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 ⓒ The New European, Dellasposa
근대 미술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예술가는 단연,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입니다. 이들은 둘 다 젊은 날에 성공한 예술가였고, 피카소가 25살, 마티스가 37살 때 서로 알게 되어서 평생 교류하면서 지냈죠. 그런데,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습니다. 늘 서로를 견제하고 경쟁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기 때문인데요.
이들의 경쟁심은 때로 폭언과 폭력으로 번지기까지 했습니다. 이전에 빋피에서도 다뤘었던 라이벌인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이후, 이렇게 공격적으로 경쟁한 예술가 라이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죠.
문화적 번영기가 만든 세기의 라이벌
1889년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 포스터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르네상스 시기 탄생한 예술가였던 것처럼, 마티스와 피카소도 예술이 가장 번영하던 19세기 파리에서 활동했어요. 이 시기 파리는 유럽 예술의 중심지였습니다. 1889년에는 에펠탑이 건설되고 지하철이 생겨났고, 1855년부터는 파리 만국박람회가 시작됐죠. 원래 만국박람회는 산업혁명의 성과를 보여주려 시작된 것이었는데요. 인상주의의 등장 여파로, 예술가의 개성과 새로운 시도가 엿보이는 아방가르드한 예술까지 아우르게 됐어요. 그렇게 예술의 트렌드 중심지로 파리가 자리매김합니다.
그렇게 파리로 전 세계 화가와 조각가들이 몰려들었고, 예술가가 몰리면서 전시도 많아집니다. 그렇게 미술 평론도 발달했고, 미술 시장이 형성되면서 엄청난 예술적 에너지가 넘치게 되었죠.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이 시기 파리를 ‘19세기의 수도’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거대한 예술적 에너지 속, 그 트렌드를 선도하는 인물로 손꼽힌 것이 바로 앙리 마티스였어요. 마티스는 ‘cher maître'라고 불렸습니다. 우리말로는 '존경하는 선생님’이라는 뜻이죠. 마티스가 신작을 냈다고 하면, “마티스가 신작을 냈다"가 아니라 “셰흐 메흐트가 신작을 발표했다"라고 이야기했고, 마티스에 대해 조금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마저도 셰흐 메흐트의 머리글자를 따서 CM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야수파의 창시자, 색채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1913, photograph by Alvin Langdon Coburn
마티스는 프랑스 미술계의 큰아버지 같은 인물입니다. 영향력이 엄청나서 예술을 일찍 시작했을 것 같지만, 원래 직업은 변호사였어요. 당시 파리에서 유학하면서 법률 공부를 했었는데, 그때도 파리는 예술의 중심지였지만 단 한 번도 미술관이나 전시장에 가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후 변호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격을 따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와 변호사 사무실에서 수년간 일하는데요. 그러던 중 여름휴가를 떠나게 되었고, 마티스의 어머니는 휴가 가서 쓰라며 장성한 변호사 아들에게 수채화 물감 상자를 건네줍니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구들이었죠.
마티스는 이 상자를 챙겨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뭘 그려야 할지 몰라서 수채화 물감 상자 뚜껑에 있는 풍경화를 그대로 따라 그렸다고 해요. 그런데 그 순간에 이게 내 운명임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해요.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어머니의 지지 덕분에, 파리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며 작가 생활을 시작해요.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Girl with a Hat>, <Still Life with Dance>, <Vase, Bottle and Fruit>, <Blue Nude>
당시 마티스가 매료된 건 색채였습니다. 이 시기 가장 주목받던 예술가였던 고흐, 고갱, 세잔의 작품을 사서 자신의 집에 걸어두고 색채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파리 최고 명문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색채가 중심이 되는 사조인 야수파를 결성합니다.
