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크 샤갈, 「나와 마을」 (1911)
피카소와 마티스. 20세기 파리 미술계를 이끌었던 대표 예술가입니다. 그리고 간혹, 함께 3대 예술가로 손꼽히는 인물이 있어요. 바로 샤갈이죠. 하지만 샤갈의 입지는 왜인지 조금 애매하게 느껴집니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확고한 투톱이었지만, 샤갈은 논쟁의 여지가 있었죠.
샤갈의 대표작 「나와 마을」(1911)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어요. 말과 사람의 얼굴이 크게 그려진 이 작품은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어 기하학적 느낌을 줍니다. 피카소의 입체파적 특징이 묻어나죠. 한편, 오른쪽 인물의 초록색 얼굴은 마티스의 야수파를 떠올리게 해요. 이때문에 샤갈의 그림은 당시 유행하던 화풍을 이리저리 섞어놓은 것 같다는 평가를 받았죠.
그럼에도 샤갈은 활동 당시, 피카소와 마티스 못지 않게 잘나가는 화가였습니다. 평생 가난한 적 없이 많은 주문을 소화하며 명성있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았죠. 그렇게 사랑받는 예술가가 된 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특유의 몽환적인 화풍, 그리고 진솔한 사랑 이야기 덕분이었죠.
운명적 만남, 스물두 살 샤갈과 열네 살 벨라

샤갈과 벨라의 모습
1909년, 러시아의 작은 마을 비테프스크. 스물두 살의 가난한 화가 지망생 샤갈은 열네 살 소녀 벨라 로젠펠드를 마주합니다. 샤갈은 후에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어요. "그녀의 침묵은 내 것이었고, 그녀의 눈동자도 내 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내 어린 시절과 부모님, 내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나를 관통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소설의 도입부를 보는듯 생생하고 매혹적이죠.
하지만 사랑이 이뤄지긴 쉽지 않았어요. 나이 차이도 많이 났고 당시 벨라가 미성년자라는 점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두 사람의 집안 차이였습니다. 샤갈은 9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극빈층 유대인이었고, 벨라는 여러 보석상을 소유한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어요. 당연히 벨라의 부모는 이 사랑을 반대했습니다.

마르크 샤갈, 「도시 위로」 (1918)
샤갈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6년간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며, 벨라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 결혼식을 올렸죠. 결혼 당시에도 샤갈은 벨라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 마음을 담아낸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도시 위로」(1918)에요. 작품은 샤갈이 벨라를 꼭 안은 채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아내와 함께할 때의 들뜬 행복감을 그대로 표현한 거죠. 색채도 따뜻하고 밝아졌어요. 샤갈은 "우리 삶에는 오직 한 가지의 색채만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색채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몽환적인 화풍과 진솔한 사랑은 사람들을 매료했어요.
샤갈의 또 다른 사랑, 버지니아와 바바

버지니아와 마르크 샤갈
이들의 사랑은 30년간 이어집니다. 첫사랑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만으로도 로맨틱하지만, 그 사랑이 30년간이나 이어진것 만으로도 샤갈의 사랑꾼같은 면모를 볼 수 있는데요. 그러던 중 1944년, 벨라가 인후염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샤갈은 한동안 붓을 놓았어요. 작업중인 모든 그림을 벽 쪽으로 돌려놓은 채 절필했죠. 다시 붓을 든 건 9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였습니다. 이때도 샤갈은 벨라와의 결혼식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며, 벨라를 잊지 못했음을 그림으로 풀어냈어요.
샤갈의 침체기를 안타깝게 지켜본 딸, 이다는 아버지에게 새로운 여인과 자리를 만들어줍니다. 샤갈의 비서로 일하던 버지니아 해거드(Virginia Haggard)였죠. 샤갈은 버지니아와 연인이 되어 아들까지 낳았어요. 하지만 이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버지니아가 다른 남성과 사랑에 빠져 샤갈을 떠났거든요. 또다시 외로움에 빠진 샤갈은 다시 한 번 작품 활동을 중단했어요.

