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컨은 보기만 해도 끔찍하고 잔혹한 화풍으로 잘 알려진 예술가입니다. 호불호가 갈릴만한 작품세계를 가졌지만, 지난 2013년에는 그의 작품 <루시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가 한화 약 2027억 5천만 원에 판매되며 고가 예술작품 기록을 세우기도 했죠.
그의 그림이 잔혹하면서도, 2천억이라는 금액에 팔릴 만큼 매력적이라 평가받는 건, 베이컨의 그림이 그의 다이내믹한 삶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이컨 어렸을 때부터 이곳저곳 떠돌며 살았고, 부잣집 자제였지만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았어요. 전화상담사, 가구 디자이너, 가정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살았죠. 그런데, 큰돈을 못 벌었는데도 술 마실 때마다 술집의 모든 사람에게 샴페인과 캐비아를 살 정도로 아이러니하고 충동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라이프 스타일이 작품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어요.
베이컨은 1909년 아일랜드 더블린 지역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경주마 조련사였고, 어머니는 영국의 유명 철강회사 집안 딸이었죠. 덕분에 베이컨은 제법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요. 그런데 부모님은 사는 집에 언제나 만족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1년 살고 이사 가기를 반복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생활했습니다. 이런 떠돌이 라이프스타일은 곧 베이컨의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미쳐요.
베이컨은 뭘 하나 끈기 있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학교도 1년 정도만 다니고 퇴학 당했고, 그림 그리기를 결심하고도 전문 미술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죠. 그렇다 보니, 제대로 소속감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베이컨은 늘 방황하듯 살았는데요. 14살 때에는 방황이 극에 달합니다. 본인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그렇게 집안의 남자 하인이나 남자 정원사와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고, 어머니 옷을 입고 화장을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화가의 길도 만만하진 않았아요.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전혀 감을 못 잡았죠. 그렇게 초기에는 피카소의 아류작 같은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아류작은 시대를 불문하고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습니다. 예술가는 독창적인 예술 세계가 있어야 주목받으니까요.
그래서 베이컨은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한 후에도 가구 디자이너와 양탄자 디자이너를 병행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베이컨은 어떤 걸 그려야 할지 찾게 돼요. 그렇게 내놓은 작품이 베이컨의 1944년 작, <십자가에 못 박힌 형상들>입니다.
이 작품은 세 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건, 종교화에서 전통적으로 활용하던 삼면화의 형식인데요. 각 그림 속 그려진 요소를 보면 굉장히 형태가 징그러워요. 몸은 동물 같은데, 입이나 귀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죠. 상당히 기괴합니다.
그리고 이 기괴함을 더 극대화하는 건 작품의 배경이에요. 징그러운 형상을 제외한 그림 대부분은 쨍한 주황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기괴한 형상과 대비되어서 불협화음을 시각화한 느낌이 듭니다. 딱 봤을 때 호감 가는 이미지는 아닌데요. 이 그림은 베이컨의 출세작입니다. 당시 사회적 상황을 그림에 잘 담아낸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호평받았는데요.
Salvador Dali, 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
이 그림이 만들어진 건 1944년입니다. 당시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고 있었어요. 전쟁의 참상이 휘몰아친 후였던 것이죠. 베이컨은 당시 사람들이 느낀 전쟁의 공포, 인간성의 상실을 징그럽고 조화롭지 않은 그림을 통해 표현한 거예요.
그런데 사실 전쟁 상황이 주는 끔찍한 현실에 회의감을 느끼고 새로운 예술을 시도한 사조는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등장한 초현실주의인데요. 초현실주의는 끔찍한 현실에서 도피해, 무의식과 꿈의 세계에서 영감을 찾았던 사조입니다.
그런데 이들과 베이컨이 달랐던 건, 베이컨은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그림에 고스란히 반영했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를 전통적인 종교화의 형식인 삼면화 구성으로 그려서, 오늘날 종교만큼 우리에게 영향력을 주는 것은 전쟁이 만든 끔찍한 상황이고, 이는 매우 파괴적임을 그림을 통해서 시사합니다.
