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ntitled (Skull), 1982 © Jean-Michel Basquiat
국내에서 바스키아 전시가 열립니다. 전시 보러가기 전, 알아두면 좋을 바스키아의 인생과 예술을 정리했어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 노숙자가 되다

쥴리앙 슈나벨의 영화 <바스키아> 포스터
바스키아는 브루클린 출신 흑인 예술가입니다. 사실 브루클린 출신이라거나, 흑인이라는 점은 왜인지 넉넉지 않은 어린 시절 보냈을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곤 합니다. 하지만 바스키아는 이런 클리셰를 깨고 굉장히 부유한 환경에서 어린시절 보냈어요. 아버지가 능력있는 회계사였던 덕분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960년대에 벤츠를 타고 다녔다고 하죠. 중산층 이상의 부잣집이었던 걸로 추정됩니다.
바스키아의 어머니는 주부였는데, 예술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바스키아는 뉴욕에 있는 미술관을 자주 드나들었어요. 그리고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를 어린 나이부터 공부합니다. 이미 11살 때 3개 국어에 능통했고,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원어로 읽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죠.
덕분에 어린 바스키아의 꿈은 시인이나 만화가가 되는 것이었는데요. 이런 행복한 삶은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바스키아가 7살 때 교통사고를 당했기 때문이었죠. 수술비가 많이 나가, 집안 재정 상황이 조금 안 좋집니다. 큰 타격은 아니었지만 이 일로 부모님이 이혼하게 돼요. 바스키아는 아빠와 함께 살기로 합니다. 이건 썩 좋지 않은 선택이었어요.

Jean-Michel Basquiat, LIKE AN IGNORANT EASTER SUIT, the artist on the set of Downtown 81. © New York Beat Film LLC. Image: Edo Bertoglio. Courtesy: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바스키아의 아버지는 체벌이 가장 효과적인 훈육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스키아가 자꾸 그림 그리고, 만화가가 되겠다, 시인이 되겠다 이야기하는 걸 탐탁치 않아했어요. 그래서 이걸 폭력으로 고치려고 했습니다. 당연히 어린 바스키아는 비뚤어지게 돼요. 15살 때는 집에서 대마초를 피웠고, 17살 때에는 교장 선생님께 파이를 던져서 퇴학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집에서 쫓겨나게 돼요.
바스키아는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고 집으로 들어가기 보다, 뉴욕 거리에서 노숙 생활을 시작하기로 합니다. 센트럴 파크에서 버려진 박스 사이 들어가 자기도 하고, 운좋으면 벤치에서 자거나, 더 운이 좋은 날은 친구 집 소파에서 자기도 했죠.
거리에서 생활하던 진짜 거리 예술가

Jean-Michel Basquiat (after) Untitled, 1983 © Jean-Michel Basquiat
바스키아는 같은 시기, 거리의 낙서 화가로 활동하던 알 디아즈와 함께 아티스트 듀오 그룹을 결성해요. 이름은 SAMO(Same Old Shit)이었습니다. 이들은 길거리에 스프레이와 크레용으로 낙서를 남겼는데, 그 내용이 꽤나 철학적이었어요. ‘신의 대안으로서의 SAMO’, ‘탈출구로서의 SAMO’등의 문구들이었습니다.
바스키아와 알 디아즈는 이런 문구를 예술계 인사들이 자주 드나드는 공간에 의도적으로 적어둬요. 그리고 저작권 기호를 함께 새겨 이것이 단순한 낙서가 아닌 예술 작품임을 암시했습니다. 또, 뉴욕현대미술관 앞에서 이런 문구들이 적힌 엽서와 티셔츠를 판매했어요. 이들의 행보는 점차 예술계 종사자들의 이목을 끌었고,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지지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SAMO 활동을 시작한지 1년, 이들은 공중파 티비쇼에 초대받게 돼요. 이 쇼에 나가는 순간 이들은 언더그라운드의 힙스터가 아닌, 대중을 상대로 하는 예술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술가 커리어의 분기점이 되는 순간이었죠. 그리고 이 순간에, SAMO의 반쪽 알 디아즈는 티비쇼 출연을 거부합니다. 유명해지기 싫고, 익명의 예술가로 남고싶다는 것이 이유였죠.

