 수련 등이 있다고 해요.
Water Lilies and the Japanese Bridge, 1897–1899
Jardin de pivoines, 1887
당시 모네가 심었던 것들엔 외국에서 들여온 품종도 많았습니다. 이때문에 주변 농민들의 불만도 상당했다고 해요. 이 식물들이 어떤 생태적 변화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도 모네는 묵살하고,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이후에는 당시 돈 4만 프랑을 들여서 온실을 만들고 난방 시스템도 갖춰요. 4만 프랑이면 한화로는 7천만 원 정도 되는데요. 1900년대 초라는 걸 감안하면 매우 큰 금액입니다. 그만큼 정원에 진심이었다는 것을 볼 수 있죠.
그리고 이렇게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만든 정원을 그림에도 그리기 시작해요. 원래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던 이유는, 철저히 '취미'였습니다. 그림 그리다 지쳤을 때 활력을 얻고자 시작했었던 건데요. 그러던 어느날 문득 정원을 가꾸던 중에 고개를 들어보니, 너무 아름답다는 걸 발견했다고 해요. 그리고 그 이후부터 정원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고. 오늘날 사랑받는 수련 작업까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3] 조셉 보이스의 <참나무 7천 그루>(1982)
Joseph Beuys, “7000 Oaks”, 1982–1987
이 작품은 실제로 7천 그루의 참나무를 심는 대규모 공공 예술 프로젝트입니다. 일종의 퍼포먼스적인 성격도 있는데요. 당연히 다른 퍼포먼스 아트처럼 짧은 시간에 하지는 못했고, 5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진행습니다. 그리고 이 5년이라는 시간은 의미가 있어요.
당시 이 작품을 선보였던 곳은, 독일의 카셀 지역이었습니다. 카셀에서는 5년에 한 번씩 현대미술 전시회인 ‘도큐멘타’라는 행사를 열어요. 도큐멘타의 시작은 1955년이었습니다. 나치 치하에서 독일 대중이 접할 수 없던 현대 미술을 기록하고자 전시를 열며 출발했죠. 처음에는 나치가 퇴폐미술로 규정했던 야수파, 입체파, 형이상학적 회화를 주로 선보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아방가르드한 시도를 하는 현대미술 작품들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실험적인 예술이 펼쳐지는 장으로 여겨져요.
이 선구적이고, 파격적인 도큐멘타 행사에 조셉 보이스가 <참나무 7천 그루>라는 작품을 선보입니다. 도큐멘타가 시작하는 날부터 시작해서, 다음 도큐멘타가 진행되는 날, 즉 5년 뒤에 끝나게끔 기획했죠. 이 프로젝트엔 카셀 지역의 주민, 학생들, 시민 단체들도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5년 뒤 도큐멘타가 또 열리던 해에 이 프로젝트가 끝났어요. (안타까운 것은, 이 프로젝트가 끝나기 1년 전인 1986년에 조셉 보이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거에요. 그래서 마지막 7천 번째 나무는 조셉 보이스의 아들이 심었습니다.)
보이스가 참나무로 전한 메시지
Joseph Beuys, “7000 Oaks”, 1982–1987
이 작품은 조셉 보이스가 평생 추구해온 예술적 가치관을 담고 있습니다. 조셉 보이스는 ‘우리의 삶 자체가 예술 작품이고,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창조적 행위다’라고 주장했어요. 예술의 일상성을 강조했던 건데요. 그러면서 '가장 좋은 예술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예술이고, 그것이 사회적 변화까지 이끌어낼 수 있다면 매우 훌륭한 예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참나무 7천 그루>를 통해서 조셉 보이스는 일종의 ‘사회적 조각’을 선보이고자 했어요. 지역 주민들이 예술가와 함께 나무를 심는 일상적인 행위를 하면서, 이것이 조각 작품처럼 영구적으로 남고, 도시 재생과 생태계 복원까지 일으키는 사회적 변화까지 목표로 한 것이죠.
보이스는 이 행위가 단순한 봉사활동이 아닌 예술로 여겨지기 위해서 몇 가지 장치를 더했습니다. 우선, 참나무를 고른 것 자체가 예술적 의도 담고 있어요. 참나무는 켈트 신화에서 신성한 나무로 여겨지는 존재이자, 성장과 재생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보이스는 참나무와 함께, 작은 현무암 기둥을 옆에 나란히 심어요. 이 현무암 기둥은 지질학적 시간과 인간 문명의 흔적을 상징합니다.
이 작품이 완성된 모습을 보면, 길가에 참나무가 쭉 심어져 있고, 참나무 옆에 현무암 기둥이 함께 심어진 걸 볼 수 있는데요. 이 현무암 기둥의 크기가 묘비의 비석만해서, 독특한 운치가 느껴집니다.
Joseph Beuys, “7000 Oaks”, 1982–1987
성장과 재생을 상징하는 참나무와 함께 인간 문명의 흔적을 상징하는 현무암 기둥을 심으며, 보이스는 인류가 파괴한 자연을 다시 인류의 힘으로 재생시키는 시도를 보여줬어요. 물론, 이런 식의 시도가 있어도 ‘이게 어떻게 예술이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들 정도로 일상적인 모습들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 조셉 보이스가 추구하는 바였어요. 또 카셀 도큐멘타는 다양한 예술에 대해 열린 자세를 취하는 전시였기 때문에, 도큐멘타의 취지와도 작품의 의도는 잘 맞아 떨어집니다. 덕분에 이 프로젝트는 이후 뉴욕 등 다른 도시로 확장되면서 글로벌 환경 운동으로 발전하기도 했어요.
이 작품이 처음 선보여지고 벌써 44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산불이 일어나고, 생태계가 위협받고 있죠. 여전히 우리는 보이스가 미술계에 쏘아 올린 화살이 날아가고 있음을 목도하는 세상에 삽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곧 예술이다'라는 말은 다소 허황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보이스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보이스의 작품은 아름다운 것만이 예술이 아닌, 의미있는 것이 예술임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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