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도시를 내려다보며 ‘미국에서 미술사를 새로 쓰겠다’고 다짐하죠. 하지만 뉴욕 미술계의 벽은 아주 높았어요. 당시 뉴욕에서 여성 작가는 개인전을 여는 경우가 없었고, 단체전에 끼여서 작품을 전시하는 정도만 이뤄졌습니다. 여성 딜러마저도 여성 작가 작품은 거래를 꺼렸고요
구사마는 이에 더해 뉴욕에 간 1958년 당시 보기 드문 아시안이었기에, 더 큰 단점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백인 남성 중심 미술계에서 일본 여성 예술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구사마는 전략을 내세웁니다.
구사마는 유행하는 옷을 잘 갖춰 입을 정도로 옷을 잘 입었던 예술가입니다. 하지만 공식 석상이 있을 때마다 기모노를 입고 다니며, 오묘하고 신비로운 아시안 여성의 매력을 발산했어요. 일본에서는 단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던 기모노였지만, 이 의상이 보수적이고, 국가적 자긍심에 가득 찬 미국인들에게 이국적인 새로움을 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짙은 화장과 진한 향수를 뿌려 자신의 강렬함을 부각했죠. 이 전략은 제법 잘 통했습니다. 전시 오프닝이 있을 때마다 작품만큼이나 구사마의 의상이 주목받았죠.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당당하게 자신의 니즈를 오픈하고, 이에 맞는 사람을 찾아 전략적으로 어울렸죠. 뉴욕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사마는 머물 아파트와 미술재료를 지원해 줄 잘생긴 후원자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자신의 개인전을 열어줄 갤러리를 물색하고 다녔죠.
구사마는 그림을 그리며 죽을 듯이 노력했다 이야기합니다. 거의 10미터나 되는 그물망 그림도 있었죠.
그림은 평단의 찬사를 받습니다. 미술계 만연하던 액션 페인팅과는 다른, 명상적인 작품은 이목을 끌었죠. 미니멀리즘 예술의 대가이자 예술 비평가인 도널드 저드는 <무한의 망>을 들어 겹겹이 이루어진 회화의 중층 구조를 조형적 관점에서 예리하게 파악했다며 선도적인 콘셉트라 이야기했죠. 미술계의 눈길을 얻은 구사마는 더 큰 스튜디오로 작업실을 옮기게 됩니다.
크리에이티브와 표절의 반복
<남근 소파>(1962) ⓒ MoMA
더 커진 공간에서 구사마는 더 새로운 크리에이티브를 내놓습니다. 이 시기 선보인 작품 중 가장 파급력 있던 건 <남근 소파>(1962)였어요. 남근 형상으로 가득한 천 조각으로 소파를 뒤덮은 작품이었는데요. 이 소파는 구사마의 정신적인 이슈를 담아낸 것이었습니다.
뉴욕 활동 중 구사마는 지인의 제안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는데, 당시 강박 신경증을 진단받게 돼요. 강박 신경증은 과거 기억 중 충격받은 무언가에 대해서 계속 집착하는 증세를 보이는 게 특징인데요.
구사마의 트라우마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외도 현장을 지켜본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때의 충격으로 성관계와 남근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며 집착하게 된 것이죠. 이를 작품으로 승화한 것이 남근 소파였습니다.
작품은 앤디 워홀(Andy warhol,1928-1987), 도널드 저드(Donald Judd,1928-1994),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1929-2022) 등 유명 화가들의 단체전에 함께 전시되었는데요. 당시 관계자들에 따르면, 결국 사람들의 뇌리에 남은 건 워홀도 저드도 아닌, 구사마의 남근 소파였다고 할 정도로 파급력이 컸죠.
작품은 거울로 된 정육면체의 방으로, 조명과 장치를 활용해 그 무한함이 느껴지게 설계한 것이 특징인데요. 이전에 선보인 페인팅 작업, <무한의 망>이 무한이라는 개념을 2차원적으로 표현한 거라면, 이 작품은 3차원으로 확장해 관객이 물리적으로 경험하게끔 했습니다.
