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쇠라: 가장 이성적인 인상주의 예술가

1888년의 조르주 쇠라

1888년의 조르주 쇠라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1859-1891)는 인상주의의 끝자락에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예술가입니다. 인상주의자들이 빠르게 빛을 포착하기 위해 거친 붓터치를 구사할 때, 쇠라는 빛의 조금 다른 특성에 집중해 아주 섬세하게 설계된 점묘법을 구사했죠. 


이 화풍은 엄청난 화제를 끌기도 했는데요. 안타깝게도 점묘법을 처음 선보이고 5년 만에 31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 때문에 쇠라는 비운의 예술가라고도 불리지만, 동시에 굉장히 신비로운 예술가로도 불립니다. 사생활을 철저히 숨겨서, 쇠라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동료들은 그의 결혼 사실을 몰랐을 정도였죠. 

 

 

조르주 쇠라, 예술가로서의 시작

Georges Seurat, Models (Les Poseuses), 1886–1888

Georges Seurat, Models (Les Poseuses), 1886–1888, Barnes Foundation, Philadelphia 소장


쇠라는 상당한 부잣집 출신 자제였어요. 쇠라의 아버지는 부동산 투기업자였습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어머니도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었어요. 그런데 조금 독특했던 것이, 아버지가 일주일에 딱 한 번만 집에 왔습니다. 미술사학자들은 이것을 쇠라가 내성적이고 고독한 성격을 갖게 된 이유라고 보기도 하는데요. 이런 독특한 가정 환경과는 별개로, 쇠라는 부족함 없는 생활을 했어요.


어렸을 때는 미술에 재능을 보이면서, 미술 교습을 받아 프랑스 최고의 명문 미술 대학, 에콜 데 보자르 입학합니다. 이곳에서 쇠라는 고대 조각 석고상을 그리거나,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곤 했는데요. 쇠라는 이런 전통적인 수업 방식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다고 해요.


쇠라가 그린 Models (Les Poseuses)의 습작, 1888

쇠라가 그린 Models (Les Poseuses)의 습작, 1888, 내셔널 갤러리 소장


그래서 쇠라는 일단 군대에 입대해 버립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자원입대하면 군복무 기간을 1년으로 줄여주었다고 해요. 쇠라는 학교 수업도 싫고, 군복무 기간도 줄일 수 있으니 자원입대를 해버립니다. 그리고 제대 후에는 에콜 데 보자르에 복학하지 않아요. 


그리고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죠. 이 시기에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렸던 들라크루아에 빠져서,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느낌의 그림을 주로 그리곤 했습니다. 

 

 

조르주 쇠라, 점묘법의 시작

1885년의 미셸 슈브뢸

1885년의 미셸 슈브뢸


쇠라는 군대 전역 이후, 미술 독학을 위해 다양한 책을 읽고 있었어요. 그중에서도 쇠라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미셸 슈브뢸(Michel Eugène Chevreul, 1786~1889)의 <색채의 동시 대비 법칙>(1839)이었습니다. 이 책은 슈브뢸이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근무하며 시작한 색채 연구의 내용을 담고 있어요. 책의 골자는, ‘색은 그 주변에 어떤 색이 놓여있는지의 영향을 받는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색채학, 광학을 다루면서 과학적인 근거들을 제시했어요. 쇠라는 이 책에 담긴 몇몇 원칙을 직접 옮겨 적으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 외에도 색채학을 다루는 다양한 책들을 공부했고요. 후에는 슈브뢸의 작업실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을 정도로 열정적이었습니다. 이렇게 했던 건,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해요.


Presentation of a way to define and name the colors, Chevreul,

Presentation of a way to define and name the colors, Chevreul, 1861


첫째로, 쇠라는 대학을 중퇴했다는 점을 계속 마음에 걸려 했습니다.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의식하면서 이론적인 공부를 더 열심히 하려고 했어요. 둘째로, 당시에는 과학의 발전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색채 이론이나 광학에 관한 연구뿐만 아니라, 전기 기술이 발전하면서 최초의 실용 태양 전지가 개발되기도 했고, 1880년대에는 루이 파스퇴르가 파스퇴르화를 개발하면서 미생물에 관한 연구도 진행되었어요. 