Jean-Michel Basquiat, Hollywood Africans, 1983. Courtesy: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ADAGP, Paris.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바스키아와 알 디아즈는 결별합니다. 그리고 바스키아는 본격적으로 혼자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해요. 처음에는 100명 정도 되는 대규모 인원이 함께하는 단체전에 나갔는데요. 당시 이 전시에 키스 해링, 제니 홀저, 케니 샤프, 낸 골딘 같은 유명 예술가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스타 예술가로 손꼽히는 쟁쟁한 이들이지요. 바스키아는 이런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주목받았습니다. 낙서처럼 적은 문장, 자유분방한 드로잉, 편견을 깨는 재료 사용 등 새로운 것이 너무나도 많았던 덕분이지요.
이후 바스키아는 혼자 활동한지 1년 만에, 아니나 노세이 갤러리와 계약을 체결해요. 이 갤러리는 데이비드 살레, 리처드 프린스 같은 유명 작가를 데리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덕분에 바스키아는 따로 미술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었음에도, 미술계에 안정적으로 진입할 수 있었죠. 이때 바스키아의 나이는 겨우 스무 살이었습니다.
갓 스물 흑인 예술가가 뉴욕 예술계를 사로잡은 방법

Jean‐Michel Basquiat, Untitled (Pollo Frito), 1982 © Jean-Michel Basquiat
바스키아가 활동하던 1980년대의 뉴욕 예술계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던 히피들이 예술 씬을 이끌고 있었어요. 그리고 바스키아의 작품은 그런 히피들 중에서도 극한의 자유로움을 보여주었습니다. 바스키아는 작품을 만들 때, 우선 길거리에서 주워온 것들을 재료로 씁니다. 나무 패널, 버려진 문짝, 창틀, 박스 같은 것들은 훌륭한 캔버스 역할을 했죠. 바스키아는 이 재료들 위에 밑색을 칠해 캔버스화합니다. 물론 보통의 예술가들이 잿소칠 하듯 꼼꼼하게 하지 않습니다. 삼각형으로 칠하거나 동그라미로 그려넣으며 캔버스를 자유롭게 활용했죠.
이후에는 그 위에 그리고 싶은 요소들을 그려넣습니다. 대부분 바스키아가 그리던 것은 자전적인 것들이었어요. 흑인 예술가로서 겪었던 부당한 사건들,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 등이 주 소재였습니다. 당시까지는 흑인 예술가가 많지 않았기에, 바스키아는 많은 수모를 당했습니다. 한 번은 바스키아의 작품을 구매하고 싶다며 컬렉터들이 작업실로 찾아왔는데,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사왔었다고 해요. 치킨은 흑인 사회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긴 하지만, 흑인 노예들이 튀겨먹던 것이 기원이라는 점 때문에 인종 차별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음식이기도 했습니다. 바스키아는 이들을 즉시 좇아냈지만, 이런 일은 이후에도 이어졌어요. 앤디 워홀과 협업을 시작한 뒤에는 워홀의 마스코트라거나, 검은 근육질의 야생마 라는 등의 인종 차별적 발언이 쏟아졌습니다.

Jean-Michel Basquiat – Untitled (Crown), 1982 © Jean-Michel Basquiat
하지만 ‘인종 차별 나빠요’라는 식으로는 그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할 수 없었습니다. 바스키아는 좀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했어요. 흑인 영웅들을 그림에 그려넣으며, 이들을 칭송했습니다. 바스키아가 한참 활동하던 1980년대는 레게, 힙합, 재즈, 그래피티 같은 흑인 문화가 번영하고 있었습니다. 체육계에서도 흑인 선수들이 활약하곤 했고요. 바스키아는 이처럼 성공을 거둔 흑인들을 작품에 그려넣고, 이들의 머리에 왕관을 그려넣었습니다. 백인 중심의 미술사에서 흑인이 왕이 되는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한 것이지요.
