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현대미술관, 애칭 모마. 모마는 세계 1위 현대미술관으로 현대미술의 모든 것이자, 그 이상의 것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등 세계 최대 거장들의 걸작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곳이자 미술관 내 외부의 끝없는 개편과 증축으로 가장 현대미술적으로 살아 숨 쉬는 미술관이기도 하죠.
모마의 역사는 1928년, 뉴욕 어느 식당의 점심 식사 자리에서 시작됐습니다. 자리에 참석한 인물은 뉴욕의 저명한 현대미술 컬렉터, 릴리 P. 블리스, 미술 교사 출신 갤러리스트, 메리 퀸 설리번, 록펠러 가의 안주인, 애비 록펠러였죠. 이들은 높은 미적 안목과 취향을 갖추고 있던 인물들이었는데요. 이들은 세계 대도시들 중에서 뉴욕만이 현대미술에 있어서는 유일하게 뒤처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뉴욕에도 훌륭한 예술작품이 있는 미술관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죠.
실제로 당시 뉴욕은 미술에 있어서는 다소 뒤처져 있었어요. 파리에서는 일찍이 1667년부터 살롱 전이 열리며 미술을 발전시켰고, 이후 1863년부터 낙선전 등을 통해 새로운 시도들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요. 미국은 1913년에야 아모리 쇼가 열리면서 새로운 예술을 소개하는 시도가 일어났습니다.
아모리 쇼 포스터와 전시 전경
당시 낙선 전과 아모리 쇼에서 소개되는 급진적인 아방가르드 한 작품은 당시에도 호불호가 갈렸는데요. 그럼에도 소수의 엘리트 계급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식사 자리에 있던 세 여성은 정확히 그 엘리트 계급에 속했어요. 심지어 릴리 P. 블리스는 자신의 소장품을 아모리 쇼에서 전시하기도 했을 정도죠.
이들은 새로운 미술관 설립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눕니다. “뉴욕도 유럽 못지않은 새로운 미술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고”, “그 장이 될만한 미술관이라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 그 아이디어는 단순히 돈 많은 이들의 식사 자리에서 나온 농담 섞인 제안이 아니었습니다. 자국의 예술도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 더 큰 예술을 위한 장이 필요하다는 당위성, 본인들이 갖춘 부와 자본을 통해 해낼 수 있다는 실행력이 뒷받침된 논의였죠.
세 여성은 이윽고 미술관의 초대 관장을 선정하고, 록펠러 가가 소유한 부지를 이용해 이후 1년 만에 미술관을 엽니다.
이들이 선정한 미션은 단순했어요. ‘우리 시대 미술인 모던 아트는 과거의 미술만큼 활기차고 중요하다’. 그리고 이 미션 아래, 뉴욕 사교계 명사들에게 작품들을 기증받기 시작합니다. 릴리 블리스(Lillie P. Bliss)는 미술관 설립을 위해 폴 세잔의 <수영하는 사람>, <사과가 있는 정물>, 폴 고갱의 <달과 지구>등 116점의 회화, 판화, 드로잉을 기증했어요. 오늘날 모두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걸작들입니다.
사람들의 반응도 엄청났어요. 그간 뉴욕에서 볼 수 없던 유럽 대가들의 작품은 상당한 인기를 끌었죠. 이후 1935년 뉴욕현대미술관은 또 한 번 그들의 초기 역사에 중요 포인트가 되는 전시를 엽니다. 바로 반 고흐 대규모 회고전이었죠. 네덜란드에서 공수한 고흐의 유화 66점, 드로잉 50점, 그리고 고흐가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발췌해 고흐의 예술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큐레이션 했습니다.
이 시기는 고흐의 편지가 책으로 발간된 지 20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고흐의 예술세계가 널리 알려지고 있던 시점이었는데요. 모마의 전시로 그 작품성이 미국에도 소개되면서 고흐의 명성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모마 역시 그들이 선정한 미션, ‘우리 시대의 미술인 모던 아트는 과거의 미술만큼 활기차고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성공적으로 전하면서, 순식간에 세계 굴지의 미술관으로 성장하게 돼요.