당시 우주로 인간이 가게 되면서 무한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에게 아주 친숙했는데요. 거울로 무한한 풍경을 직접 접하게 한 구사마의 시도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확장한 시도이면서, 사회의 흐름을 반영한 시도였습니다. 미술사적으로도 높게 평가받을 여지가 있었죠.
루카스 사마라스와 그의 거울 방 작품
하지만 이 역시 표절로 이어지게 됩니다.
같은 시기 활동하던 예술가, 루카스 사마라스(Lucas Samaras,1936-2024)가 얼마 뒤 페이스 갤러리에서 거울 방 작품을 선보인 것이죠. 이건 이전에 루카스가 하던 작업과 전혀 다른 맥락의 시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더 유명한 갤러리에서 선보인 탓에 그의 시도가 더 주목받았죠. 구사마는 동료 예술가에게 세 번이나 크리에이티브를 빼앗겼습니다.
결국 구사마는 큰 우울감에 빠져, 어느 날 창문에서 뛰어내리게 됩니다. 다행히 자전거 위로 떨어지며 살게 되었고, 구사마는 어느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자신만의 작품을 선보이기로 해요.
그리고 이탈리아 국가관 앞 정원에 미러볼을 깔아두는 퍼포먼스 <나르시스 정원>(1966)을 선보여요. 당시 구사마는 허가 신청서에 ‘아방가르드의 진정한 본질을 보여주는 창의적인 새로운 아이디어를 선보이겠다’고 적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러볼을 개당 2달러에 판매했는데요.
더 큰 예술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학술적 장인 비엔날레에서 작품을 판매하는 건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주최 측이 제발 작품을 팔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자, 구사마는 ‘미술작품을 왜 핫도그나 아이스크림처럼 팔면 안 되냐’고 대답했어요. 예술은 소수의 사람들이 아닌 더 많은 대중을 상대로 그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죠.
그리고 기모노를 벗고 미러볼 사이에서 춤을 추거나 누웠습니다. 이는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며 많은 사진으로 기록됐어요.
당시 베니스 비엔날레는 전반적으로 밋밋하고 지루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구사마의 미러볼 전시는 스캔들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구사마가 신청서에 적은 대로, 아방가르드의 진정한 본질을 보여주었죠. 구사마는 이후 1967년에 앤디 워홀보다 신문에 더 많이 등장한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까지 돌아가시며 구사마의 정신에 이상이 생깁니다. 너무 우울해져 그림까지 그리기 힘든 경험을 하자 스스로 정신병원에 찾아가 자진 입원을 해요.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갑니다.
뉴욕에서는 구사마의 이름이 알려져 있었지만, 일본은 구사마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전시를 열 수 있는 곳이 없었어요. 뉴욕에 가기 전 처음 전시를 열었던 고향의 작은 갤러리에서나 전시를 열 수 있었죠.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뉴욕으로 가기 전과 구사마의 입지는 똑같았죠. 게다가 뉴욕에서 마저도 구사마는 빠르게 잊히고 있었습니다.
1968년에는 구사마를 다룬 기사가 150편 나왔지만, 3년 만인 1971년에는 단 한편도 나오지 않았죠. 뉴욕 어느 갤러리에서도 구사마 작품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 시기는 무려 20년간 길게 이어졌는데요.
구사마는 그럼에도 계속 예술을 이어갑니다. 일본에서 단편 소설과 시 작업을 하며 문학상을 받기도 했죠. 소설은 노골적인 성적 묘사와 맨해튼 하위문화를 환각적으로 묘사했는데요. 이 시도가 일본 문학 팬들에게 발견되며 구사마의 예술성을 다시 드높여줍니다.
구사마 야요이, 재평가되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장에서 구사마 야요이
이 시기 구사마는 정신병원에서 틈틈이 미술 작품을 만들고 있었는데요. 1993년, 20여 년 만에 기회가 찾아옵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일본 대표로 나가게 된 것이죠. 당시 일본 측은 구사마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점 때문에 염려했지만, 큐레이터의 확신으로 일본관 최초의 개인전을 열게 됩니다.
