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과 그의 반려견 Maurice / Portrait of Maurice (1976) ⓒ King & McGaw
동물을 그려낸 작품은 정말 많습니다. 수많은 그림에서 예술가들은 고양이와 강아지, 원숭이 등 자신의 반려동물을 그려냈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동물의 모습은 매우 사랑스럽게 표현되곤 했는데요.
하지만 현대미술이 발전하고 다양한 재료가 예술이 되는 흐름이 생겨나면서, 그림 속 사랑스러운 대상이 아닌 재료나 도구로서 동물을 활용하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Salvador Dalí, Dalí Atomicus (1948)
일례로 초현실주의의 대표 작가 살바도르 달리는 자신의 작품 <달리 아토미쿠스>에서 실제 고양이를 활용해 사진 작품을 제작했어요. 작품이 걸린 이젤이나 스툴은 고정해둔 상태였고, 왼편의 의자는 조수가 손으로 들고 있었는데요. 오른쪽에서 뿌린 물과 달리의 점프 타이밍에 맞춰 촬영하다 보니, 고양이들은 스물여섯 번이나 집어 던져졌어요.
당시는 카메라 기술이 지금만큼 발전하지 않아서 사진을 찍고 필름을 현상해 확인한 뒤 재촬영이 이어졌는데요. 그렇게 뜨는 시간 동안 젖은 고양이를 말렸다고도 전해지죠. 당시에는 동물 권리에 대한 인식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 민감한 반응이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술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재료가 작품에 활용됨에 따라, 동물도 예술가의 도구로서 작품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죠.
Damien Hirst,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 (1991) ⓒ Artsy
데미안 허스트의 이 상어 작품은 죽은 상어의 사체를 작품에 활용했습니다. 작품의 원래 제목은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1991)>이에요. 죽음이라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실감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순을 이야기한 작품이죠. 이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허스트는 상어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상어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상어는 살아있을 때 죽은 것처럼 보이고, 죽었을 때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죠. 언론에서는 비난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영국 일간지 The Sun은 ‘감자칩도 곁들이지 않은 생선이 5만 파운드’라며 비꼬기도 했죠. 하지만 미술계는 극찬했어요. “잔인할 정도로 모순을 잘 보여주는 정직한 작품”이라거나, “우리 문화에 깊게 스며든 죽음에 대한 광적인 부정 현상을 보여준다"라는 등 주제를 잘 살린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있었죠.
Damien Hirst, In and Out of Love (1991) ⓒ White Cube
다소 난해하긴 했지만, 동물을 재료로 삶과 죽음의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전달한 허스트는 같은 해 살아있는 동물로 또 한 번, 메시지를 전하기로 합니다. 박제 상어와 같은 해 선보인 <In and Out of Love>였죠.
이 작품에서는 살아있는 나비를 전시에 활용했어요. 전시장 내에 나비가 부화할 수 있는 번데기를 부착하고 습한 환경을 조성해, 나비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순간을 볼 수 있게 만든 건데요.
전시장의 다른 공간에는 실제 나비의 날개를 박제해 만든 작품이 전시 중이었습니다. 시각적으로는 아름다웠지만 개념적으로는 다소 파격적이었죠. 허스트는 이 작품을 통해 태어나고 살아가고 사라지는 삶의 생애 주기를 보여주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을 끌어내려 했는데요.
나비의 수명이 짧은 탓에 전시 중 바닥에 떨어진 나비 사체들이 나뒹굴기 시작했고요. 일부 관객은 이 모습이 윤리적이지 않다며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 이후, 더 파격적으로 동물을 활용한 작품이 등장하게 되죠.
Wim Delvoye (b. 1965)
살아있는 돼지에 문신을 새긴 예술가, 빔 델보예가 등장한 겁니다. 데미안 허스트의 작업도 윤리적이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상어는 사체를 활용한 것이었기에 법에 저촉되지 않았고요. 나비는 그래도 곤충이었기에 비난의 강도가 크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빔 델보예는 아예 살아있는 돼지를 활용했어요.