개관 이후 10년 동안 모마는 점점 더 큰 공간으로 세 번이나 이전했고요. 1939년에는 맨해튼 미드타운에 있는 건물에 문을 열게 되었죠. 이 시기 모마는 새 건물을 열면서 피카소 회고전을 선보였는데요. 당시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를 미국에서 처음 선보이면서 화제를 모읍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중 나치 공군이 게르니카 지역을 폭격한 사건을 담고 있는데요. 피카소는 그림 속 황소, 말, 군인, 여성과 어린이 등을 입체파 화풍으로 그려내면서 이들이 느낀 고뇌와 공포를 담아냈습니다.
이 시점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에 작품이 가진 의미가 더 극대화되었는데요. 모마는 이 전시를 통해 전쟁으로 피난민이 된 사람들을 위한 기금을 모읍니다. 전시에는 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방문했고, 여담이지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이 전시에 찾아왔다고 해요.
전 세계의 비극이 이어지던 시기, 예술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 모마의 전시는 또 한 번 크게 흥행했습니다.
더 큰 발전: 선한 영향력
이윽고 1945년, 모마의 역사에 새로운 기점이 된 순간이 또 한 번 찾아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것이죠. 이 시기 모마 컬렉션 주요 작품이 입수되기 시작합니다.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앙리 마티스의 <파란 차찬문>,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피트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등이 이 시기 수집된 작품들인데요. 제2차 대전 직후 급성장한 미국의 경제력과 유럽의 예술가와 미술계 관계자들의 미국 도피로 이 모든 건 자연스럽게 이뤄졌습니다.
당시 모마는 이미 미국 미술계의 핵심이 되어 있었지만, 이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지는 않았어요. 이를 기회 삼아 모마의 포용력을 보여줬죠. 나치의 박해를 피해 이주한 미술가들과 소장가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는데 필요한 서류와 자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이들이 작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보조금을 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모마의 핵심 소장품이 아닌, 지역 갤러리나 젊은 예술가들로부터 위탁받은 작품들이었는데요. 이미 모마의 브랜드 가치가 높아진 뒤였기 때문에, 모마의 큐레이션을 거친 작품들을 집에 들이고 싶어 하는 관객이 많았고요. 모마는 이들에게 일부 금액을 내면 2-3개월 동안 작품을 집에서 소장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게 모마는 작품 임대로 10년간 20억 가량의 수익을 낼 수 있었어요. 1950년대 당시 물가를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금액이었고, 미술관 브랜딩의 성공 사례이자, 수익화 성공 사례라고 볼 수 있는 기획이었습니다.
그리고 현대미술계의 선교사로서 시대의 새로운 예술을 큐레이션 하기 시작해요. 1968년 모마가 선보인 전시 <공간 SPACES>은 오늘날 미술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설치미술 전시의 첫 시도였는데요. 당시 모마는 미술관 내부의 정원과 전시관을 7명의 예술가에게 배정해, 각 공간에 빛, 공간, 관점, 소리를 중심으로 설치미술을 선보이게 큐레이션 했습니다.
설치미술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던 시절이었기에, 뉴욕타임스는 이런 평을 남기기도 했어요.
“<공간>전시에서 관객은 미술관에서 항상 하는 일,
즉, 서서, 걷고, 감상하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유일하게 하지 않는 건, 작품을 보는 것이다.”
전통적인 작품이 없어진 미술관은 관객에게 낯선 경험이었어요. 전시관 내 배치되는 경비원들조차도 관객을 어디까지 제지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교육받았어야 했다고 하죠. 그럼에도 이 전시는 설치미술의 시작을 알리며 모마의 커리어에 한 줄을 남겼다 평가받습니다. 그리고 모마의 이런 과감한 전시 큐레이션에 감화된 이도 있었어요.
우리나라 관객에게도 익숙한 예술가인 쿠사마 야요이는, 1969년에 모마 조각 정원에서 퍼포먼스 아트의 일종인 ‘해프닝’을 진행합니다. 작품 제목은 <죽은 자를 깨우는 대연주>.
