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미셸 바스키아: 서사 노동자가 선보인 시각 예술의 미학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 폴라로이드 사진과 작품

워홀이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 The Andy Warhol Foundation / 바스키아가 그린 그림 ‘Dos Cabezas(1982)’ Courtesy of Gagosian.


1982년 10월 4일, 앤디 워홀의 스튜디오. 스물두 살의 바스키아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우상 앤디 워홀을 만납니다. 즐겁게 대화를 나눈 후 워홀이 폴라로이드로 둘의 사진을 찍자, 바스키아는 곧장 자리를 떴어요. 그리고 정확히 두 시간 뒤, 물감이 채 마르지도 않은 캔버스를 들고 돌아왔죠. 작품을 본 워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질투가 났다. 그는 나보다 빠르다.”


바스키아는 10년이라는 짧은 활동 기간 동안 천 점이 넘는 회화와 3천 점이 넘는 드로잉을 남겼어요. 이렇게나 빠르게, 많은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던 건 바스키아만의 스토리텔링 화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Charles the First, 1982

Charles the First, 1982 © Museum of Fine Arts, Boston.


바스키아의 그림엔 다양한 상징들이 있습니다. 왕관과 기호,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자들, 만화책 속 효과들, 힙합 음악을 시각화한 듯한 다양한 샘플링과 오마주까지. 쓰여지고 지워져 누군가의 해독을 기다리는 듯한 글자들은 모두 다 바스키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바스키아의 작품은 예술가의 스토리텔링 방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아주 어렸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요. 


1967년, 7살의 바스키아 (가운데)

1967년, 7살의 바스키아 (가운데)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바스키아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언어적 능력을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어머니는 스페인어를 썼어요. 그리고 바스키아는 뉴욕에서 나고 자란 덕분에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알았죠. 


그리고 예술적 조예가 깊은 어머니 덕분에, 어린 나이부터 다양한 책을 접했습니다. 10살 때에는 만화책에 매료되어 혼자 만화를 그렸고, 11살 때에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원어로 읽었다고 하죠. 그의 삶엔 언제나 

언어와 글자, 그리고 이야기가 있었어요. 어린 바스키아의 꿈은 시인, 혹은 만화가가 되는 것이었는데요. 그리고 이런 예술가적 기질은 청소년기에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그라피티 작업 중인 바스키아

그라피티 작업 중인 바스키아 © DOWNTOWN 81

알 디아즈의 모습

알 디아즈의 모습 © Matthew A Eller 2018


1978년, 18살의 바스키아는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합니다. 그리고 집에서도 쫓겨났어요. 바스키아는 말 그대로 거리에 나앉았습니다. 뉴욕 거리에서 노숙 생활을 하면서, 공원 벤치, 버려진 박스를 침대 삼아 잠을 잤죠. 


바스키아는 거리의 방랑자가 아닌, 거리 예술가가 되기로 합니다. 같은 학교에 다녔던 낙서 화가 알 디아즈(Al Diaz, b.1959)와 함께 프로젝트 그룹 SAMO©를 결성했죠. 세이모는 “Same Old Shit"의 약자로 기존 예술계와 종교, 철학에 대한 조롱과 비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들은 훔친 스프레이와 크레용, 매직 마커로 철학적인 문구를 거리에 남겼어요.


이 시기 뉴욕은 가장 역동적인 도시였습니다. 당시 거리 예술로 유행하던 것은 그라피티였는데요. 스프레이를 활용해 화려한 그림과 글자를 새기는 그라피티와 달리, 이들은 아주 단순한 예술을 구사합니다.


세이모의 그라피티

세이모의 그라피티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종말로서의 세이모’, ‘사회화된 아방가르드를 위한 세이모’, ‘신의 대안으로서의 세이모’ 같이 철학적이고 선언적인 문구를 적어 나갔죠. 이들은 꽤 전략적이었어요. 이런 문구를 예술계 인사들이 자주 드나드는 소호 거리 곳곳에 새겼습니다. 그리고 저작권 기호를 이용해서, 예술 작품임을 암시했죠.


사람들은 의아해하기 시작했어요. 알려지지 않은 갱단이 새로 출현했다거나, 백인 개념 미술가들이 환각 상태에서 적은 거라거나, 종교적인 이야기일 것이라는 추정이 난무했죠.


세이모의 그라피티

세이모의 그라피티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이후, 바스키아와 알 디아즈는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엽서와 티셔츠를 제작해 팔면서, 세이모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죠. 이 엽서를 산 사람 중에는 당시 가장 잘나가던 예술가 앤디 워홀도 있었습니다.


