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루즈 로트렉: 가장 천박하고, 가장 화려한 그림을 그린 백작 출신 귀족 예술가

툴루즈 로트렉이 그린 물랑루즈 그림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은 프랑스 예술의 최고 전성기에 존재감 있는 한 획을 그은 예술가입니다. 역동적인 댄서들, 술과 밤을 즐기는 사람들, 화려한 몽마르트르의 문화를 그려낸 그의 그림은 오늘날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랑받으며, 예술적으로 가장 화려했던 프랑스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평가받고 있죠.  


하지만, 동시에 로트렉은 저평가된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로트렉이 활동하던 시기에 함께 활동한 유명 예술가가 너무 많기 때문이죠. 대표적으로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르누아르, 클로드 모네, 폴 세잔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나 스타 예술가들과 같은 시기 같이 활동한 탓에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떨어지지만, 로트렉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파리의 찬란한 시기를 생생하게 담아냈습니다. 



[1] 툴루즈 로트렉만의 남다른 비극

툴루즈 로트렉의 사진

툴루즈 로트렉 (Photo: Paul Sescau)



로트렉은 사실 엄청난 귀족 가문 출신의 예술가입니다. 동시대 활동했던 예술가 중 가장 부자였을 것으로 추정되죠. 가족의 일원이었던 엄마, 아빠, 본인, 여동생은 모두 각자 명의로 된 성이 있었다고 해요. 그 부유함은 로트렉의 본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로트렉의 본명은 앙리 마리 레이먼드 드 툴루즈 로트렉 몽파(Henri Marie Raymond de Toulouse-Lautrec-Monfa)인데요. 당시 귀족 가문들은 가문의 유서 깊은 역사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름에 가문의 이름, 소유한 영지의 이름, 조상의 이름을 모두 포함해 작명했습니다. 이를 통해 본인의 권위, 유산, 혈통을 강조한 것이죠.


로트렉도 상당한 귀족 가문 출신이다 보니 이름이 긴데요. 당시 이런 귀족 가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근친혼을 하곤 했습니다. 로트렉도 그렇게 태어났죠. 로트렉의 부모님은 사촌지간이었고, 로트렉의 외할머니와 친할머니가 친자매였다고 해요. 아주 가까운 가족 사이였던 것이죠. 근친혼으로 태어난 로트렉은 '농축이골증'이라는 희귀 유전병을 앓게 되는데요. 작은 충격에도 뼈가 쉽게 부러지고, 이후 더 자라지 않게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이 병은 로트렉의 인생을 바꿔놓습니다. 


로트렉의 초상 사진 두 장

신체적 결함이 있었지만 부유했던 덕에, 당시 비싼 초상 사진도 다수 찍었던 로트렉 (Photo: Maurice Guibert)



로트렉은 14살 때 의자에 앉아있다가 넘어지게 돼요. 사실 의자에서 넘어져 봤자 크게 다칠 일은 없지만, 로트렉은 이 일로 왼쪽 허벅지 뼈가 부러집니다. 그리고 15살이 되던 해에는 집 마당에서 넘어지는데, 이때는 오른쪽 허벅지 뼈가 부러졌어요. 그리고 이때부터 하반신 성장이 멈췄습니다. 로트렉 사진을 보면 키가 아주 작은 걸 볼 수 있어요. 152센티였다고 하는데, 이는 14살과 15살 사고로 인해 성장이 멈춘 탓입니다. 당시 유럽 남성의 평균 키가 173센티였다고 하니, 로트렉은 훨씬 작았다는 걸 알 수 있죠. 


이렇게 성인 남성보다 훨씬 키가 작다 보니, 귀족들이 하는 스포츠들, 예를 들면 승마나 펜싱, 테니스, 사냥 같은 것들도 할 수가 없었어요. 오히려 몇 달 씩 침대에만 누워있어야 했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귀족 문화에서 멀어지게 되었는데요. 누워서 시간을 보내야 했던 로트렉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로트렉에 따르면, '다리를 다치지 않았다면 그림을 그릴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해요.



