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플은 사실 우리에게 꽤 친숙한 예술가입니다. 컴퓨터 과학을 전공한 뒤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저스틴 비버, 아리아나 그란데 등 유명 가수의 콘서트 비주얼을 제작하며 커리어를 쌓았죠.
그리고 본인이 만든 사이버펑크 스타일의 루프 영상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로 무료 배포합니다. 고퀄리티 모션 그래픽 클립으로 이루어진 VJ Loops(2010~2019), 사이버 전쟁을 주제로 한 빠른 템포의 단편 영상 Zero Day(2015) 등이 대표적인데요.
비플은 2007년 5월 1일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하나의 그림을 그려 업로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17년 넘는 시간 동안 지속해 온 <에브리데이즈> 프로젝트죠. 처음에는 미술 비전공자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그림 실력을 늘리겠다는 단순한 목표로 시작했는데요.
결혼식 날이나 아팠던 날조차 작업을 멈추지 않으면서 단순한 시리즈로 시작한 프로젝트는 곧 거대한 아카이브가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드로잉도 발전됐어요. 초기에는 종이에 끄적인 단순한 드로잉 수준이었다면, 후에는 Cinema 4D를 활용한 3D 렌더링 습작, 그리고 오늘날엔 시사 이슈를 즉각적으로 반영한 고해상도 풍자화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카이브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에브리데이즈> 프로젝트는 곧 현대미술 작품과도 비견되기 시작했어요. 48년간 3천 점의 작품을 제작한 ‘온 카와라’의 <투데이 시리즈>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며 언급되기도 했는데요. 이 외에도 비플은 영국 아티스트인 ‘톰 저드’가 1년간 매일 그림을 그린 것에서 영감받아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매일매일 작품을 제작하며, 작가의 시간과 성실함 자체가 재료가 된 ‘시간 기반의 수행적 예술’을 선보인 것이죠. 비플의 작품은 이런 미술사적 가치에 더해 종이 같은 전통적인 재료부터 3D 렌더링, 고해상도 그림 등 소프트웨어의 발전사까지 담아내며 기록 예술로서의 가치를 담아냈어요.
그리고 2021년, 2007년부터 5천 일 동안 매일 그린 그림들을 하나로 모아 거대한 디지털 콜라주 작품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를 내놓습니다. 작품은 2021년 3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화 약 780억 원에 낙찰됐어요(6,930만 달러).
이건 당시 생존 작가 중 제프 쿤스, 데이비드 호크니에 이어 세 번째로 비싼 기록이었습니다. 그리고 메이저 경매 하우스에서 NFT 작품이 판매된 첫 번째 사례이기도 했죠. 작품의 낙찰 소식은 ‘JPG 파일에 불과한 디지털 자료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라는 미술계 오랜 질문에 시장이 ‘그렇다’고 답한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건 상당한 성취였지만, 비플 개인에게는 넘어서야 할 또 다른 벽이 되었어요. 비플은 이윽고 JPG 파일 판매를 넘어 디지털 아트를 갤러리나 미술관 같은 현실의 공간에 어떻게 전시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비플은 살아있는 조각, 휴먼원(2021)을 내놓습니다. 작품은 높이 약 2.2m의 LED 스크린으로 이루어진 박스형 조각물이에요. 조각이 회전한다는 점에서 키네틱 아트로 분류할 수도 있고, 영상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는 비디오 아트로 분류할 수도 있죠.
영상은 우주복을 입은 듯한 여행자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디스토피아적 풍경 속을 걷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간 해왔던 디지털 기반의 작업을 LED라는 매체를 활용해 전시한 건데요. 이는 과거 백남준 작가가 TV 브라운관을 조각의 재료로 쓴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미술사적인 연결성을 가져간 시도로 볼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이런 식의 작품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비플의 작품도 언뜻 보았을 땐 평범한 현대미술 작품 같지만, 이 작품은 완성된 채 전시되는 대다수의 작품과 달리 ‘살아있는 작품’이라는 특이점을 가져요.
비플은 작품의 생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도 원격으로 이 작품의 배경 데이터를 업데이트하고 있습니다. 작품 소장자의 지리적 위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이슈에 맞춰 배경을 실시간으로 바꾸고 있죠. 이런 시도는 전작 <Crossroad>(2020)를 발전시킨 것이었어요.