이는 구사마에게 큰 귀감이었어요. 게다가 30년 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진행한 퍼포먼스는 주최 측의 제지를 받았지만 이번엔 당당하게 일본관의 대표로서 참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뉴욕현대미술관 전시 포스터와 전시 전경 ⓒ MoMA
그렇게 구사마의 재평가가 시작됩니다. 이윽고 1998년에는 구사마가 무단 퍼포먼스를 벌인 뉴욕현대미술관에서도 회고전을 진행하게 되었죠. 이후 세계 곳곳에서 구사마의 전시가 진행됩니다. 나중에는 관객이 몰려, 미술관 종료시간을 넘겨 밤새 전시를 진행하기도 했죠.
이 시기 구사마는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 스포트라이트를 반기는 듯, 새로운 작품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나오시마 섬에 설치된 <호박>(1994)이죠.
Photo: Tadasu Yamamoto
작품은 그간 구사마의 그림에서 꾸준히 소재로 등당했던 호박을 조각으로 만든 시도였는데요. 구사마의 시그니처인 점이 패턴을 이루며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바다를 배경으로 전시된 풍경은 엄청난 이목을 끌었죠. 이 호박은 구사마가 처음으로 선보인 야외용 조각이었는데요. 작품이 화제가 되며 이후 일본뿐 아니라 프랑스, 미국, 한국 등 다양한 나라에 전시됩니다.
2002년에는 자신의 설치작품 <무한의 방>을 새롭게 재해석한 <소멸의 방>을 선보여요. 모든 것이 흰색으로 칠해진 가정집의 모습을 한 공간인데요. 관객은 이 공간에 입장할 때 크기와 색이 다양한 스티커를 한 장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스티커를 어디든 붙일 수 있었죠. 그렇게 작품은 일상적인 공간에서 갖가지 스티커로 두껍게 뒤덮인 곳이 됩니다.
무한하게 뻗어나가는 점을 환각으로 느끼던 구사마가, 자신의 경험을 관객에게 넘겨준 것이죠.
마크 제이콥스와 구사마 야요이 ⓒ LVMH
계속 새로운 예술적 크리에이티브를 보여준 구사마는 이후 2012년에는 더 대중적인 차원의 기획을 선보입니다.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와 협력해 루이비통 콜라보를 진행한 것이죠. 당시로선 드물었던 예술가와 명품 브랜드의 대대적인 협업에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휘트니 미술관에서는 브랜드 협업이 시작된 다음 날, 구사마의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하며 그 파급력을 더욱 크게 확장했죠. 그렇게 구사마는 예술과 대중 모두 잡은 예술가로 마침내 바로 설 수 있었습니다.
ⓒ Sotheby's
오늘날 구사마는 예술성과 크리에이티브, 대중성과 상업성을 갖춘 작가로 평가받아요.
세상은 그를 무시하고 그의 아이디어를 훔치곤 했지만, 구사마는 의연하게 자신의 작품만을 꾸준히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지금까지 모든 에너지를 작품 활동에 쏟아붓고 있죠.
구사마 야요이(Kusama Yayoi, 1929~)의 커리어는 상당합니다. 2024년 기준 나이 95세로, 동시대 활동하던 작가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활동 중이죠. 그리고 긴 활동 기간 동안 많은 이력을 남겼습니다.
(1) 작품 최고가 148억 원 기록
(2) 현대미술 작가 중 경매 판매액 1위 (2023년 기준 1억 8970만 달러)
(3) 누적 경매 작품 9,400점으로 여성 작가 중 가장 많은 작품 거래 수를 기록한 작가죠.
생존 작가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의 시장가치를 보여주는 구사마는 미술시장뿐만 아니라 미술관, 대중에게도 고르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정신병을 작품으로 승화한 작가이자, 호박 할머니, 무한한 물방울 점으로 잘 알려져 있죠.
© YAYOI KUSAMA
하지만 구사마의 예술적 가치는 단순 경제적인 기록과 유명세를 넘어, 훨씬 더 방대한 크리에이티브를 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미술계에서 불가능할 것 같은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수 차례 선보이고, 성별과 인종의 차별을 이겨내며 계속 더 새로운 예술을 선보였죠.
오늘 소개할 예술가는 무한의 크리에이티브를 가진, 구사마 야요이입니다.
