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은 그 역사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때로는 완전히 상반된 개념이, 한 컬러의 상징이 되기도 해요.
삶과 죽음의 색, 초록
Gustav Klimt, Litzlberg am Attersee, 1914-1915 ⓒ Neue Galerie New York.
초록은 가장 자연과 가까운 색입니다. 초록을 뜻하는 '그린(Green)'도 중세 단어인 Grene에서 유래했어요. Grene은 풀을 뜻하는 Grass, 자란다는 뜻의 Grow의 어원이기도 한데요. 그래서 초록은 색깔도, 이름도 자연에서 비롯된 단어입니다. 그 덕분에 탄생, 생명력과 관련된 긍정적인 색으로 활용되곤 하죠.
하지만 초록은 시간이 지나며 의미가 살벌하게 달라진 색이기도 해요. 생명, 탄생, 자연을 뜻하는 동시에, 죽음의 색이라고도 불렸죠. 초록색의 이미지가 좋았던 시기는 중세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이슬람 국가에서 초록을 특히 좋아했죠. 이슬람 국가는 사막지대가 많은 지역 특성상, 초록이 번영을 의미하는 색처럼 여겨졌는데요. 그렇다 보니, 이슬람 국가들의 국기에는 유난히 초록색이 많이 사용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슬람 경전인 쿠란에서는 천상의 산인 ‘콰프’를 묘사할 때 산 뿐만 아니라 하늘, 그 아래로 흐르는 물까지 모두 녹색으로 묘사하면서 초록을 예찬했죠.
이슬람 국가의 국기들. 왼쪽부터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그리고 이 시기까지는 서구권에서도 초록색을 좋아했어요. 어느 정도였냐면, 5월 1일에는 봄을 상징하는 초록색 옷을 입지 않으면 대놓고 조롱당하는 문화가 있었을 정도였죠. 그러던 중 12세기를 전후해서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십자군 전쟁처럼 무슬림과 기독교 사이 반감이 고조되는 사건이 생기게 되고, 그러면서 무슬림 상징색인 초록이 악마의 색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거예요.
이후 이런 인식에 불을 붙인 컬러가 ‘셸레 그린’이었습니다. 1775년, 과학자 빌헬름 셸레(Carl Wilhelm Scheele)가 초록색 물질을 우연히 발견하며 만들어졌죠. 가공도 쉽고 재료도 저렴해, 생산자 입장에서 너무 완벽한 색이었습니다. 셸레 그린은 기존에 생산되던 초록색 안료보다 훨씬 밝고 선명한 초록색을 보여주었어요. 변색도 없었고요. 이건 상당한 혁신이었습니다. 당시까지 생산되던 기존의 초록색 안료는 단점이 많았기 때문이죠. 발색력이 떨어지거나, 너무 거칠게 발리거나, 발색이 오래가지 못하고 변색되는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셸레 그린은 완벽한 초록을 보여줬어요.
(좌) 빌헬름 셸레 (우) Georg Friedrich Kersting, Embroidery woman, 1827 ⓒ Kunsthalle Kiel
그렇게 빌헬름 셸레는 이 완벽한 초록에 본인 이름을 따 ‘셸레 그린’이라 이름 붙이고 판매했습니다. 셸레 그린은 곧 엄청난 인기를 얻게 돼요. 사실 그동안 이런 혁신적인 안료가 등장했을 때, 울트라 마린이나 코치닐을 떠올려보면 굉장히 비쌌는데요. 셸레 그린은 이들과 달리, 가격이 우선 저렴했어요. 여기에 더해 변색도 안되고, 색깔도 예뻐서 미술작품뿐만 아니라 의류, 벽지, 장난감, 빵을 포장하는 종이 등 다양한 곳에 활용될 수 있었죠.
그런데 점차 집에서 돌연 사망하는 사람들 나오기 시작합니다. 알고 보니 셸레 그린 때문이었어요. 셸레 그린에는 살충제, 농약에 활용하는 비소가 치사량만큼 들어있었습니다. 이건 큰 사회적 문제로 번지게 돼요. 당시 셸레 그린은 영국에서 일주일간 2만 톤 생산할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죠. 정확한 수치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셸레 그린 때문에 사망한 인물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Jacques-Louis David, The Coronation of Napoleon, 1804
그리고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나폴레옹이에요. 나폴레옹이 말년에 유배 생활을 했던 세인트헬레나 섬의 집에는 셸레 그린으로 칠해진 방이 있었는데요. 세인트헬레나 섬은 매우 습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습한 환경에서는 셸레 그린이 곰팡이와 반응하여 유독 가스를 방출하죠. 후에 1960년대에 접어들어 나폴레옹의 머리카락을 분석했더니, 높은 농도의 비소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비소 중독이 사망 원인 중 하나일 것으로 거론되었고, 셸레 그린이 가득한 방이 원인이지 않을까 추정되었습니다.
