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천재 화가

정선의 “독서여가” (讀書餘暇)
정선은 1676년, 서인 계열의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율곡 이이의 학맥을 이은 오랜 양반 가문이었지만, 증조부 이래 3대가 관직에 오르지 못하면서 가세가 기울어가고 있었어요. 설상가상으로 정선이 13세 되던 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어린 정선은 홀어머니와 함께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정선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어요. 바로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양반 출신 선비가 그림 같은 '잡기'에 몰두하는 것을 경계했어요 화가를 '환쟁이'라 부르며 천대했던 시대였습니다.
정선은 이런 시대적 인식에 굴복하지 않았어요. 30대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외조부와 외숙의 도움을 받아 기본적인 학문도 익히며 교양을 쌓아갔죠. 당대 문인 권섭은 "겸재가 그림으로는 당대 제일이지만, 문장도 볼 만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실제로 정선은 수십 권의 저서를 남기기도 했어요.
이후 정선은 41세에 벼슬길에 올라요. 처음에는 잡직이었습니다. 2년 반의 임기를 거친 후 시험을 통해 정직으로 승진하여 당당한 문관이 되었죠. 하지만 안정된 관료 생활을 하면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정선은 "내가 쓴 붓을 다 모으면 무덤을 이룰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평생 그림에 정진했어요.
그런 그에게도 시련은 계속되었습니다. 1754년, 78세의 나이에 "정선은 천한 기예로 이름을 얻고 잡직으로 벼슬을 했으니 파직하소서"라는 상소가 올라왔어요. 조선시대임을 감안하면 이미 상당한 고령이었음에도, 여전히 견제를 받았던 것이죠. 다행히 영조의 배려로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정선은 평생 이런 편견과 싸우며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두 번의 재평가: 생전의 찬사와 근대의 재발견

정선의 해악전신첩 (鄭敾 筆 海嶽傳神帖), 1747년
정선이 주목받게 된 계기는 크게 두 번 있었어요. 첫 번째는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직후였습니다. 1712년 그린 《해악전신첩》이 당대 문사들의 찬사를 받으면서 일약 문예계의 명사가 된 거죠.
이 작품은 정선이 금강산을 처음 방문한 후 그 풍경을 그린 화첩에 있는 그림으로, 21점의 그림과 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금강산 경치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모두 섬세한 필치로 담아냈어요. 한 중국 사신은 "조선 산천을 보고 나서 겸재의 그림이 얼마나 신묘한지 알았다"며 진경의 사실성에 감탄했고, 대시인 김창흡은 "그 어떤 천하 장관과도 비교할 수 없다"며 예찬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말 서구 화풍이 유행하면서 정선은 사실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19세기에는 중국의 남종화 화풍이 인기를 끌면서 추사 김정희는 정선의 작품에 대해 "안목을 흐리니 볼 필요도 없다"고까지 혹평했어요.
그런 정선의 작품이 재평가를 받은 건,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시기를 거치면서였습니다. 우리 민족 회화의 표상으로 재인식되기 시작했죠. 특히 진경산수화가 기법적인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정선의 영향력이 다시 커지게 되었어요.
진경산수화: 조선 산천의 진면목을 담다

정선의 금강전도 (鄭敾 筆 金剛全圖), 1734년
진경산수화는 정선이 개창한 독특한 산수화 양식입니다. 기존의 실경산수화나 사경산수화와는 다른 접근법을 보여주죠.
실경산수화: 실재하는 현실 풍경을 지도처럼 실용적 목적으로 그린 그림
사경산수화: 현실 풍경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듯 그려낸 산수화
진경산수화: 현실 풍경의 본질적인 진면목을 화가의 관점과 개성으로 형상화한 그림
진경산수화는 서양의 표현주의와 유사한 면이 있어요. 반 고흐나 뭉크가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보다 자신의 감정을 담아 극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정선도 조선의 산천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이런 예술적 혁신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18세기의 특별한 문화적 환경이 있었어요. 전란이 수습되고 정치·경제가 발전하면서 사회가 안정을 되찾았고, 조선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는 유람 문화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하지만 금강산까지 여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경제적 부담이나 건강상의 이유, 낮은 접근성등이 이유였죠. 금강산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금강산을 그린 그림을 보면서 위안을 얻었고, 이것이 '와유(臥遊)' 문화, 즉 누워서 경치를 즐기는 문화로 발전했습니다. 정선은 이런 시대적 요구를 정확히 파악한 예술가였어요. 그의 대표작 《금강전도》에 적힌 문장을 보면 알 수 있죠: "발로 밟아서 두루 다녀본다 하더라도, 머리맡에서 마음껏 보느니만 못 하도다."
《금강전도》(1734)는 금강산 진경산수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국보입니다. 겨울 금강산인 '개골산'을 높은 산봉우리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로 그려냈어요. 금강산의 돌로 된 암산과 나무숲이 우거진 토산을 대비시키면서도 절묘하게 어우러지게 표현했습니다. 작품 위쪽에 적힌 글도 인상적이예요.
"만 이천 봉 개골산 / 어느 누가 참된 모습을 그리려고 마음을 두었는가 / 온갖 향기 동해 바다 밖으로 퍼지고 / 쌓인 기운은 세계 속에 웅장하게 서려 있다 / 두 다리로 답사할 것 같으면 전체를 다 돌아다녀야 되니 / 머리맡에 두고 다투어서 보더라도 망설임이 없도다"