2000년 선보인 그의 <Art Farm (2000~)> 프로젝트인데요. 1990년대 초부터 죽은 돼지에 문신 작업을 하던 델보예는 살아있는 돼지를 캔버스 삼아 작품을 선보이기로 합니다. 미국의 동물 보호법을 피하기 위해 베이징 근처로 작업실을 옮겨 Art Farm이라는 농장을 만들었죠.
Wim Delvoye, Art Farm (2006-2008) ⓒ Wim Delvoye
이곳에서 델보예는 돼지를 키우고, 문신 작업을 하고, 죽은 돼지의 피부를 도려내 문신을 팔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돼지를 통째로 박제하기도 했고요. 문신이 새겨진 돼지 가죽은 2억이 넘는 금액에 팔리기도 했는데요. 이 작품부터는 동물 보호 운동가들의 저항이 거셌습니다.
델보예는 적극적으로 항변했어요. 돼지들은 학대받는 환경이 아닌, 매우 좋은 환경에 있었고, 문신을 받기 전후로 돼지 피부에 스킨케어를 진행했으며, 마취 후 문신 작업을 진행해 돼지의 불편함도 최소화했다고 이야기했죠. 그리고 문신 작업을 판매하거나 박제한 건 돼지가 자연사한 후의 일이라고도 언급했습니다.
Wim Delvoye, Art Farm (2006-2008) ⓒ Wim Delvoye
실제로 델보예의 아트팜 사진을 보면, 문신을 새긴 돼지들이 자유롭게 먹고 뛰노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델보예는 식용으로 소비되는 돼지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돼지들이 살다 자연사했다는 걸 강조했던 것이죠. 그렇다면 미술계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미술계는 델보예가 돼지 문신을 통해 예술과 상업, 윤리의 교차점을 제시했고, 토론을 이끌어냈다고 봅니다. 예술시장에서 생명의 가치는 어떻게 판단되는지, 그리고 이런 표현이 윤리적으로 옳은지. 그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만든 작품이라고 봤죠. 그리고 그 가치판단은 관객에게 넘겼어요.
빔 델보예의 루브르 박물관 전시 전경 ⓒ VOGUE
루브르 박물관은 빔 델보예의 개인전을 진행하며, 돼지 문신 박제 작품을 선보이는 걸 승인하기도 했습니다. 작품이 작품 자체로 갖는 완결성보다 관객의 토론을 통해 작품의 메시지가 완성될 수 있을 거라 봤기 때문이었죠.
앤디 워홀과 그의 반려견 Maurice / Portrait of Maurice (1976) ⓒ King & McGaw
동물을 그려낸 작품은 정말 많습니다. 수많은 그림에서 예술가들은 고양이와 강아지, 원숭이 등 자신의 반려동물을 그려냈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동물의 모습은 매우 사랑스럽게 표현되곤 했는데요.
하지만 현대미술이 발전하고 다양한 재료가 예술이 되는 흐름이 생겨나면서, 그림 속 사랑스러운 대상이 아닌 재료나 도구로서 동물을 활용하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Salvador Dalí, Dalí Atomicus (1948)
일례로 초현실주의의 대표 작가 살바도르 달리는 자신의 작품 <달리 아토미쿠스>에서 실제 고양이를 활용해 사진 작품을 제작했어요. 작품이 걸린 이젤이나 스툴은 고정해둔 상태였고, 왼편의 의자는 조수가 손으로 들고 있었는데요. 오른쪽에서 뿌린 물과 달리의 점프 타이밍에 맞춰 촬영하다 보니, 고양이들은 스물여섯 번이나 집어 던져졌어요.
당시는 카메라 기술이 지금만큼 발전하지 않아서 사진을 찍고 필름을 현상해 확인한 뒤 재촬영이 이어졌는데요. 그렇게 뜨는 시간 동안 젖은 고양이를 말렸다고도 전해지죠. 당시에는 동물 권리에 대한 인식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 민감한 반응이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Dalí Atomicus 제작 과정 © Philippe Halsman/Magnum Photos.
