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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DA&CO. Corp.

캐서린 번하드: 핑크 팬더와 화장지로 쌓아올린 명성

작업실에 있는 캐서린 번하드

Photos by Lyndon French


번하드의 그림은 단순합니다. 익숙한 대상을 패턴화해 그리죠. ET, 심슨 가족, 핑크 팬더, 가필드, 다스베이더 같은 캐릭터나, 화장지, 담배, 과자, 과일 같은 일상적인 소재들이 그림의 주인공입니다. 


평범한 것들을 그렸지만, 그의 작품은 매우 핫하기도 해요. 지난 2022년 홍콩에서는 5억 원에 팔렸고, 최근에도 수억 원대에서 꾸준히 거래되고 있죠. 아트페어에도 언제나 작품이 등장하고 있고요. 대다수는 늘 솔드아웃 상태죠. 지금 서울 예술의전당에서는 개인전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소재들을 그려낸 그의 작품은 컬렉터들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은걸까요.



수집광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소녀

캐서린 번하드의 작업실

Photos by Lyndon French


캐서린 번하드(Katherine Bernhardt, 1975~)는 1975년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1980년대 미국은 그야말로 상업 예술의 호황기였어요. 영화, 애니메이션, 음악, 광고, 잡지 할 것 없이 다양한 대중문화 아이콘들이 넘쳐나던 시기였습니다.


번하드의 어머니는 이런 아이콘들을 모조리 수집하는 저장강박증 환자, 이른바 '호더'였어요. 호더는 본인이 관리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건을 수집하면서, 가지고 있는 물건을 정리하거나 버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말하는데요. 번하드의 어머니는 그중에서도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온갖 것들로 집안이 가득 차서 빈 공간이 없었죠. 어린 번하드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다양한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모습에 익숙해졌어요. 


"물건들에 둘러싸여 사는 건 정말 짜증났지만, 사진은 잘 나와요. 그리고 뭔가 필요하면 대부분 우리 집에 있었죠"


번하드는 집안의 잡동사니가 마치 콜라주 작업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집에서의 삶은 곧 번하드의 예술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예술가로 활동하던 초기인 1990년대 초에는, 패션 잡지 속 슈퍼모델을 두껍고 거칠게 그리는 초상화를 주로 그렸죠. 


캐서린 번하드의 모델 그림들

캐서린 번하드의 모델

© V1 Gallery


이 그림들은 당시 미술계에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이전까지 잡지 속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존재하던 모델들을 새롭게 해석한 덕분이었죠. 머리카락은 엉켜있고, 붓질은 거칠고, 마스카라는 번져있는 여러 색깔로 뒤섞인 모습의 모델은 패션계의 어두운 면을 드러냈다고 평가받습니다. 덕분에 번하드는 이른 나이에 주목받을 수 있었어요.



사하라 사막에서 온 남자와의 만남

캐서린 번하드의 패턴

© V1 Gallery


번하드의 예술에 첫 번째 영감이 어머니였다면, 두 번째 영감은 남편이었습니다. 이들은 2007년 모로코에서 만났어요. 번하드는 관광객이었고, 남편 유세프 지디아는 현지인이었죠. 지디아는 카펫 딜러라는 독특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모양도 꽤나 독특했죠. 모로코 사하라 사막의 가장자리에서 태어났는데, 자신의 정확한 나이나 생일도 몰랐습니다. 기록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었죠. 학교도 다니지 않다가 사하라 사막의 가이드 일을 하던 자유로운 영혼이었어요.


번하드는 지디아와 지디아가 거래하는 카펫에 매료됐어요. 모로코 카펫 특유의 색깔 조합, 질감, 직조 기술에 감탄하면서 본인 예술에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과 사랑 모두를 쟁취했죠. 지디아와 번하드는 결혼했고, 이후 번하드는 카펫 작업에서 영감받아 기하학적인 형태가 두드러진 '패턴 페인팅'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어요.



패턴 페인팅: 여성성과 남성성을 모두 갖춘 기법

번하드의 패턴페인팅

번하드의 패턴페인팅

© Xavier Hufkens


패턴 페인팅은 일종의 콜라주 작업과 비슷해요. 다른 점이 있다면, 콜라주는 실제 이미지나 그림을 오려다 붙이는 것이지만, 패턴 페인팅은 이를 모두 그림으로 그리고 2차원의 평면으로 그려낸다는 점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림 전체가 하나의 패턴처럼 보여서 패턴 페인팅이라 이름 붙여졌어요. 