야수파는 그간 그림에 존재하던 다양한 조형 요소 중, '색의 지위'를 격상시킨 장르였어요. 그의 그림을 보면, 여성의 얼굴을 초록색으로 칠하거나, 푸르른 숲을 빨간색으로 칠하면서 자유로운 색채로 표현한 걸 볼 수 있는데요. 이를 통해 색이 색 자체로,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하는 새로운 발상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Le bonheur de vivre>, <The Dessert: Harmony in Red>
하지만 당연히 비난도 있었어요. 마티스 작품이 전시될 때면, 화가들끼리 한마디씩 하다 싸우지 않고 지나는 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화가들은 다채로운 시도를 이어가면서, 다른 화가들에 대한 디스도 가감 없이 했는데요. 점묘법으로 알려진 폴 시냑은 마티스의 순수한 색이 역겹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작가들도 “이건 그림이 아니다, 미술계의 수치다, 형편없다”라거나, 마티스가 그린 여인을 보고 “이 여자가 범인이다, 죽여야 한다” 등 과격한 이야기를 나눴죠.
그럼에도, 마티스의 예술은 오늘날까지 높게 평가받습니다. 당대 인정받던 화가들의 유산 중 '색채'에 집중해 탐구했고, 그림에서 색의 위상을 드높인 시도를 한 덕분이죠. 후에는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판화, 스테인드글라스 등 다양한 매체까지 아우르며 ‘색채의 왕’ 자리를 굳건히 유지했습니다.
입체파의 창시자, 형태의 왕: 피카소
ⓒ Biography.com
성인이 된 후 미술을 시작한 마티스와 달리, 피카소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했던 예술가입니다. 그리고 그의 어린 시절엔 몇 가지 신화적인 일화가 있죠.
1. 피카소의 아버지, 루이즈 역시 화가였다. 어느 날 한번은 루이즈가 집을 오래 비운 적이 있었는데, 피카소가 루이즈의 그림을 완성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루이즈는 피카소에게 가진 미술 재료를 다 주고 절필했다.
2. 열네 살 때 피카소는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 입학하는데, 당시 입학시험 기간은 한 달이었다. 그런데 피카소는 하루 만에 완성하고 합격했다.
3. 피카소 어머니에 따르면, 피카소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말한 단어는 연필(lapiz)이었다고 한다.
피카소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이렇게 신화적이고 극적인 것들이 많은데요. 활동 당시 피카소는 이런 일화들을 흡족해하면서 굳이 진위 여부를 밝히진 않았다고 해요. 오늘날에는 후손들에 의해 진위 여부가 밝혀지긴 했습니다.
1. 절필은 아니고, 재료를 다 내주고 마음껏 그림 그릴 수 있게 해주었다.
2. 하루 만에 완성까진 아니지만, 매우 짧게 제작 완료하긴 했다.
3. 어머니가 한 말은 자식 사랑에서 나온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
여하간 엄청난 실력을 가진 예술가는 맞습니다. 15살 때, 바르셀로나 수도원에게서 제단 장식화 두 점을 의뢰받기도 했을 정도로 뛰어났죠. (현재는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그린 사실적이고 아카데믹한 화풍은 오래 지속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파리는 반 고흐, 고갱, 폴 세잔 같은 후기 인상주의 작가들이 개성을 뽐내던 시기였기 때문에, 피카소도 자신의 개성이 담긴 그림들을 그렸죠.
왼쪽 위부터 <Portrait of Suzanne Bloch>, <La soupe (The soup)>, <La Vie>, <The Blue Room>
이때의 초기 화풍이 그 유명한 청색시대 그림들입니다. 친구의 죽음으로 우울한 심상의 푸른빛 그림들을 주로 그렸는데요. 천재성은 일찍이 인정받았지만, '푸른빛의 우울한 그림은 안 팔린다'라며 화상들은 그림에 부정적 반응을 보였습니다. 피카소는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그 화풍이 달라지는 계기가 생기게 되죠.
파리 몽마르뜨 언덕에서 만난 이들 덕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피카소는 사랑하는 여인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청색의 화풍은 장밋빛으로 바뀌게 되죠. 그렇게 장빗빛 시대가 찾아오는데요. 몽마르뜨 언덕에서 알게 된 예술가 친구들 덕에, 더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게 되기도 합니다. 당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이국적인 예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아프리카 조각이나, 일본 전통화, 터키의 오달리스크 그림, 아라베스크 패턴 등이 있었죠. 그중에서도 피카소는 아프리카 미술에 관심 가지게 됩니다.