처절함 속에 피어난 어린 구사마의 예술혼
구사마 가족의 모습. 가운데 가장 어린 아이가 구사마다. © YAYOI KUSAMA
구사마는 1929년, 일본 나가노 현 마쓰모토 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종자 도매업을 하면서 수십 명의 직원을 둘 정도로 잘나가는 도매상이었는데요. 집안은 부유했지만 분위기는 최악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외도 때문이었죠.
구사마의 어머니는 구사마를 시켜서 아버지를 감시하게 했는데요. 여느 때처럼 아버지의 뒤를 밟던 중, 아버지와 내연녀의 낯 뜨거운 스킨십을 보게 됩니다. 이는 구사마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겨주었죠.
아버지의 외도를 지켜볼 수밖에 없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화풀이를 하기 시작합니다. 구사마에게 음식도 주지 않은 채 반나절을 창고에 가둬두기도 했죠.
어린 구사마 야요이 © YAYOI KUSAMA
어린 나이에 정신적, 물리적 폭력을 모두 겪은 구사마는 이윽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게 됩니다. 테이블보가 온 방안을 뒤덮고, 점이 무한하게 펼쳐지는 환각을 본 거죠.
그리고 10살 때부터 이를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하는데요. 구사마의 어머니는 그 그림을 모두 빼앗아버립니다. 유일한 자유를 빼앗기기 싫었던 구사마는 그때부터 빠르고 맹렬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요. 어머니가 빼앗기 전에 재빠르게 그림을 완성해 버렸던 것이죠.
조지아 오키프
미술에 대한 어린 날의 야심은 크면서 점점 더 강해져, 이윽고 바다 건너 활동하던 여성 예술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ffe, 1887-1986)에게 편지를 보내기까지 이릅니다.
구사마 야요이가 조지아 오키프에게 보냈던 수채화 작품들 Courtesy of Ota Fine Arts. © YAYOI KUSAMA
진솔하게 적은 편지는 오키프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오키프는 구사마의 수채화를 몇 점 들고 갤러리를 돌며, 작품을 걸만한 곳이 있는지 알아봐 주었죠. 그리고 당시로선 드물었던 여성 예술가를 위해 친절한 조언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편지를 받아본 구사마는 이후, 일본을 떠나 미국에서 작품을 제작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집 근처 강가에서 그동안 그렸던 그림 2천 점을 불태우죠. 앞으로 이것보다는 잘 그리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당시 구사마의 나이 27살이었죠.
전략과 패기로 가득했던 뉴욕행
뉴욕으로 간 구사마 © YAYOI KUSAMA
구사마는 뉴욕에 가자마자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으로 갑니다.
그리고 도시를 내려다보며 ‘미국에서 미술사를 새로 쓰겠다’고 다짐하죠. 하지만 뉴욕 미술계의 벽은 아주 높았어요. 당시 뉴욕에서 여성 작가는 개인전을 여는 경우가 없었고, 단체전에 끼여서 작품을 전시하는 정도만 이뤄졌습니다. 여성 딜러마저도 여성 작가 작품은 거래를 꺼렸고요
구사마는 이에 더해 뉴욕에 간 1958년 당시 보기 드문 아시안이었기에, 더 큰 단점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백인 남성 중심 미술계에서 일본 여성 예술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구사마는 전략을 내세웁니다.
기모노를 입은 구사마 © YAYOI KUSAMA
첫 번째는 의상이었어요.
구사마는 유행하는 옷을 잘 갖춰 입을 정도로 옷을 잘 입었던 예술가입니다. 하지만 공식 석상이 있을 때마다 기모노를 입고 다니며, 오묘하고 신비로운 아시안 여성의 매력을 발산했어요. 일본에서는 단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던 기모노였지만, 이 의상이 보수적이고, 국가적 자긍심에 가득 찬 미국인들에게 이국적인 새로움을 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짙은 화장과 진한 향수를 뿌려 자신의 강렬함을 부각했죠. 이 전략은 제법 잘 통했습니다. 전시 오프닝이 있을 때마다 작품만큼이나 구사마의 의상이 주목받았죠.