오늘날엔 더 이상 셸레 그린에 비소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19세기 후반 들어 그 위험성이 발견되면서, 안료를 제작할 때 비소가 들어가지 않도록 법적으로 규제하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셸레 그린이 사망에 이르게 한 사람이 워낙 많았고, 셸레 그린 이후 비소를 활용한 초록이 많았어서, 초록색 자체가 죽음의 색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무대미술, 순수예술 할 것 없이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전반적으로 초록색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죠.
Wassily Kandinsky, Yellow-Red-Blue, 1925 ⓒ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Paris
일례로 추상화 작가인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초록색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해요. “녹색은 가장 강한 마비를 불러일으키는 색이다. 엄청나게 건강해 바닥에 누워 되새김질이나 하면서 멍청하고 표정 없는 눈으로 세상을 사색하는 뚱뚱한 소와 같다.”
이후 서구권에서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문화 콘텐츠에서 마녀의 색으로 초록을 쓰거나, 독극물 등을 초록으로 표현했어요. 자연과 상징의 생명이던 색이었지만, 근현대 접어들어 부정적 이미지가 생기면서, 오늘날 초록은 상반된 두 개의 이미지를 계속 이어가고 있답니다.
가장 고귀하면서 가장 천박한 색, 노랑
ⓒ lascaux-dordogne
노랑은 인간이 가장 처음 사용한 색입니다. 1만 7천3백 년 이상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사시대 라스코 동굴 벽화를 보면, 말이 노란색으로 칠해진 모습을 볼 수 있죠. 이처럼 노랑은 인간이 가장 처음 이름 붙인 색인 빨강보다도 먼저 사용되었고, 긴 시간 사용된 만큼 역사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 색이기도 합니다.
초기 노랑은 초록처럼 좋은 이미지를 가진 색이었어요. 고대 이집트에서는 노랑을 금, 후광, 햇빛을 표현하는 색으로 활용했습니다. 노란색의 영단어 옐로(yellow)도 당시 빛을 의미하는 단어였던 ġeolu에서 온 것이죠. 이런 후광은 불멸, 영원, 권력을 의미하면서 긍정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리고 종교화에서도 예수나 성모 마리아의 후광을 그리는 데 노란색을 활용하면서 귀한 것을 상징하는 색으로 여겨졌죠.
Kiss of Judas (1304–1306), fresco by Giotto ⓒ Scrovegni Chapel, Padua, Italy
그런데, 중세에 접어들면서 의미가 달라지기 시작해요. 예수의 제자인 유다가 예수를 군인들에게 팔아넘긴다는 성경 구절에서, 유다가 받은 금화를 상징하는 노란색이 유다의 상징색이 된 것이 계기였습니다. 실제로 종교화에서 유다를 그린 걸 보면, 대부분 노란 옷을 입고 있는 걸 볼 수 있어요. 이러한 인식은 점차 널리 퍼졌습니다. 그렇게 노란색은 시기, 질투, 욕망의 상징색으로 여겨지게 되었죠. 이후에는 황달이나 담즙 문제가 생겼을 때 혈색이 노랗게 된다는 점 때문에 질병의 색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노랑의 부정적 이미지를 계속 이어간 건, 19세기 프랑스였어요. 당시 프랑스에서는 선정적인 소설의 책표지를 노란색으로 활용했습니다. 이건 마케팅의 일환이었다고 해요. 노랑은 질투와 시기, 욕망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빨강, 초록과 함께 채도가 가장 높은 색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호등이 빨강, 노랑, 초록으로 구성된 것이기도 한데요. 빨강은 너무 위험한 느낌이고, 초록은 너무 안전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마케팅을 위해 눈에 띄는 노란색을 사용했다고 해요. 이윽고 노란색 표지의 선정적인 소설이 프랑스 기차역에 한가득 놓이면서, 노란 표지 = 외설적인 내용이 담긴 책이라는 인식이 생겨납니다.
