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P-Evan Vucci
최근 총격 사건을 겪은 트럼프 사건이 엄청난 이슈입니다. 조금 이르지만, 트럼프의 당선 유력하다는 이야기도 나오고요.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중, 미술계에서 화제가 된 건 현장을 담은 사진이었어요.
트럼프가 피 흘리면서도 주먹을 위로 쭉 뻗고 있고, 그 옆으로 미국 국기가 보이는 이 사진은 AP 통신의 수석 사진작가 에반 부치가 찍은 것입니다. 사진이 공개된 후에, 미술 평론가들은 사진이 미술 구도적으로 봤을 때 완벽하다고 이야기했어요.
ⓒ Jerry Gogosian Instagram
경호원들은 바닥을 보고 있지만 트럼프만 정면 위쪽을 보는 시선의 대조, 사진 속 인물들의 팔 방향, 머리 방향 등 동세를 따라 시선을 이동하면 트럼프에게서 시선이 멈추는 모습, 인물과 하늘의 적절한 여백 등을 이야기했죠.
이런 미술적 구성을 제외하더라도 사진 자체가 가진 파급력이 너무 커서, 사진 공개 직후 티셔츠 등 각종 굿즈 바로 제작되기 시작했는데요. 이 티셔츠를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순간, 이들은 트럼프의 모습을 선전하고 다니는 광고판이 됩니다. 오늘날엔 사진이나 영상 등 정치인의 선전을 할 수 있는 도구가 아주 많지만, 과거엔 오직 미술 하나뿐이었어요.
꽤 오랜 기간 종교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사용되다가, 왕권이 생기면서는 이들의 권력을 드러내기 위한 선전 도구로 활용되곤 했는데요. 이 선전 미술을 업계로 본다면, 그 안에서 업계 탑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정치적인 그림을 그린 예술가라 꼽히는,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하려 준비했어요.
Jacques-Louis David, Self Portrait (1794)
다비드가 활동하던 시기는 정치적 격변기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시기 전후의 30여 년의 시간 동안 정권이 두 번 바뀌었는데, 늘 1타 화가는 다비드였어요.
그림 실력을 말할 때 크게 두 가지 요소가 고려됩니다. 소묘와 채색 등 물리적인 그림 실력과, 캔버스 안에 대상을 배치하는 구성력이죠. 자크 루이 다비드는 여기에 한 가지 요소가 더 두드러진 작가에요. 바로 소통 능력이죠. 이건 다비드가 아주 어렸을 때 자연스럽게 갖게 된 능력입니다.
다비드의 부모님은 부유한 상인이었어요. 덕분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고급 스포츠인 펜싱을 배울 수 있었는데요. 수업 중 왼쪽 얼굴을 다치면서 안면 신경 손상을 겪게 됩니다. 이 상처가 악성 종양으로 번지면서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힘든 상황이 되었다고 해요.
Joseph-Marie Vien, Portrait de Jacques Louis David adolescent (1765)
그래서 다비드는 ‘그림’으로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합니다. 소통을 위해 항상 종이와 펜을 들고 다녔고, 어느 정도 낫고 난 후인 17살 때 그려진 초상화를 보면 이때도 종이와 펜을 들고 있는 걸 볼 수 있어요. 이때는 그림을 잘 그리고 재밌어서 들고 다녔는데요. 다비드는 어떻게 그려야 빠르고 정확하게 자기 의도를 드러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그림 한 장에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던 아이였어요.
그렇게 미술 수업을 꾸준히 받다가, 26살이 되던 해에 프랑스 내 최고 실력을 가진 작가에게 주는 ‘로마상’을 받게 됩니다. 이 상을 받으면 로마 유학 5년 다녀올 수 있었어요. 그렇게 다비드는 더 실력을 쌓고 프랑스로 복귀합니다. 그리고 유학 다녀오자마자, 32살의 나이에 왕립 아카데미 공식 회원이 돼요. 이 회원이 되면 왕실에서 요청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죠.
