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라르손: 어두워봤기에 그릴 수 있는 밝음, 행복을 그리는 예술가의 뒷 이야기

Carl Larsson, Self-Portrait in New Studio, 1912


“이케아의 모든 디자인은, 칼 라르손에게서 시작되었다”


150년 전, 평범한 가정 풍경을 그린 그림은 오늘날 가장 큰 가구 브랜드의 영감이 되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작가, 칼 라르손은 수채화를 이용해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정말 많이 그렸던 화가인데요. 하지만,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대신, 열심히 행복하려고 노력했죠. 그의 그림엔 그저 예쁜 집이 아닌, 노력해서 만든 행복의 가치가 담겨있습니다. 


행복을 그린 화가의 어두운 어린 시절

Carl Larsson, Hide and Seek, 1898


칼 라르손(Carl Larsson, 1853-1919)은 1853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태어났어요. 스톡홀름은 북방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면서 관광 중심지로 손꼽히는 곳인데요. 아름다운 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행복한 유년을 보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정반대였어요. 칼 라르손은 스톡홀름의 빈민가에서 나고 자랐고, 끔찍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라르손이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이 여관을 운영했다고 해요. 1800년대 중반 유럽의 여관에서는 술도 많이 팔았지만, 부모님은 이 빈민가에서 아이를 안전하게 키우려면 술을 팔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숙박만 할 수 있는 여관을 운영했어요. 실제로 부모님 두 분 다 술을 안 마시기도 했고요. 그런데 주변 다른 여관 주인들이 라르손의 아버지에게 술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집안이 급속도로 힘들어졌습니다. 라르손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서 어머니와 자식들을 자주 때렸고, 술과 노름에 빠져서 친척 가족들에게 돈을 빌리고 도주했죠. 결국 라르손과 어머니는 모든 재산을 아버지 빚 갚는 데 쓰고, 거리를 떠도는 노숙자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길거리 생활은 너무 위험했다고 해요. 빈민가다 보니 전염병도 돌았고, 살인자, 도둑도 거리에 많았죠. 


Carl Larsson, Mamma's and the small girls' room, 1897


라르손의 어머니는 강한 사람이었어요. 이웃집에 간청해 셋방살이를 하고 잡일을 하면서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돈을 벌어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라르손은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무료 학교에 다녔고요. 라르손은 무료학교에 다니면서 자신의 그림 실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학교 선생님은 그림 쪽으로 진로를 정하라고 추천했고,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힘든 상황이었지만 스웨덴 왕립예술아카데미에 입학했어요.


그리고 22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초상화 작업 의뢰를 받게 되었습니다. 제법 빨랐던 편이에요. 동시에 돈을 벌기 위해 책이나 잡지, 신문의 삽화 작업을 하면서 이름을 조금씩 알리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그림으로 돈을 벌면서 어머니 대신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이 시점에 칼 라르손의 아버지가 집에 돌아옵니다. 당시 아버지는 증기선 화부 일을 했다고 해요. 증기기관차의 불을 담당하는 일이었는데, 이 일을 하다 다쳐서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었죠. 


이제 막 돈을 벌기 시작한 라르손은 아버지 병원비를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성격이 여전히 불같아서 칼 라르손에게 악담을 퍼부었다고 해요. '네가 태어난 날이 가장 거지 같은 날이다, 널 저주한다..' 등의 끔찍한 말을 시도때도 없이 내뱉었죠. 결국 칼 라르손은 평생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고, 본인이 꾸릴 가정은 이런 가난과 고통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처절한 노력으로 일군 행복, 카린과의 만남

아내 카린과 딸 수잔을 그린 그림 Carl Larsson, A Studio Idyll. The Artist's Wife and their Daughter, 1885 


우리가 오늘날, 칼 라르손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행복은 사실 라르손 인생에서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가능했던 감정이었어요. 라르손은 스물네 살이 되던 해, 부모님이 살 수 있는 집과 돈을 마련해두고 파리로 넘어갑니다. 예술의 중심지가 파리였기 때문에 유학 목적으로 간 것이었는데요. 이곳에서 평생의 동반자가 될 아내 카린을 만나게 돼요.