그렇게 이미지를 통해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형식을 통해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아낸 것이죠. 초기작부터 매우 세련된 스토리텔링을 보여주었습니다. 덕분에 베이컨의 그림이 높게 평가받으면서 예술가로서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되었어요.
이 영감의 원천은 베이컨의 기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앞서 살짝 언급했듯, 베이컨은 정착해서 어딘가에 소속된 적이 없다 보니 기질적으로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삶을 살았어요. 평생 도박에 열중했었다고 하고, 돈이 있을 때도, 돈이 없을 때도 술집으로 가서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샴페인과 캐비아를 샀죠.
그리고 이런 성향이 고스란히 작품에도 반영되었습니다. 베이컨은 다른 예술가처럼, 연필이나 목탄으로 스케치 작업을 안 해요. 일단 작은 붓을 들고 대충 캔버스에 형태를 그린 뒤에, 바로 큰 붓으로 채색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붓질에 따라 점차 작품이 만들어진다고 하죠.
베이컨은 이렇게 작업하게 되면, 작품이 담고 있는 개성이 극대화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화가라기보다 우연의 매개자라고 해요. 그저 물감이 만들어가는 질감과 색채, 자취를 따라가며 그림을 완성할 뿐이라 말하죠.
그런데 이런 우연적인 작업 방식이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닙니다. 베이컨은 완성한 작품보다, 그림을 그리던 중 마음에 안 들어 박살 낸 작품 수가 더 많아요. 우연을 따르다 보니 제대로 작품이 완성될 확률이 절반도 안 되는 것이죠.
그리고 베이컨은 제법 괜찮다 생각한 작품이 나오면 바로 갤러리나 전시장으로 보내버립니다. 느낌이 왔을 때 딱 끝내버리는 건데요. 그렇다 보니 전시가 끝나고 작품이 다시 작업실로 돌아왔을 때 그림의 부족한 점이 보여서 더 수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연을 따르는 즉흥적 작업 방식이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걸 느낄 수 있죠.
그럼에도 이 작업 방식을 평생 고수했는데, 이유가 있어요. 한번은 베이컨이 인물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그림 속 인물이 회색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어떤 물감으로 칠할까 고민하다가 우연히, 작업실 바닥에 떨어진 회색 먼지를 보게 돼요.
베이컨은 우연을 따르는 화가이니, 그 먼지를 그림에 올려봤습니다. 근데 그게 생각보다 너무 잘 어울렸다고 해요. 옷의 질감도 살릴 수 있었고요. 그 사건 이후, 먼지를 작품에 꾸준히 활용하면서 이게 베이컨의 시그니처 기법이 됩니다. 우연을 따르는 작업 방식이 완전히 새로운 베이컨만의 무기를 만들어주기도 한 것이지요.
베이컨의 고집스러운 예술관: 그림은 보는 이를 흥분시켜야 한다
Diego Velázquez, Pope Innocent X, 1650
베이컨이 고집스럽게 추구하던 예술관이 하나 있습니다. ‘그림은 보는 이를 흥분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는 모든 감각의 밸브를 열어젖힐 정도로 강렬한 수준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이런 그림을 찾기는 쉽지 않아요. 스탕달 신드롬처럼, 가끔 그림을 보고 우는 이들도 있지만 이 역시 매우 드물고요. 베이컨도 이 정도로 보는 이에게 감각적 자극을 줄 수 있는 그림으로 딱 한 점의 작품만 언급했습니다. 바로,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죠.
이 그림은 아주 단순한 교황의 초상화에요. 빨간 망토를 두른 교황이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을 무릎까지 그린 전형적인 초상화의 형태인데요. 베이컨은 이 그림이 역대 미술사를 통틀어 제작된 초상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물의 심리상태는 물론이고, 그의 맥박까지 느껴질 정도라고 말했죠.
