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를 수식하는 말은 정말 많습니다. ‘빛과 어둠의 화가’, ‘악마가 내린 재능을 가진 예술가', ‘바로크 양식의 선구자' 등 다양하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카라바조는 자신의 ‘천성’을 브랜딩에 적극 활용한 작가입니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고, 그 시선이 매력적이었던 덕분에 예술가로서 주목받을 수 있었죠.
하지만 카라바조의 삐딱한 시선은 태도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가 남긴 명작의 수만큼, 불미스러운 사건을 담은 법정 기록이 그의 인생을 가득 채웠죠. 두 번의 살인 혐의와 한 번의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이자, 전과 7범의 범죄자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이라면, 나락을 가고 세상에 없는 존재로 치부됐을 겁니다. 당시에도 카라바조의 범죄 이력에 가려 그의 예술작품이 평가절하되곤 했죠. 20세기에 접어들어서야 카라바조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카라바조의 이 ‘천성’은 그의 작품만이 가진 독특한 브랜딩 요소로 작용합니다.
미켈란젤로를 버리고, 카라바조로 출발하다
Caravaggio, Basket of Fruit, 1595–1596 ⓒ Pinacoteca Ambrosiana, Milan
카라바조에 대한 기록은 부풀려지고 과장된 것이 많습니다. 최초로 카라바조의 전기를 쓴 화가, 조반니 발리오네는 그를 미워해 기록을 제대로 관리하지도 않았으며, 동시대 미술가들은 카라바조와 철천지원수라도 된 듯 그를 비난하고 헐뜯는 글을 수도 없이 써 내려갔죠.
감정이 섞인 글들은 객관적 평가가 어렵지만, 카라바조에 대한 확실한 정보도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1571년, ‘카라바조’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죠. 당시 그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였어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빈치 지역의 레오나르도’라는 뜻을 지닌 것처럼, ‘카라바조 지역의 미켈란젤로 메리시'라는 의미의 이름이죠. 하지만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본명을 버리고 ‘카라바조’라고 불리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로는 다양한 추정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것은 르네상스의 대가, 미켈란젤로 때문이라는 설이 있어요. 카라바조는 미켈란젤로가 사망 7년 뒤에 태어났는데요. 미술계엔 여전히 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별화를 위해 출신지인 카라바조를 이름처럼 사용한 것이죠. 당시 예술가들은 자신의 출신지나 본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별칭을 종종 사용하기도 했기 때문에 문제 될 건 없었습니다.
Caravaggio, The Musicians, 1595–1596 ⓒ Metropolitan Museum of Art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을 버리고 카라바조로 출발한 것. 이건 카라바조 브랜딩의 첫 번째 스텝이었어요. 카라바조가 활동하던 로마는 여전히 르네상스 대가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금씩 새로운 장르가 태동하는 듯했지만,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그림도 많이 그려졌죠. 잘 팔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 이탈리아 최고의 거장으로 꼽히는 미켈란젤로와 동명으로 활동하는 건, 카라바조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됐을 겁니다. 그렇게 이름으로 차별화 포인트를 만든 이후, 카라바조는 자신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그림을 그리기로 합니다.
카라바조는 13살 때부터 17살 때까지 약 4년간, 밀라노의 화실에서 도제식으로 미술을 배웠어요. 이후 후원자를 찾아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려고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후원자들은 카라바조가 가진 가능성에 투자하기보다, 이미 잘 알려진 거장들 화풍의 그림을 비슷하게 그려주길 바랐죠. 카라바조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일을 했어야 했고요. 이런 상황이 반복되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면 거리로 나가 못된 짓을 일삼았습니다. 경찰을 약 올리거나, 매춘부들과 어울리거나, 술에 취해 시민에게 시비를 거는 등 다양했어요.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의 일입니다.
Caravaggio, Saint Francis of Assisi in Ecstasy, 1595 ⓒ Wadsworth Atheneum
노는 게 제일 좋았던 어린 화가 지망생, 미켈란젤로 메리시가 ‘카라바조'가 된 계기는 <황홀경의 성 프란체스코(1595)> 작품을 기점으로 해요. 놀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카라바조는 도제 교육을 받으며 알게 된 부호 중, 자신에게 가장 호의적이던 발랑탱을 찾아갑니다. 발랑탱은 유의미한 조언을 해주었어요. 돈이 필요한 거라면, 주문이 많은 종교화를 그리라고 말했죠. 당시 카라바조는 풍속화를 그리곤 해서 달가워하진 않았지만, 이후 그린 그림이 계속 팔리지 않자 발랑탱의 말을 듣기로 합니다.
그렇게 카라바조는 자신의 첫 종교화 <황홀경의 성 프란체스코(1595)>를 그려내요. 그림은 어두운 밤, 기절한 성 프란체스코를 부드럽게 안고 있는 천사를 담고 있습니다. 종교화에서 자주 그려지던 주제였지만, 카라바조는 통속적인 전통화와 다른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기로 해요. 우선 시간을 밤으로 설정해, 칠흑 같은 어두움을 그려냈습니다. 종교화에서 어두움은 세속을 상징하고, 빛은 성스러움을 의미해요. 그런데도 과감하게 작품 왼편을 어둡게 묘사한 건 매우 파격적이었습니다. 당시 몇몇 화가들은 르네상스의 전통에 저항하며 어둠을 과감하게 활용하는 시도를 하고 있었는데요. 도제교육을 받은 카라바조 역시 이 흐름에 영향받긴 했습니다.
황홀경의 성 프란체스코 확대본
하지만 카라바조는 이렇게만 해선 남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걸 잘 알았어요. 그래서 카라바조는 자신만의 장치를 하나 더 더합니다. 종교화는 성스럽다는 공식을 깨고, 매우 현실적인 연출을 더한 것이죠. 프란체스코의 얼굴은 성인이라기보다 흔한 동네 아저씨 같은 모습입니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났고 머리칼은 푸석하죠. 하지만 이 덕분에 작품의 몰입감은 높아집니다. 성스럽고 아름다운 모습보다는 일상적인 것들에 이입하기 쉽기 때문이죠. 그래서 카라바조는 언뜻 아름답지 않아 보일 수 있는 것도 그대로 그려버립니다. 이것이 곧 진실한 ‘예술’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실력 없는 예술가가 전통을 깨는 시도를 하면 객기로 치부되기 쉽지만, 카라바조에겐 탄탄한 그림 실력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그의 그림 속 새로운 요소는 신선한 시도로 여겨졌어요. 동시대 다른 화가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차별점을 구축하면서, 로마의 큰손 수집가들은 카라바조에 관심 갖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카라바조는 ‘카라바조'라는 이름을 로마 예술계에 알리기 시작했죠.