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 MoMA
아프리카 예술은 시각적 양식이 다양하게 통합된 장르에요. 그리고 주술적 특성이 있어서, 시각적 표현들 안에 제각기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예술가들은 그 이국적인 겉모습에 관심 가졌지만, 피카소는 이론적인 부분에 깊은 관심을 가져요. 그리고 각 시각적 요소를 분석하고, 변형하고, 해체하고, 재해석하는 입체파를 선보이기 시작하죠.
그렇게 같은 시기, 마티스는 색채의 왕이 되었고, 피카소는 형태의 왕이 될 수 있었는데요. 마티스는 전시를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야수파를 널리 알렸지만, 피카소는 전시에 거의 참여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로서 유명세나 명예를 얻기보다는 본인 예술을 좀 더 진지하게 성찰하기 위함이었죠. 대신 피카소의 시인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평론을 이어가면서, 아는 사람만 아는 예술가들의 예술가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렇게 피카소는 마티스 못지않은 추종자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죠.
마티스 VS 피카소, 그들의 첫 만남
피카소가 그린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그리고 그 작품이 걸린 스타인 살롱의 모습
1906년 3월, 미술 컬렉터이자 후원가인 거트루드 스타인이 마티스를 데리고 피카소 작업실에 방문하면서 이들의 첫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미국 출신의 컬렉터에요. 오늘날 우리에게는 살롱 문화가 시작된 스타인 살롱의 주인장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당시 파리의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이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스타인은, 당시 최고의 예술가로 꼽히던 피카소와 마티스의 식사 자리를 주선했어요. 당시의 만남에 대해 많은 기록이 남겨졌는데요. 가장 많이 언급되는 건 이들이 얼마나 다른 예술가였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마티스와 피카소는 우선, 그림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달랐습니다. 마티스는 평온한 마음으로 일상의 요소에 찬사를 보내는 그림을 그려왔고, 피카소는 그림이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의 무기'라고 표현했죠.
또 이들은 외모도 달랐습니다. 마티스는 깔끔하고 훤칠한 신사 스타일이었고, 피카소는 거칠고 고집스러운 상남자 스타일이었어요. 마티스는 정돈된 트위드 양복을 입었지만, 피카소는 화려한 패턴의 셔츠나 마린룩 느낌의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자주 입었습니다. 외모부터 작품관, 라이프 스타일 모두 완전히 상반된 스타일이었죠.
피카소의 첫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 / Pablo Picasso, Portrait of Fernande Olivier (1906)
이들은 서로를 환대했지만,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고 있었어요. 당시 자리에 함께한 피카소의 애인, 페르낭드 올리비에가 이를 캐치했죠. 올리비에에 따르면, "피카소는 볼멘 얼굴로 뾰로통하게 있으면서 기를 펴지 못했다"라고 술회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작업에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짜증을 내고,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 했다. 반면 마티스는 놀라울 정도로 명쾌하고, 정확하고, 간결하며, 총명해서 감명을 받았다"라고 표현합니다.
피카소가 마티스를 많이 견제했던 건데요. 이를 잘 볼 수 있는 일화가 이들의 그림 교환 사건이에요. 알고 지낸 지 1년쯤 되었을 때, 이들은 우정의 표시로 서로 그림을 교환합니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기싸움은 있었어요. 현장에 있던 스타인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 다 상대방의 약점을 포착할 만한 그림을 고르느라 애쓰는듯했다'고 하죠. 그렇게 마티스는 피카소의 정물화를 받았고, 피카소는 마티스가 자신의 딸 마거리트를 그린 초상화를 받았습니다.
피카소와 친구들이 다트 던지기를 하며 놀았던 마티스의 작품 <Portrait de Marguerite (1906-07)> ⓒ Musée Picasso
그런데 피카소가, 마티스의 딸 초상화를 작업실에 걸어두고 친구들과 다트 던지기를 하면서 놀았다는 소식이 전해져요. 끝부분이 흡착 고무로 된 다트여서 그림에 상처가 나진 않았지만, 던질 때마다 ‘눈 맞혔다!’ ‘코 때렸다!’하면서 소리 지르고 놀았다고 하죠. 피카소는 친구들의 과격한 행동에 당황했지만 말리진 않았다고 합니다.