로트렉의 사진을 합성해 만든 작품

로트렉 사진 두 장을 합성해 만든 사진 작품 
Mr. Toulouse paints Mr. Lautrec, Maurice Guibert, 1891



하지만 그림이 업이 되는 계기가 생기게 됩니다. 바로 상속권 문제였는데요. 원래 로트렉의 집안은 백작 가문이었어요. 당시 백작 가문에서는 집안의 첫 남자아이에게 백작 작위 상속권을 넘겨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트렉의 아버지는 병들고 약한 로트렉을 탐탁지 않아 했어요. 로트렉이 그림을 그리는 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죠.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서는 '뻔뻔한 낙서'라 칭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로트렉을 패스하고 여동생에게 상속권을 넘겨주기로 해요. 사건 이후, 로트렉은 완전히 귀족 사회로부터 돌아서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몽마르트 지역으로 넘어가서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해요. 

 


[2] '예술가 로트렉' 새로운 시작

로트렉이 그린 고흐. 로트렉은 동료 화가들의 페인팅 기법을 그대로 흡수해 그리길 즐겼다. 
Henri de Toulouse-Lautrec, Portrait of Vincent van Gogh, 1887 (Van Gogh Museum 소장)



로트렉은 어머니의 지원으로 그림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아카데미 출신 화가인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배웠는데, 그의 아틀리에에서 로트렉은 빈센트 반 고흐, 조르주 쇠라 같은 예술가들과 교류하게 돼요. 당시까지 아직 인정받지 못해 가난한 인상주의자들에게 술을 사주면서, 그들과 어울려 지냈는데요. 조금 독특한 것은,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풍경화를 주로 그렸던 것과 달리, 로트렉은 수많은 인물화를 그렸다는 점입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대부분 몽마르트의 사람들이었어요. 지금은 몽마르트가 유명하지만, 당시는 파리 도심에 속하지도 못한 외곽의 무법 도시였습니다. 술과 도박, 마약과 향락이 가득했죠. 그리고 물랑 루즈 같은, 유명한 카바레에서 공연도 진행되곤 했습니다. 카바레는 공연을 보면서 술을 마실 수 있는, 새롭게 떠오르는 문화공간이었어요. 자극적이고 외설적인 공연도 진행된 덕분에, 신분과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밤을 즐기기 위해 모여들었죠. 로트렉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그리고 집안에서 독립해 예술가로서 커리어를 이어가기 위해, 카바레 홍보 포스터를 자주 그리기 시작합니다. 당시 로트렉과 가깝게 지내던 예술가들은 '예술이 아닌 상업을 선택하는 것이냐'며 비난했지만, 로트렉은 상업적 시도로도 예술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 했어요. 그리고 포스터 안에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녹여내기 시작합니다. 


당시 포스터에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어요. 홍보를 위한 것이었죠. 특히나 카바레 문화가 성행하던 당시에는 포스터 속 여인을 보고 카바레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보니, 매력적으로 그리는 게 중요했는데요. 그런데 로트렉은 절대 그림 속 인물을 예쁘게, 멋지게 그리지 않았습니다. 로트렉 본인이 신체적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아름답고 멋지게 그리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죠. 오히려 인물의 개성, 혹은 인물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특징을 강조해서 그려냅니다. 이건 당시 다른 상업 포스터와는 다른 로트렉만의 예술적 특징이었어요.


로트렉이 그린 물랑루즈 포스터

Henri de Toulouse-Lautrec, Moulin Rouge: La Goulue, poster, 1891



대표적인 것이 로트렉의 초기작인 <저녁의 라 굴뤼(Moulin Rouge: La Goulue)>입니다. 이 작품은 오늘날 전설적인 카바레로 불리는 물랑루즈의 1889년 개업 당시 홍보를 위해 제작한 포스터인데요. 그림을 보면, 캉캉 춤을 추는 여성 댄서와 앞쪽에 웨이브 하듯 춤추는 남성이 보입니다. 그런데 로트렉은 두 사람 다 예쁘게 그리지 않았어요. 그리고 로트렉이 보기에 이들의 중요한 특징만 그림에 담아냈죠. 