이런 과학적 발전은 프랑스 사회 전반에 걸쳐, 과학적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그렇게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미술을 독학한 쇠라는 스물세 살이 되던 해, 살롱전에 입선해요.


Georges Seurat, Portrait of Edmond Aman-Jean

Georges Seurat, Portrait of Edmond Aman-Jean, 1883


당시 쇠라가 입선한 그림은 친구를 그린 작품 <아망 장의 초상>이었습니다. 콩테로 그려져 흑백인데도 불구하고, 뛰어난 소묘 실력을 가졌다는 게 느껴지는 작품이죠. 작품은 친구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상반신만 그려냈는데요. 콩테가 까끌까끌한 종이 표면과 닿으면서 울퉁불퉁한 질감을 자아낸 모습이 점묘법을 연상시키곤 합니다.


당시 활동하던 미술 평론가 로제 마르크스는 “이렇게 뛰어난 명암법의 습작은 신출내기의 작품이 아닌 것 같다”라며 극찬합니다. 이 평가처럼, 흑백임에도 밝은 톤, 중간 톤, 어두운 톤의 스펙트럼을 다양하게 가져가면서 보는 재미를 만들었어요. 그렇게 살롱전에 입선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건 꽤 대단한 성취였어요. 명문 미술 대학을 중퇴하고 살롱전에 입선한 건 꽤 이례적인 커리어였기에, 쇠라는 빠르게 주목받습니다.

 

 

새로운 예술을 준비하기 시작하다

Georges Seurat, Bathers at Asnieres, 1884

Georges Seurat, Bathers at Asnieres, 1884, 내셔널 갤러리 소장


살롱전에 입선하고 나서는 쇠라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전처럼 대학교 자퇴로 인해 의기소침해하지도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예술을 선보이기로 결심하죠. 그렇게 선보인 작품이 <아스니에르의 수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파리의 평범한 시민들이 강가에서 수영도 하고, 일광욕도 하면서 평화로운 휴일을 보내는 모습을 포착했어요. 자연의 3요소인 하늘, 땅, 물이 적절한 비율로 그려져 있고, 사람들의 모습도 따뜻한 색감으로 그려져 있어서 보는 이에게 평온함을 느끼게 하는 그림입니다.


쇠라가 그린 Bathers at Asnieres의 습작

쇠라가 그린 Bathers at Asnieres의 습작, 1883, Scottish National Gallery 소장


독특한 점은 크기가 아주 크다는 점이었어요. 세로 201센티, 가로 300센티입니다. 이 정도 사이즈의 그림은 그동안 종교화나 역사화, 신화화를 그릴 때나 주로 사용되던 기념비적인 크기였는데요. 쇠라는 이 그림을 살롱전에 출품합니다. 그리고, 떨어졌어요.


파리 살롱전 심사 위원들은 보수적이었습니다. 큰 사이즈의 그림은 역사적이고 고전적인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너무나 평범한 시민들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그려낸 것은 그들의 기준에 맞지 않았습니다. 


쇠라의 시도는 신선했지만, 기법적인 부분을 들여다보았을 때는 아직 점묘법이 보이진 않아요. 대신, 그림을 자세히 확대해서 들여다보면, 색채학에서 영감받아서 여러 색의 물감을 섞어 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초록색 잔디에는 빨간 붓질을 더하고, 파란색 강가에는 노란 붓터치를 더하는 식이죠.