<Crossroad>는 2020년,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그림이 바뀌도록 프로그래밍한 디지털 작품이에요. 결과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작품 이미지를 볼 수 없었죠. 트럼프가 승리할 경우, 왕관을 쓴 근육질의 트럼프가 불길을 당당히 걸어가는 영상이 공개되도록 설정되었고, 패배할 경우 낙서 가득한 시체가 된 트럼프 영상이 공개되도록 설정했는데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했기 때문에 시체가 된 트럼프 영상은 볼 수 없습니다. 이 시도는 작품이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선거 결과라는 외부 데이터에 반응해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작품에 생명력을 더했다고 평가받았어요.
이후 비플은 단순히 보는 재미를 가진 작품을 넘어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가진 예술 작품을 선보여요. 최근 화제가 된 작품, <Regular Animals>를 내놓았죠.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선보인 이 로봇 개 시리즈는 일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 등의 얼굴을 하고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이미지를 배설합니다.
이는 AI와 로봇 기술이 예술의 영역을 침범하는 시대, 인간 예술가로서 기술에 가한 풍자이자 공격이었죠. 또 앤디 워홀, 피카소 등 예술가 로봇 개는 과열된 예술시장의 소비 행태를 조롱합니다. 풍자와 공격, 조롱의 의도를 담고 있기에 작품은 이렇게 불쾌하고 기괴한 모습으로 연출되었습니다.
작품을 통해 특유의 트롤링 미학을 전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비플은 이 로봇 개들을 투명한 우리에 담아, 한 자리에 몰아넣고 비판하며 소비하게 했어요. 그의 작품은 여전히 보는 재미만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작품의 백미는 관계 미술적 특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관계 미술은 1998년 시작된 현대미술 장르예요. 그림이나 조각 같은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관람자와의 상호작용, 참여, 대면을 통해 발생하는 사회적 관계 자체를 예술의 중심으로 보는 사조죠. 이전에 다른 영상을 통해 소개해 드린 리크리트 티라바니자가 관계 미술의 대표 작가로 손꼽힙니다.
<팟타이>라는 작품이자 실제 음식을 작가가 만들어서 관객에게 대접한 작품이 잘 알려져 있는데요. 그동안 작가는 작품을 매개체로 관객과 관계를 맺었는데, 작품 없이 작가와 관객이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관계 미술의 미학을 잘 실천한 작품으로 회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코로나 팬데믹 이후 단절된 사회 문제가 주요 담론으로 떠오르면서 관계 미술은 이를 연결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서의 예술로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어요. 비플은 NFT가 가장 핫했던 시기 최고가에 NFT를 팔았던 작가예요. 시대를 아주 잘 읽고 빠르게 작품에 적용할 줄 아는 작가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 미술적 특징도 작품에 적용했어요.
그럼에도 비플은 미술계에서 쓰임 받고 있습니다. 사실 미술관에서 작품을 전시하는 예술가들은 다른 예술가들에 비해 윤리적 이슈에서 비판을 피해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내 살인 혐의로 수년간 재판을 받은 미니멀리즘 예술가, 칼 안드레도 사건과 별개로 전시를 이어갔고,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르네상스 시기 예술가 카라바조도 살인 혐의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작품이 전시 중이죠.
논란에도 불구하고 작품과 예술가는 별개로 여기는 경향이 많기 때문인데요. 비플도 마찬가지입니다. 2024년 중국에서 처음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 올해 마이애미 아트 바젤에서 작품을 전시하며 미술계와 미술 시장 모두를 넘나들고 있죠. 비플의 작품이 오늘날 현대미술의 모든 특징을 아주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Cinema 4D, NFT 등 디지털 기반의 매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미술사적인 맥락을 계승하는 모습, 영상 기반의 본인 작업을 비디오 아트 등 미술 장르를 통해 계승하려는 시도, 동시대 가장 큰 담론으로 손꼽히는 기술 발전과 미술 시장 과잉에 대한 비판, 그리고 관객 참여를 유도하는 관계 미술적 시도까지 다양합니다.
물론 로봇 개처럼 그 모습이 아직은 현대 관객에게 익숙지 않아 불쾌함을 유발하는 때도 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미’가 아닌 ‘추’의 모습을 다루고 있어 더욱 다채로운 예술을 선보일 것이 기대되기도 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저마다 비슷한 모습이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른 모습이라는 레프 톨스토이의 글처럼요.