Vincent Van Gogh, The Parisian Novels (The Yellow Books),1887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도 포르노 이미지를 담은 잡지 표지로 노란색을 활용하면서, 노랑은 선정적인 색이라는 인식이 많이 퍼져나갔어요. 그리고 이런 흐름을 당시 활동하던 문학가들은 부정적으로 봤습니다. 선정적인 내용을 담은 소설이 노란 표지를 이용해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는 걸 안 좋게 본 건데요. 일례로 시인 에드거 앨런 포는 <노란색 소책자의 영원한 무가치>라는 글을 쓰기도 했고,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서 주인공이 친구에게 노란색 표지의 책을 받은 후, 타락하고 몰락한 내용을 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노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현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일례로 옐로 저널리즘(황색언론)은 흥미 위주의 자극적인 내용을 실어서 판매 부수를 높이는데 집중하는 언론들을 일컫는 말로 활용됩니다. 노란색과 책이 붙으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느낌을 받게 되었죠. 이후 미술 쪽에서도 이런 인식이 이어져요.
<두 명의 프리다> 앞의 프리다 칼로 ⓒ Photograph by Bettmann/Getty
일례로 멕시코 여성 예술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일기장에 노란색에 대한 설명을 적어두었는데요. 내용이 상당히 부정적입니다. “광기, 질병, 공포, 태양과 행복의 일부, 더 많은 광기 그리고 미스터리, 모든 귀신이 이 색깔의 옷을 입는다. 적어도 속옷이라도.” 노랑이 귀신의 색깔이라고 언급하면서, 귀신이 노란 옷을 입지 않았으면 속옷이라도 노랑을 입었을 거라고 이야기하죠. 그럼에도 노랑을 '태양과 행복의 일부'라 칭하면서, 노란색의 양면적인 특성 강조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 초록이 여전히 자연을 상징하는 색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노랑도 마찬가지예요. 금이나 햇빛 같은, 인간이 가치를 높게 평가하거나 생명과 관련된 요소와 맞닿아 있는 덕에 여전히 긍정적으로 소비되기도 하고, 상업적으로도 임팩트 있는 컬러로 여겨집니다. 특히나 노란색의 금발머리가 높게 평가받는데, 인구 비율보다 훨씬 더 많은 금발이 광고에 등장한다고도 하죠.
뒤늦은 사랑을 받은 색, 핑크
핑크와 핑킹가위의 어원이 된 핑크스 플라워 (Pinks Flower) ⓒ Whetman Garden Plants, Roots Plants
핑크는 오늘날 인기를 얻고 있는 색을 통틀어 가장 젊은 색이에요. 가장 첫 기록으로 추정되는 건, 기원전 800년에 쓰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호메루스는 해가 뜨는 새벽의 분홍빛 하늘을 로지(Rosy) 하다고 표현했어요. 이후 새벽의 분홍빛 하늘을 칭할 때 로지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했죠. 그렇게 계속 로즈, 로지로만 활용되다가 핑크라는 단어가 처음 공식적으로 기록된 건 17세기였습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 옅은 빨간색을 묘사하는 단어로 최초로 쓰였죠.
17세기 등장한 핑크라는 단어는, 분홍색 꽃인 ‘패랭이꽃'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패랭이꽃은 우리가 핑크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전형적인 분홍색을 하고 있는데, 영어 이름이 핑크스 플라워(Pinks Flower)에요. 여기서 핑크라는 단어가 탄생했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 핑크스 플라워가 핑크의 어원일 뿐만 아니라, 핑킹가위의 어원이기도 하다는 점이에요. 패랭이꽃의 꽃잎 끝부분은 지그재그로 뾰족합니다. 그래서 원래 핑크는 ‘무늬를 만들다'라는 의미의 동사로 활용되다가, 현대에는 핑킹가위의 어원이 되었죠. 이후 패랭이꽃의 핑크색에서 따와 색깔 핑크의 뜻도 가지게 되었어요.
Jean-Honoré Fragonard, The Swing, 1767-8 ⓒ The Wallace Collection, London, United Kingdom
그런데 이때까지의 핑크는 그렇게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빨간색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빨강에서 물 빠지거나 색이 바래면 나오는 컬러 정도로만 인식된 거예요. 미술 작품에서도 소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얼굴의 발그레한 홍조를 표현하는 정도로 쓰거나, 빨간색만큼 강한 임팩트는 아니지만 붉은 계열의 옷감으로 채색하고 싶을 때 약간 물 빠진 분홍색으로 활용하는 정도였어요.