그리고 이 작품의 도판이 담긴 책을 여러 권 구입해, 그 사진을 참고해 작품을 여러 차례 제작합니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건 1953년 작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에 대한 연구>에요. 교황이 앉아있는 모습을 마찬가지로 무릎까지 그렸는데, 이거 외에는 다 달라요.
일단 교황의 얼굴이 마치 뭉크의 <절규>처럼 입을 한껏 벌리고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묘사했고, 피부는 파랗게, 망토는 보라색으로 바꿔 칠해 차가운 느낌을 더합니다. 여기에 그림의 잔혹한 이미지를 더해주는 검은색 세로선을 넣었어요. 교황이 무언가 고통에 시달리는듯한 느낌을 자아내면서, 그림이 가진 강렬한 느낌이 더 극대화되게 연출했죠. 언뜻 전기의자에 앉아 고문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베이컨은 이를 통해, 종교에서 최고 권위를 가지는 이를 단순한 인간 존재로 규정하고, 그가 느끼는 고통과 공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강렬한 감각을 선사해요. 베이컨이 추구하던, 감각의 밸브가 열리는 느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은데요.
베이컨은 이 그림을 통해 종교의 의미가 과거와 달라지면서, 종교적 권위자 역시 하나의 인물에 불과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렇게 권력의 공허함과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낸 건데요. 덕분에 작품은 20세기 회화를 통틀어 가장 강렬하고 독창적인 재해석이라 평가받습니다. 작품은 오늘날까지 베이컨의 대표작으로 손꼽히죠.
과거의 명화를 현대적으로, 그리고 베이컨의 개성을 가득 담아 재해석한 시도는 효과적이었어요. 미술계는 베이컨의 시도를 극찬했고 대중의 반응 역시 좋았습니다. 베이컨은 활동 당시에도 많은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죠. 당시로서 드문 비전공자 출신 예술가였지만 이런 조건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영감을 찾아야 했어요. 그리고 베이컨에게 영감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진 작품, 영화, 문학, 시 등 다양한 예술 장르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던 덕분이죠.
Eadweard Muybridge, The Horse in Motion, 1878
그중에서도 베이컨은 사진에 특히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사진작가 에드워드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의 연속 촬영 사진이 가장 큰 영향을 줬죠. 머이브리지는 움직이는 인간과 동물의 동작을 연속적으로 포착한 사진 시리즈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이컨은 이를 참고해 인체의 역동성과 왜곡된 형태를 그림에 반영해요. 특히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인물의 비정상적인 자세, 변형된 움직임이 이런 사진에서 영향받은 것이지요.
베이컨은 이 사진을 참고 자료로 사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창의적으로 재해석합니다. 특히 자화상을 그릴 때, 카메라를 적극 활용했어요. 셀피를 여러 장 찍고, 이들 중 몇 장을 선택해 자화상의 기초로 삼았죠. 여러 장을 뒤섞어 활용하며 이미지를 왜곡하고 변형했습니다. 이를 통해 오히려 대상의 본질이 더 잘 드러날 거라고 보았기 때문이죠.
왜곡된 얼굴, 강렬한 표현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내면의 고뇌를 반영해요. 주로 작은 사이즈의 캔버스에 그렸고, 대부분 세 개의 패널로 구성된 트립티크 형식으로 제작했죠. 그리고 수많은 자화상을 그려냅니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로는 모델을 두고 작업하는 걸 선호하지 않았어요. 사람들과 정서적 관계를 두는 것이 본인 작품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일만 한다면, 휴식을 취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둘째로는, 자화상이 내면 표현하기 가장 좋은 주제라 생각했어요. 그간 베이컨은 다양한 작품을 통해 다양한 인물이 느끼는 공포감, 고통, 불안 같은 주제를 다루었는데요. 그림 속 인물은 교황이나 자신의 친구 등 다양했지만 무엇보다 내면을 잘 알고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실제로 베이컨은 큰 전시를 앞둔 때마다 연인이 사망하는 일을 겪곤 했는데요. 연달은 사망에서 비롯된 상실감과 고통은 자화상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베이컨의 농축된 예술은 1970년대 절정에 달합니다. 가장 유명한 것이 <고기를 위한 그림>이에요. 이 작품은 베이컨의 예술이 절정에 달했다 평가받는 시기에 제작된 시리즈인 ‘푸줏간 고깃덩어리 시리즈’의 대표작입니다.