이 그림이 평범한 정물화였어도 마티스 입장에선 화가 났겠지만, 자신의 딸을 그린 초상화였다는 점 때문에 마티스는 격분했어요. 이후 피카소의 말에 따르면, '내가 어떤 작품을 내놓고 어떤 행보를 취하는지, 마티스가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는듯했다'라고 합니다.
마티스의 젠틀한 복수
마티스와 피카소는 모두 하드 워커였어요. 마티스는 20대 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단 하루도 그림을 안 그린 날이 없었고, 피카소는 평생 동안 1만 5천 점 가량의 회화와 조각, 도자기 작품을 남겼죠. 이들의 경쟁이 심화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피카소는 입체파를 계속 발전시켜나가고 있었는데요. 이 시기에 피카소의 친구 기욤 아폴리네르가 조르주 브라크라는 화가를 소개해 줍니다. 브라크는 마티스의 제자이자, 야수파에 속한 화가였는데요. 피카소와 만난 후, 그의 예술관에 빠져들게 돼요.
Pabol Picasso, Still Life with a Bottle of Rum (1911) / Georges Braque, Nature Morte (1911)
피카소와 브라크는 이들은 함께 작업하면서 입체파라는 장르를 고도화시켜갔는데요. 이들이 얼마나 일심동체였는지, 피카소가 5개월간 휴가를 다녀오면서 떨어져 지낸 동안, 똑같은 그림을 그릴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피카소와 브라크는 입체파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브라크가 마티스의 제자였다는 점이에요. 게다가 마티스의 야수파적 특성을 계승한 화가였다 보니, 마티스 입장에서는 황당했습니다.
앙리 마티스의 모습 ⓒ The Artnewspaper
거트루드 스타인은 이 상황에 불을 붙입니다. 마티스에게 가서 “그들은 이제 마티스 추종자가 아닌 피카소 추종자가 되었다"라고 말했죠. 마티스는 격노하여 “거짓 소문이오. 그런데 당신은 오히려 그 소문을 퍼뜨리고 있소!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오. 당신의 피카소는 싸구려 그림을 그리는 사기꾼이오. 내가 가만두지 않겠소"라 말했습니다.
이후 마티스는 젠틀한 방식으로 복수합니다. 자신이 심사위원으로 있던 전시에 출품된 브라크의 작품을 퇴짜놓은 것이죠. 거기에 부정적인 평가까지 덧붙입니다. “푸후… 입방체 덩어리군!” 이건, 비난과 조롱에서 나온 말이었어요. 하지만 인상주의가 비난에서 탄생했던 것처럼, 마티스의 혹평은 입체파, 큐비즘의 탄생을 만들어냅니다.
말년에 아름답게 마무리된 두 사람의 관계
앙리 마티스 MoMA 전시 전경 ⓒ The New York Times
이들의 경쟁과 견제는 치열했지만, 두 사람 다 조금씩 나이 들어가면서부터는 피 튀기는 견제보다는 서로의 예술에 대한 존경과 지지를 보냈어요.
마티스는 72살이 되던 해에 대장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창자의 일부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고, 인공항문을 달고 휠체어 생활을 해야 했죠. 신체적 고통은 자연스럽게 정신으로도 이어져서 우울증에도 시달렸고요. 그림을 그리기 너무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병상에서 그림 그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요. 그리고 색종이를 오려 만드는 컷아웃 작품을 제작합니다.
피카소는 투병생활 중에도 자신의 예술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가는 마티스에게 찬사 보내요. 결국 마티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죠.
파블로 피카소 MoMA 전시 전경 ⓒ 2023 MoMA, N.Y
피카소는 마티스가 사망하고서도 20년 정도 더 작품 활동을 이어갔는데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피카소의 명성은 점점 더 커져, 생존 예술가 중에선 드물게 살아있을 때 본인을 다룬 영화도 만들어지고, 다양한 책도 쓰이곤 했습니다. 그리고 책과 영화 제작을 위해 제작진과 인터뷰할 때마다, 피카소는 마티스에 대한 찬사를 보냈어요.