야요이는 퍼포머들에게 모마 조각 정원에 있는 조각 작품과 교류하듯 서로를 껴안으라고 지시했어요. 문제는 퍼포머들이 모두 알몸이었다는 것과 모마의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점이었죠.
1963년의 쿠사마 야요이 Courtesy KUSAMA Enterprise, Ota Fine Arts
모마 경비원은 알몸의 퍼포머들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했고, 쿠사마 야요이는 고개를 돌리고 뒤돌아서있었습니다. 사진이 보도되며 “이게 진짜 예술인가”라는 헤드라인으로 보도되기도 했는데요. 야요이는 모마가 현대미술관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대다수 소장품은 이미 죽은 예술가들이라는 점을 비판하기 위해 이 해프닝을 기획했다고 해요. 그리고 죽은 예술이 아닌 살아있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주목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거죠.
이후 모마는 1971년, 뉴욕 퀸즈 롱아일랜드 시티에 있는 독립 현대미술기관인 PS1 현대미술관과 제휴를 맺습니다. PS1은 폐교된 학교를 활용해 실험적인 전시와 퍼포먼스 아트를 선보이던 공간이었는데요. 젊은 예술가들의 신선한 시도를 선보이는 덕에 쿠사마 야요이가 바란 살아있는 예술가의 생생한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죠.
이후 모마는 다채로워지는 현대미술을 반영하기 위해 과감한 부서 개편도 감행합니다. 전통적인 회화 작품을 다루는 페인팅과 조각 부서(1929) 뿐 아니라, 드로잉과 프린팅(1929), 사진(1930), 건축과 디자인 부서(1932), 영화(1935), 미디어 앤 퍼포먼스(2006) 등 여섯 개 부서로 나누어 컬렉션을 관리하고 있죠. 이런 부서 개편은 오늘날 다른 현대미술관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선구적이고 영향력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모마: 끝없는 혁신
MoMA Highlights (2013)
오늘날에도 모마는 계속 동시대 예술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2013년 뉴욕현대미술관 출판부가 쓴 책, MoMA Highlights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있죠.
현대미술관이라는 공간 자체가 언제나 기꺼이 모험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기관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모마는 주기적으로 스스로를 쇄신해야 하며,
은유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새로운 공간을 그려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모마는 스스로에 대한 가장 엄격한 비평가가 되어야만 한다.
(…) 그리고 앞으로도 현대미술에 관여하고자 한다면,
변함없이 분열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새로운 아이디어와 접근법에 대한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MoMA Highlights, 뉴욕현대미술관 출판부 (2013)
모마는 그들의 선언처럼 지금도 스스로에 대한 가장 엄격한 비평가를 자처하면서, 다양한 현대미술을 선보이기 위해 미술관을 증축하고, 과감한 전시 큐레이션으로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또 미술관 굿즈 숍의 새 패러다임을 쓴 모마 디자인 스토어 개관을 통해, 더 대중적으로 현대미술을 경험하게 만든 시도도 선보였죠. 단연 현대미술의 선구자이자 선교자로서의 역사를 계속 써나가고 있는 건데요.
뉴욕현대미술관 전경 © MoMA
뉴욕현대미술관, 애칭 모마. 모마는 세계 1위 현대미술관으로 현대미술의 모든 것이자, 그 이상의 것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등 세계 최대 거장들의 걸작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곳이자 미술관 내 외부의 끝없는 개편과 증축으로 가장 현대미술적으로 살아 숨 쉬는 미술관이기도 하죠.
오늘 소개할 미술관은 미술계 트렌드를 지배하는, 모마입니다.
신화적인 시작
모마를 만든 세 여인. 왼쪽부터 릴리 P. 블리스, 메리 퀸 설리번, 애비 록펠러 © MoMA
모마의 역사는 1928년, 뉴욕 어느 식당의 점심 식사 자리에서 시작됐습니다. 자리에 참석한 인물은 뉴욕의 저명한 현대미술 컬렉터, 릴리 P. 블리스, 미술 교사 출신 갤러리스트, 메리 퀸 설리번, 록펠러 가의 안주인, 애비 록펠러였죠. 이들은 높은 미적 안목과 취향을 갖추고 있던 인물들이었는데요. 이들은 세계 대도시들 중에서 뉴욕만이 현대미술에 있어서는 유일하게 뒤처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뉴욕에도 훌륭한 예술작품이 있는 미술관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죠.