핑크가 본격적으로 사랑받기 시작한 건 18세기였습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파스텔 톤이 유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빨강에 흰색이 섞인 핑크가 각광받기 시작해요. 18세기 중반부터 성행한 로코코 미술작품들을 보면, 그림 속 귀족들이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핑크나 하늘색의 파스텔 톤 옷 입은 것 볼 수 있는데요. 그런데 이때까지는 핑크가 남성의 컬러, 하늘색이 여성의 컬러로 여겨지곤 했어요. 이런 인식은 빨강과 파랑의 역사에서 비롯된 겁니다.
Giovanni Battista Tiepolo, Ceiling fresco in the Würzburg Residence, 1720 – 1744
빨강은 빨간색 망토를 두른 전사나, 빨간색 가운을 걸친 추기경 등의 이미지로 고착되어 있었어요. 여기서 약간 색이 바래거나 빠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핑크가 되어서 남성의 색으로 여겨졌고요. 반면 파란색은 성모 마리아의 상징색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파랑은 여자를 위한 색, 핑크는 남자를 위한 색이 된 것이죠. 이 인식은 20세기까지 이어집니다. 일례로 뉴욕 타임스의 1893년 기사에서는 “언제나 남자아이에게 핑크색, 여자아이에게 하늘색의 옷을 입혀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이때는 전통적인 의미가 계속 이어진 영향보다도, 아동복 판매량을 높이기 위한 마케팅의 일환으로 활용되었는데요.
이 흐름이 바뀌게 된 건 20세기 중후반이었습니다. 여성복에 핑크를 활용하는 시도가 많아지고, 티브이나 잡지 같은 미디어 노출이 잦아지면서 여성을 위한 색으로 여겨지게 되었죠. 더 이후에는 마릴린 먼로, 앤디 워홀,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셀럽들이 핑크를 활용하면서 성별 구분 없이, 상업적이고 매력적인 색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함께 보면 좋을 콘텐츠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는 색 3: 빨강, 파랑, 보라
색깔을 독점한 최초의 예술가: 아니쉬 카푸어
추상화는 왜 비싸게 팔릴까?
색깔은 그 역사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때로는 완전히 상반된 개념이, 한 컬러의 상징이 되기도 해요.
삶과 죽음의 색, 초록
Gustav Klimt, Litzlberg am Attersee, 1914-1915 ⓒ Neue Galerie New York.
초록은 가장 자연과 가까운 색입니다. 초록을 뜻하는 '그린(Green)'도 중세 단어인 Grene에서 유래했어요. Grene은 풀을 뜻하는 Grass, 자란다는 뜻의 Grow의 어원이기도 한데요. 그래서 초록은 색깔도, 이름도 자연에서 비롯된 단어입니다. 그 덕분에 탄생, 생명력과 관련된 긍정적인 색으로 활용되곤 하죠.
하지만 초록은 시간이 지나며 의미가 살벌하게 달라진 색이기도 해요. 생명, 탄생, 자연을 뜻하는 동시에, 죽음의 색이라고도 불렸죠. 초록색의 이미지가 좋았던 시기는 중세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이슬람 국가에서 초록을 특히 좋아했죠. 이슬람 국가는 사막지대가 많은 지역 특성상, 초록이 번영을 의미하는 색처럼 여겨졌는데요. 그렇다 보니, 이슬람 국가들의 국기에는 유난히 초록색이 많이 사용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슬람 경전인 쿠란에서는 천상의 산인 ‘콰프’를 묘사할 때 산 뿐만 아니라 하늘, 그 아래로 흐르는 물까지 모두 녹색으로 묘사하면서 초록을 예찬했죠.
이슬람 국가의 국기들. 왼쪽부터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그리고 이 시기까지는 서구권에서도 초록색을 좋아했어요. 어느 정도였냐면, 5월 1일에는 봄을 상징하는 초록색 옷을 입지 않으면 대놓고 조롱당하는 문화가 있었을 정도였죠. 그러던 중 12세기를 전후해서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십자군 전쟁처럼 무슬림과 기독교 사이 반감이 고조되는 사건이 생기게 되고, 그러면서 무슬림 상징색인 초록이 악마의 색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거예요.