당시 파리에서는 고전적인 기존 화풍에 저항해 새로운 시도를 담아낸 인상주의가 태동하던 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상주의는 초기에 대중과 평단의 비난을 받았어요. 이전까지 그려지던 그림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죠. 한편, 동료 화가들은 이런 새로운 시도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좋게 평가했습니다. 칼 라르손도 그 화가들 중 한 명이었고, 마찬가지로 인상주의 화풍의 그림을 그리곤 했죠.


하지만 이 시도는 빠르게 받아들여지지 못했어요. 인상주의가 태동하고 1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장르로 인정받기 시작했거든요. 라르손이 딱 이 시기에 파리에 있었습니다. 인상주의가 아직 예술로 인정 못 받던 타이밍에요. 그렇다 보니, 힘든 상황에 결심한 파리 유학이었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했어요. 살롱전에는 항상 떨어졌고, 어쩌다 전시 기회를 얻게 되더라도 안 좋은 위치에 작품이 걸렸죠. 문제는, 칼 라르손이 프랑스어도 못했기 때문에 항의하거나 문제제기를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점입니다. 


Carl Larsson, Azalea, 1906


결국 라르손은 스웨덴 출신 화가들과 어울리며 어떤 식으로 이 타국에서 활동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밤이 많아졌는데요. 이 시기, 스웨덴 화가들의 모임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평생의 동반자가 될, 카린이었죠. 카린은 칼 라르손의 학교 후배였어요. 부잣집 딸이었지만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죠. 그래서 결혼할 때까지 라르손은 카린이 부잣집 딸인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이들은 매우 달랐어요. 칼 라르손은 빈민가 출신에 호탕한 성격이었고, 카린은 부잣집 딸에 조용한 성격이었어요. 하지만 서로의 다른 점 때문에 더 빠르게 서로에게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하게 되었어요. 결혼식 당시 칼 라르손은 ‘내 삶에 있던 불행이 이제 행복으로 바뀌겠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죠.


라르손은 아내 카린과 결혼한 후 아이 8명을 낳아서 가정을 꾸렸어요. 그리고 이 시점부터 칼 라르손의 예술세계가 본격적으로 성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가장 큰 변화는 유화에서 수채화로 재료를 바꾸었다는 거예요. 아내 카린이 제안한 것이었죠. 수채화는 유화와 달리 물을 타서 쓰는 재료입니다. 그래서 기름을 타서 두텁게 바르는 유화보다 훨씬 가볍고 맑은 표현이 가능해요. 그렇다 보니 아기자기한 요소가 많았던 칼 라르손 그림에는 수채화가 잘 맞았어요.


Carl Larsson, Crayfishing,1898


그리고 수채화는 빠르게 작업이 가능해요. 유화는 물감이 마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일상적인 순간을 포착하듯이 그리기보다는 종교화나 역사화 같은 웅장하고 무게감 있는 그림이 많이 그려지곤 했어요. 이 시도에 저항한 게 인상주의였는데, 인상주의는 유화 물감을 빠른 붓질로 포착해 일상성을 더했다면, 칼 라르손은 수채화를 선택해 섬세함은 가져가면서 일상성을 포착한 시도를 했던 거예요.


Carl Larsson, Cosy Corner, 1894


그중에서도 잘 알려진 작품은 1894년 작, <아늑한 공간(Cosy Corner)>이에요. 라르손 집의 거실을 그린 수채화인데, 밝은 색의 벽지에 벽에는 그림이 몇 점 걸려있고, 북유럽 인테리어 특유의 넝굴 식물들 화분도 보여요. 소파에는 하늘색 줄무늬 담요가 얹혀져 있고, 바닥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낮잠자는 모습이에요.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이케아가 왜 칼 라르손에게 영감받았다고 이야기했는지 느껴질 정도로 이케아 감성이 가득 느껴져요. 따뜻하고 포근하고 깔끔하죠.


이런 감성의 원천은 칼 라르손의 아내인 '카린'에게서 온 것이었다고 해요. 카린은 라르손과 결혼한 후에 실내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는 일을 했는데, 그 일환으로 집안의 가구들을 고르고 꾸미곤 했어요. 그 감각이 라르손의 그림 실력과 만나며 이렇게 아기자기한 느낌의 따뜻한 집안 풍경 작품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고요.