피카소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도 나만큼 마티스 작품을 자세히 본 사람이 없고, 누구도 마티스만큼 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본 사람이 없다' 치열한 경쟁과 견제 속, 역사에 남겨진 아름다운 작품들은 이들의 열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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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 ⓒ The New European, Dellasposa
근대 미술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예술가는 단연,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입니다. 이들은 둘 다 젊은 날에 성공한 예술가였고, 피카소가 25살, 마티스가 37살 때 서로 알게 되어서 평생 교류하면서 지냈죠. 그런데,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습니다. 늘 서로를 견제하고 경쟁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기 때문인데요.
이들의 경쟁심은 때로 폭언과 폭력으로 번지기까지 했습니다. 이전에 빋피에서도 다뤘었던 라이벌인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이후, 이렇게 공격적으로 경쟁한 예술가 라이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죠.
문화적 번영기가 만든 세기의 라이벌
1889년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 포스터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르네상스 시기 탄생한 예술가였던 것처럼, 마티스와 피카소도 예술이 가장 번영하던 19세기 파리에서 활동했어요. 이 시기 파리는 유럽 예술의 중심지였습니다. 1889년에는 에펠탑이 건설되고 지하철이 생겨났고, 1855년부터는 파리 만국박람회가 시작됐죠. 원래 만국박람회는 산업혁명의 성과를 보여주려 시작된 것이었는데요. 인상주의의 등장 여파로, 예술가의 개성과 새로운 시도가 엿보이는 아방가르드한 예술까지 아우르게 됐어요. 그렇게 예술의 트렌드 중심지로 파리가 자리매김합니다.
그렇게 파리로 전 세계 화가와 조각가들이 몰려들었고, 예술가가 몰리면서 전시도 많아집니다. 그렇게 미술 평론도 발달했고, 미술 시장이 형성되면서 엄청난 예술적 에너지가 넘치게 되었죠.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이 시기 파리를 ‘19세기의 수도’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거대한 예술적 에너지 속, 그 트렌드를 선도하는 인물로 손꼽힌 것이 바로 앙리 마티스였어요. 마티스는 ‘cher maître'라고 불렸습니다. 우리말로는 '존경하는 선생님’이라는 뜻이죠. 마티스가 신작을 냈다고 하면, “마티스가 신작을 냈다"가 아니라 “셰흐 메흐트가 신작을 발표했다"라고 이야기했고, 마티스에 대해 조금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마저도 셰흐 메흐트의 머리글자를 따서 CM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야수파의 창시자, 색채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1913, photograph by Alvin Langdon Coburn
마티스는 프랑스 미술계의 큰아버지 같은 인물입니다. 영향력이 엄청나서 예술을 일찍 시작했을 것 같지만, 원래 직업은 변호사였어요. 당시 파리에서 유학하면서 법률 공부를 했었는데, 그때도 파리는 예술의 중심지였지만 단 한 번도 미술관이나 전시장에 가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후 변호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격을 따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와 변호사 사무실에서 수년간 일하는데요. 그러던 중 여름휴가를 떠나게 되었고, 마티스의 어머니는 휴가 가서 쓰라며 장성한 변호사 아들에게 수채화 물감 상자를 건네줍니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구들이었죠.
마티스는 이 상자를 챙겨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뭘 그려야 할지 몰라서 수채화 물감 상자 뚜껑에 있는 풍경화를 그대로 따라 그렸다고 해요. 그런데 그 순간에 이게 내 운명임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해요.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어머니의 지지 덕분에, 파리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며 작가 생활을 시작해요.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Girl with a Hat>, <Still Life with Dance>, <Vase, Bottle and Fruit>, <Blue Nude>
당시 마티스가 매료된 건 색채였습니다. 이 시기 가장 주목받던 예술가였던 고흐, 고갱, 세잔의 작품을 사서 자신의 집에 걸어두고 색채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파리 최고 명문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색채가 중심이 되는 사조인 야수파를 결성합니다.