이후 이런 인식에 불을 붙인 컬러가 ‘셸레 그린’이었습니다. 1775년, 과학자 빌헬름 셸레(Carl Wilhelm Scheele)가 초록색 물질을 우연히 발견하며 만들어졌죠. 가공도 쉽고 재료도 저렴해, 생산자 입장에서 너무 완벽한 색이었습니다. 셸레 그린은 기존에 생산되던 초록색 안료보다 훨씬 밝고 선명한 초록색을 보여주었어요. 변색도 없었고요. 이건 상당한 혁신이었습니다. 당시까지 생산되던 기존의 초록색 안료는 단점이 많았기 때문이죠. 발색력이 떨어지거나, 너무 거칠게 발리거나, 발색이 오래가지 못하고 변색되는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셸레 그린은 완벽한 초록을 보여줬어요.
(좌) 빌헬름 셸레 (우) Georg Friedrich Kersting, Embroidery woman, 1827 ⓒ Kunsthalle Kiel
그렇게 빌헬름 셸레는 이 완벽한 초록에 본인 이름을 따 ‘셸레 그린’이라 이름 붙이고 판매했습니다. 셸레 그린은 곧 엄청난 인기를 얻게 돼요. 사실 그동안 이런 혁신적인 안료가 등장했을 때, 울트라 마린이나 코치닐을 떠올려보면 굉장히 비쌌는데요. 셸레 그린은 이들과 달리, 가격이 우선 저렴했어요. 여기에 더해 변색도 안되고, 색깔도 예뻐서 미술작품뿐만 아니라 의류, 벽지, 장난감, 빵을 포장하는 종이 등 다양한 곳에 활용될 수 있었죠.
그런데 점차 집에서 돌연 사망하는 사람들 나오기 시작합니다. 알고 보니 셸레 그린 때문이었어요. 셸레 그린에는 살충제, 농약에 활용하는 비소가 치사량만큼 들어있었습니다. 이건 큰 사회적 문제로 번지게 돼요. 당시 셸레 그린은 영국에서 일주일간 2만 톤 생산할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죠. 정확한 수치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셸레 그린 때문에 사망한 인물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Jacques-Louis David, The Coronation of Napoleon, 1804
그리고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나폴레옹이에요. 나폴레옹이 말년에 유배 생활을 했던 세인트헬레나 섬의 집에는 셸레 그린으로 칠해진 방이 있었는데요. 세인트헬레나 섬은 매우 습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습한 환경에서는 셸레 그린이 곰팡이와 반응하여 유독 가스를 방출하죠. 후에 1960년대에 접어들어 나폴레옹의 머리카락을 분석했더니, 높은 농도의 비소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비소 중독이 사망 원인 중 하나일 것으로 거론되었고, 셸레 그린이 가득한 방이 원인이지 않을까 추정되었습니다.
오늘날엔 더 이상 셸레 그린에 비소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19세기 후반 들어 그 위험성이 발견되면서, 안료를 제작할 때 비소가 들어가지 않도록 법적으로 규제하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셸레 그린이 사망에 이르게 한 사람이 워낙 많았고, 셸레 그린 이후 비소를 활용한 초록이 많았어서, 초록색 자체가 죽음의 색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무대미술, 순수예술 할 것 없이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전반적으로 초록색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죠.
Wassily Kandinsky, Yellow-Red-Blue, 1925 ⓒ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Paris
일례로 추상화 작가인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초록색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해요. “녹색은 가장 강한 마비를 불러일으키는 색이다. 엄청나게 건강해 바닥에 누워 되새김질이나 하면서 멍청하고 표정 없는 눈으로 세상을 사색하는 뚱뚱한 소와 같다.”
이후 서구권에서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문화 콘텐츠에서 마녀의 색으로 초록을 쓰거나, 독극물 등을 초록으로 표현했어요. 자연과 상징의 생명이던 색이었지만, 근현대 접어들어 부정적 이미지가 생기면서, 오늘날 초록은 상반된 두 개의 이미지를 계속 이어가고 있답니다.
가장 고귀하면서 가장 천박한 색, 노랑
ⓒ lascaux-dordogne
노랑은 인간이 가장 처음 사용한 색입니다. 1만 7천3백 년 이상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사시대 라스코 동굴 벽화를 보면, 말이 노란색으로 칠해진 모습을 볼 수 있죠. 이처럼 노랑은 인간이 가장 처음 이름 붙인 색인 빨강보다도 먼저 사용되었고, 긴 시간 사용된 만큼 역사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 색이기도 합니다.