전시 오프닝장에서의 구사마 야요이 Courtesy of Ota Fine Arts. © YAYOI KUSAMA
또 구사마는 상당한 사교술을 가지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당당하게 자신의 니즈를 오픈하고, 이에 맞는 사람을 찾아 전략적으로 어울렸죠. 뉴욕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사마는 머물 아파트와 미술재료를 지원해 줄 잘생긴 후원자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자신의 개인전을 열어줄 갤러리를 물색하고 다녔죠.
© YAYOI KUSAMA
이 시기 구사마가 선보이던 작업은 <무한의 망>(1958) 시리즈였는데요.
이 역시 전략적으로 기획한 그림입니다. 당시 뉴욕에서 유행하던 화풍은 액션 페인팅이었어요. 잭슨 폴록 이후 이어진 흐름이었는데요. 구사마는 똑같은 작업은 하나마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주 개인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요.
Pacific Ocean, 1959 Courtesy of Ota Fine Arts. © YAYOI KUSAMA
이 시기 구사마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태평양을 그립니다.
마치 거대한 그물 같은 그림은 바다의 윤슬을 표현한 것이었는데요. 이를 더 크고 더 기계적으로 표현한 <무한의 망>(1958) 시리즈를 선보이기 시작해요.
작품은 마치 물고기의 비늘처럼 겹겹이 쌓인 수백 개의 반원형 붓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배경도, 주인공도 없는 붓질은 캔버스의 가장자리에서 시작해 멈추지 않고 끝없이 확장되죠.
<무한의 망> 그림 앞 구사마 야요이 © YAYOI KUSAMA
구사마는 그림을 그리며 죽을 듯이 노력했다 이야기합니다. 거의 10미터나 되는 그물망 그림도 있었죠.
그림은 평단의 찬사를 받습니다. 미술계 만연하던 액션 페인팅과는 다른, 명상적인 작품은 이목을 끌었죠. 미니멀리즘 예술의 대가이자 예술 비평가인 도널드 저드는 <무한의 망>을 들어 겹겹이 이루어진 회화의 중층 구조를 조형적 관점에서 예리하게 파악했다며 선도적인 콘셉트라 이야기했죠. 미술계의 눈길을 얻은 구사마는 더 큰 스튜디오로 작업실을 옮기게 됩니다.
크리에이티브와 표절의 반복
<남근 소파>(1962) ⓒ MoMA
더 커진 공간에서 구사마는 더 새로운 크리에이티브를 내놓습니다. 이 시기 선보인 작품 중 가장 파급력 있던 건 <남근 소파>(1962)였어요. 남근 형상으로 가득한 천 조각으로 소파를 뒤덮은 작품이었는데요. 이 소파는 구사마의 정신적인 이슈를 담아낸 것이었습니다.
뉴욕 활동 중 구사마는 지인의 제안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는데, 당시 강박 신경증을 진단받게 돼요. 강박 신경증은 과거 기억 중 충격받은 무언가에 대해서 계속 집착하는 증세를 보이는 게 특징인데요.
Courtesy of Ota Fine Arts. © YAYOI KUSAMA
구사마의 트라우마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외도 현장을 지켜본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때의 충격으로 성관계와 남근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며 집착하게 된 것이죠. 이를 작품으로 승화한 것이 남근 소파였습니다.
작품은 앤디 워홀(Andy warhol,1928-1987), 도널드 저드(Donald Judd,1928-1994),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1929-2022) 등 유명 화가들의 단체전에 함께 전시되었는데요. 당시 관계자들에 따르면, 결국 사람들의 뇌리에 남은 건 워홀도 저드도 아닌, 구사마의 남근 소파였다고 할 정도로 파급력이 컸죠.
클래스 올덴버그와 그의 작품 <Soft Calendar for the Month of August>, 1962 © 2000–2024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시 함께 전시했던 작가 클래스 올덴버그가 이 전시 이후, 섬유와 바느질을 활용한 작품을 내놓기 시작한 거죠. 전통적으로 섬유와 바느질을 활용한 시도는 여성의 작업물로 여겨졌고, 이전까지 올덴버그가 해왔던 작업과도 결이 달랐습니다.