© Art Basel
일론 머스크 얼굴을 한 로봇 개가 아트바젤 마이애미 비치에서 선보여졌습니다. 극도로 사실적인 실리콘 얼굴, 로봇 그 자체인 딱딱한 움직임, 기괴한 형태에 더 기괴한 동작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겼죠.
이 작품의 제목은 <Regular Animals>. 작품을 구성하는 로봇 개는 일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 같은 테크 억만장자와 앤디 워홀, 피카소, 비플 등 예술가로 구성됐어요. 각 2점씩 총 10점이 제작되었죠.
© Art Basel
이 로봇 개들은 투명한 우리 안을 돌아다니며 관람객의 사진을 찍은 뒤, 엉덩이 부분에서 그 이미지를 인쇄해 배설합니다. 이 배설물, 즉 프린트는 총 1024장으로 그중 256장에는 NFT를 받을 수 있는 QR코드가 담겨 있었어요.
작품의 가격은 개당 1억 3천만 원(100,000달러)이었는데, VIP 프리뷰 날 하루 동안 10개 작품 전부가 판매됐습니다.
이 작품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기에 이렇게 기괴한 형태에도 하루 만에 빠르게 매진된 걸까요? 작품의 의미를 알아보기 전, 우리는 작품의 제작자 비플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 디자이너 출신 예술가, 비플
© Beeple
비플은 사실 우리에게 꽤 친숙한 예술가입니다. 컴퓨터 과학을 전공한 뒤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저스틴 비버, 아리아나 그란데 등 유명 가수의 콘서트 비주얼을 제작하며 커리어를 쌓았죠.
그리고 본인이 만든 사이버펑크 스타일의 루프 영상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로 무료 배포합니다. 고퀄리티 모션 그래픽 클립으로 이루어진 VJ Loops(2010~2019), 사이버 전쟁을 주제로 한 빠른 템포의 단편 영상 Zero Day(2015) 등이 대표적인데요.
VJ Loops(2010~2019) © Beeple
Zero Day(2015) © Beeple
어디선가 한 번쯤 보았을 이 영상들은 비플이 시초를 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10년 초반부터 영상을 무료로 배포한 덕분에, 많은 클럽과 다양한 공간에서 10년 넘게 영상이 활용됐고요. 그렇게 비플의 영상들은 곧 하나의 대중 장르가 되었습니다.
그간 앤디 워홀 등 수많은 현대 미술가들이 대중문화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고 온 것과 달리, 비플은 자신의 예술을 대중문화 속으로 침투시킨 것이죠. 타고난 예술적 재능에 탁월한 마케팅적 전략까지 갖춘 아티스트였던 셈인데요.
비플의 재능은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바로 성실함이에요.
성실함을 재료 삼은 예술가의 아카이브, 에브리데이즈 프로젝트
Everydays 프로젝트 중 하나의 작품 © Beeple
비플은 2007년 5월 1일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하나의 그림을 그려 업로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17년 넘는 시간 동안 지속해 온 <에브리데이즈> 프로젝트죠. 처음에는 미술 비전공자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그림 실력을 늘리겠다는 단순한 목표로 시작했는데요.
결혼식 날이나 아팠던 날조차 작업을 멈추지 않으면서 단순한 시리즈로 시작한 프로젝트는 곧 거대한 아카이브가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드로잉도 발전됐어요. 초기에는 종이에 끄적인 단순한 드로잉 수준이었다면, 후에는 Cinema 4D를 활용한 3D 렌더링 습작, 그리고 오늘날엔 시사 이슈를 즉각적으로 반영한 고해상도 풍자화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On Kawara, Today Series
© Tom Judd
아카이브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에브리데이즈> 프로젝트는 곧 현대미술 작품과도 비견되기 시작했어요. 48년간 3천 점의 작품을 제작한 ‘온 카와라’의 <투데이 시리즈>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며 언급되기도 했는데요. 이 외에도 비플은 영국 아티스트인 ‘톰 저드’가 1년간 매일 그림을 그린 것에서 영감받아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매일매일 작품을 제작하며, 작가의 시간과 성실함 자체가 재료가 된 ‘시간 기반의 수행적 예술’을 선보인 것이죠. 비플의 작품은 이런 미술사적 가치에 더해 종이 같은 전통적인 재료부터 3D 렌더링, 고해상도 그림 등 소프트웨어의 발전사까지 담아내며 기록 예술로서의 가치를 담아냈어요.