Jacques-Louis David, Oath of the Horatii (1784)
당시 왕실이 요청하던 그림은 대부분 초상화였는데, 이외에도 정치적 목적의 그림이 그려지곤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회화 작품이 국민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정치적인 의도를 담은 그림도 자주 그려지곤 했는데요. 다비드가 워낙 스토리텔링 능력 뛰어나, 왕실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조금씩 혁명의 흐름이 생기기 시작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영점은 왕실로 향합니다. ‘왕실에서 지나치게 많은 걸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의문 속, 왕정을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있었죠. 이런 흐름 속 당시 왕이었던 루이 16세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그림이나, 왕권에 대한 복종을 이끌어내는 그림을 요청합니다. 다비드는 매번 루이 16세 마음에 쏙 드는 그림을 착착 그려내면서, 아주 사랑받는 작가가 되었는데요.
그런데 중요한 건, 다비드의 정치 성향은 왕실 쪽이 아닌 혁명가들 쪽이었다는 거예요. 당시 혁명가들은 다양한 정파를 나누어 활동했는데, 다비드는 그중에서도 자코뱅파 당원이었고 그 안에서 꽤 영향력이 컸던 인물입니다.
Jacques-Louis David, The Death of Marat (1793)
이 시기 프랑스 혁명을 위해 노력하면서 다비드가 남긴 대표작은 <마라의 죽음>이에요. 아마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그림일 텐데요. 욕실에서 고요하고 쓸쓸하게 한 남자가 죽음을 맞이한 모습 그려냈는데. 그림 속 인물은 자코뱅파의 핵심 당원인 장 폴 마라입니다.
마라는 피부병을 앓고 있어서 목욕을 하면서 업무를 보곤 했어요. 이때를 노리고 자코뱅파와 대립 중이던 지롱드파의 당원이 마라를 칼로 찔러 살해한 것이죠. 당시 칼은 마라의 폐와 심장, 대동맥을 끊었고 마라는 즉사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분노한 자코뱅파는 다비드에게 마라를 추모하기 위해, 죽음의 순간을 담은 그림을 그려달라 요청해요.
여기서 다비드의 스토리텔링 능력이 빛을 발합니다. 다비드는 이 그림이 단순 추모의 의미만 담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프랑스 혁명 중 당파의 이념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자코뱅파를 선전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거라고 봤어요. 그리고 마라의 죽음을 비극적으로 연출합니다. 사건 당시 마라는 칼로 난도질당한 상태여서, 손에 쥐고 있던 종이와 펜을 놓칠 수밖에 없었던 상태였는데, 다비드는 이걸 꼭 쥔 상태로 묘사해서 마라 죽음의 비극성을 더합니다.
마라의 죽음을 그린 또 다른 그림. Paul-Jaques-Aime Baudry, Charlotte Corday (1860)
그리고 스토리텔링이 효과적으로 이뤄지기 위해, 쓸데없는 요소는 과감하게 삭제해요. 사건 당시 다비드는 현장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는데, 아수라장이었다고 해요. 욕조의 간이 책상과 서류더미엔 피가 잔뜩 튀어있었지만, 이런 요소는 그림의 집중도를 떨어트릴 거라 보고 과감히 삭제합니다.
또 욕실 벽에는 원래 권총 한 쌍과 프랑스 지도가 걸려있었는데, 이 역시 지워내고 빈 벽으로 묘사했어요. 그리고 붓 터치가 거의 보이지 않도록 침착하게 채색했죠. 덕분에 그림은 간결하면서 비극적으로 마라의 죽음을 담게 되었습니다.
두 작품을 비교하면 다비드의 구성이 훨씬 숭고하게 와닿는 걸 알 수 있다.
다비드는 작품의 요소들을 영리하게 더하고 빼면서, 죽음에 비극은 더하고 신성함을 끌어올린 진정한 의미의 추모 회화를 제작한 것이죠. 그림은 누가 봐도 혁명을 꿈꾸던 이의 숭고한 죽음을 그려내고 있었고, 자코뱅파 당원들을 고취시키기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혁명은 다비드가 바라던 대로 끝나지 않아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통해 프랑스 지도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죠. 나폴레옹은 쿠데타로 얻은 권력인 만큼, 자신의 권력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까지도 여전히 프랑스는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에, 강력한 선전도구는 계속 미술 작품이었어요. 그렇게 나폴레옹은 뛰어난 화가들을 왕실에 들이기 시작했고, 선전적인 작품을 잘 만드는 걸로 입소문 난 다비드에게도 요청합니다.