Bathers at Asnieres의 확대본

Bathers at Asnieres의 확대본


이렇게 보색을 옆에 배치하면 주요 색이 보색대비 효과로 더 높은 채도를 띄는 것처럼 맑고 선명하게 보입니다. 쇠라는 이 효과를 노렸던 건데요. 당시에는 인상주의자들의 거친 붓터치도 인정하지 못하던 때였기에, 쇠라의 기법은 당연히 좋게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주제적으로도, 기법적으로도 살롱전에 들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었죠.


하지만 쇠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본인 작품이 왜 떨어졌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었다고 하죠. 그래도 쇠라는 실망하기보다, 대안을 빠르게 찾기 시작해요. 쇠라는 자신의 그림에 확신이 가득했기 때문에, 어디서든 이 작품을 전시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살롱전에서 떨어진 후 독자적인 예술을 펼치겠노라 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던 예술가들의 모임에 합류해요. 


Paul Sinac, La Corne d’Or(Constantinople), 1907

Paul Sinac, La Corne d’Or(Constantinople), 1907


당시 이 모임에는 폴 시냐크(Paul Sinac, 1863-1935) 등 예술가들이 있었는데요. 이들은 ‘독립예술가협회’를 만들어서 ‘심사도 없고, 상도 없다’라는 걸 신조로 누구나 자유롭게 작품을 출품할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합니다. 이 전시에는 이들의 생각에 공감한 예술가 400여 명이 5천여 점의 작품을 선보였다고 해요.


쇠라도 이 전시에 참여해, <아스니에르의 수영하는 사람들>을 선보입니다. 이 전시는 살롱전과 다르게 많은 사람이 찾지는 않긴 했는데, 성과가 있긴 했어요. 이전에 살롱전에 입상했을 때 쇠라에게 좋은 평가를 보냈던 평론가, 로제 마르크스가 이번에도 좋은 평가를 했죠.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인상주의적 작품에서 어떤 기질과 자취가 분명히 새겨져 있음을 인정하고자 한다.” 쇠라의 작품에 확실한 개성이 담겨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평론이었죠. 

 

 

점묘법, 그 본격적 시작

Georges Seurat,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Georges Seurat,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1884-1886

Art Institute of Chicago 소장


이로부터 2년이 지난 1886년.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쇠라는 점묘법을 처음으로 선보입니다. 당시 쇠라는 보색 대비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그림에 과학적 요소를 더 적극적으로 도입해도 되겠다고 보고 있었어요. 그렇게 2년간 작품을 제작합니다. 오늘날 그의 대표 작품이라고 손꼽히는 <라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였어요.


쇠라는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2년간 60여 점의 습작을 그리면서, 작품의 크고 작은 부분을 섬세하게 조율했습니다. 이 그림은 ‘쇠라’ 하면 가장 먼저 사람들이 떠올리는 아주 유명한 작품인데요. 앞서 언급한 <아스니에르의 수영하는 사람들>에서 볼 수 있던, 주말 오후의 여유로움을 즐기는 프랑스의 평범한 사람들을 그려낸 작품이죠.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의 습작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의 습작, 1884-1885, Art Institute of Chicago 소장


그리고 전작과 마찬가지로 세로 2미터, 가로 3미터의 큰 기념비적인 크기를 가지고 있고요. 대신, 이 작품은 조금 더 고급스럽습니다. 전작이 강가에서 수영하고 잔디밭에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사람들, 심지어 옷을 좀 벗고 있는 사람들을 포착했다면, 이 작품에서는 그래도 정장을 갖춰 입고, 양산과 모자를 쓴 인물들을 그려내면서 좀 더 부르주아적인 면모를 더했죠.


쇠라는 이런 분위기를 극대화하기 위해, 그림 속 사람들을 모두 정면 아니면 측면으로만 배치합니다. 아주 차갑고 경직되어 보이게끔 연출했죠. 또, 그림 속 인물 누구도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있지 않습니다. 덕분에 작품은 따뜻한 색감과 달리 미묘한 느낌을 자아내죠. 