이외에도 바스키아 작품에는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았습니다. 바스키아는 작업할 때 티비, 라디오, LP 판 등 많은 매체들을 틀어두었어요. 그렇게 귀에 들어오는 문구들을 영어나 프랑스어, 스페인어로 새겼죠. 또 책이나 잡지, 사진들을 온갖 곳에 펼쳐놓고 눈에 들어오는 이미지를 마구잡이로 그림에 그려넣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작업을 지우거나, 다시 칠하면서 마무리했어요. “살짝 가려졌을 때 오히려 더 눈에 띄게 된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바스키아의 이런 조형언어는 확실히 새로웠습니다. 자유로움을 추구하던 당시 예술계에서 사랑받을만한 요소가 가득했죠. 덕분에 바스키아는 스물한 살에 최연소로 독일 카셀 도큐멘타에 참가하고, 스물두 살에는 최연소로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여했어요. 그리고 굉장히 빠르게 당시 예술계 유명인사들과 가까워지게 되었죠.
젊고 새로운 예술가, 바스키아가 만난 사람들

Left: Jean-Michel Basquiat, A Panel of Experts, 1982. Courtesy: The Montreal Museum of Fine Arts.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Right: Jean-Michel Basquiat painting, 1983. © Roland Hagenberg
뉴욕 예술 씬의 중심에 있던 바스키아는 정말 많은 셀럽과 함께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마돈나에요. 1982년, 바스키아가 22살, 마돈나가 20살이던 때 교제했습니다. 당시 마돈나는 데뷔 앨범을 작업 중이었고, 바스키아는 이제 막 전시를 하고 다니던 때였죠.
마돈나에 따르면 바스키아는 마돈나 집 벽과 가구에 낙서를 하기도 했다고 해요. 또 새벽 네시 쯤 문득 잠에서 깨보면 침대에 없고 캔버스 앞에 서서 그림 그리는 바스키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독특했지만, 그럼에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이야기했어요. 바스키아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여자친구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그녀의 이름은 마돈나이고, 거대한 스타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이별 후에 바스키아는 마돈나에게 선물했던 그림들을 모두 돌려달라고 이야기했어요. 마돈나는 작품을 돌려줬고, 바스키아는 돌려받은 작품들을 모두 검은색으로 칠해버렸습니다. 그렇게 이들의 관계는 끝을 맺었죠.

Jean-Michel Basquiat, Dos Cabezas, 1982.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이후 바스키아가 만난 특별한 인연은 앤디 워홀이었습니다. 워홀은 바스키아의 멘토이자 아버지 같은 역할을 했어요. 이들의 첫만남은 바스키아가 한참 길거리에서 노숙하며 엽서를 팔던 1979년에 이뤄졌습니다. 당시 바스키아는 우연히 식당에서 식사하고 있는 워홀을 보게 되는데요. 이때도 이미 유명인이었던 워홀에게 바스키아는 자신있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팔고 있는 엽서를 사라고 이야기했죠. 워홀은 1달러에 엽서를 구입했습니다.
3년 뒤, 이들은 다시 만납니다. 이때는 바스키아가 유명해진 후였어요. 미술계 관계자가 자리를 주선해 함께 점심식사를 했죠. 이때의 만남이 인상적이었는지, 워홀과 바스키아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서로에 대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요. 그리고 이들은 빠르게 가까워집니다. 후에는 함께 전시를 열기도 해요. 하지만 비평가들의 평가는 썩 좋지 않았습니다. 워홀과 바스키아는 연락을 끊고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해요.
스타의 추락, 말년의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and Andy Warhol, installation view of Ten Punching Bags (Last Supper), 1985–86, in “Basquiat × Warhol, à quatre mains” at Fondation Louis Vuitton, 2023. Photo © Fondation Louis Vuitton / Marc Domage. Courtesy of Fondation Louis Vuitton.