하지만 이 시도가 독특하다 주목받으며, 올덴버그는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스타가 됩니다. 올덴버그는 구사마와 아주 가까이 살던 이웃이기도 했는데요. 당시 올덴버그의 작업을 도와주던 그의 아내는 구사마에게 사과하며 표절을 시인하기도 했죠.
One Thousand Boats Show, 1963 Courtesy of Ota Fine Arts. © YAYOI KUSAMA
크리에이티브 표절 사건은 계속 이어집니다.
구사마는 이듬해, 남근 모티브를 활용한 배 작업을 내놓는데요. 배 작품 사진을 흑백으로 999장 인화해, 전시 공간의 벽과 바닥, 천장까지 모조리 덮었습니다. 그리고 전시장의 마지막 공간에서 진짜 배 작품을 맞이하게끔 설치했죠.
이는 대량생산 사회에서 복제본에 대한 원본의 우위를 보여주는 시도였는데요. 그러던 중 대량생산을 옹호하는 작품을 선보이는 앤디 워홀이 전시장에 방문합니다. 워홀은 구사마에게 아주 훌륭한 디스플레이라며 극찬했죠.
그리고 얼마 후 이어진 자신의 전시에서 구사마가 했던 것과 똑같은 디스플레이를 선보입니다. 소 머리 그림 작품을 인화해 전시 공간을 뒤덮은 것이죠.
구사마의 디피 방식을 베꼈다 불리는 앤디 워홀의 전시 디피
구사마는 전례 없던 새로운 시도를 했지만, 남녀 차별과 인종차별로 인해 스포트라이트를 백인 남성 작가들에게 모두 빼앗겨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구사마는 무너지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해내기로 해요. 자신의 무한한 크리에이티브를 이용한 거죠.
Courtesy of Ota Fine Arts. © YAYOI KUSAMA
그렇게 내놓은 작품이 <무한의 방>입니다.
작품은 거울로 된 정육면체의 방으로, 조명과 장치를 활용해 그 무한함이 느껴지게 설계한 것이 특징인데요. 이전에 선보인 페인팅 작업, <무한의 망>이 무한이라는 개념을 2차원적으로 표현한 거라면, 이 작품은 3차원으로 확장해 관객이 물리적으로 경험하게끔 했습니다.
당시 우주로 인간이 가게 되면서 무한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에게 아주 친숙했는데요. 거울로 무한한 풍경을 직접 접하게 한 구사마의 시도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확장한 시도이면서, 사회의 흐름을 반영한 시도였습니다. 미술사적으로도 높게 평가받을 여지가 있었죠.
루카스 사마라스와 그의 거울 방 작품
하지만 이 역시 표절로 이어지게 됩니다.
같은 시기 활동하던 예술가, 루카스 사마라스(Lucas Samaras,1936-2024)가 얼마 뒤 페이스 갤러리에서 거울 방 작품을 선보인 것이죠. 이건 이전에 루카스가 하던 작업과 전혀 다른 맥락의 시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더 유명한 갤러리에서 선보인 탓에 그의 시도가 더 주목받았죠. 구사마는 동료 예술가에게 세 번이나 크리에이티브를 빼앗겼습니다.
결국 구사마는 큰 우울감에 빠져, 어느 날 창문에서 뛰어내리게 됩니다. 다행히 자전거 위로 떨어지며 살게 되었고, 구사마는 어느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자신만의 작품을 선보이기로 해요.
과격해진 구사마, 해프닝의 시작
© YAYOI KUSAMA
그렇게 선보인 것이 퍼포먼스 아트였습니다. 이 역시 본인 작업이 가진 세계관의 연장선이었어요.
1964년 도널드 저드는 ‘구사마 야요이의 작품을 보는 것은, 작품 자체가 아니라 구사마가 행한 작업의 결과를 보는 것’이라 말했어요. 아직 퍼포먼스 아트라는 용어가 생겨나기 전이었지만, 퍼포먼스적인 성격이 있는 작업임을 시사하는 평론이었죠.