종교에 저항하여 종교화의 대가가 되다
Caravaggio, The Martyrdom of Saint Matthew, 1599–1600 ⓒ San Luigi dei Francesi, Rome
덕분에 카라바조의 전성기는 빠르게 찾아옵니다. 스물여덟 살이 되던 1599년, 카라바조는 로마에 새로 지어질 콘타렐리 예배당에 놓일 그림 2점의 의뢰를 받아요. 원래는 로마의 인기 화가, 주세페 페라리에게 의뢰가 갈 예정이었지만, 그가 이미 너무 많은 작품을 진행 중이었던 탓에 떠오르는 신예인 카라바조에게 일이 넘어갔던 겁니다.
이건 카라바조가 주요한 교회에게서 받은 첫 번째 의뢰였고, 그의 예술가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될만한 중요한 의뢰였어요. 당시 사람들 사이 가장 화두가 되는 주제는 ‘예배당에 걸린 그림'이었기 때문이죠. 새로운 종교화가 공개되는 날이면, 오늘날 오픈런 하듯 교회 앞에 몇 시간씩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특히나 콘타렐리 예배당은 매우 큰 교회였고, 새로 지어지는 교회였기에 더더욱 이목을 끌고 있었고요. 카라바조는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려냅니다. 이윽고 공개된 두 점의 그림은 엄청난 화제에 오르게 돼요. 이번에도 기존 종교화와는 다른, 카라바조만의 장치가 들어있던 덕분이죠.
성 마태오의 순교 확대본
먼저 공개된 <성 마태오의 순교(1599-1600)>는 피습의 현장을 포착해 그려냈습니다. 마태오가 기도를 드리던 중, 공격당해 바닥에 쓰러지는 찰나의 모습을 사진 찍듯 포착했죠. 주목할 만한 건 인물들의 표정입니다. 긴박한 순간 짓게 되는 표정은 아주 빠르게 스쳐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감정이 담겨있어, 모델을 둔다 하더라도 그림에 표현하긴 쉽지 않죠. 하지만 카라바조는 아주 능숙하게 해냅니다.
바닥에 쓰러져 공격을 막는 중인 마태오는 너무 놀라 오히려 어떤 표정도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손을 뻗어 막으면서 상대방을 바라보는데, 그 몇 초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긴박감이 느껴지죠. 마태오를 공격하는 남성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분노와 광기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지죠. 오늘 확실하게 처단하겠다는 듯, 확신에 찬 몸짓도 인상적입니다.
성 마태오의 순교 확대본
무엇보다도 이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건, 주변의 군중입니다. 두려움, 경악의 감정이 뒤섞인 군중의 모습은 현장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를 실감하게 하죠. 놀라서 절규하는 표정과 상황 파악을 위해 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들. 겁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 등 찰나에 드러나는 감정을 카라바조는 매우 능숙하게 그려냈습니다.
한편, 이런 난리 통 속 군중 뒤쪽엔 무심하게 상황을 바라보는 인물도 있는데요. 이건 카라바조가 본인 자화상을 서명처럼 그려 넣은 겁니다. 혼란의 상황을 관조하듯 바라보는 작가의 표정은 너무 무심해서 오히려 눈에 띕니다. 온통 놀라운 감정만 그려냈다면 이 작품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을 테지만, 카라바조는 본인 실력을 내내 뽐내기보다 밸런스를 맞출 줄도 알았던 작가였던 것 같습니다. 능숙한 완급조절 덕에, 관객도 이 사건 현장에 함께하는 듯 몰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죠.
Caravaggio, The Martyrdom of Saint Matthew, 1599–1600 ⓒ San Luigi dei Francesi, Rome
연극을 보는 듯 생생한 인물의 표정은 기존 종교화와 다른 매력을 뿜어냈습니다. 그간 종교화는 웃음이나 놀람 같은 순간적인 감정은 ‘성숙하지 않다’며 배제하곤 했어요. 물론, 그림으로 그려내기에 너무 짧게 드러나는 표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황홀경의 성 프란체스코> 등 작품에서 ‘현실적인 인물’을 그려낸 것이 관객에게 통한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성 마태오의 순교>에서는 ‘현실적인 감정’을 포착하며 자신만의 차별화 포인트를 한 차원 더 발전시키기로 합니다.
이 전략은 다른 예술가들이 쉽게 훔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의 표정을 포착할 수 있는 관찰력과, 이를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실력이 모두 있어야 했기 때문이죠. 카라바조는 스케치도 좀처럼 하지 않았던 작가이지만, <성 마태오의 순교>는 X선 촬영 결과 초안이 여러 번 수정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기록에 따르면 몇 달이나 마감기한을 넘겨서 완성했다고도 전해지고요. 이전까지 카라바조가 작업을 빠르게 쳐내듯 완성했던 걸 고려하면, 이 작품을 통해서는 노력과 고뇌를 담아냈다는 걸 알 수 있죠. 작품은 ‘명암의 대가가 자신만의 기술을 통해 이야기의 본질을 강조했다'라며 극찬하는 의견과, ‘공연한 소란이다!’라는 부정적 의견을 모두 끌어냈어요.
Caravaggio, The Calling of Saint Matthew, 1599–1600 ⓒ Contarelli Chapel, San Luigi dei Francesi, Rome
몇 달 후 나란히 걸리게 된 <성 마태의 소명(1599-1600)>은 더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미하는 ‘소명'은 종교화에서 매우 신성하게 그려져 온 소재예요. 하지만 카라바조는 이 성스러운 순간을 선술집이나, 도박꾼의 소굴처럼 묘사했습니다. 실제로 작품 왼쪽 아래엔 동전 놀이를 하는 인물들도 보이죠. 소명을 상징하는 빛은 오른쪽 위 창문에서 내려오지만, 신성함은 없고 그저 일상 속 평범한 순간처럼 묘사되었어요.
만약 이 작품의 제목이 <동전 놀이>거나 <선술집>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이상한 점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제목이 아니라면 그림은 종교화인지 알기조차 어려운 정도로 일상적인 순간을 담았기 때문이죠. 그간 종교화에 일상적인 얼굴, 일상적인 표정을 그려왔던 카라바조가 이제는 종교적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을 아예 일상적인 순간으로 연출한 겁니다. 이 시도 역시 파격적이었습니다.
<성 마태의 소명>이 완성된 후, ‘교회에 걸리기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교회 측은 만족했습니다. 흔한 주제를 신선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 트렌디하게 느껴진 덕분이죠. 표현기법이나 묘사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고요. 단연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그림이었습니다.