워홀과 인연이 끊어진 후, 바스키아는 정신적으로 많이 무너졌습니다. 많은 양의 헤로인을 사용하면서 심각한 마약 중독으로 대부분의 치아가 빠졌고, 얼굴은 반점으로 뒤덮이게 되었죠. 바스키아는 좀처럼 작업실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약을 구하러 갈때만 외출했죠.
하지만 이시기, 아이러니하게도 바스키아의 작품은 너무도 잘 팔렸습니다. ‘흑인 스타 예술가가 조만간 마약 중독으로 죽을 것 같으니, 작품을 미리 사두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죠. 끔찍하지만 사실입니다. 바스키아는 그렇게 빠르게 팔려나간 작품으로 번 돈을 현금째로 주머니에 넣고 마약을 사들고 작업실로 돌아왔어요.

Jean-Michel Basquiat and Andy Warhol, Taxi, 45th/Broadway, 1984–85.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and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Courtesy of Fondation Louis Vuitton.
그러던 중 1987년 2월 22일, 앤디 워홀이 수술 합병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이 사건은 바스키아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어요. 바스키아의 동료들에 따르면, 바스키아는 워홀이 죽고 나서 단 한 번도 그의 죽음을 극복한 적이 없었다고 하죠.
그리고 1년 6개월이 지난 1988년 8월 12일, 바스키아는 자신의 집에서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스물일곱 살의 나이였어요. 바스키아 이후 비슷한 예술을 선보이는 작가가 많이 등장했지만, 바스키아 만큼의 새로움과 충격을 안긴 예술가는 없었다고 평가받습니다. 다가올 9월, 그의 작품을 통해 바스키아의 예술을 경험해보시길 추천드려요.
전시 정보

-전시 제목: 장 미셸 바스키아-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적 기호들
-전시 일정: 2025년 9월 23일 - 2026년 1월 31일
-전시 작품: 회화, 드로잉 70점, 메모 160점
-전시 장소: 서울 DDP 제1 전시실
-웹사이트 (링크)

Untitled (Skull), 1982 © Jean-Michel Basquiat
국내에서 바스키아 전시가 열립니다. 전시 보러가기 전, 알아두면 좋을 바스키아의 인생과 예술을 정리했어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 노숙자가 되다
쥴리앙 슈나벨의 영화 <바스키아> 포스터
바스키아는 브루클린 출신 흑인 예술가입니다. 사실 브루클린 출신이라거나, 흑인이라는 점은 왜인지 넉넉지 않은 어린 시절 보냈을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곤 합니다. 하지만 바스키아는 이런 클리셰를 깨고 굉장히 부유한 환경에서 어린시절 보냈어요. 아버지가 능력있는 회계사였던 덕분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960년대에 벤츠를 타고 다녔다고 하죠. 중산층 이상의 부잣집이었던 걸로 추정됩니다.
바스키아의 어머니는 주부였는데, 예술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바스키아는 뉴욕에 있는 미술관을 자주 드나들었어요. 그리고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를 어린 나이부터 공부합니다. 이미 11살 때 3개 국어에 능통했고,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원어로 읽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죠.
덕분에 어린 바스키아의 꿈은 시인이나 만화가가 되는 것이었는데요. 이런 행복한 삶은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바스키아가 7살 때 교통사고를 당했기 때문이었죠. 수술비가 많이 나가, 집안 재정 상황이 조금 안 좋집니다. 큰 타격은 아니었지만 이 일로 부모님이 이혼하게 돼요. 바스키아는 아빠와 함께 살기로 합니다. 이건 썩 좋지 않은 선택이었어요.
Jean-Michel Basquiat, LIKE AN IGNORANT EASTER SUIT, the artist on the set of Downtown 81. © New York Beat Film LLC. Image: Edo Bertoglio. Courtesy: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바스키아의 아버지는 체벌이 가장 효과적인 훈육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스키아가 자꾸 그림 그리고, 만화가가 되겠다, 시인이 되겠다 이야기하는 걸 탐탁치 않아했어요. 그래서 이걸 폭력으로 고치려고 했습니다. 당연히 어린 바스키아는 비뚤어지게 돼요. 15살 때는 집에서 대마초를 피웠고, 17살 때에는 교장 선생님께 파이를 던져서 퇴학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집에서 쫓겨나게 돼요.