구사마 역시 본인 작업의 육체노동적 특성을 보여주고자, 전문 사진가를 고용해 작업 과정을 담은 사진을 일찍이 많이 남겼습니다. 작품 사진을 촬영할 때는 늘 본인도 함께 프레임에 담겼고요. 그렇게 관객이 작품을 보며 구사마의 육체노동을 떠올리게 만들었죠.
Courtesy of Ota Fine Arts. © YAYOI KUSAMA
이후 구사마는 1966년 진행된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관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국가관 앞 정원에 미러볼을 깔아두는 퍼포먼스 <나르시스 정원>(1966)을 선보여요. 당시 구사마는 허가 신청서에 ‘아방가르드의 진정한 본질을 보여주는 창의적인 새로운 아이디어를 선보이겠다’고 적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러볼을 개당 2달러에 판매했는데요.
더 큰 예술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학술적 장인 비엔날레에서 작품을 판매하는 건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주최 측이 제발 작품을 팔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자, 구사마는 ‘미술작품을 왜 핫도그나 아이스크림처럼 팔면 안 되냐’고 대답했어요. 예술은 소수의 사람들이 아닌 더 많은 대중을 상대로 그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죠.
Courtesy of Ota Fine Arts. © YAYOI KUSAMA
그리고 기모노를 벗고 미러볼 사이에서 춤을 추거나 누웠습니다. 이는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며 많은 사진으로 기록됐어요.
당시 베니스 비엔날레는 전반적으로 밋밋하고 지루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구사마의 미러볼 전시는 스캔들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구사마가 신청서에 적은 대로, 아방가르드의 진정한 본질을 보여주었죠. 구사마는 이후 1967년에 앤디 워홀보다 신문에 더 많이 등장한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Courtesy of Ota Fine Arts. © YAYOI KUSAMA
이후 구사마는 자신의 크리에이티브를 선보이기 위해, 더 자극적인 알몸 퍼포먼스를 벌이기 시작해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공원에서 일련의 바디 페스티벌을 열었죠. 구사마는 알몸이 된 관객에게 둥근 점을 그려 넣으면서 이런 슬로건을 제시합니다.
‘몸을 즐겁게 하라’
‘배워라, 잊어라, 다시 배워라!’
Courtesy of Ota Fine Arts. © YAYOI KUSAMA
이벤트는 많은 참여자를 만들며 주목받았고, 이를 계기로 구사마는 대중매체에서 ‘알몸의 여사제’ ‘도티’라 불리게 되었죠. 그렇게 뉴욕 예술계에 자신을 명확하게 인식시킵니다.
이는 이후 뉴욕현대미술관과 유엔 선거관리위원회 건물, 뉴욕 지하철 등에서 이어지면서 매번 파급력을 만들어냈어요.
과격함 뒤에 찾아온 나락
© YAYOI KUSAMA
하지만 일본은 구사마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누드 퍼포먼스를 벌이던 구사마를 스캔들 메이커로만 치부했고, 구사마의 고등학교는 졸업자 명단에서 구사마 야요이를 지워버렸죠. 가족들마저도 구사마를 부끄러워했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까지 돌아가시며 구사마의 정신에 이상이 생깁니다. 너무 우울해져 그림까지 그리기 힘든 경험을 하자 스스로 정신병원에 찾아가 자진 입원을 해요.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갑니다.
뉴욕에서는 구사마의 이름이 알려져 있었지만, 일본은 구사마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전시를 열 수 있는 곳이 없었어요. 뉴욕에 가기 전 처음 전시를 열었던 고향의 작은 갤러리에서나 전시를 열 수 있었죠.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뉴욕으로 가기 전과 구사마의 입지는 똑같았죠. 게다가 뉴욕에서 마저도 구사마는 빠르게 잊히고 있었습니다.
© YAYOI KUSAMA
1968년에는 구사마를 다룬 기사가 150편 나왔지만, 3년 만인 1971년에는 단 한편도 나오지 않았죠. 뉴욕 어느 갤러리에서도 구사마 작품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 시기는 무려 20년간 길게 이어졌는데요.
구사마는 그럼에도 계속 예술을 이어갑니다. 일본에서 단편 소설과 시 작업을 하며 문학상을 받기도 했죠. 소설은 노골적인 성적 묘사와 맨해튼 하위문화를 환각적으로 묘사했는데요. 이 시도가 일본 문학 팬들에게 발견되며 구사마의 예술성을 다시 드높여줍니다.