Caravaggio, Saint Matthew and the Angel, 1602 (1945년 훼손)
이에 자신감을 얻은 카라바조는 더욱 파격적인 시도를 하기로 해요. 콘타렐리 예배당에서 추가로 의뢰한 그림, <성 마태오와 천사(1602)>를 그린 겁니다. 이 그림은 성인이 더러운 발과 다리를 드러내고, 덥수룩한 수염이 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요. 둔탁한 팔과 다리, 벗겨진 머리는 성인이라기보다는 평범한 농부와 같아 보이죠. 마태오는 천사의 말을 집중해서 들으며 복음을 쓰고 있습니다. 천사는 신성한 존재이지만, 마태오와 몸을 맞댄 채 가까이에 붙어 이야기를 전하고 있어요. 다정하고 친근하면서도, 묘하게 관능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이 묘한 느낌은 당시 사람들도 똑같이 느꼈습니다. 천사를 보고는 ‘천박해 보인다'라고 비난했고, 성 마태에 대해선 ‘멍청하고 어눌해 보인다'라고 평가했죠.
하지만 카라바조는 이게 진실한 예술이라고 봤어요. ‘천사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상상일 뿐, 우리는 모두 천사가 어떤 모습인지 모르고, 천사를 마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그간 종교화에 일상적인 요소를 몇 스푼 첨가해왔다면, 이제는 풍속화에 종교를 몇 스푼 곁들인 느낌이었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죠. 결국 이 그림은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예배당으로부터 거절당합니다. 카라바조는 결국 좀 더 ‘종교화스러운' 그림으로 다시 그려야 했죠.
Caravaggio, The Inspiration of Saint Matthew, 1602 ⓒ San Luigi dei Francesi, Rome
같은 해 카라바조는 <성 마태오의 영감(1602)>를 다시 그려 제출했는데, 여기서도 마태오는 대머리에 맨발로 등장하지만 조금 더 성스럽게 연출한 모습입니다. 옷도 훨씬 근사해졌고, 머리엔 후광이 더해졌으며, 수염은 잘 정돈된 모습이죠. 천사를 바라보는 눈빛도 총명합니다. 천사 역시 마태오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이야기를 전하면서 친근한 느낌은 더 이상 자아내지 않고 있죠. 전보다 많이 성스러워졌지만 여전히 비난은 있었습니다. 천사가 마치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것 같다거나, 곡예사 같다 평가했죠. 여전히 그림 속 마태오를 추레하게 보는 이들도 많았고요.
카라바조는 본인 그림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성스럽기만 한 종교화가 아닌 우리네 일상에서 종교적 사건을 바라보게 만들면서, 가장 진실한 예술을 선보인다 믿었죠. 카라바조의 작품은 확실히 기존 그림과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른 나이에 교회의 의뢰를 받아 작업할 수 있었던 거기도 하고요.
Caravaggio, Medusa, 1597-1598 ⓒ Uffizi Gallery
하지만 <성 마태오와 천사> 거절 사건 이후, 카라바조는 크게 상심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무명화가 시절로 돌아간 듯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죠. 어느 날 밤엔 로마 뒷골목에서 술에 잔뜩 취한 채 시간을 보내다, 이탈리아 수도사였던 지롤라모 스팜파와 말싸움이 붙었는데요. 스팜파는 카라바조의 그림을 비난했고, 이런 비난에 이골이 나 있던 카라바조는 늘 지니고 다니던 단검으로 그를 찔렀습니다. 이 일로 잠시 투옥되었지만, 후원자들이 뒤를 봐준 덕에 금세 풀려날 수 있었어요.
사회로 나온 직후 카라바조는 동료 화가들을 비난하는 시를 써서 뿌립니다. 그리고 동료 화가들에게 고소당해요.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동시대 예술가들과 다른 관점으로 작품을 선보이며 빠르게 성공한 카라바조는, 의아할 만큼 동료들이 많이 비난했던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문서로 남은 것만 수십 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방대하죠. 그것이 질투였는지, 혹은 정말 카라바조 인성의 문제였는지는 추측의 영역으로 남아있습니다. 확실한 건 당시 사회에서 카라바조는 ‘인성 문제가 있는 화가', 혹은 ‘스캔들 메이커'로 낙인이 찍혀있었다는 거예요.
화가로서의 명성만큼 높았던 불량배로서의 악명
Caravaggio, Madonna with the Serpent, 1606 ⓒ Galleria Borghese
자신에 대한 비난에 전면 대응하는 호전적인 예술가, 카라바조는 결국 본인의 화를 못 이겨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적도 있습니다. 그의 작품이 워낙 논쟁적이었기 때문에, 카라바조의 명성이 높아져가는 만큼 ‘팬덤’과 ‘헤이 터’도 나란히 늘었는데요. 그의 팬덤 중에는 이탈리아의 추기경이자 예술품 컬렉터인 스키피오네 보르게세도 있었습니다. 그는 삼촌인 교황 파울루스 5세를 설득해, 카라바조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장식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도와줘요. 못마땅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주교는 이를 받아들였죠.
카라바조에게 찾아온 두 번째 일생일대의 기회였습니다. 그렇게 카라바조는 며칠 만에 <마부회의 성모(1604-1605)>를 그려냈어요.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일상적인 맥락으로 종교화를 그려내던 그의 방식이 선을 넘어버린 것이죠. 작품 오른쪽의 성 안나는 집시 노파처럼 그렸고, 성모 마리아는 빨래하는 아낙네처럼 치마를 걷어 올린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아기 예수는 초등학생 정도로 컸지만, 방금 태어난 것처럼 벌거벗고 있죠.
성 베드로 대성당 주교들은 이 그림을 거절했습니다. 한 추기경의 비서는 “사람들은 이 작품을 두고, 그림은 그릴 줄 알지만 오랫동안 하느님을 멀리하고 경배하지 않아 선한 생각을 할 수 없는, 정신이 혼탁해진 화가가 그린 그림이라고 말했다"라고 기록했죠.
Caravaggio, Judith Beheading Holofernes, 1599–1602 ⓒ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카라바조는 이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성 마태오와 천사>를 거절당한 트라우마 때문에, 두 번째 거절은 더 큰 고통으로 다가왔던 겁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카라바조는 술에 취해 또 한 번 범죄를 저질러요. 그간 뒷골목에서 싸움을 벌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범죄였습니다. 살인이었죠.