바스키아는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고 집으로 들어가기 보다, 뉴욕 거리에서 노숙 생활을 시작하기로 합니다. 센트럴 파크에서 버려진 박스 사이 들어가 자기도 하고, 운좋으면 벤치에서 자거나, 더 운이 좋은 날은 친구 집 소파에서 자기도 했죠.
거리에서 생활하던 진짜 거리 예술가
Jean-Michel Basquiat (after) Untitled, 1983 © Jean-Michel Basquiat
바스키아는 같은 시기, 거리의 낙서 화가로 활동하던 알 디아즈와 함께 아티스트 듀오 그룹을 결성해요. 이름은 SAMO(Same Old Shit)이었습니다. 이들은 길거리에 스프레이와 크레용으로 낙서를 남겼는데, 그 내용이 꽤나 철학적이었어요. ‘신의 대안으로서의 SAMO’, ‘탈출구로서의 SAMO’등의 문구들이었습니다.
바스키아와 알 디아즈는 이런 문구를 예술계 인사들이 자주 드나드는 공간에 의도적으로 적어둬요. 그리고 저작권 기호를 함께 새겨 이것이 단순한 낙서가 아닌 예술 작품임을 암시했습니다. 또, 뉴욕현대미술관 앞에서 이런 문구들이 적힌 엽서와 티셔츠를 판매했어요. 이들의 행보는 점차 예술계 종사자들의 이목을 끌었고,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지지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SAMO 활동을 시작한지 1년, 이들은 공중파 티비쇼에 초대받게 돼요. 이 쇼에 나가는 순간 이들은 언더그라운드의 힙스터가 아닌, 대중을 상대로 하는 예술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술가 커리어의 분기점이 되는 순간이었죠. 그리고 이 순간에, SAMO의 반쪽 알 디아즈는 티비쇼 출연을 거부합니다. 유명해지기 싫고, 익명의 예술가로 남고싶다는 것이 이유였죠.
Jean-Michel Basquiat, Hollywood Africans, 1983. Courtesy: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ADAGP, Paris.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바스키아와 알 디아즈는 결별합니다. 그리고 바스키아는 본격적으로 혼자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해요. 처음에는 100명 정도 되는 대규모 인원이 함께하는 단체전에 나갔는데요. 당시 이 전시에 키스 해링, 제니 홀저, 케니 샤프, 낸 골딘 같은 유명 예술가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스타 예술가로 손꼽히는 쟁쟁한 이들이지요. 바스키아는 이런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주목받았습니다. 낙서처럼 적은 문장, 자유분방한 드로잉, 편견을 깨는 재료 사용 등 새로운 것이 너무나도 많았던 덕분이지요.
이후 바스키아는 혼자 활동한지 1년 만에, 아니나 노세이 갤러리와 계약을 체결해요. 이 갤러리는 데이비드 살레, 리처드 프린스 같은 유명 작가를 데리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덕분에 바스키아는 따로 미술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었음에도, 미술계에 안정적으로 진입할 수 있었죠. 이때 바스키아의 나이는 겨우 스무 살이었습니다.
갓 스물 흑인 예술가가 뉴욕 예술계를 사로잡은 방법
Jean‐Michel Basquiat, Untitled (Pollo Frito), 1982 © Jean-Michel Basquiat
바스키아가 활동하던 1980년대의 뉴욕 예술계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던 히피들이 예술 씬을 이끌고 있었어요. 그리고 바스키아의 작품은 그런 히피들 중에서도 극한의 자유로움을 보여주었습니다. 바스키아는 작품을 만들 때, 우선 길거리에서 주워온 것들을 재료로 씁니다. 나무 패널, 버려진 문짝, 창틀, 박스 같은 것들은 훌륭한 캔버스 역할을 했죠. 바스키아는 이 재료들 위에 밑색을 칠해 캔버스화합니다. 물론 보통의 예술가들이 잿소칠 하듯 꼼꼼하게 하지 않습니다. 삼각형으로 칠하거나 동그라미로 그려넣으며 캔버스를 자유롭게 활용했죠.