이 그림들은 이후 1890년대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했어요. 1899년에는 수채화 작품집을 출간했는데, 이것이 크게 성공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로서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이후 1900년 진행된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수채화 작품으로 1등상을 받게 돼요. 이전 파리 유학 때에는 살롱전에도 낙선하고, 작품이 걸리더라도 안 좋은 위치에 걸려서 관객들이 보지도 못할 정도였지만, 파리 유학 다녀온 지 20년 만인 47살에 성과를 내게 되었던 거예요.


논란의 대작 <한겨울의 희생>

Carl Larsson, Midwinter Sacrifice, 1915


칼 라르손의 나이 62세 때 그린 1915년 작 <한겨울의 희생(Midwinter Sacrifice)>은 여지까지 행복한 가정을 그렸던 그림과는 달라요. 국가의 요청으로 스웨덴 국립박물관에 걸릴 그림을 그린 건데, 오늘날에는 스웨덴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그림으로도 손꼽혀요.


가장 큰 이유는 그림의 내용 때문이에요. 이 그림은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전설을 묘사하고 있어요. 오랜 기근에 여러 제물을 바쳤지만 점점 상황이 악화되자, 통치 중이던 도말드 왕이 자신을 제물로 바친 이야기예요.

작품을 보면 제물이 되기를 선택한 왕이 벌거벗은 채로 하늘을 보고 있고, 그 양옆으로 좌절하는 신하들의 모습과 침착하게 풍경을 바라보는 신하들의 모습이 대비되어 그려져 있어요.


기존에 왕을 그려낸 다른 그림들과 달리 왕의 전신이 다 누드로 그려져있다는 게 특징이에요. 이건 조금 논란될 여지가 있었어요. 그런데 중요한 건 칼 라르손이 이 그림의 스케치를 네 번이나 그리면서 정부와 소통했다는 거예요. 매번 다 오케이를 받았고, 이후 다섯 번째 그림은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내서 완성했습니다.


Carl Larsson, Self-Portrait, 1895


칼 라르손은 이 그림이야말로 본인의 예술세계를 집대성한 대작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전시 직전, 국가에서 이 작품의 전시를 막았어요. '신화 속 이야기를 주제로 다룬 게 시대에 뒤쳐지는 시도'라는 이유였는데, 이건 형식적인 이유이고 그 이면에는 어떤 정치적 이슈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아요.


아무래도 왕의 벌거벗은 모습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도 예민하게 받아들여졌을 수 있고, 왕이 자신을 제물 삼아 희생한다는 점이 정치권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 거라 보았을 수도 있었겠죠. 결국 이 그림은 박물관 측에서 거부되었어요. 이후 이곳저곳 떠도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작품 사이즈가 세로 6미터 가로 13미터나 될 정도로 큰데도 다양한 미술관과 박물관을 떠돌았어요.


스웨덴에서는 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라, 역사 박물관에서 소장하라면서 서로 떠밀었고, 결국 소장처를 찾지 못해 1987년에 소더비 경매까지 갔어요. 낙찰가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한 일본 미술품 수집가가 구매했다고 하는데, 이후 5년 뒤에 원래 작품을 주문했던 국립박물관이 개관 200주년을 맞아 칼 라르손 헌정 전시를 열게 되면서 이 전시에 대여 형태로 작품이 다시 돌아왔어요.


작품 제작 77년 만에야 원래 걸리기로 한 장소에 작품이 걸리게 된 건데, 당시 사람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고 해요. 덕분에 1997년, 국립박물관이 이 일본인 수집가에게 작품을 구입해서 소장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칼 라르손이 의도한 곳에 정확히 전시되어 관객과 만나고 있어요.


Carl Larsson, Self-Portrait, 1906


칼 라르손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딛고 일어나 행복한 가정을 이룬 화가였어요. 그의 그림은 단순히 아름다운 집안 풍경을 넘어서 진정한 행복을 향한 열망과 노력을 담고 있습니다. 15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그려낸 행복의 모습이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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