1606년 5월 29일, 카라바조는 라노초 톰마소니라는 청년과 모종의 이유로 결투를 벌이는데요. 분노를 참지 못한 카라바조는 단검으로 톰마소니를 찌릅니다. 톰마소니는 사망했고, 카라바조는 도망쳤어요. 부유한 집안이었던 톰마소니 가문은 카라바조를 살인범으로 고소했고, 로마 법원은 카라바조에게 참수형을 선고했습니다. 카라바조는 도망쳤지만, 그를 발견한 경찰이라면 누구든 참수형을 별도 보고 없이 집행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두려워진 카라바조는 후원자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렸습니다. 하지만 후원자들의 반응은 냉담했어요. 이미 수차례 그를 감옥에서 꺼내줬던 탓에 넌더리가 난 거죠. 몇몇 후원자들은 휴가 중이거나 병중이란 답장을 보냈고, 답이 아예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결국 카라바조는 한밤중 변장을 하고 도망치기로 해요. 1606년 6월, 카라바조가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 되어 있을 때의 일입니다.
Caravaggio,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1600-1601 ⓒ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사형선고를 받고 도망치던 와중에도 카라바조는 그림을 그려냅니다. 참수형이라는 공포에 질려있던 탓인지, 그 심리를 반영한 그림을 다수 그렸죠.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1605-1606)>입니다. 그림 속 다윗은 당당한 표정으로 골리앗의 참수된 머리를 들고 있어요. 한편 골리앗의 얼굴은 참담해요. 싸늘한 표정의 얼굴에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죠. 섬찟하게도 카라바조는 골리앗을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해 그렸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느끼고 있던 두려움을 표출했죠.
종교화를 현실과 가깝게 풀어내던 시도가, 이제는 현실에서 자신이 처한 이야기를 담아낼 정도로 첨예해진 겁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 역시 종교화에서 자주 다뤄지던 소재이지만, 카라바조는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더하면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강조했어요. 이건 도피를 이어가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그림은 점점 더 죽음을 암시하는 뉘앙스를 강하게 띠게 되었죠. 종교화의 성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고, 그가 현실에서 느끼는 공포감만을 담아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Caravaggio,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1609–1610 ⓒ Galleria Borghese, Rome
카라바조는 살인자로 수배당하며 도피생활을 이어가던 4년간, 평생 남긴 작품의 약 30%에 달하는 33점의 그림을 그린 걸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 그린 그림은 대부분 카라바조의 심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요. 대다수 그림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죠. 손을 등 뒤로 묶인 채 참수당하는 남자를 그린 <세례자 요한의 참수(1608)>, 병색이 완연해 죽음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의 <세례자 요한(1609-1610년 경)>, 화살이 막 가슴에 박힌 순간을 포착한 <성녀 우르술라의 순교(1610)>가 그 예죠.
이 시기 그려진 그림은 어떤 작품보다 죽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낸 그림은 1610년 작품,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이에요. 이 그림 역시 참수당한 골리앗의 얼굴은 본인을 모델로 합니다. 막 살인자로 쫓기기 시작했던 1604년 작품과 차이가 있다면, 다윗의 표정에 안쓰러움이 담겨있다는 거예요.
이 그림은 당시 교황의 조카이자 예술 애호가였던 스키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에게 바치기 위해 그린 걸로 추정됩니다. 목이 잘려 죽게 될 위기에 처한 자신을 도와달라 애원하는 거죠. 이제 종교화는 형식으로만 활용하고, 온전히 본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아 연출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Caravaggio, The Beheading of Saint John, 1608 ⓒ Saint John's Co-Cathedral, Valletta, Malta
심지어 자신의 사면을 요청하기 위해 그렸다는 점도 매우 전략적입니다. 그림을 통해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느낄지, 철저히 계산하고 그려낸 거죠. 그 애절함이 통했던 것인지, 카라바조는 사면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아주 좋은 소식이었지만, 카라바조에겐 안 좋은 소식도 있었습니다. 결국 로마에 도착할 수 없었다는 것이죠. 카라바조는 로마로 향하던 중,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1610년 8월, 로마에 카라바조의 죽음이 공표됩니다. 해변에서 그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소식이 전해졌죠.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불분명해요. 로마로 향하는 배에서 내리는 순간 체포당했고, 보석금을 내느라 가진 돈을 모두 써버려 굶주림 때문에 지쳐 죽었을 거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다른 추정으로는 부랑자들에게 피습당했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었지만, 이미 카라바조의 화가로서 명성은 높아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로마의 다양한 소식지는 앞다투어 카라바조의 사망 소식을 전했죠.
그를 수식하는 말은 다양했습니다.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어린 나이에 스타 예술가가 된 카라바조. 종교가 예술에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던 시절, 신성모독의 경계를 넘나들 정도로 파격적인 연출을 보여준 화가. 불같은 성격에 싸움을 일삼다 살인을 저질러 말년을 도망자로 살았던 문제아. 18년간 94점의 그림을 그린 카라바조는 39살의 나이에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Caravaggio, Death of the Virgin, 1601–1606 ⓒ Louvre, Paris
카라바조는 종교화라는 오랜 전통을 지닌 미술 장르를 일상적인 맥락으로 풀어냈습니다. 이건 결코 쉽지 않은 시도였어요. 종교화의 구매자는 대부분 강력한 권력을 지닌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원하는 작품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있었고, 이건 카라바조가 그려낸 일상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대신 이 시도는 카라바조의 추종자를 만들어냈어요. 종교화가 핫한 대화거리였던 시대, 이입의 여지가 큰 일상적인 느낌의 종교화는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죠.
하지만 그들은 카라바조에게 돈 주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동료 화가들은 그의 작품을 비웃었지만, 카라바조는 타고난 천성으로 그들과 맞서며 자신의 예술을 이어나가요. 때로는 폭력과 살인까지 저지를 정도로 호전적이었죠. 그 불같은 성격 탓에 수많은 범죄를 저지르며 작품까지 평가 절하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격이 있었기에 동료는 물론 교회가 외면할 때에도 자신만의 예술을 밀고 나갈 수 있었죠.
Caravaggio, Narcissus, 1600 ⓒ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후에는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종교화를 통해 풀어내는 시도까지 선보이며, 진정 자신의 예술을 독보적 위치에 올려놓은 예술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가 만든 시스템을 자신의 방식으로 다뤄낸 예술가, 카라바조의 작품은 사회 규범 안에서 예술가가 선보일 수 있는 브랜딩 전략을 보여줍니다.