오히려 예술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재료가 작품에 활용됨에 따라, 동물도 예술가의 도구로서 작품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죠.
Damien Hirst,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 (1991) ⓒ Artsy
데미안 허스트의 이 상어 작품은 죽은 상어의 사체를 작품에 활용했습니다. 작품의 원래 제목은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1991)>이에요. 죽음이라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실감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순을 이야기한 작품이죠. 이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허스트는 상어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상어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상어는 살아있을 때 죽은 것처럼 보이고, 죽었을 때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죠. 언론에서는 비난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영국 일간지 The Sun은 ‘감자칩도 곁들이지 않은 생선이 5만 파운드’라며 비꼬기도 했죠. 하지만 미술계는 극찬했어요. “잔인할 정도로 모순을 잘 보여주는 정직한 작품”이라거나, “우리 문화에 깊게 스며든 죽음에 대한 광적인 부정 현상을 보여준다"라는 등 주제를 잘 살린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있었죠.
Damien Hirst, In and Out of Love (1991) ⓒ White Cube
다소 난해하긴 했지만, 동물을 재료로 삶과 죽음의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전달한 허스트는 같은 해 살아있는 동물로 또 한 번, 메시지를 전하기로 합니다. 박제 상어와 같은 해 선보인 <In and Out of Love>였죠.
이 작품에서는 살아있는 나비를 전시에 활용했어요. 전시장 내에 나비가 부화할 수 있는 번데기를 부착하고 습한 환경을 조성해, 나비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순간을 볼 수 있게 만든 건데요.
전시장의 다른 공간에는 실제 나비의 날개를 박제해 만든 작품이 전시 중이었습니다. 시각적으로는 아름다웠지만 개념적으로는 다소 파격적이었죠. 허스트는 이 작품을 통해 태어나고 살아가고 사라지는 삶의 생애 주기를 보여주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을 끌어내려 했는데요.
나비의 수명이 짧은 탓에 전시 중 바닥에 떨어진 나비 사체들이 나뒹굴기 시작했고요. 일부 관객은 이 모습이 윤리적이지 않다며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 이후, 더 파격적으로 동물을 활용한 작품이 등장하게 되죠.
Wim Delvoye (b. 1965)
살아있는 돼지에 문신을 새긴 예술가, 빔 델보예가 등장한 겁니다. 데미안 허스트의 작업도 윤리적이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상어는 사체를 활용한 것이었기에 법에 저촉되지 않았고요. 나비는 그래도 곤충이었기에 비난의 강도가 크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빔 델보예는 아예 살아있는 돼지를 활용했어요.
2000년 선보인 그의 <Art Farm (2000~)> 프로젝트인데요. 1990년대 초부터 죽은 돼지에 문신 작업을 하던 델보예는 살아있는 돼지를 캔버스 삼아 작품을 선보이기로 합니다. 미국의 동물 보호법을 피하기 위해 베이징 근처로 작업실을 옮겨 Art Farm이라는 농장을 만들었죠.
Wim Delvoye, Art Farm (2006-2008) ⓒ Wim Delvoye
이곳에서 델보예는 돼지를 키우고, 문신 작업을 하고, 죽은 돼지의 피부를 도려내 문신을 팔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돼지를 통째로 박제하기도 했고요. 문신이 새겨진 돼지 가죽은 2억이 넘는 금액에 팔리기도 했는데요. 이 작품부터는 동물 보호 운동가들의 저항이 거셌습니다.
델보예는 적극적으로 항변했어요. 돼지들은 학대받는 환경이 아닌, 매우 좋은 환경에 있었고, 문신을 받기 전후로 돼지 피부에 스킨케어를 진행했으며, 마취 후 문신 작업을 진행해 돼지의 불편함도 최소화했다고 이야기했죠. 그리고 문신 작업을 판매하거나 박제한 건 돼지가 자연사한 후의 일이라고도 언급했습니다.