거리의 노숙자이자 예술가였던 18살의 바스키아는 점점 유명해지고 있었어요. 활동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빌리지 보이스』에 세이모에 대한 기사가 실리며 처음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죠. 마침내 기회가 찾아온 듯했습니다.


세이모의 그라피티

세이모의 그라피티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바스키아는 이 순간을 고대해 왔지만, 파트너인 알 디아즈는 생각이 달랐어요. 거리의 예술가는 익명으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들은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공동 작업을 종료합니다. 뉴욕 거리 곳곳엔 

세이모 프로젝트가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문구가 새겨졌죠. 


협업은 끝났지만, 바스키아에게는 새로운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바스키아는 본격적으로 PR을 시작해요. 미스터 세이모라는 이름으로 TV 쇼에 출연하면서 얼굴을 알렸고, 단체전에 참가하며 예술가로서 행보를 밟아나갔죠.


타임스 스퀘어 쇼 전경

타임스 스퀘어 쇼 전경 Photo: Ted Stamm.


바스키아가 홀로서기를 한 첫 번째 전시는 ‘타임스 스퀘어 쇼(1980)’였어요. 이 전시는 기존 갤러리의 영향권을 벗어나, 새로운 예술을 선보이기 위해 기획됐습니다. 당시 갤러리와 미술관엔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 작품이 가득했어요. 하지만 뉴욕의 예술가들은 이런 작품이 이 도시의 불안감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예술을 시도하는 예술가 100여 명이 모였어요. 바스키아를 비롯해 키스 해링, 제니 홀저, 케니 샤프, 낸 골딘 등 유수한 작가들이 함께했죠. 건물 하나를 통째로 빌려 진행된 전시회에서 바스키아는 3층과 4층 벽을 할당받아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작업실의 바스키아

작업실의 바스키아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전시작은 세이모 때 선보인 것과는 달랐어요. 이전에는 텍스트만으로 사람들을 매료했다면, 이번엔 이미지도 함께 사용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그 모습은 바스키아가 생활하던 뉴욕 소호 거리를 쏙 빼닮은 모습이었습니다. 전시는 신선한 기획이라며 좋은 평가를 받았고, 그중에서도 가장 이목을 끈 작가로는 바스키아가 꼽혔습니다.


‘드 쿠닝과 그라피티의 조화’라거나, ‘사이 톰블리에 팝적인 감성을 가진 예술’ 같은 좋은 평가가 따랐죠. 하지만 바스키아는 드 쿠닝과 사이 톰블리가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바스키아가 참고했던 건 동료 현대미술 작가들이 아니라, 상징들을 모아둔 헨리 드레이퍼스의 <심볼 소스북>이나 르네상스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해부학 드로잉, 그리고 어린 시절 접한 해부학 책들이었죠.


바스키아는 그저 자기가 속한 세상과 자신을 둘러싼 요소들을 글과 그림으로 풀어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대부분 ‘자전적인 것’이었어요.


바스키아와 어머니

바스키아와 어머니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바스키아는 7살 때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팔이 부러지고 횡경막 아래쪽의 비장이 파열되는 큰 사고였죠. 바스키아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레이 해부학>을 선물합니다. 아들이 본인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어요.


8살 남자아이가 읽기엔 다소 어려운 책이었지만, 바스키아는 이 책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작품 활동을 시작하며, 어린 시절 책에서 본 해부학적 드로잉과 의학 용어를 작품에 그리고 새겨 넣었죠. 바스키아 작품 속 그림과 글자들은 그의 개성뿐만 아니라 그의 삶까지 풀어내고 있었는데요.


‘Versus Medici’, 1982

‘Versus Medici’, 1982 Courtesy of Sotheby's


삶과 죽음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듯한 그림은 당대 예술의 중심지이자, 범죄가 난무했던 혼란한 뉴욕 분위기를

잘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이후 바스키아에게 또 다른 전시 제안이 옵니다. ‘타임스퀘어 쇼’를 기획한 큐레이터, ‘디에고 코르테즈’가 캔버스 중심의 작업을 선보여달라고 요청한 건데요.


코르테즈는 바스키아가 가진 재능이 거리의 스토리텔러 정도로 그칠 게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캔버스라는 미술계 전통적인 형식 안에 바스키아 그림이 담기면, 예술가로서 바스키아가 더 잘 자리 잡을 수 있을 거라 보았죠.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여러 갤러리스트들이 바스키아 작품에 관심을 보였고 여권도, 신용카드도, 건강 보험증도 없던 바스키아는 갤러리와 계약하며 공식적인 예술가 행보를 걷기 시작하는데요. 지만 그 길이 탄탄대로였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안니나 노세이와 바스키아

안니나 노세이와 바스키아 Courtesy Annina Nosei Gallery


당시 바스키아는 이탈리아 갤러리스트, ‘안니나 노세이’가 지원해 준 작업실을 쓰고 있었어요. 그곳에서 그린 그림은 노세이가 판매했죠. 그런데 바스키아의 인기가 점점 많아지자, 노세이는 바스키아의 작품이 완성되기도 전에 판매해 버리곤 했습니다. 바스키아는 점차 노세이의 그림 그리는 기계로 전락했다고 느꼈어요.