검은 방에 나란히 고깃덩어리가 걸려있고, 그 앞쪽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앉아있는 모습이에요. 이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앞서 살펴본 교황 시리즈의 연장선에서 그려졌습니다. 자세나 형태가 교황 그림과 매우 유사해요. 마찬가지로 비명을 지르는 듯 입을 벌리고 있고, 피부는 파랗게, 망토는 보라색으로 칠했습니다. 차가운 골방에서 고문당하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 자아내죠.
철학가 질 들뢰즈는 베이컨의 이 작품을 들어 “신경계에 직접 호소하는, 감각을 신경계에 직접 전달하는 새로운 기법의 회화”라 칭송합니다. 그간 베이컨이 추구하던 ‘감각의 밸브를 여는’ 작품관이 마침내 인정받은 것이죠.
그리고 이 작품은 1989년 영화 <배트맨>에 등장하기도 했어요. 조커가 박물관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씬에 등장했습니다. 조커와 그의 부하들은 렘브란트, 에드가 드가 등 유명 거장의 작품에 페인트칠을 하고 스프레이를 뿌리며 훼손합니다. 조커 역시 거들었고요.
그런데 베이컨의 <고기가 있는 그림>만은 훼손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 그림은 마음에 든다면서요. 이 장면이 상당히 화제가 됩니다. 베이컨이 그림을 통해 표현한 인간 존재의 불안과 고통이 조커라는 캐릭터의 혼란스럽고 파괴적인 내면과 잘 어우러지면서, 영화와 예술작품이 잘 조화된 케이스로 오늘날까지 회자되었어요.
ⓒ Christie's
프랑스 작가 야릭 에넬은 자신의 책 <블루 베이컨>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분명히 하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폭력과 잔인함의 화가가 아니다. 가학적인(그리고 우리가 예술가들을 미치광이로 믿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회다. 카라바조나 베이컨처럼 위대한 화가는 악의 편에 서지도 않고 악에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인간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포착하여 그것을 드러내는 형태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베이컨의 이런 면모가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요. 여러분은 베이컨의 작품에서 어떤 감각을 느끼셨나요?
프랜시스 베이컨, 루시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 1969 © 2024 The Estate of Francis Bacon
베이컨은 보기만 해도 끔찍하고 잔혹한 화풍으로 잘 알려진 예술가입니다. 호불호가 갈릴만한 작품세계를 가졌지만, 지난 2013년에는 그의 작품 <루시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가 한화 약 2027억 5천만 원에 판매되며 고가 예술작품 기록을 세우기도 했죠.
그의 그림이 잔혹하면서도, 2천억이라는 금액에 팔릴 만큼 매력적이라 평가받는 건, 베이컨의 그림이 그의 다이내믹한 삶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이컨 어렸을 때부터 이곳저곳 떠돌며 살았고, 부잣집 자제였지만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았어요. 전화상담사, 가구 디자이너, 가정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살았죠. 그런데, 큰돈을 못 벌었는데도 술 마실 때마다 술집의 모든 사람에게 샴페인과 캐비아를 살 정도로 아이러니하고 충동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라이프 스타일이 작품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어요.