Wim Delvoye, Art Farm (2006-2008) ⓒ Wim Delvoye
실제로 델보예의 아트팜 사진을 보면, 문신을 새긴 돼지들이 자유롭게 먹고 뛰노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델보예는 식용으로 소비되는 돼지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돼지들이 살다 자연사했다는 걸 강조했던 것이죠. 그렇다면 미술계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미술계는 델보예가 돼지 문신을 통해 예술과 상업, 윤리의 교차점을 제시했고, 토론을 이끌어냈다고 봅니다. 예술시장에서 생명의 가치는 어떻게 판단되는지, 그리고 이런 표현이 윤리적으로 옳은지. 그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만든 작품이라고 봤죠. 그리고 그 가치판단은 관객에게 넘겼어요.
빔 델보예의 루브르 박물관 전시 전경 ⓒ VOGUE
루브르 박물관은 빔 델보예의 개인전을 진행하며, 돼지 문신 박제 작품을 선보이는 걸 승인하기도 했습니다. 작품이 작품 자체로 갖는 완결성보다 관객의 토론을 통해 작품의 메시지가 완성될 수 있을 거라 봤기 때문이었죠.
Guillermo Vargas, Exposición N° 1 (2008) ⓒ Guillermo Vargas
이후, 동물을 통해 토론을 이끌어내는 작품이 또 등장하게 됩니다. 기예르모 베르가스의 2008년 작, <굶어죽은 개 (2007)>였죠. 베르가스는 미술관에 늙고 병든 유기견을 전시하기로 합니다. 미술관 한쪽 벽에는 사료로 글자를 새겨뒀어요.
“당신이 읽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하지만 유기견이 먹을 수 있는 사료나 물은 없었습니다. 관객들은 미술관에서 줄에 묶인 유기견을 보고 당황했지만, 그 누구도 개에게 물을 주거나 벽에 붙은 사료를 뜯어주진 않았어요.
Exposición N° 1 전시 전경 ⓒ Guillermo Vargas
그리고 전시 이튿날, 전시되었던 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사람들은 분노했어요. 베르가스 집에 찾아가는 사람도 있었고, 그의 블로그엔 수십 건의 살해 협박이 이어졌죠.
하지만 진실은 따로 있었습니다. 전시 당시 베르가스는 관객 입장 전후로 개에게 사료를 충분히 먹게 했고, 전시는 단 세 시간만 진행되었으며, 죽었다는 소식도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전시가 끝난 첫날밤 탈출해 사라졌을 뿐이었죠.
Exposición N° 1 전시 전경 ⓒ Guillermo Vargas
그럼에도 개를 작품에 활용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며 논란이 거세지자, 베르가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얼마 전 거리의 부랑자가 개에 물려 죽었다. 이 작품은 그 부랑자에 대한 헌정이다’
거리에서 죽어가는 부랑자에겐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죽어가는 개를 보고 분노하는 위선을 비판하고자 했던 건데요. 방법이 다소 과격하긴 했지만, 베르가스의 이 작품은 그 어떤 다른 작품보다 주제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평가받았습니다.
Wim Delvoye, Art Farm (2006-2008) ⓒ Wim Delvoye
오늘 이야기한 작품들은 모두 살아있거나 죽은, 동물, 혹은 생명을 활용해 메시지를 전달한 작품을 다루고 있습니다. 법에 저촉되지는 않지만, '예술이란 이름으로 행해져도 괜찮은가' 끝없는 토론을 만들어내는 작품들이죠.
오늘날에는 바이오 아트 등 세포를 활용한 예술이 등장하기도 하면서 예술의 수단, 혹은 재료로서 어떤 것까지 활용될 수 있는지, 우리가 고려해야 할 건 무엇인지 등 담론이 더 확장되는 모습인데요.
점점 더 다채로워지는 현대미술,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도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