이때 다비드는 이미 혁명에 참여했던 자코뱅파 당원이라는 게 잘 알려진 상태였지만 나폴레옹은 개의치 않았고, 다비드도 나폴레옹 요청에 응해요.
Jacques-Louis David, Napoleon Crossing the Alps (1802)
그렇게 나폴레옹 집권 초기 다비드가 그린 작품이 <생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입니다. 오늘날 나폴레옹 그림 중 제일 잘 알려진 그림이죠. 이 그림은 나폴레옹 군대가 승리를 거둔 후,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향하는 모습을 그려냈어요.
그리고 다비드는 이번에도 미술적 연출을 통해 나폴레옹의 권력 강조합니다. 우선 나폴레옹이 오르는 협곡을 가파른 대각선으로 그려내, 그림에 역동성을 더했어요. 말도 앞발을 들고 있어 그 역동성을 강조하는 모습이죠. 가파른 언덕을 액티비티 하듯이 오르는데도 나폴레옹은 본인의 전력을 보여주는 것처럼 아주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다비드는 또 나폴레옹의 망토가 얼굴 앞쪽으로 향하게 해서,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한 상황 연출했어요. 그리고 이 빨간색 망토 덕분에 나폴레옹의 손이 더 잘 들어오고요.
Paul Delaroche가 그린 같은 상황의 나폴레옹의 초상화 <Bonaparte Crossing the Alps, (1850)>
이런 그림적인 구성뿐만 아니라, 실제와 다르게 바꾼 것도 있었는데요. 당시 나폴레옹이 타고 있던 말은 우리가 지금 보는 것처럼 크고 근육질 있는 말이 아니라 작은 노새였습니다. 산악지형에서는 말보다 노새가 훨씬 지구력이 좋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다비드는 이 초상화가 선전도구로 쓰일 것을 알고 있었기에, 굳이 사실적으로 그리기보다 극적인 연출을 더합니다. 그래서 딱 봤을 때 작품 자체가 훨씬 웅장해 보이는 효과가 있죠.
다비드가 추가로 더 그린 초상화들. 총 네 점이 있다.
나폴레옹도 이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1801년 처음 받아본 후, 네 번이나 더 똑같은 작품을 의뢰해 국가 기관 곳곳에 전시해두었다고 해요.
또 다비드는 그림만 잘 그린 게 아니라, 나폴레옹에게 완전히 충성하기도 했는데요. 언젠가 다비드의 작업실에 제자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다비드가 작업 중인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보여주면서 “여기 내 영웅이 있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기술적으로 잘 그리는 걸 넘어, 진정으로 그림 속 인물을 존경하고 있었던 거죠.
Jacques-Louis David, The Coronation of Napoleon (1806)
진심을 다하는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난 건, 나폴레옹의 대관식 작품입니다. 대관식은 나폴레옹이 이제 프랑스 지도자로서 공식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해요. 매우 중요한 그림인 것이죠. 다비드는 세로 6미터, 가로 10미터의 거대한 캔버스에 이 현장을 그려 넣었습니다.
사실 이 작품에는 이야기할 거리가 너무나 많아요. 인물만 150명이 등장하고, 의상이나 연출 등 다양한 면에서 걸작이라 꼽히는 작품인데요. 그중에서도 가장 다비드의 내공을 잘 보여주는 건 나폴레옹의 어머니를 그린 부분입니다.
대관식을 보며 웃는 나폴레옹의 어머니 모습.