캐서린 번하드의 작업 모습

Photos by Lyndon French


번하드는 모로코 카펫 디자인에서 봤던 직물 특유의 패턴이 이런 패턴 페인팅과 비슷하다고 봤어요. 서로 전혀 관련없는 요소들이 조합된 걸 보고 이를 본인 그림에 고스란히 적용했죠. 그리고 여기에 현대적인 기법을 더했어요. 이 시기 번하드가 지내던 뉴욕에서는 그래피티가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키스 해링, 장 미셸 바스키아 같은 작가들이 한참 활동하고, 경찰에게 쫓기고, 지명수배받던 때였죠. 이들은 대부분 빠르게 그림을 그리고, 오래도록 남을 수 있는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렸는데요. 번하드는 이 역시 동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이라고 보고 그림에 적용하기 시작했어요. 번하드는 그림의 거친 느낌을 더하기 위해, 작업실 바닥에 캔버스를 눕혀놓고 그 위를 걸어다니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캐서린 번하드의 작품

Katherine Bernhardt, "Starship Enterprise" (2021)

캐서린 번하드의 작품

© Katherine Bernhardt


그렇게 조금 더 날것의 강렬한 회화 느낌을 더했는데, 이건 꽤나 파격적인 시도였어요. 그동안 여성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방식에 일관성이 있었거든요. 아예 여성의 전유물인 직물, 바느질 같은 걸 활용하거나, 혹은 여성의 취약함, 내밀함을 내세우는 방식들이었죠. 그중에서 금기처럼 여겨지던 게 바로 지저분하고 표현주의적인 시도들이었는데, 번하드는 그 금기를 깨고 강렬한 패턴 페인팅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반지성주의: 지성에 반대하는 가장 똑똑한 전략

캐서린 번하드의 작품

Katherine Bernhardt, Untitled, 2016. Courtesy of Phillips.


번하드의 그림은 매우 단순해요. 나이키 운동화나 핑크 팬더 캐릭터, 도리토스 과자, 스타워즈 캐릭터들이 패턴화 돼 묘사되었죠. 이 그림들에 어떤 디테일이나 섬세함도 보이지 않습니다. 대중문화 캐릭터들을 큰 고민 없이 그려낸 모습에, 한편에서는 ‘그의 그림엔 충분한 담론이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요. 번하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최고의 화가는 자신의 그림을 지나치게 지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그림을 그리고, 색과 패턴을 즐긴다". 일종의 반지성주의적 의견이었어요. 


이건 단순히 '생각하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번하드는 "사람들이 미술관에 가서 세상의 끔찍한 일들을 생각하지 않고 예술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색채를 보고, 우리가 인간이고, 세상에 좋은 것들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해요. 그림을 볼 때 우리가 경험하는 아주 단순하고 직관적인, 하지만 인간이기에 가능한 감상들을 추구해보자는 것인데요. 이 주장은 최근 들어 과도하게 개념화되고 추상화되는 현대미술의 대안이라 평가받으면서, 그림 보는 재미, 색깔 보는 재미를 일깨워준 번하드의 예술 작품이 가진 가치가 높게 평가받았어요. 특히나 시장에서는 젊은 컬렉터의 선택을 받았죠. 


캐서린 번하드의 작품

Katherine Bernhardt, Hawaiian Punch, 2014. Courtesy of Phillips.

캐서린 번하드의 작품

Katherine Bernhardt, "Plantains + Bananas + Doritos + Sharpies" (2015)


10년 전인 2015년, 번하드의 연간 경매 총액은 1억 8천만 원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4년 뒤인 2019년에는 5억 3천만 원으로 두 배 이상 올랐어요. 이후 2021년에는 데이비드 즈워너와 전속 계약을 하게 되는데, 이후 2022년, 상반기에만 30억 1천만 원을 기록합니다. 


번하드의 작품을 주로 구매한 이들이 전 세계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오르는 아시아 지역 컬렉터들이 많았고, 밀레니얼이나 Z세대 같은 젊은 컬렉터 비중이 높았다고 해요. 그래서 앞으로도 번하드의 작품이 더 많은 인기를 끌 것으로 기대됩니다.



번하드의 대표적 시리즈들

캐서린 번하드의 바나나 작품

Katherine Bernhardt, PLANTAINS, BANANAS & TOILET PAPER, 2015. Courtesy of Sotheby’s.