우선 여성부터 보면, 매우 역동적인 모습을 한 걸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캉캉을 추면서 다리를 높게 들어 올리는 게 댄서의 실력을 보여주는 지표이자, 성적으로 매력을 과시하는 행동이었다고 해요. 그리고 이 그림 속 여인은 캉캉을 추면서 발을 아주 높이 들어 올릴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남자 관객의 모자를 벗기는 게 주 묘기였을 정도라고 하죠.


동시에 이 여인의 외적인 특징은 정수리 위쪽으로 높게 묶은 똥 머리도 특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로트렉은 이런 특징이 잘 드러나게 그려냈어요. 한편, 앞의 남자는 아주 유연하게 춤을 추고 있는데요. 이 남자의 예명은 '데 소세'예요, 뼈가 없는 듯이 유연하다는 의미의 프랑스어입니다. 실제로 유연한 것으로 너무나 유명했던 남성이였죠. 그래서 로트렉은 이 특징 역시 그림을 통해 부각합니다.



로트렉이 그린 여성 동성애자 작품

로트렉은 인물의 특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려내며, 동성애자 등 다양한 이들도 편견없이 작품에 담아냈다.
Henri de Toulouse-Lautrec, At the Moulin Rouge (Two Women Waltzing), 1892 (National Gallery in Prague 소장)



이처럼 역동적으로 인물의 본질을 포착해 만든 포스터는, 로트렉의 예술적 고집을 보여주면서 좋은 반응을 얻게 돼요. 포스터는 이후 3천여 장이 만들어졌고, 파리 곳곳의 길가에 붙여졌는데요. 상당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로트렉의 포스터는 당시와 지금 모두 상업성과 예술성을 모두 아우른 사례로 높게 평가받아요. 덕분에 로트렉은 귀족 집안으로부터 돌아선 이후로도 예술가로 자립할 수 있었죠.

 


[3] 포스터 작업을 가능케 한 석판화 기술

툴루즈 로트렉이 그린 포스터

Henri de Toulouse-Lautrec, Divan Japonais, 1892–93


당시 활동하던 예술가들은 딱 하나의 작품만 만들어 판매했지만, 로트렉은 포스터로 여러 장 작품을 찍어냈기 때문에 훨씬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작품을 여러 장 찍어낼 수 있었던 건, 그의 모든 포스터가 석판화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석판화하면 ‘돌을 깎아서 만든 건가?’싶지만, 그렇게까지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판화는 아니에요. 물과 기름의 반발력을 이용해서 찍어냅니다.


우선, 석회석으로 된 평평한 판에 유성 잉크나, 크레용. 오늘날 오일 파스텔 같은 기름 성질의 재료로 그림을 그려요. 그리고 화학 용액을 발라서 기름 성질을 고정시키고, 그 위에 물을 붓습니다. 그러면 물과 기름의 반발력 때문에, 기름이 칠해진 부분의 돌에는 물이 스며들지 않아요. 그 후에 유성 잉크를 묻힌 롤러로 석판을 밀어주면, 기름이 칠해진 부분에만 잉크가 스며듭니다. 그러면 그 위에 종이를 대고 찍어내서 석판화 도안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툴루즈 로트렉이 그린 포스터

Henri de Toulouse-Lautrec, Reine de Joie, 1892



석판화는 특히 19세기에 유행했어요. 여기에는 사회적 이슈도 있었는데요. 1881년부터 프랑스에서 언론의 자유에 관한 법안이 통과되면서, 출판, 인쇄물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었습니다. 그렇게 각종 광고나 선전 포스터가 파리 거리에 붙기 시작했고, 포스터 열풍이 불었어요. 이런 상황 속, 여러 장을 균일한 퀄리티로 계속 생산할 수 있는 석판화는 인기를 끌게 되었죠. 