Beeple,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 (2021) © Beeple
그리고 2021년, 2007년부터 5천 일 동안 매일 그린 그림들을 하나로 모아 거대한 디지털 콜라주 작품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를 내놓습니다. 작품은 2021년 3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화 약 780억 원에 낙찰됐어요(6,930만 달러).
이건 당시 생존 작가 중 제프 쿤스, 데이비드 호크니에 이어 세 번째로 비싼 기록이었습니다. 그리고 메이저 경매 하우스에서 NFT 작품이 판매된 첫 번째 사례이기도 했죠. 작품의 낙찰 소식은 ‘JPG 파일에 불과한 디지털 자료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라는 미술계 오랜 질문에 시장이 ‘그렇다’고 답한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건 상당한 성취였지만, 비플 개인에게는 넘어서야 할 또 다른 벽이 되었어요. 비플은 이윽고 JPG 파일 판매를 넘어 디지털 아트를 갤러리나 미술관 같은 현실의 공간에 어떻게 전시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살아있는 작품’ 비플이 내놓은 새로운 개념
Beeple, Human One, 2021 © Beeple
이후 비플은 살아있는 조각, 휴먼원(2021)을 내놓습니다. 작품은 높이 약 2.2m의 LED 스크린으로 이루어진 박스형 조각물이에요. 조각이 회전한다는 점에서 키네틱 아트로 분류할 수도 있고, 영상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는 비디오 아트로 분류할 수도 있죠.
영상은 우주복을 입은 듯한 여행자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디스토피아적 풍경 속을 걷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간 해왔던 디지털 기반의 작업을 LED라는 매체를 활용해 전시한 건데요. 이는 과거 백남준 작가가 TV 브라운관을 조각의 재료로 쓴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미술사적인 연결성을 가져간 시도로 볼 수 있는 것이죠.
© Nam June Paik
물론 이런 식의 작품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비플의 작품도 언뜻 보았을 땐 평범한 현대미술 작품 같지만, 이 작품은 완성된 채 전시되는 대다수의 작품과 달리 ‘살아있는 작품’이라는 특이점을 가져요.
비플은 작품의 생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도 원격으로 이 작품의 배경 데이터를 업데이트하고 있습니다. 작품 소장자의 지리적 위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이슈에 맞춰 배경을 실시간으로 바꾸고 있죠. 이런 시도는 전작 <Crossroad>(2020)를 발전시킨 것이었어요.
(좌) 트럼프 승리 시 공개 NFT, (우) 트럼프 패배 시 공개 NFT © Beeple
<Crossroad>는 2020년,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그림이 바뀌도록 프로그래밍한 디지털 작품이에요. 결과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작품 이미지를 볼 수 없었죠. 트럼프가 승리할 경우, 왕관을 쓴 근육질의 트럼프가 불길을 당당히 걸어가는 영상이 공개되도록 설정되었고, 패배할 경우 낙서 가득한 시체가 된 트럼프 영상이 공개되도록 설정했는데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했기 때문에 시체가 된 트럼프 영상은 볼 수 없습니다. 이 시도는 작품이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선거 결과라는 외부 데이터에 반응해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작품에 생명력을 더했다고 평가받았어요.
<휴먼 원>을 바라보는 비플 © Artazine
그리고 비플은 이어진 작품, <휴먼원>을 통해 살아있는 작품이 계속해서 외부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미술계 전례 없는 ‘살아있는 작품’의 개념을 완성했죠.
작품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에브리데이즈> 프로젝트처럼 작가가 계속해서 업데이트해 줘야 하기에 작가 개인의 성실함이 필수적인데요. 하지만 성실함만으로는 작품의 맛을 더하기에 부족했습니다.
<Regular Animals>의 예술성 살펴보기
© Art Basel
이후 비플은 단순히 보는 재미를 가진 작품을 넘어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가진 예술 작품을 선보여요. 최근 화제가 된 작품, <Regular Animals>를 내놓았죠.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선보인 이 로봇 개 시리즈는 일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 등의 얼굴을 하고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이미지를 배설합니다.