실제로 한 언론에서는 바스키아를 ‘지하실에 처박힌 예술가’라 표현하기도 했고요. 이건 미술 시장에서 

수동적으로 이용 당하는 바스키아의 상황을 표현한 말이기도 했습니다. 바스키아는 본인이 백인 예술가였다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거라고 이야기했어요.


당시 미술계에는 분명히 인종차별이 존재했습니다. 바스키아의 그림을 구매하러 온 한 컬렉터는 흑인이 자주 먹는 음식으로 알려진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사 들고 와서, 바스키아에게 맛있게 먹으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죠.


바스키아 왕관 작품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찰리 파커, 마일스 데이비스, 무하마드 알리를 그린 바스키아의 그림

찰리 파커, 마일스 데이비스, 무하마드 알리를 그린 바스키아의 그림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바스키아는 이런 경험 역시 그림의 스토리텔링 요소로 녹여냅니다. 대신, 흑인을 약자가 아닌 강자로 그렸죠. 그의 작품을 보면, 사회에서 인정받은 다양한 흑인 영웅들을 그려낸 걸 볼 수 있어요. 재즈 뮤지션 찰리 파커,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 권투 선수 무하드 알리 등 다양하죠. 


바스키아는 그들의 이름을 글자로 새겨넣고 왕관 기호를 그려 넣으며 이들의 권위를 신성시했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세이모 때 보여준 것처럼, 텍스트도 작품에 적극 활용했어요. 노예제와 노예무역을 떠올리게 하는 TOBACCO, 화이트 워싱을 은유하는 SOAP 같은 단어를 넣어 흑인 예술가로서 겪었던 차별을 풀어냈죠.


바스키아는 자신을 ‘뉴욕의 영향을 받은 예술가’라고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나에겐 문화적 기억이 있다. 이걸 에둘러 찾을 필요도 없다. 그냥 존재한다. 그 기억은 아프리카에 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바스키아 작품에 아프리카 조각 두상의 모습으로 자주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이 역시 글자와 함께 표현하며 아프리카 문화의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죠.


바스키아 작품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바스키아는 작품에 이야기를 담을 때, 글과 그림을 모두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특유의 리듬감을 형성해요. 글과 그림은 각각 뇌에 인식될 때 시차가 발생하기 때문인데요. 그림 우위론에 따르면, 이미지는 불과 몇 나노 초 만에 즉각 해독됩니다. 하지만 문자 해독은 훨씬 복잡해요. 글자에서 단어, 그리고 맥락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시선이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죠.


바스키아는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이를 볼 수 있는 것이 ‘단어 지우기 기법’인데요. 바스키아는 사람들이 자신의 단어와 문장을 더 자세히 보게 하려고 일부러 단어를 쓰고, 선을 그어 지웠어요. ‘가려지면 더 읽고 싶어 진다’라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바스키아는 이렇게 이미지를 통해 관객의 눈을 열고, 텍스트를 이용해 그들의 생각을 확장했어요. 그림으로만 이루어진 작품보다 글로서 더 많은 사유를 끌어낸거죠.


장 미셸 바스키아의 노트북

장 미셸 바스키아의 노트북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이 때문인지 바스키아 역시 스스로를 ‘그림 그리는 작가’라기보다 ‘글 쓰는 작가’에 더 가깝게 여겼어요. 바스키아가 평생 남긴 8권의 노트엔 단어 목록이 가득했죠. 이 단어들은 모두 바스키아의 삶 속 이야기를 담고 있어, 그의 작품은 구상 시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바스키아를 인터뷰했던 베키 존스턴은 그의 작품이 ‘수수께끼 같고, 정치적이며, 시적이고, 또 재미있다’고 말했어요. 그 말처럼, 사람들은 바스키아가 만든 조형 언어를 보고, 읽고, 해석하며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그렇게 바스키아의 전성기가 시작돼요. 당대 뉴욕에서 가장 잘나가던 예술가, 앤디 워홀과 협업을 진행하고 당시 미술시장 붐을 이끌었던 ‘메리 분 갤러리’와도 계약했죠. 하지만 여전히 한편에선 바스키아를 앤디 워홀의 마스코트라 칭하며 깎아내리거나, 미술시장 버블에 수혜를 입은 알맹이 없는 작가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흑인 특유의 원시적인 느낌, 글자를 활용한 독특한 비주얼이 인기를 끌었을 뿐, 그 안에 담긴 사유는 딱히 없다고 비판했죠.