야수파는 그간 그림에 존재하던 다양한 조형 요소 중, '색의 지위'를 격상시킨 장르였어요. 그의 그림을 보면, 여성의 얼굴을 초록색으로 칠하거나, 푸르른 숲을 빨간색으로 칠하면서 자유로운 색채로 표현한 걸 볼 수 있는데요. 이를 통해 색이 색 자체로,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하는 새로운 발상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Le bonheur de vivre>, <The Dessert: Harmony in Red>
하지만 당연히 비난도 있었어요. 마티스 작품이 전시될 때면, 화가들끼리 한마디씩 하다 싸우지 않고 지나는 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화가들은 다채로운 시도를 이어가면서, 다른 화가들에 대한 디스도 가감 없이 했는데요. 점묘법으로 알려진 폴 시냑은 마티스의 순수한 색이 역겹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작가들도 “이건 그림이 아니다, 미술계의 수치다, 형편없다”라거나, 마티스가 그린 여인을 보고 “이 여자가 범인이다, 죽여야 한다” 등 과격한 이야기를 나눴죠.
그럼에도, 마티스의 예술은 오늘날까지 높게 평가받습니다. 당대 인정받던 화가들의 유산 중 '색채'에 집중해 탐구했고, 그림에서 색의 위상을 드높인 시도를 한 덕분이죠. 후에는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판화, 스테인드글라스 등 다양한 매체까지 아우르며 ‘색채의 왕’ 자리를 굳건히 유지했습니다.
입체파의 창시자, 형태의 왕: 피카소
ⓒ Biography.com
성인이 된 후 미술을 시작한 마티스와 달리, 피카소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했던 예술가입니다. 그리고 그의 어린 시절엔 몇 가지 신화적인 일화가 있죠.
피카소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이렇게 신화적이고 극적인 것들이 많은데요. 활동 당시 피카소는 이런 일화들을 흡족해하면서 굳이 진위 여부를 밝히진 않았다고 해요. 오늘날에는 후손들에 의해 진위 여부가 밝혀지긴 했습니다.
여하간 엄청난 실력을 가진 예술가는 맞습니다. 15살 때, 바르셀로나 수도원에게서 제단 장식화 두 점을 의뢰받기도 했을 정도로 뛰어났죠. (현재는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그린 사실적이고 아카데믹한 화풍은 오래 지속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파리는 반 고흐, 고갱, 폴 세잔 같은 후기 인상주의 작가들이 개성을 뽐내던 시기였기 때문에, 피카소도 자신의 개성이 담긴 그림들을 그렸죠.
왼쪽 위부터 <Portrait of Suzanne Bloch>, <La soupe (The soup)>, <La Vie>, <The Blue Room>
이때의 초기 화풍이 그 유명한 청색시대 그림들입니다. 친구의 죽음으로 우울한 심상의 푸른빛 그림들을 주로 그렸는데요. 천재성은 일찍이 인정받았지만, '푸른빛의 우울한 그림은 안 팔린다'라며 화상들은 그림에 부정적 반응을 보였습니다. 피카소는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그 화풍이 달라지는 계기가 생기게 되죠.
파리 몽마르뜨 언덕에서 만난 이들 덕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피카소는 사랑하는 여인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청색의 화풍은 장밋빛으로 바뀌게 되죠. 그렇게 장빗빛 시대가 찾아오는데요. 몽마르뜨 언덕에서 알게 된 예술가 친구들 덕에, 더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게 되기도 합니다. 당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이국적인 예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아프리카 조각이나, 일본 전통화, 터키의 오달리스크 그림, 아라베스크 패턴 등이 있었죠. 그중에서도 피카소는 아프리카 미술에 관심 가지게 됩니다.
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 MoMA
아프리카 예술은 시각적 양식이 다양하게 통합된 장르에요. 그리고 주술적 특성이 있어서, 시각적 표현들 안에 제각기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예술가들은 그 이국적인 겉모습에 관심 가졌지만, 피카소는 이론적인 부분에 깊은 관심을 가져요. 그리고 각 시각적 요소를 분석하고, 변형하고, 해체하고, 재해석하는 입체파를 선보이기 시작하죠.