이후에는 그 위에 그리고 싶은 요소들을 그려넣습니다. 대부분 바스키아가 그리던 것은 자전적인 것들이었어요. 흑인 예술가로서 겪었던 부당한 사건들,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 등이 주 소재였습니다. 당시까지는 흑인 예술가가 많지 않았기에, 바스키아는 많은 수모를 당했습니다. 한 번은 바스키아의 작품을 구매하고 싶다며 컬렉터들이 작업실로 찾아왔는데,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사왔었다고 해요. 치킨은 흑인 사회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긴 하지만, 흑인 노예들이 튀겨먹던 것이 기원이라는 점 때문에 인종 차별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음식이기도 했습니다. 바스키아는 이들을 즉시 좇아냈지만, 이런 일은 이후에도 이어졌어요. 앤디 워홀과 협업을 시작한 뒤에는 워홀의 마스코트라거나, 검은 근육질의 야생마 라는 등의 인종 차별적 발언이 쏟아졌습니다.
Jean-Michel Basquiat – Untitled (Crown), 1982 © Jean-Michel Basquiat
하지만 ‘인종 차별 나빠요’라는 식으로는 그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할 수 없었습니다. 바스키아는 좀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했어요. 흑인 영웅들을 그림에 그려넣으며, 이들을 칭송했습니다. 바스키아가 한참 활동하던 1980년대는 레게, 힙합, 재즈, 그래피티 같은 흑인 문화가 번영하고 있었습니다. 체육계에서도 흑인 선수들이 활약하곤 했고요. 바스키아는 이처럼 성공을 거둔 흑인들을 작품에 그려넣고, 이들의 머리에 왕관을 그려넣었습니다. 백인 중심의 미술사에서 흑인이 왕이 되는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한 것이지요.
이외에도 바스키아 작품에는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았습니다. 바스키아는 작업할 때 티비, 라디오, LP 판 등 많은 매체들을 틀어두었어요. 그렇게 귀에 들어오는 문구들을 영어나 프랑스어, 스페인어로 새겼죠. 또 책이나 잡지, 사진들을 온갖 곳에 펼쳐놓고 눈에 들어오는 이미지를 마구잡이로 그림에 그려넣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작업을 지우거나, 다시 칠하면서 마무리했어요. “살짝 가려졌을 때 오히려 더 눈에 띄게 된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바스키아의 이런 조형언어는 확실히 새로웠습니다. 자유로움을 추구하던 당시 예술계에서 사랑받을만한 요소가 가득했죠. 덕분에 바스키아는 스물한 살에 최연소로 독일 카셀 도큐멘타에 참가하고, 스물두 살에는 최연소로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여했어요. 그리고 굉장히 빠르게 당시 예술계 유명인사들과 가까워지게 되었죠.
젊고 새로운 예술가, 바스키아가 만난 사람들
Left: Jean-Michel Basquiat, A Panel of Experts, 1982. Courtesy: The Montreal Museum of Fine Arts.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Right: Jean-Michel Basquiat painting, 1983. © Roland Hagenberg
뉴욕 예술 씬의 중심에 있던 바스키아는 정말 많은 셀럽과 함께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마돈나에요. 1982년, 바스키아가 22살, 마돈나가 20살이던 때 교제했습니다. 당시 마돈나는 데뷔 앨범을 작업 중이었고, 바스키아는 이제 막 전시를 하고 다니던 때였죠.