번하드의 2015년 작 <플랜테인, 바나나, 그리고 화장지>는 2018년 소더비 경매에서 1억 천만 원에 낙찰됐어요. 당시 번하드 작품의 최고가였죠. 작품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화장지, 바나나, 그리고 플랜테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플랜테인은 카리브해나 중남미 같은 열대 지역에서 요리용으로 쓰는 초록색 바나나를 의미해요. 반면에 바나나는 플랜테인과 아주 비슷하지만 노란색이고, 전 세계에서 다 먹는 과일입니다. 그리고 화장지는 현대 도시 생활의 필수품이지만 과일도 아니고 먹는 것도 아니죠.


번하드는 이렇게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요소들을 패턴처럼 배치해 그려내면서 글로벌 문화의 혼재를 보여주고 있어요. 이 작품도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간 소비 문화에 대해 예술가들이 그려낼 때 대부분은 소비 문화를 비판하는 작품들이 많았지만, 번하드는 연결고리가 없는 요소들을 동등하게, 패턴처럼 배치하면서 이런 소비 문화를 유쾌하게 포옹하는 시도를 보여줬어요.


캐서린 번하드의 핑크팬더

Katherine Bernhardt, Pink Panther, 2019


이번 예술의전당 전시에서는 번하드의 초기 작품들, 앞서 말씀드린 잡지 속 모델을 그린 시리즈부터 시작해서 심슨 같은 캐릭터나 나이키, 맥도날드 등 유명 브랜드를 그려 넣은 패턴 페인팅 작품들 140여 점을 만나볼 수 있어요. 그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은 단연 핑크 팬더 시리즈입니다. 핑크 팬더는 캐서린 번하드 작품 중 최고가를 달성했던 작품 시리즈예요.


이 작품을 그리게 된 계기가 독특합니다. 번하드가 아들과 함께 하와이 와이키키에 있는 핑크 팰리스 호텔에서 휴가를 보낼 당시, 분홍색 침대에서 핑크 팬더 애니메이션을 봤던 것에서 영감받아 만들어졌다고 해요. 호텔부터 침실, 보고 있는 프로그램까지 모두 핑크인 상황에서 번하드는 '모든 것을 핑크로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이후 핑크 팬더를 중심으로 한 대형 회화 시리즈를 제작했습니다.


캐서린 번하드의 대형 핑크 팬더 작품

© Katherine Bernhardt


이번 전시에는 6미터짜리 핑크 팬더 작품도 와요. 2019년 작 <핑크팬더 + 스카치 테이프 + 그린 플랜테인>이라는 작품인데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핑크 팬더와 스카치 테이프, 녹색 플랜테인이 반복적으로 그려진 작품이에요.


모두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들이지만, 이 요소들 사이 어떤 연관성도 찾을 수 없어요. 그런데 이 조합이 우리에게 강한 시각적 즐거움을 줍니다. 가장 큰 이유는 색깔 때문이에요. 핑크색의 보색인 초록색을 과감하게 배치하면서 색깔들끼리 강렬한 상호작용을 하게 만드는데, 이 보색 조합은 서로의 색깔을 더 눈에 띄고 강렬해 보이게 만들어요.


여기에 번하드는 색들 간 더 풍성한 효과를 연출하기 위해 밝은 핑크부터 어두운 핑크, 밝은 초록부터 어두운 초록까지 다양하게 활용했습니다. 작품의 크기가 가로로 6미터나 되기 때문에 매우 강렬한 색채 경험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캐서린 번하드의 핑크 팬더 작품

Katherine Bernhardt, "Escape from New York" (2020)


오늘날 AI가 빠르게 발전하고 예술 역시 이를 반영해서 미디어가 다채로워지는 흐름 속에서,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을 붓과 물감으로 예술가가 직접 그려내는 번하드의 시도는 특별합니다. 너무나 많은 선택지가 있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복잡한 이론 없이 단순하게, 반지성주의를 밀고 나가는 번하드의 작품은 오히려 젊은 관객에게 많은 인기를 끌고 있죠.


번하드의 그림은 예술은 복잡하고 어려운, 상류층만의 전유물이 아닌 더 많은 대중이 이해할 수 있고 위트 있는 것들이 사랑받음을 알게 해줍니다. 이번 전시만을 위해 준비한 신작은 물론이고, 다양한 핑크 팬더 작품들이 선보인다고 하니, 이번 여름 시원하게 미술관 나들이를 하고 싶다면 한번쯤 다녀와 보시길 추천해요.



이정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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