그렇게 같은 시기, 마티스는 색채의 왕이 되었고, 피카소는 형태의 왕이 될 수 있었는데요. 마티스는 전시를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야수파를 널리 알렸지만, 피카소는 전시에 거의 참여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로서 유명세나 명예를 얻기보다는 본인 예술을 좀 더 진지하게 성찰하기 위함이었죠. 대신 피카소의 시인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평론을 이어가면서, 아는 사람만 아는 예술가들의 예술가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렇게 피카소는 마티스 못지않은 추종자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죠.
마티스 VS 피카소, 그들의 첫 만남
피카소가 그린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그리고 그 작품이 걸린 스타인 살롱의 모습
1906년 3월, 미술 컬렉터이자 후원가인 거트루드 스타인이 마티스를 데리고 피카소 작업실에 방문하면서 이들의 첫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미국 출신의 컬렉터에요. 오늘날 우리에게는 살롱 문화가 시작된 스타인 살롱의 주인장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당시 파리의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이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스타인은, 당시 최고의 예술가로 꼽히던 피카소와 마티스의 식사 자리를 주선했어요. 당시의 만남에 대해 많은 기록이 남겨졌는데요. 가장 많이 언급되는 건 이들이 얼마나 다른 예술가였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마티스와 피카소는 우선, 그림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달랐습니다. 마티스는 평온한 마음으로 일상의 요소에 찬사를 보내는 그림을 그려왔고, 피카소는 그림이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의 무기'라고 표현했죠.
또 이들은 외모도 달랐습니다. 마티스는 깔끔하고 훤칠한 신사 스타일이었고, 피카소는 거칠고 고집스러운 상남자 스타일이었어요. 마티스는 정돈된 트위드 양복을 입었지만, 피카소는 화려한 패턴의 셔츠나 마린룩 느낌의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자주 입었습니다. 외모부터 작품관, 라이프 스타일 모두 완전히 상반된 스타일이었죠.
피카소의 첫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 / Pablo Picasso, Portrait of Fernande Olivier (1906)
이들은 서로를 환대했지만,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고 있었어요. 당시 자리에 함께한 피카소의 애인, 페르낭드 올리비에가 이를 캐치했죠. 올리비에에 따르면, "피카소는 볼멘 얼굴로 뾰로통하게 있으면서 기를 펴지 못했다"라고 술회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작업에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짜증을 내고,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 했다. 반면 마티스는 놀라울 정도로 명쾌하고, 정확하고, 간결하며, 총명해서 감명을 받았다"라고 표현합니다.
피카소가 마티스를 많이 견제했던 건데요. 이를 잘 볼 수 있는 일화가 이들의 그림 교환 사건이에요. 알고 지낸 지 1년쯤 되었을 때, 이들은 우정의 표시로 서로 그림을 교환합니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기싸움은 있었어요. 현장에 있던 스타인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 다 상대방의 약점을 포착할 만한 그림을 고르느라 애쓰는듯했다'고 하죠. 그렇게 마티스는 피카소의 정물화를 받았고, 피카소는 마티스가 자신의 딸 마거리트를 그린 초상화를 받았습니다.
피카소와 친구들이 다트 던지기를 하며 놀았던 마티스의 작품 <Portrait de Marguerite (1906-07)> ⓒ Musée Picasso
그런데 피카소가, 마티스의 딸 초상화를 작업실에 걸어두고 친구들과 다트 던지기를 하면서 놀았다는 소식이 전해져요. 끝부분이 흡착 고무로 된 다트여서 그림에 상처가 나진 않았지만, 던질 때마다 ‘눈 맞혔다!’ ‘코 때렸다!’하면서 소리 지르고 놀았다고 하죠. 피카소는 친구들의 과격한 행동에 당황했지만 말리진 않았다고 합니다.
이 그림이 평범한 정물화였어도 마티스 입장에선 화가 났겠지만, 자신의 딸을 그린 초상화였다는 점 때문에 마티스는 격분했어요. 이후 피카소의 말에 따르면, '내가 어떤 작품을 내놓고 어떤 행보를 취하는지, 마티스가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는듯했다'라고 합니다.