초기 노랑은 초록처럼 좋은 이미지를 가진 색이었어요. 고대 이집트에서는 노랑을 금, 후광, 햇빛을 표현하는 색으로 활용했습니다. 노란색의 영단어 옐로(yellow)도 당시 빛을 의미하는 단어였던 ġeolu에서 온 것이죠. 이런 후광은 불멸, 영원, 권력을 의미하면서 긍정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리고 종교화에서도 예수나 성모 마리아의 후광을 그리는 데 노란색을 활용하면서 귀한 것을 상징하는 색으로 여겨졌죠.
Kiss of Judas (1304–1306), fresco by Giotto ⓒ Scrovegni Chapel, Padua, Italy
그런데, 중세에 접어들면서 의미가 달라지기 시작해요. 예수의 제자인 유다가 예수를 군인들에게 팔아넘긴다는 성경 구절에서, 유다가 받은 금화를 상징하는 노란색이 유다의 상징색이 된 것이 계기였습니다. 실제로 종교화에서 유다를 그린 걸 보면, 대부분 노란 옷을 입고 있는 걸 볼 수 있어요. 이러한 인식은 점차 널리 퍼졌습니다. 그렇게 노란색은 시기, 질투, 욕망의 상징색으로 여겨지게 되었죠. 이후에는 황달이나 담즙 문제가 생겼을 때 혈색이 노랗게 된다는 점 때문에 질병의 색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노랑의 부정적 이미지를 계속 이어간 건, 19세기 프랑스였어요. 당시 프랑스에서는 선정적인 소설의 책표지를 노란색으로 활용했습니다. 이건 마케팅의 일환이었다고 해요. 노랑은 질투와 시기, 욕망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빨강, 초록과 함께 채도가 가장 높은 색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호등이 빨강, 노랑, 초록으로 구성된 것이기도 한데요. 빨강은 너무 위험한 느낌이고, 초록은 너무 안전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마케팅을 위해 눈에 띄는 노란색을 사용했다고 해요. 이윽고 노란색 표지의 선정적인 소설이 프랑스 기차역에 한가득 놓이면서, 노란 표지 = 외설적인 내용이 담긴 책이라는 인식이 생겨납니다.
Vincent Van Gogh, The Parisian Novels (The Yellow Books),1887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도 포르노 이미지를 담은 잡지 표지로 노란색을 활용하면서, 노랑은 선정적인 색이라는 인식이 많이 퍼져나갔어요. 그리고 이런 흐름을 당시 활동하던 문학가들은 부정적으로 봤습니다. 선정적인 내용을 담은 소설이 노란 표지를 이용해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는 걸 안 좋게 본 건데요. 일례로 시인 에드거 앨런 포는 <노란색 소책자의 영원한 무가치>라는 글을 쓰기도 했고,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서 주인공이 친구에게 노란색 표지의 책을 받은 후, 타락하고 몰락한 내용을 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노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현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일례로 옐로 저널리즘(황색언론)은 흥미 위주의 자극적인 내용을 실어서 판매 부수를 높이는데 집중하는 언론들을 일컫는 말로 활용됩니다. 노란색과 책이 붙으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느낌을 받게 되었죠. 이후 미술 쪽에서도 이런 인식이 이어져요.
<두 명의 프리다> 앞의 프리다 칼로 ⓒ Photograph by Bettmann/Getty
일례로 멕시코 여성 예술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일기장에 노란색에 대한 설명을 적어두었는데요. 내용이 상당히 부정적입니다. “광기, 질병, 공포, 태양과 행복의 일부, 더 많은 광기 그리고 미스터리, 모든 귀신이 이 색깔의 옷을 입는다. 적어도 속옷이라도.” 노랑이 귀신의 색깔이라고 언급하면서, 귀신이 노란 옷을 입지 않았으면 속옷이라도 노랑을 입었을 거라고 이야기하죠. 그럼에도 노랑을 '태양과 행복의 일부'라 칭하면서, 노란색의 양면적인 특성 강조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 초록이 여전히 자연을 상징하는 색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노랑도 마찬가지예요. 금이나 햇빛 같은, 인간이 가치를 높게 평가하거나 생명과 관련된 요소와 맞닿아 있는 덕에 여전히 긍정적으로 소비되기도 하고, 상업적으로도 임팩트 있는 컬러로 여겨집니다. 특히나 노란색의 금발머리가 높게 평가받는데, 인구 비율보다 훨씬 더 많은 금발이 광고에 등장한다고도 하죠.