바스키아의 사진이 실린 뉴욕 타임스 매거진 표지

바스키아의 사진이 실린 뉴욕 타임스 매거진 표지 © New York Times Magazine


하지만 이런 비난도 바스키아의 스타성을 억제하진 못했어요. 1985년 2월 10일, 바스키아는 뉴욕타임스 매거진 커버를 장식합니다. 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예술가로서는 전례 없는 일이었죠.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 바스키아의 인생도 찬란함과 어두움을 반복합니다. 앤디 워홀과 협업한 전시가 혹평을 들으며

이들 사이는 완전히 틀어지게 되었어요. 그럼에도 이들의 작품은 꾸준히 잘 팔려서, 바스키아는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죠.


그리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바스키아는 마약을 사는 데 씁니다. 그렇게 약물 중독으로 치아가 다 빠졌고, 피부엔 검은 반점이 생겼어요. 바스키아는 약을 사러 나갈 때만 외출하곤 했는데요. 이런 모습이 입소문을 타며 ‘흑인 스타 예술가가 마약 중독으로 곧 죽을 것 같으니, 작품을 미리미리 사두라’는 가십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앤디 워홀의 부고 기사


그렇게 바스키아의 작품은 더 잘 팔렸고 돈이 들어오면 약을 더 사는 악순환이 이어져요. 그러던 중 1987년 2월 22일, 앤디 워홀이 수술 합병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이 사건은 바스키아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안겼어요. 바스키아의 동료 예술가들은 워홀의 죽음 후 바스키아는 단 한 번도 그의 죽음을 극복한 적 없다고 말했습니다. 최근 사이가 틀어지긴 했어도, 바스키아에겐 멘토이자 친구, 아버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죠.


바스키아는 그의 죽음으로 느낀 충격을 작품으로 풀어냅니다. <페가수스>. 이 작품은 바스키아가 얼마나 훌륭한 스토리텔러인지 보여줍니다. 작품은 전에 만들어오던 것과는 다른 느낌을 가져요. 복잡한 상징과 글자를 깜지 채우듯 새겨넣은 큰 사이즈의 작품은 블랙앤 화이트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색깔은 삶과 죽음의 양면성을 은유해요. 



Pegasus, 1987

Pegasus, 1987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바스키아는 색뿐만 아니라 단어를 통해서도 메시지를 전합니다. 써있는 글을 보면, 독일어로 검정을 의미하는 슈왈츠, 흑백 누와르 영화의 명대사뿐만 아니라, 성경, 신화, 소설, 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 속 삶과 죽음의 단면성과 필연성을 담은 단어들을 적은 걸 볼 수 있죠.


빽빽하게 채워진 다양한 레퍼런스는 이 시기 바스키아가 얼마나 어두운 감정 속을 걷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겨우 스물여섯 살, 어린 나이에 가장 높은 곳의 성공을 맛보고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을 경험한 그의 나약함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죠. 바스키아는 그렇게 또 한 번 자신의 삶을 작품으로 스토리텔링 했습니다.


Riding with Death, 1988

Riding with Death, 1988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이후로도 바스키아는 슬픔과 약에 취한 채 계속 작품을 제작했어요. 그의 유작이 된 <죽음을 타고>(1988)를 보면, 해골을 타고 달리는 인물이 묘사된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림과 글로 빼곡하게 차 있던 이전의 작업과 달리

빈 공간이 더 많은 그림은 관객의 이입을 유도하죠. 그리고 이 모습은 삶의 마지막 순간, 서사가 종료됨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는 일할 때 ‘예술’을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내 삶’을 생각하려고 한다.”


이 말처럼 바스키아의 예술은 온통 자전적인 것들의 스토리텔링으로 가득해요. 그림부터 글자, 재료에 이르기까지 거리예술가이자 흑인 예술가, 그리고 시각 언어와 상징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전하죠.


시대상을 자신의 관점에서 가장 생생하게 스토리텔링 했고 이미지와 텍스트를 결합해 자신만의 새로운 리듬감을 그림으로 표현한 예술가, 바스키아의 예술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전시되고 전해지며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Artists

변기가 예술이 되고, 죽은 상어가 수백억 원에 팔리는 현대미술. 이제 미술은 관객 설득을 뒤로한 채 빠르게 달려나가고 있습니다.  


그안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경쟁 속, 빋피는 빛나는 예술관을 가진 예술가의 작품을 포착해 관객에게 소개합니다. 지금 바로 빋피의 예술가 브랜딩 큐레이션을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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