정선의 인왕제색도 (鄭敾 筆 仁王霽色圖), 1751년
정선의 또다른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은 《인왕제색도》(1751)입니다. 정선 75세 때의 대작으로, 가로 138cm, 세로 79cm의 큰 규모예요. 여름날 소나기가 내린 후 개이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인왕산을 육중하게 묘사했습니다.
거대한 암벽이 물기를 머금은 모습을 수묵으로 얇게 여러 번 덧칠해 깊이 있게 표현했고, 주변의 작은 언덕들은 가벼운 필치로 그려 인왕산의 무게감을 더욱 돋보이게 했어요. 정선의 실력과 감각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새롭게 발견하는 정선의 면모: 초충도

정선의 추일한묘도
정선은 진경산수화로 잘 알려져 있지만, 다른 장르에도 정통했어요.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 초충도에요. 초충도는 꽃과 새, 곤충들을 세심하게 관찰해 그린 그림으로, 신사임당의 작품들로도 잘 알려진 장르죠. 당시에는 학문을 공부하는 문인들에게 적합한 주제가 아니라 여겨졌어요. 주로 직업화가들이 그리는 장르였죠.
하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면서 많은 문인 화가들이 주변 사물들에 관심을 가지며 초충도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정선도 이런 트렌드에 동참했어요. 군자를 상징하는 소나무부터 닭, 다람쥐, 고양이 같은 동물, 가지, 오이, 무궁화, 호박 같은 식물, 나비, 메뚜기, 매미 같은 곤충까지 다양하게 그려냈죠
흥미로운 건, 초충도를 그릴 때는 진경산수화와 완전히 다른 화풍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화사한 채색으로 아기자기하고 생동감 넘치는 느낌을 연출했죠. 웅장하고 멋진 진경산수화로만 정선을 알고 있었다면, 초충도를 통해 그의 새로운 면모를 만나볼 수 있을 거에요.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천재 화가
정선의 “독서여가” (讀書餘暇)
정선은 1676년, 서인 계열의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율곡 이이의 학맥을 이은 오랜 양반 가문이었지만, 증조부 이래 3대가 관직에 오르지 못하면서 가세가 기울어가고 있었어요. 설상가상으로 정선이 13세 되던 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어린 정선은 홀어머니와 함께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정선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어요. 바로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양반 출신 선비가 그림 같은 '잡기'에 몰두하는 것을 경계했어요 화가를 '환쟁이'라 부르며 천대했던 시대였습니다.
정선은 이런 시대적 인식에 굴복하지 않았어요. 30대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외조부와 외숙의 도움을 받아 기본적인 학문도 익히며 교양을 쌓아갔죠. 당대 문인 권섭은 "겸재가 그림으로는 당대 제일이지만, 문장도 볼 만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실제로 정선은 수십 권의 저서를 남기기도 했어요.
이후 정선은 41세에 벼슬길에 올라요. 처음에는 잡직이었습니다. 2년 반의 임기를 거친 후 시험을 통해 정직으로 승진하여 당당한 문관이 되었죠. 하지만 안정된 관료 생활을 하면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정선은 "내가 쓴 붓을 다 모으면 무덤을 이룰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평생 그림에 정진했어요.
그런 그에게도 시련은 계속되었습니다. 1754년, 78세의 나이에 "정선은 천한 기예로 이름을 얻고 잡직으로 벼슬을 했으니 파직하소서"라는 상소가 올라왔어요. 조선시대임을 감안하면 이미 상당한 고령이었음에도, 여전히 견제를 받았던 것이죠. 다행히 영조의 배려로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정선은 평생 이런 편견과 싸우며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두 번의 재평가: 생전의 찬사와 근대의 재발견
정선의 해악전신첩 (鄭敾 筆 海嶽傳神帖), 1747년
정선이 주목받게 된 계기는 크게 두 번 있었어요. 첫 번째는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직후였습니다. 1712년 그린 《해악전신첩》이 당대 문사들의 찬사를 받으면서 일약 문예계의 명사가 된 거죠.
이 작품은 정선이 금강산을 처음 방문한 후 그 풍경을 그린 화첩에 있는 그림으로, 21점의 그림과 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금강산 경치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모두 섬세한 필치로 담아냈어요. 한 중국 사신은 "조선 산천을 보고 나서 겸재의 그림이 얼마나 신묘한지 알았다"며 진경의 사실성에 감탄했고, 대시인 김창흡은 "그 어떤 천하 장관과도 비교할 수 없다"며 예찬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말 서구 화풍이 유행하면서 정선은 사실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19세기에는 중국의 남종화 화풍이 인기를 끌면서 추사 김정희는 정선의 작품에 대해 "안목을 흐리니 볼 필요도 없다"고까지 혹평했어요.