구사마 야요이, 재평가되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장에서 구사마 야요이
이 시기 구사마는 정신병원에서 틈틈이 미술 작품을 만들고 있었는데요. 1993년, 20여 년 만에 기회가 찾아옵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일본 대표로 나가게 된 것이죠. 당시 일본 측은 구사마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점 때문에 염려했지만, 큐레이터의 확신으로 일본관 최초의 개인전을 열게 됩니다.
이는 구사마에게 큰 귀감이었어요. 게다가 30년 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진행한 퍼포먼스는 주최 측의 제지를 받았지만 이번엔 당당하게 일본관의 대표로서 참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뉴욕현대미술관 전시 포스터와 전시 전경 ⓒ MoMA
그렇게 구사마의 재평가가 시작됩니다. 이윽고 1998년에는 구사마가 무단 퍼포먼스를 벌인 뉴욕현대미술관에서도 회고전을 진행하게 되었죠. 이후 세계 곳곳에서 구사마의 전시가 진행됩니다. 나중에는 관객이 몰려, 미술관 종료시간을 넘겨 밤새 전시를 진행하기도 했죠.
이 시기 구사마는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 스포트라이트를 반기는 듯, 새로운 작품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나오시마 섬에 설치된 <호박>(1994)이죠.
Photo: Tadasu Yamamoto
작품은 그간 구사마의 그림에서 꾸준히 소재로 등당했던 호박을 조각으로 만든 시도였는데요. 구사마의 시그니처인 점이 패턴을 이루며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바다를 배경으로 전시된 풍경은 엄청난 이목을 끌었죠. 이 호박은 구사마가 처음으로 선보인 야외용 조각이었는데요. 작품이 화제가 되며 이후 일본뿐 아니라 프랑스, 미국, 한국 등 다양한 나라에 전시됩니다.
20년간의 암흑기 끝에 찾아온 전성기
Courtesy of Ota Fine Arts. © YAYOI KUSAMA
구사마는 이렇게 말하며 의연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The obliteration room, 2002 © YAYOI KUSAMA
그리고 계속해서 자신의 크리에이티브를 확장하죠.
2002년에는 자신의 설치작품 <무한의 방>을 새롭게 재해석한 <소멸의 방>을 선보여요. 모든 것이 흰색으로 칠해진 가정집의 모습을 한 공간인데요. 관객은 이 공간에 입장할 때 크기와 색이 다양한 스티커를 한 장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스티커를 어디든 붙일 수 있었죠. 그렇게 작품은 일상적인 공간에서 갖가지 스티커로 두껍게 뒤덮인 곳이 됩니다.
무한하게 뻗어나가는 점을 환각으로 느끼던 구사마가, 자신의 경험을 관객에게 넘겨준 것이죠.
마크 제이콥스와 구사마 야요이 ⓒ LVMH
계속 새로운 예술적 크리에이티브를 보여준 구사마는 이후 2012년에는 더 대중적인 차원의 기획을 선보입니다.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와 협력해 루이비통 콜라보를 진행한 것이죠. 당시로선 드물었던 예술가와 명품 브랜드의 대대적인 협업에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휘트니 미술관에서는 브랜드 협업이 시작된 다음 날, 구사마의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하며 그 파급력을 더욱 크게 확장했죠. 그렇게 구사마는 예술과 대중 모두 잡은 예술가로 마침내 바로 설 수 있었습니다.
ⓒ Sotheby's
오늘날 구사마는 예술성과 크리에이티브, 대중성과 상업성을 갖춘 작가로 평가받아요.
세상은 그를 무시하고 그의 아이디어를 훔치곤 했지만, 구사마는 의연하게 자신의 작품만을 꾸준히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지금까지 모든 에너지를 작품 활동에 쏟아붓고 있죠.
© YAYOI KUSAMA
무한히 뻗어나가는 구사마의 크리에이티브는 역경 덕분에 오늘날 더 밝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많은 귀감을 안겨주죠. 오늘은 구사마가 남긴 말로 마무리 지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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