실제로 당시 뉴욕은 미술에 있어서는 다소 뒤처져 있었어요. 파리에서는 일찍이 1667년부터 살롱 전이 열리며 미술을 발전시켰고, 이후 1863년부터 낙선전 등을 통해 새로운 시도들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요. 미국은 1913년에야 아모리 쇼가 열리면서 새로운 예술을 소개하는 시도가 일어났습니다.
아모리 쇼 포스터와 전시 전경
당시 낙선 전과 아모리 쇼에서 소개되는 급진적인 아방가르드 한 작품은 당시에도 호불호가 갈렸는데요. 그럼에도 소수의 엘리트 계급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식사 자리에 있던 세 여성은 정확히 그 엘리트 계급에 속했어요. 심지어 릴리 P. 블리스는 자신의 소장품을 아모리 쇼에서 전시하기도 했을 정도죠.
이들은 새로운 미술관 설립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눕니다. “뉴욕도 유럽 못지않은 새로운 미술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고”, “그 장이 될만한 미술관이라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 그 아이디어는 단순히 돈 많은 이들의 식사 자리에서 나온 농담 섞인 제안이 아니었습니다. 자국의 예술도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 더 큰 예술을 위한 장이 필요하다는 당위성, 본인들이 갖춘 부와 자본을 통해 해낼 수 있다는 실행력이 뒷받침된 논의였죠.
세 여성은 이윽고 미술관의 초대 관장을 선정하고, 록펠러 가가 소유한 부지를 이용해 이후 1년 만에 미술관을 엽니다.
미션: 공격적인 기획력
Paul Cézanne, The Bather, 1885–1887 / Paul Gauguin, Hina Te Fatu, 1893 © MoMA
이들이 선정한 미션은 단순했어요. ‘우리 시대 미술인 모던 아트는 과거의 미술만큼 활기차고 중요하다’. 그리고 이 미션 아래, 뉴욕 사교계 명사들에게 작품들을 기증받기 시작합니다. 릴리 블리스(Lillie P. Bliss)는 미술관 설립을 위해 폴 세잔의 <수영하는 사람>, <사과가 있는 정물>, 폴 고갱의 <달과 지구>등 116점의 회화, 판화, 드로잉을 기증했어요. 오늘날 모두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걸작들입니다.
앙리 마티스 전시 도록 © MoMA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된 앙리 마티스 전시 전경 © MoMA
하지만 이때까지는 미술관 소장품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미술관에서 작품을 임대해 기획전을 열 필요가 있었어요. 그렇게 모마가 연 첫 번째 기획전은 1931년 열린 앙리 마티스 전시회였습니다.
마티스의 그림, 조각, 판화, 드로잉 등 130점을 선보이면서, 뉴욕의 관객에게 마티스를 처음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는데요. 당시 62세였던 마티스도 이 전시의 큐레이션과 설치에 찬사를 보냈을 정도로 완벽한 전시였다고 평가받습니다.
반 고흐 전시 도록과 전시 전경 © MoMA
사람들의 반응도 엄청났어요. 그간 뉴욕에서 볼 수 없던 유럽 대가들의 작품은 상당한 인기를 끌었죠. 이후 1935년 뉴욕현대미술관은 또 한 번 그들의 초기 역사에 중요 포인트가 되는 전시를 엽니다. 바로 반 고흐 대규모 회고전이었죠. 네덜란드에서 공수한 고흐의 유화 66점, 드로잉 50점, 그리고 고흐가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발췌해 고흐의 예술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큐레이션 했습니다.
이 시기는 고흐의 편지가 책으로 발간된 지 20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고흐의 예술세계가 널리 알려지고 있던 시점이었는데요. 모마의 전시로 그 작품성이 미국에도 소개되면서 고흐의 명성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모마 역시 그들이 선정한 미션, ‘우리 시대의 미술인 모던 아트는 과거의 미술만큼 활기차고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성공적으로 전하면서, 순식간에 세계 굴지의 미술관으로 성장하게 돼요.