이는 AI와 로봇 기술이 예술의 영역을 침범하는 시대, 인간 예술가로서 기술에 가한 풍자이자 공격이었죠. 또 앤디 워홀, 피카소 등 예술가 로봇 개는 과열된 예술시장의 소비 행태를 조롱합니다. 풍자와 공격, 조롱의 의도를 담고 있기에 작품은 이렇게 불쾌하고 기괴한 모습으로 연출되었습니다.
© Art Basel
작품을 통해 특유의 트롤링 미학을 전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비플은 이 로봇 개들을 투명한 우리에 담아, 한 자리에 몰아넣고 비판하며 소비하게 했어요. 그의 작품은 여전히 보는 재미만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작품의 백미는 관계 미술적 특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관계 미술은 1998년 시작된 현대미술 장르예요. 그림이나 조각 같은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관람자와의 상호작용, 참여, 대면을 통해 발생하는 사회적 관계 자체를 예술의 중심으로 보는 사조죠. 이전에 다른 영상을 통해 소개해 드린 리크리트 티라바니자가 관계 미술의 대표 작가로 손꼽힙니다.
작품을 진행 중인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 Artsy
<팟타이>라는 작품이자 실제 음식을 작가가 만들어서 관객에게 대접한 작품이 잘 알려져 있는데요. 그동안 작가는 작품을 매개체로 관객과 관계를 맺었는데, 작품 없이 작가와 관객이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관계 미술의 미학을 잘 실천한 작품으로 회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코로나 팬데믹 이후 단절된 사회 문제가 주요 담론으로 떠오르면서 관계 미술은 이를 연결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서의 예술로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어요. 비플은 NFT가 가장 핫했던 시기 최고가에 NFT를 팔았던 작가예요. 시대를 아주 잘 읽고 빠르게 작품에 적용할 줄 아는 작가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 미술적 특징도 작품에 적용했어요.
© Art Basel
로봇 개들은 우리 안을 돌아다니며 관객의 이미지를 촬영하고 배설하는데요. 이는 관객이 단순히 작품의 감상자가 아닌, 작품의 일부로 기능하게 합니다. 관객의 존재가 필수적인 관계 미술의 특성을 적극 활용하며 현대미술의 트렌드를 작품에 적용해 냈죠.
비플 작품,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기
© Beeple
한편 비플의 작품은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에브리데이즈 시리즈에서 인종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적 이미지들이 포착된 것이 이유였어요. 다양성을 포용하려는 현대 미술계의 방향성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죠.
또 다른 논란도 있었습니다. 비플 작품은 디지털 기반이어서 원본성 유지를 위해 NFT로 발행되곤 했는데요. 작품에 연동된 토큰에 비플의 지분이 섞여 있어, 작품 판매 후 스캠이라 비난받기도 했죠.
© Beeple
그럼에도 비플은 미술계에서 쓰임 받고 있습니다. 사실 미술관에서 작품을 전시하는 예술가들은 다른 예술가들에 비해 윤리적 이슈에서 비판을 피해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내 살인 혐의로 수년간 재판을 받은 미니멀리즘 예술가, 칼 안드레도 사건과 별개로 전시를 이어갔고,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르네상스 시기 예술가 카라바조도 살인 혐의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작품이 전시 중이죠.
논란에도 불구하고 작품과 예술가는 별개로 여기는 경향이 많기 때문인데요. 비플도 마찬가지입니다. 2024년 중국에서 처음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 올해 마이애미 아트 바젤에서 작품을 전시하며 미술계와 미술 시장 모두를 넘나들고 있죠. 비플의 작품이 오늘날 현대미술의 모든 특징을 아주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 Beeple
Cinema 4D, NFT 등 디지털 기반의 매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미술사적인 맥락을 계승하는 모습, 영상 기반의 본인 작업을 비디오 아트 등 미술 장르를 통해 계승하려는 시도, 동시대 가장 큰 담론으로 손꼽히는 기술 발전과 미술 시장 과잉에 대한 비판, 그리고 관객 참여를 유도하는 관계 미술적 시도까지 다양합니다.
물론 로봇 개처럼 그 모습이 아직은 현대 관객에게 익숙지 않아 불쾌함을 유발하는 때도 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미’가 아닌 ‘추’의 모습을 다루고 있어 더욱 다채로운 예술을 선보일 것이 기대되기도 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저마다 비슷한 모습이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른 모습이라는 레프 톨스토이의 글처럼요.
여러분은 비플의 기괴한 예술 작품, 어떻게 감상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