아이러니하고 충동적인 작가, 프랜시스 베이컨
프랜시스 베이컨 © 2024 The Estate of Francis Bacon
베이컨은 1909년 아일랜드 더블린 지역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경주마 조련사였고, 어머니는 영국의 유명 철강회사 집안 딸이었죠. 덕분에 베이컨은 제법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요. 그런데 부모님은 사는 집에 언제나 만족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1년 살고 이사 가기를 반복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생활했습니다. 이런 떠돌이 라이프스타일은 곧 베이컨의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미쳐요.
베이컨은 뭘 하나 끈기 있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학교도 1년 정도만 다니고 퇴학 당했고, 그림 그리기를 결심하고도 전문 미술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죠. 그렇다 보니, 제대로 소속감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베이컨은 늘 방황하듯 살았는데요. 14살 때에는 방황이 극에 달합니다. 본인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그렇게 집안의 남자 하인이나 남자 정원사와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고, 어머니 옷을 입고 화장을 하기도 했어요.
14살의 프랜시스 베이컨 © 2024 The Estate of Francis Bacon
그런데 어느 날, 화장하고 엄마 옷 입은 모습을 아버지에게 들키게 됩니다. 그러면서 집에서 쫓겨나요. 당시는 1920년대였는데요. 이때까지는 동성애가 금기시되고 있었어요. 게다가 베이컨의 아버지는 굉장히 괴팍하고 폭력적인 사람이었고요.
그렇게 베이컨은 반강제로 독립하게 됩니다. 그런데 베이컨이 무언가를 끈기 있게 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다양한 직업을 전전해요. 속기사, 전화상담사, 하인, 요리사를 하기도 했죠. 중간중간 새로운 직업을 구할 땐 어머니한테 몰래 용돈을 받아썼고요.
그렇게 반 백수 상태로 지내는 중, 어느 날 우연히 한 갤러리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그곳에서 피카소의 그림을 처음 봅니다. 그 순간 베이컨은 이제야 정착할 곳을 찾은 느낌을 받았다고 해요. ‘나도 그림을 그려야겠다’ 생각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베이컨의 출세작, <십자가에 못 박힌 형상들>
Francis Bacon,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 1944 © 2024 The Estate of Francis Bacon
하지만 화가의 길도 만만하진 않았아요.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전혀 감을 못 잡았죠. 그렇게 초기에는 피카소의 아류작 같은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아류작은 시대를 불문하고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습니다. 예술가는 독창적인 예술 세계가 있어야 주목받으니까요.
그래서 베이컨은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한 후에도 가구 디자이너와 양탄자 디자이너를 병행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베이컨은 어떤 걸 그려야 할지 찾게 돼요. 그렇게 내놓은 작품이 베이컨의 1944년 작, <십자가에 못 박힌 형상들>입니다.
이 작품은 세 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건, 종교화에서 전통적으로 활용하던 삼면화의 형식인데요. 각 그림 속 그려진 요소를 보면 굉장히 형태가 징그러워요. 몸은 동물 같은데, 입이나 귀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죠. 상당히 기괴합니다.
그리고 이 기괴함을 더 극대화하는 건 작품의 배경이에요. 징그러운 형상을 제외한 그림 대부분은 쨍한 주황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기괴한 형상과 대비되어서 불협화음을 시각화한 느낌이 듭니다. 딱 봤을 때 호감 가는 이미지는 아닌데요. 이 그림은 베이컨의 출세작입니다. 당시 사회적 상황을 그림에 잘 담아낸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호평받았는데요.
Salvador Dali, 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
이 그림이 만들어진 건 1944년입니다. 당시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고 있었어요. 전쟁의 참상이 휘몰아친 후였던 것이죠. 베이컨은 당시 사람들이 느낀 전쟁의 공포, 인간성의 상실을 징그럽고 조화롭지 않은 그림을 통해 표현한 거예요.
그런데 사실 전쟁 상황이 주는 끔찍한 현실에 회의감을 느끼고 새로운 예술을 시도한 사조는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등장한 초현실주의인데요. 초현실주의는 끔찍한 현실에서 도피해, 무의식과 꿈의 세계에서 영감을 찾았던 사조입니다.