함께 보면 좋을 콘텐츠
► 곧 예술의전당에서 펼쳐질 카라바조 전시회 정보 (인터파크 티켓)
► [미술 담론] 예술가가 저지른 범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 리즈 13인: 예술이 된 사기, 해프닝이라는 예술 장르에 대하여
카라바조를 수식하는 말은 정말 많습니다. ‘빛과 어둠의 화가’, ‘악마가 내린 재능을 가진 예술가', ‘바로크 양식의 선구자' 등 다양하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카라바조는 자신의 ‘천성’을 브랜딩에 적극 활용한 작가입니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고, 그 시선이 매력적이었던 덕분에 예술가로서 주목받을 수 있었죠.
하지만 카라바조의 삐딱한 시선은 태도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가 남긴 명작의 수만큼, 불미스러운 사건을 담은 법정 기록이 그의 인생을 가득 채웠죠. 두 번의 살인 혐의와 한 번의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이자, 전과 7범의 범죄자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이라면, 나락을 가고 세상에 없는 존재로 치부됐을 겁니다. 당시에도 카라바조의 범죄 이력에 가려 그의 예술작품이 평가절하되곤 했죠. 20세기에 접어들어서야 카라바조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카라바조의 이 ‘천성’은 그의 작품만이 가진 독특한 브랜딩 요소로 작용합니다.
미켈란젤로를 버리고, 카라바조로 출발하다
Caravaggio, Basket of Fruit, 1595–1596 ⓒ Pinacoteca Ambrosiana, Milan
카라바조에 대한 기록은 부풀려지고 과장된 것이 많습니다. 최초로 카라바조의 전기를 쓴 화가, 조반니 발리오네는 그를 미워해 기록을 제대로 관리하지도 않았으며, 동시대 미술가들은 카라바조와 철천지원수라도 된 듯 그를 비난하고 헐뜯는 글을 수도 없이 써 내려갔죠.
감정이 섞인 글들은 객관적 평가가 어렵지만, 카라바조에 대한 확실한 정보도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1571년, ‘카라바조’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죠. 당시 그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였어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빈치 지역의 레오나르도’라는 뜻을 지닌 것처럼, ‘카라바조 지역의 미켈란젤로 메리시'라는 의미의 이름이죠. 하지만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본명을 버리고 ‘카라바조’라고 불리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로는 다양한 추정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것은 르네상스의 대가, 미켈란젤로 때문이라는 설이 있어요. 카라바조는 미켈란젤로가 사망 7년 뒤에 태어났는데요. 미술계엔 여전히 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별화를 위해 출신지인 카라바조를 이름처럼 사용한 것이죠. 당시 예술가들은 자신의 출신지나 본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별칭을 종종 사용하기도 했기 때문에 문제 될 건 없었습니다.
Caravaggio, The Musicians, 1595–1596 ⓒ Metropolitan Museum of Art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을 버리고 카라바조로 출발한 것. 이건 카라바조 브랜딩의 첫 번째 스텝이었어요. 카라바조가 활동하던 로마는 여전히 르네상스 대가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금씩 새로운 장르가 태동하는 듯했지만,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그림도 많이 그려졌죠. 잘 팔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 이탈리아 최고의 거장으로 꼽히는 미켈란젤로와 동명으로 활동하는 건, 카라바조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됐을 겁니다. 그렇게 이름으로 차별화 포인트를 만든 이후, 카라바조는 자신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그림을 그리기로 합니다.
카라바조는 13살 때부터 17살 때까지 약 4년간, 밀라노의 화실에서 도제식으로 미술을 배웠어요. 이후 후원자를 찾아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려고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후원자들은 카라바조가 가진 가능성에 투자하기보다, 이미 잘 알려진 거장들 화풍의 그림을 비슷하게 그려주길 바랐죠. 카라바조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일을 했어야 했고요. 이런 상황이 반복되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면 거리로 나가 못된 짓을 일삼았습니다. 경찰을 약 올리거나, 매춘부들과 어울리거나, 술에 취해 시민에게 시비를 거는 등 다양했어요.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의 일입니다.
Caravaggio, Saint Francis of Assisi in Ecstasy, 1595 ⓒ Wadsworth Atheneum
노는 게 제일 좋았던 어린 화가 지망생, 미켈란젤로 메리시가 ‘카라바조'가 된 계기는 <황홀경의 성 프란체스코(1595)> 작품을 기점으로 해요. 놀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카라바조는 도제 교육을 받으며 알게 된 부호 중, 자신에게 가장 호의적이던 발랑탱을 찾아갑니다. 발랑탱은 유의미한 조언을 해주었어요. 돈이 필요한 거라면, 주문이 많은 종교화를 그리라고 말했죠. 당시 카라바조는 풍속화를 그리곤 해서 달가워하진 않았지만, 이후 그린 그림이 계속 팔리지 않자 발랑탱의 말을 듣기로 합니다.
그렇게 카라바조는 자신의 첫 종교화 <황홀경의 성 프란체스코(1595)>를 그려내요. 그림은 어두운 밤, 기절한 성 프란체스코를 부드럽게 안고 있는 천사를 담고 있습니다. 종교화에서 자주 그려지던 주제였지만, 카라바조는 통속적인 전통화와 다른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기로 해요. 우선 시간을 밤으로 설정해, 칠흑 같은 어두움을 그려냈습니다. 종교화에서 어두움은 세속을 상징하고, 빛은 성스러움을 의미해요. 그런데도 과감하게 작품 왼편을 어둡게 묘사한 건 매우 파격적이었습니다. 당시 몇몇 화가들은 르네상스의 전통에 저항하며 어둠을 과감하게 활용하는 시도를 하고 있었는데요. 도제교육을 받은 카라바조 역시 이 흐름에 영향받긴 했습니다.
황홀경의 성 프란체스코 확대본
하지만 카라바조는 이렇게만 해선 남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걸 잘 알았어요. 그래서 카라바조는 자신만의 장치를 하나 더 더합니다. 종교화는 성스럽다는 공식을 깨고, 매우 현실적인 연출을 더한 것이죠. 프란체스코의 얼굴은 성인이라기보다 흔한 동네 아저씨 같은 모습입니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났고 머리칼은 푸석하죠. 하지만 이 덕분에 작품의 몰입감은 높아집니다. 성스럽고 아름다운 모습보다는 일상적인 것들에 이입하기 쉽기 때문이죠. 그래서 카라바조는 언뜻 아름답지 않아 보일 수 있는 것도 그대로 그려버립니다. 이것이 곧 진실한 ‘예술’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실력 없는 예술가가 전통을 깨는 시도를 하면 객기로 치부되기 쉽지만, 카라바조에겐 탄탄한 그림 실력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그의 그림 속 새로운 요소는 신선한 시도로 여겨졌어요. 동시대 다른 화가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차별점을 구축하면서, 로마의 큰손 수집가들은 카라바조에 관심 갖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카라바조는 ‘카라바조'라는 이름을 로마 예술계에 알리기 시작했죠.