바바 브로드스키와 샤갈
이에 다시 한 번, 딸 이다가 나섭니다. 딸이 아버지의 사랑을 돕는게 이상하다 느낄 수도 있지만, 이다는 샤갈의 예술에서 중요한 게 사랑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어요. 사랑 없는 샤갈의 그림은 반쪽짜리였죠. 그렇게 이번에도 샤갈의 비서와 자리를 만듭니다. 바바 브로드스키(Vava Broadsky), 샤갈의 마지막 사랑이 된 여인이었어요.
샤갈은 이렇게 평생 단 세 명의 여인만을 사랑했습니다. 사랑이 작품에 있어 정말 중요한 요소였지만, 평생 세 사람만을 사랑한 것은 매우 적은 숫자죠. 그만큼 샤갈의 사랑이 진솔했음을 볼 수 있어요. 피카소처럼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지도 않았고, 여인에 따라 작품 스타일이 바뀌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만의 몽환적이고 따뜻한 색채로 사랑을 그려냈을 뿐이었죠.
사랑만큼이나 강렬했던 질투심

피카소와 마티스, 샤갈
샤갈은 자기 감정에 솔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에도 언제나 진심이었고, 동료 예술가들에게 느끼는 질투심도 노골적으로 드러냈죠. 새로 이사 간 집에 다른 예술가의 작품이 걸려있으면 바로 내다 버렸습니다. 자신의 집에 다른 예술가 작품이 있는 걸 용납하지 않았죠. 당시 예술가들 사이 유행하던 작품을 주고받는 문화조차도 샤갈에게는 상관 없는 일이었어요. 유일하게 집에 있던 작품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조르주 브라크의 정물화,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작품이었는데요. 이 역시 모두 상대방이 사정사정해서 억지로 받은 것들이었습니다.
파리에서 지낼 때도 시내 중심가에는 거의 가지 않았어요. 거기서 피카소나 마티스를 마주치거나, 이들의 추종자들을 만나는 것마저도 꺼렸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본인 작품이 야수파나 입체파 같다는 평가도 싫어했어요. 특히 입체파에 대해서는 '건방진 입체파 화가들'이라며 비난하기도 했죠.
그런 샤갈의 질투심이 조금 누그러진 건, 무려 63세가 되어서야였습니다. 당시 샤갈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로 이주했는데요. 이곳에는 샤갈이 그토록 피하고 싶어 했던 마티스와 피카소가 살고 있었습니다. 샤갈은 이 시기 이들을 처음 실제로 대면하게 돼요. 40년 넘게 3대 화가로 손꼽혔지만, 계속 피해다녔던 탓이었습니다. 샤갈은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어요. 특히 피카소와는 같은 도자기 공방에서 작업하며 친하게 지냈죠.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샤갈이 피카소의 작품을 자꾸 따라 했습니다. 피카소는 분노했어요. 그리고 독특한 방식으로 복수합니다. 샤갈이 작업하던 도자기를 본인이 완성한 후, 「샤갈풍」이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에 내놓았죠. 이후 두 사람은 앙숙이 되었습니다. 샤갈은 피카소를 '그 스페인 놈'이라고 불렀어요.
샤갈은 마티스와는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먼발치에서 그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지켜보며 배웠어요. 그리고 자신도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시작했죠. 평생 피카소의 입체파, 샤갈의 야수파적 특징을 그림에 그려내면서도 절대 인정하지 않던 샤갈의 말년 모습은 어쩐지 그의 과거까지도 의구심을 갖게 만듭니다.

1985년, 샤갈은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거의 한 세기에 가까운 긴 예술 인생이었죠. 평생 세 명의 여인만을 사랑하며 그들과의 사랑에서 느낀 감정들을 성실히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평생 화풍에 큰 변화 없이 오직 사랑의 색채만으로 자신만의 몽환적 세계를 만들어냈죠.
샤갈의 작품은 당시 활동하던 가장 핫한 예술가들의 그림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샤갈은 끝까지 이를 부정했지만 관객의 감상은 다를 수 있죠. 그럼에도 그를 사랑하는 관객은 과거에도, 지금도 가득합니다. 그의 작품에 담긴 따뜻함과 행복감만은 진정성으로 가득한 덕분이죠. 여러분은 샤갈의 작품, 어떻게 느끼셨나요?