피카소 전시 도록과 전시 전경 © MoMA
개관 이후 10년 동안 모마는 점점 더 큰 공간으로 세 번이나 이전했고요. 1939년에는 맨해튼 미드타운에 있는 건물에 문을 열게 되었죠. 이 시기 모마는 새 건물을 열면서 피카소 회고전을 선보였는데요. 당시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를 미국에서 처음 선보이면서 화제를 모읍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중 나치 공군이 게르니카 지역을 폭격한 사건을 담고 있는데요. 피카소는 그림 속 황소, 말, 군인, 여성과 어린이 등을 입체파 화풍으로 그려내면서 이들이 느낀 고뇌와 공포를 담아냈습니다.
Pablo Picasso, Guernica, 1937 © Museo Reina Sofía 소장
이 시점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에 작품이 가진 의미가 더 극대화되었는데요. 모마는 이 전시를 통해 전쟁으로 피난민이 된 사람들을 위한 기금을 모읍니다. 전시에는 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방문했고, 여담이지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이 전시에 찾아왔다고 해요.
전 세계의 비극이 이어지던 시기, 예술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 모마의 전시는 또 한 번 크게 흥행했습니다.
더 큰 발전: 선한 영향력
이윽고 1945년, 모마의 역사에 새로운 기점이 된 순간이 또 한 번 찾아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것이죠. 이 시기 모마 컬렉션 주요 작품이 입수되기 시작합니다.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앙리 마티스의 <파란 차찬문>,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피트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등이 이 시기 수집된 작품들인데요. 제2차 대전 직후 급성장한 미국의 경제력과 유럽의 예술가와 미술계 관계자들의 미국 도피로 이 모든 건 자연스럽게 이뤄졌습니다.
Pablo Picasso, 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Vincent van Gogh, Starry Night, 1889
Piet Mondrian, Broadway Boogie-Woogie, 1942-1943
당시 모마는 이미 미국 미술계의 핵심이 되어 있었지만, 이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지는 않았어요. 이를 기회 삼아 모마의 포용력을 보여줬죠. 나치의 박해를 피해 이주한 미술가들과 소장가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는데 필요한 서류와 자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이들이 작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보조금을 주기도 했습니다.
© MoMA
그리고 전쟁 참전 용사 미술센터를 열면서, 참전용사들의 재활을 위한 미술 수업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했죠. 그렇게 모마는 총 1,500명의 용사들이 미술로 치유될 수 있도록 장을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 모마는 이런 선행뿐만 아니라 크리에이티브 한 기획력이 엿보이는 시도도 선보였어요. 아트 랜딩 서비스(1951)를 통해 모마의 작품을 임대할 수 있게 만든 것이죠.
모마 아트 랜딩 서비스 가격표와 현장 © MoMA
물론 모마의 핵심 소장품이 아닌, 지역 갤러리나 젊은 예술가들로부터 위탁받은 작품들이었는데요. 이미 모마의 브랜드 가치가 높아진 뒤였기 때문에, 모마의 큐레이션을 거친 작품들을 집에 들이고 싶어 하는 관객이 많았고요. 모마는 이들에게 일부 금액을 내면 2-3개월 동안 작품을 집에서 소장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게 모마는 작품 임대로 10년간 20억 가량의 수익을 낼 수 있었어요. 1950년대 당시 물가를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금액이었고, 미술관 브랜딩의 성공 사례이자, 수익화 성공 사례라고 볼 수 있는 기획이었습니다.
안주하지 않기, 그것이 현대미술이니까
모마 조각 정원 전경 © MoMA
모마는 설립 30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큰 현대미술관이자, 가장 트렌디하고 선하며 크리에이티브 한 미술관이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어요. 다시 현대미술관이라는 자신들의 본질로 돌아갔죠. 1954년, 모마는 소식지에 이런 내용을 담습니다.