그런 정선의 작품이 재평가를 받은 건,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시기를 거치면서였습니다. 우리 민족 회화의 표상으로 재인식되기 시작했죠. 특히 진경산수화가 기법적인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정선의 영향력이 다시 커지게 되었어요.
진경산수화: 조선 산천의 진면목을 담다
정선의 금강전도 (鄭敾 筆 金剛全圖), 1734년
진경산수화는 정선이 개창한 독특한 산수화 양식입니다. 기존의 실경산수화나 사경산수화와는 다른 접근법을 보여주죠.
실경산수화: 실재하는 현실 풍경을 지도처럼 실용적 목적으로 그린 그림
사경산수화: 현실 풍경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듯 그려낸 산수화
진경산수화: 현실 풍경의 본질적인 진면목을 화가의 관점과 개성으로 형상화한 그림
진경산수화는 서양의 표현주의와 유사한 면이 있어요. 반 고흐나 뭉크가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보다 자신의 감정을 담아 극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정선도 조선의 산천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이런 예술적 혁신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18세기의 특별한 문화적 환경이 있었어요. 전란이 수습되고 정치·경제가 발전하면서 사회가 안정을 되찾았고, 조선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는 유람 문화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하지만 금강산까지 여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경제적 부담이나 건강상의 이유, 낮은 접근성등이 이유였죠. 금강산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금강산을 그린 그림을 보면서 위안을 얻었고, 이것이 '와유(臥遊)' 문화, 즉 누워서 경치를 즐기는 문화로 발전했습니다. 정선은 이런 시대적 요구를 정확히 파악한 예술가였어요. 그의 대표작 《금강전도》에 적힌 문장을 보면 알 수 있죠: "발로 밟아서 두루 다녀본다 하더라도, 머리맡에서 마음껏 보느니만 못 하도다."
《금강전도》(1734)는 금강산 진경산수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국보입니다. 겨울 금강산인 '개골산'을 높은 산봉우리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로 그려냈어요. 금강산의 돌로 된 암산과 나무숲이 우거진 토산을 대비시키면서도 절묘하게 어우러지게 표현했습니다. 작품 위쪽에 적힌 글도 인상적이예요.
"만 이천 봉 개골산 / 어느 누가 참된 모습을 그리려고 마음을 두었는가 / 온갖 향기 동해 바다 밖으로 퍼지고 / 쌓인 기운은 세계 속에 웅장하게 서려 있다 / 두 다리로 답사할 것 같으면 전체를 다 돌아다녀야 되니 / 머리맡에 두고 다투어서 보더라도 망설임이 없도다"
정선의 인왕제색도 (鄭敾 筆 仁王霽色圖), 1751년
정선의 또다른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은 《인왕제색도》(1751)입니다. 정선 75세 때의 대작으로, 가로 138cm, 세로 79cm의 큰 규모예요. 여름날 소나기가 내린 후 개이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인왕산을 육중하게 묘사했습니다.
거대한 암벽이 물기를 머금은 모습을 수묵으로 얇게 여러 번 덧칠해 깊이 있게 표현했고, 주변의 작은 언덕들은 가벼운 필치로 그려 인왕산의 무게감을 더욱 돋보이게 했어요. 정선의 실력과 감각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새롭게 발견하는 정선의 면모: 초충도
정선의 추일한묘도
정선은 진경산수화로 잘 알려져 있지만, 다른 장르에도 정통했어요.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 초충도에요. 초충도는 꽃과 새, 곤충들을 세심하게 관찰해 그린 그림으로, 신사임당의 작품들로도 잘 알려진 장르죠. 당시에는 학문을 공부하는 문인들에게 적합한 주제가 아니라 여겨졌어요. 주로 직업화가들이 그리는 장르였죠.
하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면서 많은 문인 화가들이 주변 사물들에 관심을 가지며 초충도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정선도 이런 트렌드에 동참했어요. 군자를 상징하는 소나무부터 닭, 다람쥐, 고양이 같은 동물, 가지, 오이, 무궁화, 호박 같은 식물, 나비, 메뚜기, 매미 같은 곤충까지 다양하게 그려냈죠
흥미로운 건, 초충도를 그릴 때는 진경산수화와 완전히 다른 화풍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화사한 채색으로 아기자기하고 생동감 넘치는 느낌을 연출했죠. 웅장하고 멋진 진경산수화로만 정선을 알고 있었다면, 초충도를 통해 그의 새로운 면모를 만나볼 수 있을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