마티스의 젠틀한 복수
마티스와 피카소는 모두 하드 워커였어요. 마티스는 20대 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단 하루도 그림을 안 그린 날이 없었고, 피카소는 평생 동안 1만 5천 점 가량의 회화와 조각, 도자기 작품을 남겼죠. 이들의 경쟁이 심화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피카소는 입체파를 계속 발전시켜나가고 있었는데요. 이 시기에 피카소의 친구 기욤 아폴리네르가 조르주 브라크라는 화가를 소개해 줍니다. 브라크는 마티스의 제자이자, 야수파에 속한 화가였는데요. 피카소와 만난 후, 그의 예술관에 빠져들게 돼요.
Pabol Picasso, Still Life with a Bottle of Rum (1911) / Georges Braque, Nature Morte (1911)
피카소와 브라크는 이들은 함께 작업하면서 입체파라는 장르를 고도화시켜갔는데요. 이들이 얼마나 일심동체였는지, 피카소가 5개월간 휴가를 다녀오면서 떨어져 지낸 동안, 똑같은 그림을 그릴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피카소와 브라크는 입체파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브라크가 마티스의 제자였다는 점이에요. 게다가 마티스의 야수파적 특성을 계승한 화가였다 보니, 마티스 입장에서는 황당했습니다.
앙리 마티스의 모습 ⓒ The Artnewspaper
거트루드 스타인은 이 상황에 불을 붙입니다. 마티스에게 가서 “그들은 이제 마티스 추종자가 아닌 피카소 추종자가 되었다"라고 말했죠. 마티스는 격노하여 “거짓 소문이오. 그런데 당신은 오히려 그 소문을 퍼뜨리고 있소!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오. 당신의 피카소는 싸구려 그림을 그리는 사기꾼이오. 내가 가만두지 않겠소"라 말했습니다.
이후 마티스는 젠틀한 방식으로 복수합니다. 자신이 심사위원으로 있던 전시에 출품된 브라크의 작품을 퇴짜놓은 것이죠. 거기에 부정적인 평가까지 덧붙입니다. “푸후… 입방체 덩어리군!” 이건, 비난과 조롱에서 나온 말이었어요. 하지만 인상주의가 비난에서 탄생했던 것처럼, 마티스의 혹평은 입체파, 큐비즘의 탄생을 만들어냅니다.
말년에 아름답게 마무리된 두 사람의 관계
앙리 마티스 MoMA 전시 전경 ⓒ The New York Times
이들의 경쟁과 견제는 치열했지만, 두 사람 다 조금씩 나이 들어가면서부터는 피 튀기는 견제보다는 서로의 예술에 대한 존경과 지지를 보냈어요.
마티스는 72살이 되던 해에 대장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창자의 일부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고, 인공항문을 달고 휠체어 생활을 해야 했죠. 신체적 고통은 자연스럽게 정신으로도 이어져서 우울증에도 시달렸고요. 그림을 그리기 너무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병상에서 그림 그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요. 그리고 색종이를 오려 만드는 컷아웃 작품을 제작합니다.
피카소는 투병생활 중에도 자신의 예술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가는 마티스에게 찬사 보내요. 결국 마티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죠.
파블로 피카소 MoMA 전시 전경 ⓒ 2023 MoMA, N.Y
피카소는 마티스가 사망하고서도 20년 정도 더 작품 활동을 이어갔는데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피카소의 명성은 점점 더 커져, 생존 예술가 중에선 드물게 살아있을 때 본인을 다룬 영화도 만들어지고, 다양한 책도 쓰이곤 했습니다. 그리고 책과 영화 제작을 위해 제작진과 인터뷰할 때마다, 피카소는 마티스에 대한 찬사를 보냈어요.
피카소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도 나만큼 마티스 작품을 자세히 본 사람이 없고, 누구도 마티스만큼 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본 사람이 없다' 치열한 경쟁과 견제 속, 역사에 남겨진 아름다운 작품들은 이들의 열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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