마르크 샤갈, 「나와 마을」 (1911)
피카소와 마티스. 20세기 파리 미술계를 이끌었던 대표 예술가입니다. 그리고 간혹, 함께 3대 예술가로 손꼽히는 인물이 있어요. 바로 샤갈이죠. 하지만 샤갈의 입지는 왜인지 조금 애매하게 느껴집니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확고한 투톱이었지만, 샤갈은 논쟁의 여지가 있었죠.
샤갈의 대표작 「나와 마을」(1911)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어요. 말과 사람의 얼굴이 크게 그려진 이 작품은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어 기하학적 느낌을 줍니다. 피카소의 입체파적 특징이 묻어나죠. 한편, 오른쪽 인물의 초록색 얼굴은 마티스의 야수파를 떠올리게 해요. 이때문에 샤갈의 그림은 당시 유행하던 화풍을 이리저리 섞어놓은 것 같다는 평가를 받았죠.
그럼에도 샤갈은 활동 당시, 피카소와 마티스 못지 않게 잘나가는 화가였습니다. 평생 가난한 적 없이 많은 주문을 소화하며 명성있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았죠. 그렇게 사랑받는 예술가가 된 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특유의 몽환적인 화풍, 그리고 진솔한 사랑 이야기 덕분이었죠.
운명적 만남, 스물두 살 샤갈과 열네 살 벨라
샤갈과 벨라의 모습
1909년, 러시아의 작은 마을 비테프스크. 스물두 살의 가난한 화가 지망생 샤갈은 열네 살 소녀 벨라 로젠펠드를 마주합니다. 샤갈은 후에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어요. "그녀의 침묵은 내 것이었고, 그녀의 눈동자도 내 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내 어린 시절과 부모님, 내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나를 관통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소설의 도입부를 보는듯 생생하고 매혹적이죠.
하지만 사랑이 이뤄지긴 쉽지 않았어요. 나이 차이도 많이 났고 당시 벨라가 미성년자라는 점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두 사람의 집안 차이였습니다. 샤갈은 9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극빈층 유대인이었고, 벨라는 여러 보석상을 소유한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어요. 당연히 벨라의 부모는 이 사랑을 반대했습니다.
마르크 샤갈, 「도시 위로」 (1918)
샤갈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6년간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며, 벨라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 결혼식을 올렸죠. 결혼 당시에도 샤갈은 벨라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 마음을 담아낸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도시 위로」(1918)에요. 작품은 샤갈이 벨라를 꼭 안은 채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아내와 함께할 때의 들뜬 행복감을 그대로 표현한 거죠. 색채도 따뜻하고 밝아졌어요. 샤갈은 "우리 삶에는 오직 한 가지의 색채만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색채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몽환적인 화풍과 진솔한 사랑은 사람들을 매료했어요.
샤갈의 또 다른 사랑, 버지니아와 바바
버지니아와 마르크 샤갈
이들의 사랑은 30년간 이어집니다. 첫사랑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만으로도 로맨틱하지만, 그 사랑이 30년간이나 이어진것 만으로도 샤갈의 사랑꾼같은 면모를 볼 수 있는데요. 그러던 중 1944년, 벨라가 인후염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샤갈은 한동안 붓을 놓았어요. 작업중인 모든 그림을 벽 쪽으로 돌려놓은 채 절필했죠. 다시 붓을 든 건 9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였습니다. 이때도 샤갈은 벨라와의 결혼식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며, 벨라를 잊지 못했음을 그림으로 풀어냈어요.