마돈나에 따르면 바스키아는 마돈나 집 벽과 가구에 낙서를 하기도 했다고 해요. 또 새벽 네시 쯤 문득 잠에서 깨보면 침대에 없고 캔버스 앞에 서서 그림 그리는 바스키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독특했지만, 그럼에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이야기했어요. 바스키아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여자친구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그녀의 이름은 마돈나이고, 거대한 스타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이별 후에 바스키아는 마돈나에게 선물했던 그림들을 모두 돌려달라고 이야기했어요. 마돈나는 작품을 돌려줬고, 바스키아는 돌려받은 작품들을 모두 검은색으로 칠해버렸습니다. 그렇게 이들의 관계는 끝을 맺었죠.
Jean-Michel Basquiat, Dos Cabezas, 1982.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이후 바스키아가 만난 특별한 인연은 앤디 워홀이었습니다. 워홀은 바스키아의 멘토이자 아버지 같은 역할을 했어요. 이들의 첫만남은 바스키아가 한참 길거리에서 노숙하며 엽서를 팔던 1979년에 이뤄졌습니다. 당시 바스키아는 우연히 식당에서 식사하고 있는 워홀을 보게 되는데요. 이때도 이미 유명인이었던 워홀에게 바스키아는 자신있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팔고 있는 엽서를 사라고 이야기했죠. 워홀은 1달러에 엽서를 구입했습니다.
3년 뒤, 이들은 다시 만납니다. 이때는 바스키아가 유명해진 후였어요. 미술계 관계자가 자리를 주선해 함께 점심식사를 했죠. 이때의 만남이 인상적이었는지, 워홀과 바스키아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서로에 대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요. 그리고 이들은 빠르게 가까워집니다. 후에는 함께 전시를 열기도 해요. 하지만 비평가들의 평가는 썩 좋지 않았습니다. 워홀과 바스키아는 연락을 끊고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해요.
스타의 추락, 말년의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and Andy Warhol, installation view of Ten Punching Bags (Last Supper), 1985–86, in “Basquiat × Warhol, à quatre mains” at Fondation Louis Vuitton, 2023. Photo © Fondation Louis Vuitton / Marc Domage. Courtesy of Fondation Louis Vuitton.
워홀과 인연이 끊어진 후, 바스키아는 정신적으로 많이 무너졌습니다. 많은 양의 헤로인을 사용하면서 심각한 마약 중독으로 대부분의 치아가 빠졌고, 얼굴은 반점으로 뒤덮이게 되었죠. 바스키아는 좀처럼 작업실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약을 구하러 갈때만 외출했죠.
하지만 이시기, 아이러니하게도 바스키아의 작품은 너무도 잘 팔렸습니다. ‘흑인 스타 예술가가 조만간 마약 중독으로 죽을 것 같으니, 작품을 미리 사두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죠. 끔찍하지만 사실입니다. 바스키아는 그렇게 빠르게 팔려나간 작품으로 번 돈을 현금째로 주머니에 넣고 마약을 사들고 작업실로 돌아왔어요.
Jean-Michel Basquiat and Andy Warhol, Taxi, 45th/Broadway, 1984–85.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and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Courtesy of Fondation Louis Vuitton.
그러던 중 1987년 2월 22일, 앤디 워홀이 수술 합병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이 사건은 바스키아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어요. 바스키아의 동료들에 따르면, 바스키아는 워홀이 죽고 나서 단 한 번도 그의 죽음을 극복한 적이 없었다고 하죠.
그리고 1년 6개월이 지난 1988년 8월 12일, 바스키아는 자신의 집에서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스물일곱 살의 나이였어요. 바스키아 이후 비슷한 예술을 선보이는 작가가 많이 등장했지만, 바스키아 만큼의 새로움과 충격을 안긴 예술가는 없었다고 평가받습니다. 다가올 9월, 그의 작품을 통해 바스키아의 예술을 경험해보시길 추천드려요.
전시 정보
-전시 제목: 장 미셸 바스키아-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적 기호들
-전시 일정: 2025년 9월 23일 - 2026년 1월 31일
-전시 작품: 회화, 드로잉 70점, 메모 160점
-전시 장소: 서울 DDP 제1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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