그림 가운데 뒤편으로 흰옷을 입고 앉아서 대관식을 바라보는 인물이 나폴레옹의 어머니인데요. 실제로 대관식 때는 나폴레옹 어머니가 불참했다고 해요. 나폴레옹의 아내인 조세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습니다. 조세핀은 이혼녀고, 전 남편과 아이도 있었어요. 그래서 아들과 조세핀의 관계를 반대하면서 대관식에 불참한 거죠.
나폴레옹은 어머니가 대관식에까지 안 온 것을 서운해했는데, 다비드는 이걸 눈치채고 참석하지도 않은 어머니를 그려 넣었습니다. 심지어 흡족한 표정으로 따뜻하게 아들과 며느리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연출했죠.
그림은 나폴레옹의 요청에 따라 많은 수정이 있었고, 실제 현장과 다른 부분도 많았다.
이걸 나폴레옹도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 대관식 그림이 진행될 때 나폴레옹은 수차례 다비드를 찾아와 그림에 피드백 했다고 해요. 교황의 손짓을 수정 해달라거나, 인물의 표정을 바꿔달라는 등 많은 피드백을 했는데. 어머니의 모습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심지어 어느 날 하루는 와서 아무 말 없이, 한 시간가량을 묵묵히 바라보다 다비드에게 “당신을 존경한다 I Salute you’라는 말을 했다고 해요. 다비드의 그림 실력뿐만 아니라 화가로서의 스토리텔링 능력, 그리고 의뢰인을 만족시키는 전략 등을 아우른 존경 표시였죠.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그림의 선전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의뢰인의 니즈까지 완벽하게 충족시킨 그림입니다. 다비드가 사랑받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죠.
다비드의 마지막 대작, Mars Being Disarmed by Venus and the Three Graces (1824)
말년에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유배된 후, 다비드는 벨기에로 망명을 떠나 죽을 때까지 프랑스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다비드가 원하는 세상이 도래했지만, 예술가로서 선택한 전략이 더 이상 프랑스에 머무를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정치적 신념을 저버리며 예술의 가치를 끌어올린 다비드의 시도는 권력이 뒤바뀌고 사회 흐름이 변화한 상황에서도 그가 최고 권위의 예술가로 불린 이유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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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Evan Vucci
최근 총격 사건을 겪은 트럼프 사건이 엄청난 이슈입니다. 조금 이르지만, 트럼프의 당선 유력하다는 이야기도 나오고요.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중, 미술계에서 화제가 된 건 현장을 담은 사진이었어요.
트럼프가 피 흘리면서도 주먹을 위로 쭉 뻗고 있고, 그 옆으로 미국 국기가 보이는 이 사진은 AP 통신의 수석 사진작가 에반 부치가 찍은 것입니다. 사진이 공개된 후에, 미술 평론가들은 사진이 미술 구도적으로 봤을 때 완벽하다고 이야기했어요.
ⓒ Jerry Gogosian Instagram
경호원들은 바닥을 보고 있지만 트럼프만 정면 위쪽을 보는 시선의 대조, 사진 속 인물들의 팔 방향, 머리 방향 등 동세를 따라 시선을 이동하면 트럼프에게서 시선이 멈추는 모습, 인물과 하늘의 적절한 여백 등을 이야기했죠.
이런 미술적 구성을 제외하더라도 사진 자체가 가진 파급력이 너무 커서, 사진 공개 직후 티셔츠 등 각종 굿즈 바로 제작되기 시작했는데요. 이 티셔츠를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순간, 이들은 트럼프의 모습을 선전하고 다니는 광고판이 됩니다. 오늘날엔 사진이나 영상 등 정치인의 선전을 할 수 있는 도구가 아주 많지만, 과거엔 오직 미술 하나뿐이었어요.
꽤 오랜 기간 종교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사용되다가, 왕권이 생기면서는 이들의 권력을 드러내기 위한 선전 도구로 활용되곤 했는데요. 이 선전 미술을 업계로 본다면, 그 안에서 업계 탑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정치적인 그림을 그린 예술가라 꼽히는,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하려 준비했어요.
Jacques-Louis David, Self Portrait (1794)
다비드가 활동하던 시기는 정치적 격변기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시기 전후의 30여 년의 시간 동안 정권이 두 번 바뀌었는데, 늘 1타 화가는 다비드였어요.