샤갈의 침체기를 안타깝게 지켜본 딸, 이다는 아버지에게 새로운 여인과 자리를 만들어줍니다. 샤갈의 비서로 일하던 버지니아 해거드(Virginia Haggard)였죠. 샤갈은 버지니아와 연인이 되어 아들까지 낳았어요. 하지만 이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버지니아가 다른 남성과 사랑에 빠져 샤갈을 떠났거든요. 또다시 외로움에 빠진 샤갈은 다시 한 번 작품 활동을 중단했어요.
바바 브로드스키와 샤갈
이에 다시 한 번, 딸 이다가 나섭니다. 딸이 아버지의 사랑을 돕는게 이상하다 느낄 수도 있지만, 이다는 샤갈의 예술에서 중요한 게 사랑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어요. 사랑 없는 샤갈의 그림은 반쪽짜리였죠. 그렇게 이번에도 샤갈의 비서와 자리를 만듭니다. 바바 브로드스키(Vava Broadsky), 샤갈의 마지막 사랑이 된 여인이었어요.
샤갈은 이렇게 평생 단 세 명의 여인만을 사랑했습니다. 사랑이 작품에 있어 정말 중요한 요소였지만, 평생 세 사람만을 사랑한 것은 매우 적은 숫자죠. 그만큼 샤갈의 사랑이 진솔했음을 볼 수 있어요. 피카소처럼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지도 않았고, 여인에 따라 작품 스타일이 바뀌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만의 몽환적이고 따뜻한 색채로 사랑을 그려냈을 뿐이었죠.
사랑만큼이나 강렬했던 질투심
피카소와 마티스, 샤갈
샤갈은 자기 감정에 솔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에도 언제나 진심이었고, 동료 예술가들에게 느끼는 질투심도 노골적으로 드러냈죠. 새로 이사 간 집에 다른 예술가의 작품이 걸려있으면 바로 내다 버렸습니다. 자신의 집에 다른 예술가 작품이 있는 걸 용납하지 않았죠. 당시 예술가들 사이 유행하던 작품을 주고받는 문화조차도 샤갈에게는 상관 없는 일이었어요. 유일하게 집에 있던 작품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조르주 브라크의 정물화,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작품이었는데요. 이 역시 모두 상대방이 사정사정해서 억지로 받은 것들이었습니다.
파리에서 지낼 때도 시내 중심가에는 거의 가지 않았어요. 거기서 피카소나 마티스를 마주치거나, 이들의 추종자들을 만나는 것마저도 꺼렸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본인 작품이 야수파나 입체파 같다는 평가도 싫어했어요. 특히 입체파에 대해서는 '건방진 입체파 화가들'이라며 비난하기도 했죠.
그런 샤갈의 질투심이 조금 누그러진 건, 무려 63세가 되어서야였습니다. 당시 샤갈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로 이주했는데요. 이곳에는 샤갈이 그토록 피하고 싶어 했던 마티스와 피카소가 살고 있었습니다. 샤갈은 이 시기 이들을 처음 실제로 대면하게 돼요. 40년 넘게 3대 화가로 손꼽혔지만, 계속 피해다녔던 탓이었습니다. 샤갈은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어요. 특히 피카소와는 같은 도자기 공방에서 작업하며 친하게 지냈죠.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샤갈이 피카소의 작품을 자꾸 따라 했습니다. 피카소는 분노했어요. 그리고 독특한 방식으로 복수합니다. 샤갈이 작업하던 도자기를 본인이 완성한 후, 「샤갈풍」이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에 내놓았죠. 이후 두 사람은 앙숙이 되었습니다. 샤갈은 피카소를 '그 스페인 놈'이라고 불렀어요.
샤갈은 마티스와는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먼발치에서 그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지켜보며 배웠어요. 그리고 자신도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시작했죠. 평생 피카소의 입체파, 샤갈의 야수파적 특징을 그림에 그려내면서도 절대 인정하지 않던 샤갈의 말년 모습은 어쩐지 그의 과거까지도 의구심을 갖게 만듭니다.
1985년, 샤갈은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거의 한 세기에 가까운 긴 예술 인생이었죠. 평생 세 명의 여인만을 사랑하며 그들과의 사랑에서 느낀 감정들을 성실히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평생 화풍에 큰 변화 없이 오직 사랑의 색채만으로 자신만의 몽환적 세계를 만들어냈죠.
샤갈의 작품은 당시 활동하던 가장 핫한 예술가들의 그림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샤갈은 끝까지 이를 부정했지만 관객의 감상은 다를 수 있죠. 그럼에도 그를 사랑하는 관객은 과거에도, 지금도 가득합니다. 그의 작품에 담긴 따뜻함과 행복감만은 진정성으로 가득한 덕분이죠. 여러분은 샤갈의 작품, 어떻게 느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