Francis Bacon,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 1944 © 2024 The Estate of Francis Bacon
그런데 이들과 베이컨이 달랐던 건, 베이컨은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그림에 고스란히 반영했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를 전통적인 종교화의 형식인 삼면화 구성으로 그려서, 오늘날 종교만큼 우리에게 영향력을 주는 것은 전쟁이 만든 끔찍한 상황이고, 이는 매우 파괴적임을 그림을 통해서 시사합니다.
그렇게 이미지를 통해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형식을 통해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아낸 것이죠. 초기작부터 매우 세련된 스토리텔링을 보여주었습니다. 덕분에 베이컨의 그림이 높게 평가받으면서 예술가로서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되었어요.
© 2024 The Estate of Francis Bacon
이 영감의 원천은 베이컨의 기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앞서 살짝 언급했듯, 베이컨은 정착해서 어딘가에 소속된 적이 없다 보니 기질적으로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삶을 살았어요. 평생 도박에 열중했었다고 하고, 돈이 있을 때도, 돈이 없을 때도 술집으로 가서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샴페인과 캐비아를 샀죠.
그리고 이런 성향이 고스란히 작품에도 반영되었습니다. 베이컨은 다른 예술가처럼, 연필이나 목탄으로 스케치 작업을 안 해요. 일단 작은 붓을 들고 대충 캔버스에 형태를 그린 뒤에, 바로 큰 붓으로 채색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붓질에 따라 점차 작품이 만들어진다고 하죠.
© 2024 The Estate of Francis Bacon
베이컨은 이렇게 작업하게 되면, 작품이 담고 있는 개성이 극대화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화가라기보다 우연의 매개자라고 해요. 그저 물감이 만들어가는 질감과 색채, 자취를 따라가며 그림을 완성할 뿐이라 말하죠.
그런데 이런 우연적인 작업 방식이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닙니다. 베이컨은 완성한 작품보다, 그림을 그리던 중 마음에 안 들어 박살 낸 작품 수가 더 많아요. 우연을 따르다 보니 제대로 작품이 완성될 확률이 절반도 안 되는 것이죠.
그리고 베이컨은 제법 괜찮다 생각한 작품이 나오면 바로 갤러리나 전시장으로 보내버립니다. 느낌이 왔을 때 딱 끝내버리는 건데요. 그렇다 보니 전시가 끝나고 작품이 다시 작업실로 돌아왔을 때 그림의 부족한 점이 보여서 더 수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연을 따르는 즉흥적 작업 방식이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걸 느낄 수 있죠.
Francis Bacon, Portrait of a Man Walking Down Steps, 1972 © 2024 The Estate of Francis Bacon
그럼에도 이 작업 방식을 평생 고수했는데, 이유가 있어요. 한번은 베이컨이 인물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그림 속 인물이 회색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어떤 물감으로 칠할까 고민하다가 우연히, 작업실 바닥에 떨어진 회색 먼지를 보게 돼요.
베이컨은 우연을 따르는 화가이니, 그 먼지를 그림에 올려봤습니다. 근데 그게 생각보다 너무 잘 어울렸다고 해요. 옷의 질감도 살릴 수 있었고요. 그 사건 이후, 먼지를 작품에 꾸준히 활용하면서 이게 베이컨의 시그니처 기법이 됩니다. 우연을 따르는 작업 방식이 완전히 새로운 베이컨만의 무기를 만들어주기도 한 것이지요.