그림 실력을 말할 때 크게 두 가지 요소가 고려됩니다. 소묘와 채색 등 물리적인 그림 실력과, 캔버스 안에 대상을 배치하는 구성력이죠. 자크 루이 다비드는 여기에 한 가지 요소가 더 두드러진 작가에요. 바로 소통 능력이죠. 이건 다비드가 아주 어렸을 때 자연스럽게 갖게 된 능력입니다.
다비드의 부모님은 부유한 상인이었어요. 덕분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고급 스포츠인 펜싱을 배울 수 있었는데요. 수업 중 왼쪽 얼굴을 다치면서 안면 신경 손상을 겪게 됩니다. 이 상처가 악성 종양으로 번지면서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힘든 상황이 되었다고 해요.
Joseph-Marie Vien, Portrait de Jacques Louis David adolescent (1765)
그래서 다비드는 ‘그림’으로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합니다. 소통을 위해 항상 종이와 펜을 들고 다녔고, 어느 정도 낫고 난 후인 17살 때 그려진 초상화를 보면 이때도 종이와 펜을 들고 있는 걸 볼 수 있어요. 이때는 그림을 잘 그리고 재밌어서 들고 다녔는데요. 다비드는 어떻게 그려야 빠르고 정확하게 자기 의도를 드러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그림 한 장에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던 아이였어요.
그렇게 미술 수업을 꾸준히 받다가, 26살이 되던 해에 프랑스 내 최고 실력을 가진 작가에게 주는 ‘로마상’을 받게 됩니다. 이 상을 받으면 로마 유학 5년 다녀올 수 있었어요. 그렇게 다비드는 더 실력을 쌓고 프랑스로 복귀합니다. 그리고 유학 다녀오자마자, 32살의 나이에 왕립 아카데미 공식 회원이 돼요. 이 회원이 되면 왕실에서 요청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죠.
Jacques-Louis David, Oath of the Horatii (1784)
당시 왕실이 요청하던 그림은 대부분 초상화였는데, 이외에도 정치적 목적의 그림이 그려지곤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회화 작품이 국민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정치적인 의도를 담은 그림도 자주 그려지곤 했는데요. 다비드가 워낙 스토리텔링 능력 뛰어나, 왕실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조금씩 혁명의 흐름이 생기기 시작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영점은 왕실로 향합니다. ‘왕실에서 지나치게 많은 걸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의문 속, 왕정을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있었죠. 이런 흐름 속 당시 왕이었던 루이 16세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그림이나, 왕권에 대한 복종을 이끌어내는 그림을 요청합니다. 다비드는 매번 루이 16세 마음에 쏙 드는 그림을 착착 그려내면서, 아주 사랑받는 작가가 되었는데요.
그런데 중요한 건, 다비드의 정치 성향은 왕실 쪽이 아닌 혁명가들 쪽이었다는 거예요. 당시 혁명가들은 다양한 정파를 나누어 활동했는데, 다비드는 그중에서도 자코뱅파 당원이었고 그 안에서 꽤 영향력이 컸던 인물입니다.
Jacques-Louis David, The Death of Marat (1793)
이 시기 프랑스 혁명을 위해 노력하면서 다비드가 남긴 대표작은 <마라의 죽음>이에요. 아마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그림일 텐데요. 욕실에서 고요하고 쓸쓸하게 한 남자가 죽음을 맞이한 모습 그려냈는데. 그림 속 인물은 자코뱅파의 핵심 당원인 장 폴 마라입니다.
마라는 피부병을 앓고 있어서 목욕을 하면서 업무를 보곤 했어요. 이때를 노리고 자코뱅파와 대립 중이던 지롱드파의 당원이 마라를 칼로 찔러 살해한 것이죠. 당시 칼은 마라의 폐와 심장, 대동맥을 끊었고 마라는 즉사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분노한 자코뱅파는 다비드에게 마라를 추모하기 위해, 죽음의 순간을 담은 그림을 그려달라 요청해요.