뒤늦은 사랑을 받은 색, 핑크
핑크와 핑킹가위의 어원이 된 핑크스 플라워 (Pinks Flower) ⓒ Whetman Garden Plants, Roots Plants
핑크는 오늘날 인기를 얻고 있는 색을 통틀어 가장 젊은 색이에요. 가장 첫 기록으로 추정되는 건, 기원전 800년에 쓰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호메루스는 해가 뜨는 새벽의 분홍빛 하늘을 로지(Rosy) 하다고 표현했어요. 이후 새벽의 분홍빛 하늘을 칭할 때 로지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했죠. 그렇게 계속 로즈, 로지로만 활용되다가 핑크라는 단어가 처음 공식적으로 기록된 건 17세기였습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 옅은 빨간색을 묘사하는 단어로 최초로 쓰였죠.
17세기 등장한 핑크라는 단어는, 분홍색 꽃인 ‘패랭이꽃'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패랭이꽃은 우리가 핑크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전형적인 분홍색을 하고 있는데, 영어 이름이 핑크스 플라워(Pinks Flower)에요. 여기서 핑크라는 단어가 탄생했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 핑크스 플라워가 핑크의 어원일 뿐만 아니라, 핑킹가위의 어원이기도 하다는 점이에요. 패랭이꽃의 꽃잎 끝부분은 지그재그로 뾰족합니다. 그래서 원래 핑크는 ‘무늬를 만들다'라는 의미의 동사로 활용되다가, 현대에는 핑킹가위의 어원이 되었죠. 이후 패랭이꽃의 핑크색에서 따와 색깔 핑크의 뜻도 가지게 되었어요.
Jean-Honoré Fragonard, The Swing, 1767-8 ⓒ The Wallace Collection, London, United Kingdom
그런데 이때까지의 핑크는 그렇게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빨간색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빨강에서 물 빠지거나 색이 바래면 나오는 컬러 정도로만 인식된 거예요. 미술 작품에서도 소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얼굴의 발그레한 홍조를 표현하는 정도로 쓰거나, 빨간색만큼 강한 임팩트는 아니지만 붉은 계열의 옷감으로 채색하고 싶을 때 약간 물 빠진 분홍색으로 활용하는 정도였어요.
핑크가 본격적으로 사랑받기 시작한 건 18세기였습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파스텔 톤이 유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빨강에 흰색이 섞인 핑크가 각광받기 시작해요. 18세기 중반부터 성행한 로코코 미술작품들을 보면, 그림 속 귀족들이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핑크나 하늘색의 파스텔 톤 옷 입은 것 볼 수 있는데요. 그런데 이때까지는 핑크가 남성의 컬러, 하늘색이 여성의 컬러로 여겨지곤 했어요. 이런 인식은 빨강과 파랑의 역사에서 비롯된 겁니다.
Giovanni Battista Tiepolo, Ceiling fresco in the Würzburg Residence, 1720 – 1744
빨강은 빨간색 망토를 두른 전사나, 빨간색 가운을 걸친 추기경 등의 이미지로 고착되어 있었어요. 여기서 약간 색이 바래거나 빠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핑크가 되어서 남성의 색으로 여겨졌고요. 반면 파란색은 성모 마리아의 상징색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파랑은 여자를 위한 색, 핑크는 남자를 위한 색이 된 것이죠. 이 인식은 20세기까지 이어집니다. 일례로 뉴욕 타임스의 1893년 기사에서는 “언제나 남자아이에게 핑크색, 여자아이에게 하늘색의 옷을 입혀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이때는 전통적인 의미가 계속 이어진 영향보다도, 아동복 판매량을 높이기 위한 마케팅의 일환으로 활용되었는데요.
이 흐름이 바뀌게 된 건 20세기 중후반이었습니다. 여성복에 핑크를 활용하는 시도가 많아지고, 티브이나 잡지 같은 미디어 노출이 잦아지면서 여성을 위한 색으로 여겨지게 되었죠. 더 이후에는 마릴린 먼로, 앤디 워홀,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셀럽들이 핑크를 활용하면서 성별 구분 없이, 상업적이고 매력적인 색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함께 보면 좋을 콘텐츠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는 색 3: 빨강, 파랑, 보라
색깔을 독점한 최초의 예술가: 아니쉬 카푸어
추상화는 왜 비싸게 팔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