뉴욕 현대미술관의 <SPACES> 전시 전경 © MoMA
그리고 현대미술계의 선교사로서 시대의 새로운 예술을 큐레이션 하기 시작해요. 1968년 모마가 선보인 전시 <공간 SPACES>은 오늘날 미술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설치미술 전시의 첫 시도였는데요. 당시 모마는 미술관 내부의 정원과 전시관을 7명의 예술가에게 배정해, 각 공간에 빛, 공간, 관점, 소리를 중심으로 설치미술을 선보이게 큐레이션 했습니다.
설치미술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던 시절이었기에, 뉴욕타임스는 이런 평을 남기기도 했어요.
전통적인 작품이 없어진 미술관은 관객에게 낯선 경험이었어요. 전시관 내 배치되는 경비원들조차도 관객을 어디까지 제지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교육받았어야 했다고 하죠. 그럼에도 이 전시는 설치미술의 시작을 알리며 모마의 커리어에 한 줄을 남겼다 평가받습니다. 그리고 모마의 이런 과감한 전시 큐레이션에 감화된 이도 있었어요.
쿠사마 야요이가 진행한 해프닝 <죽은 자를 깨우는 대연주> © MoMA
우리나라 관객에게도 익숙한 예술가인 쿠사마 야요이는, 1969년에 모마 조각 정원에서 퍼포먼스 아트의 일종인 ‘해프닝’을 진행합니다. 작품 제목은 <죽은 자를 깨우는 대연주>.
야요이는 퍼포머들에게 모마 조각 정원에 있는 조각 작품과 교류하듯 서로를 껴안으라고 지시했어요. 문제는 퍼포머들이 모두 알몸이었다는 것과 모마의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점이었죠.
1963년의 쿠사마 야요이 Courtesy KUSAMA Enterprise, Ota Fine Arts
모마 경비원은 알몸의 퍼포머들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했고, 쿠사마 야요이는 고개를 돌리고 뒤돌아서있었습니다. 사진이 보도되며 “이게 진짜 예술인가”라는 헤드라인으로 보도되기도 했는데요. 야요이는 모마가 현대미술관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대다수 소장품은 이미 죽은 예술가들이라는 점을 비판하기 위해 이 해프닝을 기획했다고 해요. 그리고 죽은 예술이 아닌 살아있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주목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거죠.
이후 모마는 1971년, 뉴욕 퀸즈 롱아일랜드 시티에 있는 독립 현대미술기관인 PS1 현대미술관과 제휴를 맺습니다. PS1은 폐교된 학교를 활용해 실험적인 전시와 퍼포먼스 아트를 선보이던 공간이었는데요. 젊은 예술가들의 신선한 시도를 선보이는 덕에 쿠사마 야요이가 바란 살아있는 예술가의 생생한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죠.
이후 모마는 다채로워지는 현대미술을 반영하기 위해 과감한 부서 개편도 감행합니다. 전통적인 회화 작품을 다루는 페인팅과 조각 부서(1929) 뿐 아니라, 드로잉과 프린팅(1929), 사진(1930), 건축과 디자인 부서(1932), 영화(1935), 미디어 앤 퍼포먼스(2006) 등 여섯 개 부서로 나누어 컬렉션을 관리하고 있죠. 이런 부서 개편은 오늘날 다른 현대미술관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선구적이고 영향력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모마: 끝없는 혁신
MoMA Highlights (2013)
오늘날에도 모마는 계속 동시대 예술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2013년 뉴욕현대미술관 출판부가 쓴 책, MoMA Highlights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있죠.
모마는 그들의 선언처럼 지금도 스스로에 대한 가장 엄격한 비평가를 자처하면서, 다양한 현대미술을 선보이기 위해 미술관을 증축하고, 과감한 전시 큐레이션으로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또 미술관 굿즈 숍의 새 패러다임을 쓴 모마 디자인 스토어 개관을 통해, 더 대중적으로 현대미술을 경험하게 만든 시도도 선보였죠. 단연 현대미술의 선구자이자 선교자로서의 역사를 계속 써나가고 있는 건데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세계 1위 현대미술관, 모마의 이야기. 여러분은 어떻게 감상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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