베이컨의 고집스러운 예술관: 그림은 보는 이를 흥분시켜야 한다
Diego Velázquez, Pope Innocent X, 1650
베이컨이 고집스럽게 추구하던 예술관이 하나 있습니다. ‘그림은 보는 이를 흥분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는 모든 감각의 밸브를 열어젖힐 정도로 강렬한 수준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이런 그림을 찾기는 쉽지 않아요. 스탕달 신드롬처럼, 가끔 그림을 보고 우는 이들도 있지만 이 역시 매우 드물고요. 베이컨도 이 정도로 보는 이에게 감각적 자극을 줄 수 있는 그림으로 딱 한 점의 작품만 언급했습니다. 바로,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죠.
베이컨이 참고한 도판 © 2024 The Estate of Francis Bacon
이 그림은 아주 단순한 교황의 초상화에요. 빨간 망토를 두른 교황이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을 무릎까지 그린 전형적인 초상화의 형태인데요. 베이컨은 이 그림이 역대 미술사를 통틀어 제작된 초상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물의 심리상태는 물론이고, 그의 맥박까지 느껴질 정도라고 말했죠.
그리고 이 작품의 도판이 담긴 책을 여러 권 구입해, 그 사진을 참고해 작품을 여러 차례 제작합니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건 1953년 작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에 대한 연구>에요. 교황이 앉아있는 모습을 마찬가지로 무릎까지 그렸는데, 이거 외에는 다 달라요.
일단 교황의 얼굴이 마치 뭉크의 <절규>처럼 입을 한껏 벌리고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묘사했고, 피부는 파랗게, 망토는 보라색으로 바꿔 칠해 차가운 느낌을 더합니다. 여기에 그림의 잔혹한 이미지를 더해주는 검은색 세로선을 넣었어요. 교황이 무언가 고통에 시달리는듯한 느낌을 자아내면서, 그림이 가진 강렬한 느낌이 더 극대화되게 연출했죠. 언뜻 전기의자에 앉아 고문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베이컨은 이를 통해, 종교에서 최고 권위를 가지는 이를 단순한 인간 존재로 규정하고, 그가 느끼는 고통과 공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강렬한 감각을 선사해요. 베이컨이 추구하던, 감각의 밸브가 열리는 느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은데요.
Francis Bacon, Study after Velá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 1953 © 2024 The Estate of Francis Bacon
베이컨은 이 그림을 통해 종교의 의미가 과거와 달라지면서, 종교적 권위자 역시 하나의 인물에 불과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렇게 권력의 공허함과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낸 건데요. 덕분에 작품은 20세기 회화를 통틀어 가장 강렬하고 독창적인 재해석이라 평가받습니다. 작품은 오늘날까지 베이컨의 대표작으로 손꼽히죠.
사진으로 완성한 강렬한 이미지
© 2024 The Estate of Francis Bacon
과거의 명화를 현대적으로, 그리고 베이컨의 개성을 가득 담아 재해석한 시도는 효과적이었어요. 미술계는 베이컨의 시도를 극찬했고 대중의 반응 역시 좋았습니다. 베이컨은 활동 당시에도 많은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죠. 당시로서 드문 비전공자 출신 예술가였지만 이런 조건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영감을 찾아야 했어요. 그리고 베이컨에게 영감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진 작품, 영화, 문학, 시 등 다양한 예술 장르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던 덕분이죠.
Eadweard Muybridge, The Horse in Motion, 1878
그중에서도 베이컨은 사진에 특히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사진작가 에드워드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의 연속 촬영 사진이 가장 큰 영향을 줬죠. 머이브리지는 움직이는 인간과 동물의 동작을 연속적으로 포착한 사진 시리즈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이컨은 이를 참고해 인체의 역동성과 왜곡된 형태를 그림에 반영해요. 특히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인물의 비정상적인 자세, 변형된 움직임이 이런 사진에서 영향받은 것이지요.
베이컨은 이 사진을 참고 자료로 사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창의적으로 재해석합니다. 특히 자화상을 그릴 때, 카메라를 적극 활용했어요. 셀피를 여러 장 찍고, 이들 중 몇 장을 선택해 자화상의 기초로 삼았죠. 여러 장을 뒤섞어 활용하며 이미지를 왜곡하고 변형했습니다. 이를 통해 오히려 대상의 본질이 더 잘 드러날 거라고 보았기 때문이죠.