여기서 다비드의 스토리텔링 능력이 빛을 발합니다. 다비드는 이 그림이 단순 추모의 의미만 담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프랑스 혁명 중 당파의 이념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자코뱅파를 선전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거라고 봤어요. 그리고 마라의 죽음을 비극적으로 연출합니다. 사건 당시 마라는 칼로 난도질당한 상태여서, 손에 쥐고 있던 종이와 펜을 놓칠 수밖에 없었던 상태였는데, 다비드는 이걸 꼭 쥔 상태로 묘사해서 마라 죽음의 비극성을 더합니다.
마라의 죽음을 그린 또 다른 그림. Paul-Jaques-Aime Baudry, Charlotte Corday (1860)
그리고 스토리텔링이 효과적으로 이뤄지기 위해, 쓸데없는 요소는 과감하게 삭제해요. 사건 당시 다비드는 현장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는데, 아수라장이었다고 해요. 욕조의 간이 책상과 서류더미엔 피가 잔뜩 튀어있었지만, 이런 요소는 그림의 집중도를 떨어트릴 거라 보고 과감히 삭제합니다.
또 욕실 벽에는 원래 권총 한 쌍과 프랑스 지도가 걸려있었는데, 이 역시 지워내고 빈 벽으로 묘사했어요. 그리고 붓 터치가 거의 보이지 않도록 침착하게 채색했죠. 덕분에 그림은 간결하면서 비극적으로 마라의 죽음을 담게 되었습니다.
두 작품을 비교하면 다비드의 구성이 훨씬 숭고하게 와닿는 걸 알 수 있다.
다비드는 작품의 요소들을 영리하게 더하고 빼면서, 죽음에 비극은 더하고 신성함을 끌어올린 진정한 의미의 추모 회화를 제작한 것이죠. 그림은 누가 봐도 혁명을 꿈꾸던 이의 숭고한 죽음을 그려내고 있었고, 자코뱅파 당원들을 고취시키기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혁명은 다비드가 바라던 대로 끝나지 않아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통해 프랑스 지도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죠. 나폴레옹은 쿠데타로 얻은 권력인 만큼, 자신의 권력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까지도 여전히 프랑스는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에, 강력한 선전도구는 계속 미술 작품이었어요. 그렇게 나폴레옹은 뛰어난 화가들을 왕실에 들이기 시작했고, 선전적인 작품을 잘 만드는 걸로 입소문 난 다비드에게도 요청합니다.
이때 다비드는 이미 혁명에 참여했던 자코뱅파 당원이라는 게 잘 알려진 상태였지만 나폴레옹은 개의치 않았고, 다비드도 나폴레옹 요청에 응해요.
Jacques-Louis David, Napoleon Crossing the Alps (1802)
그렇게 나폴레옹 집권 초기 다비드가 그린 작품이 <생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입니다. 오늘날 나폴레옹 그림 중 제일 잘 알려진 그림이죠. 이 그림은 나폴레옹 군대가 승리를 거둔 후,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향하는 모습을 그려냈어요.
그리고 다비드는 이번에도 미술적 연출을 통해 나폴레옹의 권력 강조합니다. 우선 나폴레옹이 오르는 협곡을 가파른 대각선으로 그려내, 그림에 역동성을 더했어요. 말도 앞발을 들고 있어 그 역동성을 강조하는 모습이죠. 가파른 언덕을 액티비티 하듯이 오르는데도 나폴레옹은 본인의 전력을 보여주는 것처럼 아주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다비드는 또 나폴레옹의 망토가 얼굴 앞쪽으로 향하게 해서,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한 상황 연출했어요. 그리고 이 빨간색 망토 덕분에 나폴레옹의 손이 더 잘 들어오고요.