당시에 포스터로 홍보하던 것들 중 가장 이목을 끈 건,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문화 공간인 카바레 포스터였어요. 그리고 카바레 문화와 아주 가까웠던 로트렉은 물랑 루즈 뿐만 아니라 다른 카바레의 포스터도 다수 제작합니다. 이 포스터들도 마찬가지로 인기를 끌면서, 이후에는 소설책 홍보 포스터를 제작하거나, 친구의 사진관 홍보 포스터를 제작하는 등 다양한 포스터를 제작하곤 했어요. 

 

 

[3]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는 로트렉의 대표작 2점

로트렉이 그린 아리스티드 브뤼앙 포스터

Henri de Toulouse-Lautrec, Aristide Bruant in his cabaret, 1892



<자신의 카바레에 있는 아리스티드 브뤼앙(Aristide Bruant in his cabaret)> 이 작품은 한 남성의 뒷모습을 크게 그린 작품이에요. 실제 사이즈도 큽니다. 세로 127센티, 가로 92센티죠. 그림 속 남성은 파리 밤 문화에서 가장 유명한 존재였던 아리스티드 브뤼앙이라는 인물입니다. 브뤼앙은 몽마르트르 언덕 기슭에 미를리통이라는 카바레를 운영하고 있었는데요. 카바레 사장이면서, 동시에 가수이기도 했어요. 언제나 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우아하고 멋지게 부르는 게 아니라, 욕설을 섞어가면서 호탕하게 불렀습니다. 그리고 공연을 보러 온 부자들에게 도발적인 제스처를 취하면서 호응을 유도하기도 했어요. 


브뤼앙의 도발적 퍼포먼스는 언제나 눈길을 끌었지만, 또 하나 주목받았던 건 브뤼앙의 노래 가사였습니다. 브뤼앙은 매춘부와 범죄자의 이야기를 직접 가사로 쓴 자작곡을 불렀는데요. 예나 지금이나 노이즈 마케팅은 잘 통하는 것 같습니다. 브뤼앙의 도발적인 노래와 퍼포먼스를 듣기 위해 많은 이들이 모여들며 카바레 운영이 아주 잘 되었죠. 로트렉은 브뤼앙의 초상을 여러 장 그리기도 했는데요. 이건 브뤼앙이 직접 의뢰한 것이었다고 해요. 본인의 초상을 포스터로 그려달라고 의뢰한 첫 번째 사례였습니다.


로트렉이 그린 아리스티드 브뤼앙 포스터

Henri de Toulouse-Lautrec, Ambassadeurs – Aristide Bruant, 1892



브뤼앙은 그만큼 자신감도 넘쳤고, 호탕하고, 호방한 인물이었습니다. 로트렉 예술의 특징이, 그림 속 인물을 멋지게 그리지 않고 그 특징과 개성이 드러나게 그린다고 언급했는데요. 브뤼앙을 그릴 때에도 교활한 눈매와 냉소적인 입술을 늘 강조해 그렸습니다. 그리고 큰 풍채도 언제나 부각되게 그려서 브뤼앙의 이미지를 잘 전달했다고 평가받죠. 덕분에 브뤼앙을 모델로 한 포스터는 로트렉 전시가 열릴 때마다 대표 작품, 전시 홍보 포스터 작품으로 활용되곤 합니다. 



애글랑틴 무용단 공연 홍보 포스터

Henri de Toulouse-Lautrec, Troupe de Mlle Elegantine, 1896



 <에글랑틴 무용단(Troupe de Mlle Elegantine)> 이 그림은 물랑루즈에서 인기 무용수라 불렸던 에글랑틴 드 메이가, 물랑 루즈 출신 무용수 세 명을 모아서 창단한 4인조 무용단을 그린 작품이에요. 이들은 아주 잘나가는 걸그룹 같은 존재였습니다. 1896년 1월에 영국 투어를 떠나기로 하면서 로트렉에게 홍보 포스터를 의뢰했고, 그렇게 로트렉이 그린 작품이 이 <에글랑틴 무용단>인데요. 