Francis Bacon, Self Portrait, 1975 © 2024 The Estate of Francis Bacon
왜곡된 얼굴, 강렬한 표현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내면의 고뇌를 반영해요. 주로 작은 사이즈의 캔버스에 그렸고, 대부분 세 개의 패널로 구성된 트립티크 형식으로 제작했죠. 그리고 수많은 자화상을 그려냅니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로는 모델을 두고 작업하는 걸 선호하지 않았어요. 사람들과 정서적 관계를 두는 것이 본인 작품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일만 한다면, 휴식을 취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둘째로는, 자화상이 내면 표현하기 가장 좋은 주제라 생각했어요. 그간 베이컨은 다양한 작품을 통해 다양한 인물이 느끼는 공포감, 고통, 불안 같은 주제를 다루었는데요. 그림 속 인물은 교황이나 자신의 친구 등 다양했지만 무엇보다 내면을 잘 알고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실제로 베이컨은 큰 전시를 앞둔 때마다 연인이 사망하는 일을 겪곤 했는데요. 연달은 사망에서 비롯된 상실감과 고통은 자화상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조커가 선택한 작품, 고기가 있는 그림
Francis Bacon, Figure with Meat, 1954 © 2024 The Estate of Francis Bacon
그리고 베이컨의 농축된 예술은 1970년대 절정에 달합니다. 가장 유명한 것이 <고기를 위한 그림>이에요. 이 작품은 베이컨의 예술이 절정에 달했다 평가받는 시기에 제작된 시리즈인 ‘푸줏간 고깃덩어리 시리즈’의 대표작입니다.
검은 방에 나란히 고깃덩어리가 걸려있고, 그 앞쪽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앉아있는 모습이에요. 이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앞서 살펴본 교황 시리즈의 연장선에서 그려졌습니다. 자세나 형태가 교황 그림과 매우 유사해요. 마찬가지로 비명을 지르는 듯 입을 벌리고 있고, 피부는 파랗게, 망토는 보라색으로 칠했습니다. 차가운 골방에서 고문당하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 자아내죠.
철학가 질 들뢰즈는 베이컨의 이 작품을 들어 “신경계에 직접 호소하는, 감각을 신경계에 직접 전달하는 새로운 기법의 회화”라 칭송합니다. 그간 베이컨이 추구하던 ‘감각의 밸브를 여는’ 작품관이 마침내 인정받은 것이죠.
그리고 이 작품은 1989년 영화 <배트맨>에 등장하기도 했어요. 조커가 박물관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씬에 등장했습니다. 조커와 그의 부하들은 렘브란트, 에드가 드가 등 유명 거장의 작품에 페인트칠을 하고 스프레이를 뿌리며 훼손합니다. 조커 역시 거들었고요.
그런데 베이컨의 <고기가 있는 그림>만은 훼손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 그림은 마음에 든다면서요. 이 장면이 상당히 화제가 됩니다. 베이컨이 그림을 통해 표현한 인간 존재의 불안과 고통이 조커라는 캐릭터의 혼란스럽고 파괴적인 내면과 잘 어우러지면서, 영화와 예술작품이 잘 조화된 케이스로 오늘날까지 회자되었어요.
ⓒ Christie's
프랑스 작가 야릭 에넬은 자신의 책 <블루 베이컨>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분명히 하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폭력과 잔인함의 화가가 아니다. 가학적인(그리고 우리가 예술가들을 미치광이로 믿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회다. 카라바조나 베이컨처럼 위대한 화가는 악의 편에 서지도 않고 악에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인간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포착하여 그것을 드러내는 형태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베이컨의 이런 면모가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요. 여러분은 베이컨의 작품에서 어떤 감각을 느끼셨나요?
함께 보면 좋을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