종교에 저항하여 종교화의 대가가 되다
Caravaggio, The Martyrdom of Saint Matthew, 1599–1600 ⓒ San Luigi dei Francesi, Rome
덕분에 카라바조의 전성기는 빠르게 찾아옵니다. 스물여덟 살이 되던 1599년, 카라바조는 로마에 새로 지어질 콘타렐리 예배당에 놓일 그림 2점의 의뢰를 받아요. 원래는 로마의 인기 화가, 주세페 페라리에게 의뢰가 갈 예정이었지만, 그가 이미 너무 많은 작품을 진행 중이었던 탓에 떠오르는 신예인 카라바조에게 일이 넘어갔던 겁니다.
이건 카라바조가 주요한 교회에게서 받은 첫 번째 의뢰였고, 그의 예술가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될만한 중요한 의뢰였어요. 당시 사람들 사이 가장 화두가 되는 주제는 ‘예배당에 걸린 그림'이었기 때문이죠. 새로운 종교화가 공개되는 날이면, 오늘날 오픈런 하듯 교회 앞에 몇 시간씩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특히나 콘타렐리 예배당은 매우 큰 교회였고, 새로 지어지는 교회였기에 더더욱 이목을 끌고 있었고요. 카라바조는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려냅니다. 이윽고 공개된 두 점의 그림은 엄청난 화제에 오르게 돼요. 이번에도 기존 종교화와는 다른, 카라바조만의 장치가 들어있던 덕분이죠.
성 마태오의 순교 확대본
먼저 공개된 <성 마태오의 순교(1599-1600)>는 피습의 현장을 포착해 그려냈습니다. 마태오가 기도를 드리던 중, 공격당해 바닥에 쓰러지는 찰나의 모습을 사진 찍듯 포착했죠. 주목할 만한 건 인물들의 표정입니다. 긴박한 순간 짓게 되는 표정은 아주 빠르게 스쳐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감정이 담겨있어, 모델을 둔다 하더라도 그림에 표현하긴 쉽지 않죠. 하지만 카라바조는 아주 능숙하게 해냅니다.
바닥에 쓰러져 공격을 막는 중인 마태오는 너무 놀라 오히려 어떤 표정도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손을 뻗어 막으면서 상대방을 바라보는데, 그 몇 초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긴박감이 느껴지죠. 마태오를 공격하는 남성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분노와 광기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지죠. 오늘 확실하게 처단하겠다는 듯, 확신에 찬 몸짓도 인상적입니다.
성 마태오의 순교 확대본
무엇보다도 이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건, 주변의 군중입니다. 두려움, 경악의 감정이 뒤섞인 군중의 모습은 현장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를 실감하게 하죠. 놀라서 절규하는 표정과 상황 파악을 위해 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들. 겁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 등 찰나에 드러나는 감정을 카라바조는 매우 능숙하게 그려냈습니다.
한편, 이런 난리 통 속 군중 뒤쪽엔 무심하게 상황을 바라보는 인물도 있는데요. 이건 카라바조가 본인 자화상을 서명처럼 그려 넣은 겁니다. 혼란의 상황을 관조하듯 바라보는 작가의 표정은 너무 무심해서 오히려 눈에 띕니다. 온통 놀라운 감정만 그려냈다면 이 작품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을 테지만, 카라바조는 본인 실력을 내내 뽐내기보다 밸런스를 맞출 줄도 알았던 작가였던 것 같습니다. 능숙한 완급조절 덕에, 관객도 이 사건 현장에 함께하는 듯 몰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죠.
Caravaggio, The Martyrdom of Saint Matthew, 1599–1600 ⓒ San Luigi dei Francesi, Rome
연극을 보는 듯 생생한 인물의 표정은 기존 종교화와 다른 매력을 뿜어냈습니다. 그간 종교화는 웃음이나 놀람 같은 순간적인 감정은 ‘성숙하지 않다’며 배제하곤 했어요. 물론, 그림으로 그려내기에 너무 짧게 드러나는 표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황홀경의 성 프란체스코> 등 작품에서 ‘현실적인 인물’을 그려낸 것이 관객에게 통한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성 마태오의 순교>에서는 ‘현실적인 감정’을 포착하며 자신만의 차별화 포인트를 한 차원 더 발전시키기로 합니다.
이 전략은 다른 예술가들이 쉽게 훔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의 표정을 포착할 수 있는 관찰력과, 이를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실력이 모두 있어야 했기 때문이죠. 카라바조는 스케치도 좀처럼 하지 않았던 작가이지만, <성 마태오의 순교>는 X선 촬영 결과 초안이 여러 번 수정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기록에 따르면 몇 달이나 마감기한을 넘겨서 완성했다고도 전해지고요. 이전까지 카라바조가 작업을 빠르게 쳐내듯 완성했던 걸 고려하면, 이 작품을 통해서는 노력과 고뇌를 담아냈다는 걸 알 수 있죠. 작품은 ‘명암의 대가가 자신만의 기술을 통해 이야기의 본질을 강조했다'라며 극찬하는 의견과, ‘공연한 소란이다!’라는 부정적 의견을 모두 끌어냈어요.
Caravaggio, The Calling of Saint Matthew, 1599–1600 ⓒ Contarelli Chapel, San Luigi dei Francesi, Rome
몇 달 후 나란히 걸리게 된 <성 마태의 소명(1599-1600)>은 더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미하는 ‘소명'은 종교화에서 매우 신성하게 그려져 온 소재예요. 하지만 카라바조는 이 성스러운 순간을 선술집이나, 도박꾼의 소굴처럼 묘사했습니다. 실제로 작품 왼쪽 아래엔 동전 놀이를 하는 인물들도 보이죠. 소명을 상징하는 빛은 오른쪽 위 창문에서 내려오지만, 신성함은 없고 그저 일상 속 평범한 순간처럼 묘사되었어요.
만약 이 작품의 제목이 <동전 놀이>거나 <선술집>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이상한 점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제목이 아니라면 그림은 종교화인지 알기조차 어려운 정도로 일상적인 순간을 담았기 때문이죠. 그간 종교화에 일상적인 얼굴, 일상적인 표정을 그려왔던 카라바조가 이제는 종교적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을 아예 일상적인 순간으로 연출한 겁니다. 이 시도 역시 파격적이었습니다.
<성 마태의 소명>이 완성된 후, ‘교회에 걸리기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교회 측은 만족했습니다. 흔한 주제를 신선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 트렌디하게 느껴진 덕분이죠. 표현기법이나 묘사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고요. 단연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그림이었습니다.