그림을 보면 흥미로운 포인트가 많아요. 우선, 그림은 네 명의 무용수를 그렸는데, 앞쪽에 있는 세 명의 무용수는 모두 일정한 높이로 다리를 들고 있어서 질서정연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가장 뒤쪽의 여인은 좀 더 자유롭게, 역동적으로 춤추고 있어요. 다리 각도도 세 명과 다르고, 자세도 어딘가 좀 다릅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제인 아브릴이에요. 로트렉의 뮤즈였던 인물이죠. 뮤즈라서 좀 튀게 그렸나? 할 수도 있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로트렉은 미감을 위해 일부러 뭘 하지 않습니다. 그저 본질적인 특징을 부각할 뿐이에요.


제인 아브릴을 모델로 한 포스터

제인 아브릴을 모델로 한 포스터 Henri de Toulouse-Lautrec, Avril (Jane Avril), 1893



실제로 제인 아브릴은 무도병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경련성 신체 움직임이 특징이죠. 일종의 틱 같은 행동이 계속 이어지는데요. 당시 아브릴의 의사는 몸을 통제하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그냥 춤을 추라고 조언했다고 해요. 그렇게 아브릴은 댄서로 활동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더 역동적인 모습이 연출되곤 했습니다. 로트렉은 이것도 아브릴의 특징이라고 보고 그대로 그림에 그려냈어요. 


그리고 또 하나 재밌는 점은 무용수들의 표정인데요. 가운데 있는 두 명의 여인은 가장 앞쪽에 있는 여인을 흘겨보고 있습니다. 당시 이들은 그룹으로 활동하면서 서로 경쟁의식을 갖기도 했다고 하는데, 로트렉이 이걸 포착하고 그대로 그려 넣으면서 독특한 방식으로 현장감 만들어냈어요. 그러면서도 각 인물의 개성을 잘 담아냈다는 점에서 수작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두 작품 모두 이번 전시에서 만나보실 수 있어요. 

 

 

[4] 비운의 예술가, 툴루즈 로트렉

Henri de Toulouse-Lautrec, At the Moulin Rouge, 1892 (Art Institute of Chicago 소장)



로트렉과 친했던 반 고흐처럼, 로트렉도 비운의 예술가라 많이 불리곤 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단명했다는 점 때문이에요. 로트렉은 3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요. 당시 몽마르트르의 아름다움과 환상을 그림으로 그려내는데 집착하면서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고,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근친혼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몸이 약했는데, 여기에 관리도 잘 못하게 되면서, 말년에는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하게 되었어요. 실제로 이 시기 로트렉은 벌레를 잡으려고 총을 쏘거나, 물랑루즈에 있던 코끼리 조각상에 말을 거는 등 이상 행동을 하기도 했죠. 


그러면서도 '나는 정신병원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 때문에 미치게 된 화가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그림으로 또 증명했다는 게 아이러니하기도 한데요. 당시 로트렉이 그린 그림들을 보면 제법 정교해 놀라움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로트렉의 미술 작품

Henri de Toulouse-Lautrec, The Englishman at the Moulin Rouge, 1892 (Metropolitan Museum of Art 소장)



그럼에도 로트렉은 건강 문제로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었어요. 37년이라는 젊은 나이였지만, 무려 5천여 점에 달하는 많은 작품을 남긴 후였습니다. 로트렉의 어머니는 그의 작품을 프랑스에 기증하고, 또 그 작품 세계를 알리려 노력했어요. 마치 반 고흐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처제 조안나가 고흐의 작품과 편지를 세상에 알렸던 것처럼요. 덕분에 오늘날까지 로트렉은 파리 몽마르뜨를 상징하는 예술가이자, 가장 낮은 곳을 가장 아름답게 그린 예술가로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추함에는 언제나, 그리고 항상 아름다운 면면이 존재한다" 

Everywhere and always ugliness has its beautiful aspects.

-툴루즈 로트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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