Paul Delaroche가 그린 같은 상황의 나폴레옹의 초상화 <Bonaparte Crossing the Alps, (1850)>
이런 그림적인 구성뿐만 아니라, 실제와 다르게 바꾼 것도 있었는데요. 당시 나폴레옹이 타고 있던 말은 우리가 지금 보는 것처럼 크고 근육질 있는 말이 아니라 작은 노새였습니다. 산악지형에서는 말보다 노새가 훨씬 지구력이 좋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다비드는 이 초상화가 선전도구로 쓰일 것을 알고 있었기에, 굳이 사실적으로 그리기보다 극적인 연출을 더합니다. 그래서 딱 봤을 때 작품 자체가 훨씬 웅장해 보이는 효과가 있죠.
다비드가 추가로 더 그린 초상화들. 총 네 점이 있다.
나폴레옹도 이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1801년 처음 받아본 후, 네 번이나 더 똑같은 작품을 의뢰해 국가 기관 곳곳에 전시해두었다고 해요.
또 다비드는 그림만 잘 그린 게 아니라, 나폴레옹에게 완전히 충성하기도 했는데요. 언젠가 다비드의 작업실에 제자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다비드가 작업 중인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보여주면서 “여기 내 영웅이 있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기술적으로 잘 그리는 걸 넘어, 진정으로 그림 속 인물을 존경하고 있었던 거죠.
Jacques-Louis David, The Coronation of Napoleon (1806)
진심을 다하는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난 건, 나폴레옹의 대관식 작품입니다. 대관식은 나폴레옹이 이제 프랑스 지도자로서 공식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해요. 매우 중요한 그림인 것이죠. 다비드는 세로 6미터, 가로 10미터의 거대한 캔버스에 이 현장을 그려 넣었습니다.
사실 이 작품에는 이야기할 거리가 너무나 많아요. 인물만 150명이 등장하고, 의상이나 연출 등 다양한 면에서 걸작이라 꼽히는 작품인데요. 그중에서도 가장 다비드의 내공을 잘 보여주는 건 나폴레옹의 어머니를 그린 부분입니다.
대관식을 보며 웃는 나폴레옹의 어머니 모습.
그림 가운데 뒤편으로 흰옷을 입고 앉아서 대관식을 바라보는 인물이 나폴레옹의 어머니인데요. 실제로 대관식 때는 나폴레옹 어머니가 불참했다고 해요. 나폴레옹의 아내인 조세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습니다. 조세핀은 이혼녀고, 전 남편과 아이도 있었어요. 그래서 아들과 조세핀의 관계를 반대하면서 대관식에 불참한 거죠.
나폴레옹은 어머니가 대관식에까지 안 온 것을 서운해했는데, 다비드는 이걸 눈치채고 참석하지도 않은 어머니를 그려 넣었습니다. 심지어 흡족한 표정으로 따뜻하게 아들과 며느리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연출했죠.
그림은 나폴레옹의 요청에 따라 많은 수정이 있었고, 실제 현장과 다른 부분도 많았다.
이걸 나폴레옹도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 대관식 그림이 진행될 때 나폴레옹은 수차례 다비드를 찾아와 그림에 피드백 했다고 해요. 교황의 손짓을 수정 해달라거나, 인물의 표정을 바꿔달라는 등 많은 피드백을 했는데. 어머니의 모습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심지어 어느 날 하루는 와서 아무 말 없이, 한 시간가량을 묵묵히 바라보다 다비드에게 “당신을 존경한다 I Salute you’라는 말을 했다고 해요. 다비드의 그림 실력뿐만 아니라 화가로서의 스토리텔링 능력, 그리고 의뢰인을 만족시키는 전략 등을 아우른 존경 표시였죠.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그림의 선전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의뢰인의 니즈까지 완벽하게 충족시킨 그림입니다. 다비드가 사랑받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죠.
다비드의 마지막 대작, Mars Being Disarmed by Venus and the Three Graces (1824)
말년에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유배된 후, 다비드는 벨기에로 망명을 떠나 죽을 때까지 프랑스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다비드가 원하는 세상이 도래했지만, 예술가로서 선택한 전략이 더 이상 프랑스에 머무를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정치적 신념을 저버리며 예술의 가치를 끌어올린 다비드의 시도는 권력이 뒤바뀌고 사회 흐름이 변화한 상황에서도 그가 최고 권위의 예술가로 불린 이유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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