Caravaggio, Saint Matthew and the Angel, 1602 (1945년 훼손)
이에 자신감을 얻은 카라바조는 더욱 파격적인 시도를 하기로 해요. 콘타렐리 예배당에서 추가로 의뢰한 그림, <성 마태오와 천사(1602)>를 그린 겁니다. 이 그림은 성인이 더러운 발과 다리를 드러내고, 덥수룩한 수염이 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요. 둔탁한 팔과 다리, 벗겨진 머리는 성인이라기보다는 평범한 농부와 같아 보이죠. 마태오는 천사의 말을 집중해서 들으며 복음을 쓰고 있습니다. 천사는 신성한 존재이지만, 마태오와 몸을 맞댄 채 가까이에 붙어 이야기를 전하고 있어요. 다정하고 친근하면서도, 묘하게 관능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이 묘한 느낌은 당시 사람들도 똑같이 느꼈습니다. 천사를 보고는 ‘천박해 보인다'라고 비난했고, 성 마태에 대해선 ‘멍청하고 어눌해 보인다'라고 평가했죠.
하지만 카라바조는 이게 진실한 예술이라고 봤어요. ‘천사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상상일 뿐, 우리는 모두 천사가 어떤 모습인지 모르고, 천사를 마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그간 종교화에 일상적인 요소를 몇 스푼 첨가해왔다면, 이제는 풍속화에 종교를 몇 스푼 곁들인 느낌이었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죠. 결국 이 그림은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예배당으로부터 거절당합니다. 카라바조는 결국 좀 더 ‘종교화스러운' 그림으로 다시 그려야 했죠.
Caravaggio, The Inspiration of Saint Matthew, 1602 ⓒ San Luigi dei Francesi, Rome
같은 해 카라바조는 <성 마태오의 영감(1602)>를 다시 그려 제출했는데, 여기서도 마태오는 대머리에 맨발로 등장하지만 조금 더 성스럽게 연출한 모습입니다. 옷도 훨씬 근사해졌고, 머리엔 후광이 더해졌으며, 수염은 잘 정돈된 모습이죠. 천사를 바라보는 눈빛도 총명합니다. 천사 역시 마태오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이야기를 전하면서 친근한 느낌은 더 이상 자아내지 않고 있죠. 전보다 많이 성스러워졌지만 여전히 비난은 있었습니다. 천사가 마치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것 같다거나, 곡예사 같다 평가했죠. 여전히 그림 속 마태오를 추레하게 보는 이들도 많았고요.
카라바조는 본인 그림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성스럽기만 한 종교화가 아닌 우리네 일상에서 종교적 사건을 바라보게 만들면서, 가장 진실한 예술을 선보인다 믿었죠. 카라바조의 작품은 확실히 기존 그림과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른 나이에 교회의 의뢰를 받아 작업할 수 있었던 거기도 하고요.
Caravaggio, Medusa, 1597-1598 ⓒ Uffizi Gallery
하지만 <성 마태오와 천사> 거절 사건 이후, 카라바조는 크게 상심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무명화가 시절로 돌아간 듯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죠. 어느 날 밤엔 로마 뒷골목에서 술에 잔뜩 취한 채 시간을 보내다, 이탈리아 수도사였던 지롤라모 스팜파와 말싸움이 붙었는데요. 스팜파는 카라바조의 그림을 비난했고, 이런 비난에 이골이 나 있던 카라바조는 늘 지니고 다니던 단검으로 그를 찔렀습니다. 이 일로 잠시 투옥되었지만, 후원자들이 뒤를 봐준 덕에 금세 풀려날 수 있었어요.
사회로 나온 직후 카라바조는 동료 화가들을 비난하는 시를 써서 뿌립니다. 그리고 동료 화가들에게 고소당해요.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동시대 예술가들과 다른 관점으로 작품을 선보이며 빠르게 성공한 카라바조는, 의아할 만큼 동료들이 많이 비난했던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문서로 남은 것만 수십 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방대하죠. 그것이 질투였는지, 혹은 정말 카라바조 인성의 문제였는지는 추측의 영역으로 남아있습니다. 확실한 건 당시 사회에서 카라바조는 ‘인성 문제가 있는 화가', 혹은 ‘스캔들 메이커'로 낙인이 찍혀있었다는 거예요.
화가로서의 명성만큼 높았던 불량배로서의 악명
Caravaggio, Madonna with the Serpent, 1606 ⓒ Galleria Borghese
자신에 대한 비난에 전면 대응하는 호전적인 예술가, 카라바조는 결국 본인의 화를 못 이겨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적도 있습니다. 그의 작품이 워낙 논쟁적이었기 때문에, 카라바조의 명성이 높아져가는 만큼 ‘팬덤’과 ‘헤이 터’도 나란히 늘었는데요. 그의 팬덤 중에는 이탈리아의 추기경이자 예술품 컬렉터인 스키피오네 보르게세도 있었습니다. 그는 삼촌인 교황 파울루스 5세를 설득해, 카라바조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장식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도와줘요. 못마땅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주교는 이를 받아들였죠.
카라바조에게 찾아온 두 번째 일생일대의 기회였습니다. 그렇게 카라바조는 며칠 만에 <마부회의 성모(1604-1605)>를 그려냈어요.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일상적인 맥락으로 종교화를 그려내던 그의 방식이 선을 넘어버린 것이죠. 작품 오른쪽의 성 안나는 집시 노파처럼 그렸고, 성모 마리아는 빨래하는 아낙네처럼 치마를 걷어 올린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아기 예수는 초등학생 정도로 컸지만, 방금 태어난 것처럼 벌거벗고 있죠.
성 베드로 대성당 주교들은 이 그림을 거절했습니다. 한 추기경의 비서는 “사람들은 이 작품을 두고, 그림은 그릴 줄 알지만 오랫동안 하느님을 멀리하고 경배하지 않아 선한 생각을 할 수 없는, 정신이 혼탁해진 화가가 그린 그림이라고 말했다"라고 기록했죠.
Caravaggio, Judith Beheading Holofernes, 1599–1602 ⓒ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카라바조는 이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성 마태오와 천사>를 거절당한 트라우마 때문에, 두 번째 거절은 더 큰 고통으로 다가왔던 겁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카라바조는 술에 취해 또 한 번 범죄를 저질러요. 그간 뒷골목에서 싸움을 벌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범죄였습니다. 살인이었죠.