쇠라가 그린 또다른 라 그랑 자트 그림 The Seine and la Grande Jatte – Springtime, 1888

쇠라가 그린 또다른 라 그랑 자트 그림 The Seine and la Grande Jatte – Springtime, 1888, Royal Museums of Fine Arts of Belgium 소장


이 작품에서 아주 중요한 점은 점묘법을 완성했다는 점입니다. 쇠라는 보색대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선이 아닌 점을 활용해요. 전작에서는 색연필로 그려낸 그림을 보는 것처럼, 얇은 선으로 보색대비를 구현했는데요.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에서는 점으로 찍어서, 회화의 감성적인 부분이 아닌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기하학적 느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인상주의자들의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전시에 출품하면서, ‘신인상주의의 시작’을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인상주의 앞에 새롭다는 의미의 뉴, 프랑스어로 네오를 붙이면서 차별화해요. 이 작품은 실제로 인상주의와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인상주의자들은 야외로 나가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려내곤 했는데요. 쇠라는 이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28개의 스케치, 28점의 유화, 3점의 대형 유화 작품을 제작했어요. 철저히 계산하고 준비한 작품인 것이죠.


이는 ‘인상주의 내 스캔들’로 여겨졌고, 비평가들은 쇠라의 작품을 ‘과학적 인상주의’라고 칭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긍정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신비로운 예술가, 쇠라

쇠라의 유작 The Circus, 1891, 오르세 미술관 소장

쇠라의 유작 The Circus, 1891, 오르세 미술관 소장


이후 1889년 서른 살이 되던 해, 쇠라는 20살의 모델 마들렌 크노블로슈와 동거를 시작해요. 그리고 쇠라는 이 관계를 가족과 친구들에게 철저히 숨겼습니다. 쇠라는 서른한 살 때 세상을 떠났는데, 쇠라가 죽을 때까지도 쇠라의 친구들은 쇠라가 누군가와 같이 사는 줄 몰랐어요. 이렇게나 철저히 숨긴 이유는 신분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크노블로슈는 프랑스의 노동 계급 여성이었어요. 쇠라는 부르주아 출신이었고요.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중산층도 아닌 노동 계급 여인과의 연애한다는 건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쇠라는 죽을 때까지 크노블로슈와의 관계를 철저히 숨겼습니다.


Georges Seurat, Jeune femme de poudrant(파우더를 뿌리는 젊은 여인), 1888-1890

Georges Seurat, Jeune femme de poudrant(파우더를 뿌리는 젊은 여인), 1888-1890, Courtauld Institute of Art 소장


그래도 쇠라는 크노블로슈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파우더를 뿌리는 젊은 여인》(1889-1890)에서는 배가 볼록 나온 여인이 그려져 있는데요. 크노블로슈가 임신한 상태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크노블로슈는 쇠라의 아들까지 낳았는데요. 쇠라는 아들을 얻고 나서도 친구들한테 끝까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쇠라는 정말 신비로운 예술가였습니다. 동시대 활동하던 예술가와 달리 과학적으로 작품에 접근하면서 조금은 다른 포지셔닝을 선점하고, 차가운 제작 방식과 달리 따뜻한 감성을 담아냈죠. 덕분에 쇠라의 예술은 오늘날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는 스티븐 손드하임의 뮤지컬 <Sunday in the Park with George>(1984)의 영감이 되었고, 영화 <페리스의 해방>(1986)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죠. 짧은 생을 살았던 쇠라의 예술은 그의 인생보다 훨씬 긴 기간 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빋피 이정우 에디터


Artists

변기가 예술이 되고, 죽은 상어가 수백억 원에 팔리는 현대미술. 이제 미술은 관객 설득을 뒤로한 채 빠르게 달려나가고 있습니다.  


그안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경쟁 속, 빋피는 빛나는 예술관을 가진 예술가의 작품을 포착해 관객에게 소개합니다. 지금 바로 빋피의 예술가 브랜딩 큐레이션을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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