1606년 5월 29일, 카라바조는 라노초 톰마소니라는 청년과 모종의 이유로 결투를 벌이는데요. 분노를 참지 못한 카라바조는 단검으로 톰마소니를 찌릅니다. 톰마소니는 사망했고, 카라바조는 도망쳤어요. 부유한 집안이었던 톰마소니 가문은 카라바조를 살인범으로 고소했고, 로마 법원은 카라바조에게 참수형을 선고했습니다. 카라바조는 도망쳤지만, 그를 발견한 경찰이라면 누구든 참수형을 별도 보고 없이 집행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두려워진 카라바조는 후원자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렸습니다. 하지만 후원자들의 반응은 냉담했어요. 이미 수차례 그를 감옥에서 꺼내줬던 탓에 넌더리가 난 거죠. 몇몇 후원자들은 휴가 중이거나 병중이란 답장을 보냈고, 답이 아예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결국 카라바조는 한밤중 변장을 하고 도망치기로 해요. 1606년 6월, 카라바조가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 되어 있을 때의 일입니다.
Caravaggio,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1600-1601 ⓒ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사형선고를 받고 도망치던 와중에도 카라바조는 그림을 그려냅니다. 참수형이라는 공포에 질려있던 탓인지, 그 심리를 반영한 그림을 다수 그렸죠.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1605-1606)>입니다. 그림 속 다윗은 당당한 표정으로 골리앗의 참수된 머리를 들고 있어요. 한편 골리앗의 얼굴은 참담해요. 싸늘한 표정의 얼굴에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죠. 섬찟하게도 카라바조는 골리앗을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해 그렸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느끼고 있던 두려움을 표출했죠.
종교화를 현실과 가깝게 풀어내던 시도가, 이제는 현실에서 자신이 처한 이야기를 담아낼 정도로 첨예해진 겁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 역시 종교화에서 자주 다뤄지던 소재이지만, 카라바조는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더하면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강조했어요. 이건 도피를 이어가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그림은 점점 더 죽음을 암시하는 뉘앙스를 강하게 띠게 되었죠. 종교화의 성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고, 그가 현실에서 느끼는 공포감만을 담아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Caravaggio,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1609–1610 ⓒ Galleria Borghese, Rome
카라바조는 살인자로 수배당하며 도피생활을 이어가던 4년간, 평생 남긴 작품의 약 30%에 달하는 33점의 그림을 그린 걸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 그린 그림은 대부분 카라바조의 심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요. 대다수 그림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죠. 손을 등 뒤로 묶인 채 참수당하는 남자를 그린 <세례자 요한의 참수(1608)>, 병색이 완연해 죽음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의 <세례자 요한(1609-1610년 경)>, 화살이 막 가슴에 박힌 순간을 포착한 <성녀 우르술라의 순교(1610)>가 그 예죠.
이 시기 그려진 그림은 어떤 작품보다 죽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낸 그림은 1610년 작품,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이에요. 이 그림 역시 참수당한 골리앗의 얼굴은 본인을 모델로 합니다. 막 살인자로 쫓기기 시작했던 1604년 작품과 차이가 있다면, 다윗의 표정에 안쓰러움이 담겨있다는 거예요.
이 그림은 당시 교황의 조카이자 예술 애호가였던 스키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에게 바치기 위해 그린 걸로 추정됩니다. 목이 잘려 죽게 될 위기에 처한 자신을 도와달라 애원하는 거죠. 이제 종교화는 형식으로만 활용하고, 온전히 본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아 연출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Caravaggio, The Beheading of Saint John, 1608 ⓒ Saint John's Co-Cathedral, Valletta, Malta
심지어 자신의 사면을 요청하기 위해 그렸다는 점도 매우 전략적입니다. 그림을 통해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느낄지, 철저히 계산하고 그려낸 거죠. 그 애절함이 통했던 것인지, 카라바조는 사면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아주 좋은 소식이었지만, 카라바조에겐 안 좋은 소식도 있었습니다. 결국 로마에 도착할 수 없었다는 것이죠. 카라바조는 로마로 향하던 중,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1610년 8월, 로마에 카라바조의 죽음이 공표됩니다. 해변에서 그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소식이 전해졌죠.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불분명해요. 로마로 향하는 배에서 내리는 순간 체포당했고, 보석금을 내느라 가진 돈을 모두 써버려 굶주림 때문에 지쳐 죽었을 거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다른 추정으로는 부랑자들에게 피습당했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었지만, 이미 카라바조의 화가로서 명성은 높아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로마의 다양한 소식지는 앞다투어 카라바조의 사망 소식을 전했죠.
그를 수식하는 말은 다양했습니다.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어린 나이에 스타 예술가가 된 카라바조. 종교가 예술에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던 시절, 신성모독의 경계를 넘나들 정도로 파격적인 연출을 보여준 화가. 불같은 성격에 싸움을 일삼다 살인을 저질러 말년을 도망자로 살았던 문제아. 18년간 94점의 그림을 그린 카라바조는 39살의 나이에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Caravaggio, Death of the Virgin, 1601–1606 ⓒ Louvre, Paris
카라바조는 종교화라는 오랜 전통을 지닌 미술 장르를 일상적인 맥락으로 풀어냈습니다. 이건 결코 쉽지 않은 시도였어요. 종교화의 구매자는 대부분 강력한 권력을 지닌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원하는 작품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있었고, 이건 카라바조가 그려낸 일상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대신 이 시도는 카라바조의 추종자를 만들어냈어요. 종교화가 핫한 대화거리였던 시대, 이입의 여지가 큰 일상적인 느낌의 종교화는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죠.
하지만 그들은 카라바조에게 돈 주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동료 화가들은 그의 작품을 비웃었지만, 카라바조는 타고난 천성으로 그들과 맞서며 자신의 예술을 이어나가요. 때로는 폭력과 살인까지 저지를 정도로 호전적이었죠. 그 불같은 성격 탓에 수많은 범죄를 저지르며 작품까지 평가 절하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격이 있었기에 동료는 물론 교회가 외면할 때에도 자신만의 예술을 밀고 나갈 수 있었죠.
Caravaggio, Narcissus, 1600 ⓒ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후에는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종교화를 통해 풀어내는 시도까지 선보이며, 진정 자신의 예술을 독보적 위치에 올려놓은 예술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가 만든 시스템을 자신의 방식으로 다뤄낸 예술가, 카라바조의 작품은 사회 규범 안에서 예술가가 선보일 수 있는 브랜딩 전략을 보여줍니다.
함께 보면 좋을 콘텐츠
► 곧 예술의전당에서 펼쳐질 카라바조 전시회 정보 (인터파크 티켓)
► [미술 담론] 예술가가 저지른 범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 리즈 13인: 예술이 된 사기, 해프닝이라는 예술 장르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