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파티: 파스텔로 쌓아 올린 허상의 예술

파스텔 작업 중인 니콜라스 파티



1980년 생 스위스 작가, 니콜라스 파티는 화려한 이름만큼 화려한 색채를 보여주는 작가입니다. 이 찬란한 색채는 모두 파스텔로 만든 거예요. 그런데 사실, 파스텔은 미술관에서 보기 쉽지 않은 재료입니다. 과거부터 몇몇 예술가들이 파스텔을 사용하긴 했지만, 페인팅 작업에 보조적으로 활용하거나, 빠른 스케치가 필요한 드로잉 작업, 혹은 습작에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파스텔의 뚜렷한 단점 때문인데요.


우선 파스텔은 스틱 형태로 되어 있어서 세밀한 묘사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용할 때마다 가루가 많이 나오는데, 이 때문에 재료 낭비도 많은 편이죠. 이 가루를 손으로 문질러가면서 그리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되면 피부가 캔버스의 거친 면과 닿으면서, 피부와 캔버스 모두 자극이 생기기 쉬워요. 그래서 대형 작업에는 적합하지 않죠.



에드가 드가의 파스텔화들

Edgar Degas, Waiting, 1882 / Edgar Degas, Standing Dancer, 1879


그래도 물감보다 빠르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드로잉이나 습작에 활용을 많이 했습니다. 또 물감 위에 올려도 선명한 색감이 구현 가능해서, 보조적으로 쓰기도 좋았죠. 게다가 건식 재료이기 때문에 작품의 지속성이나 보존에 있어서는 물감을 뛰어넘는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줍니다. 르네상스 거장들의 페인팅 작품보다 스케치가 더 잘 보존된 것도 같은 이유죠. 그럼에도 유화 물감처럼 주인공이 되기에는 단점이 치명적이어서 비주류 재료처럼 여겨지곤 했는데요. 



[1] 니콜라스 파티가 파스텔을 선택한 이유

니콜라스 파티의 정물화

Nicolas Party, Still Life, 2015 ⓒ Christie's


하지만 니콜라스 파티는 그런 파스텔을 본인의 작품의 메인 재료로 활용합니다. 여기엔 아주 개인적인 이유가 있어요. 파티는 1990년, 청소년 시기에 당시 한창 유행하던 그래피티를 했습니다. 그래피티는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불법인, 거리예술 장르인데요. 존재 자체가 불법인 그래피티가 있는 지역은 '범죄의 온상지'라는 인식이 생겨나면서 이를 막기 위한 경찰들의 감시가 삼엄해졌어요. 당시 10대였고, 미숙했던 니콜라스 파티는 경찰에 여러 번 잡혀서 어린 나이에 막대한 벌금을 갚아야 했죠.


하지만 하다 보면 어떤 일이든 요령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나중에는 경찰을 피해서 빠르게 그림 그리는데 익숙해져서, 짧은 시간에 완성도 높은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해요. 그렇게 니콜라스 파티는 그림 그리는 것 그 자체에 재미를 크게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더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요.



파스텔 앞의 니콜라스 파티

파스텔 앞의 니콜라스 파티 ⓒ Artflyer


그중에는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씩은 거쳐가는 재료인 유화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래피티를 하면서, 빠르게 그림을 그려내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고 해요. 실제로 유화 물감은 마르는데 최소 2주에서 길게는 몇 개월씩 걸립니다. 


언제 그림을 두고 튀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 속, 빠르게 완성해 내던 파티에게는 답답한 속도였죠. 그래서 좀 더 빠르게 진행할 수 있는 재료를 고민합니다. 



피카소의 여인 두상 그림

Pablo Picasso, Tête de femme, 1921 ⓒ Fondation Beyeler, Riehen/Basel, Sammlung Beyeler


그러던 중 2013년, 파티는 피카소의 1921년 작품 <여인 두상>을 보게 돼요. 작품은 파스텔로 화면 한가득 여인의 두상을 그려냈는데요. 파티는 이 그림을 보자마자 매료되어서, 파스텔을 사서 이 그림을 베껴 그리기 시작했다고 해요. 그리고 그 순간, 파스텔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재료라는 걸 감각적으로 알게 됩니다. 이때부터 파티가 파스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단순히 재료에 대한 영감만 얻은 건 아니었습니다.


니콜라스 파티의 인물화들

니콜라스 파티의 인물화들 ⓒ Hauser&Wirth


파티가 그린 인물화를 보면, 어딘가 피카소 그림과 비슷한 느낌을 자아내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다른 작가가 그린 다른 그림이지만, 어딘지 느낌이 비슷하게 느껴지죠. 이들의 공통점은 둘 다 성별이 두드러지지 않게 그렸다는 거예요. 피카소 그림 속 여인을 자세히 보면, 굉장히 중성적으로 그려낸 걸 볼 수 있어요. 콧대도 두툼하고, 목도 두꺼운 편이고, 머리카락도 짧습니다. 그간 미술사에서 규정했던 여성성을 모두 지워낸 모습이죠.



[2] 파스텔로 그린 환영
니콜라스 파티의 정물화들

니콜라스 파티의 정물화들 ⓒ Hauser&Wirth


그리고 이런 중성적인, 젠더가 드러나지 않는 표현 방법을 니콜라스 파티도 차용해요. 그렇다 보니, 파티의 그림은 현실 속 인물을 그린 게 아니라, 환상이나 상상 속 인물을 그린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파티는 이윽고 이런 특징을 

인물화 뿐만 아니라 정물화나 풍경화에도 적용하기 시작하는데요. 일례로 정물화를 그릴 때에는 판타지 영화 속 자아가 깃든 무생물 캐릭터처럼 과일을 축 늘어진 상태로 그리거나, 나이를 먹은 것처럼 주름지게 그리거나, 살찐 것처럼 뚱뚱하게, 혹은 삐쩍 마르게 그리기도 해요. 혹은 아예 죽은 것처럼 회색으로 과일을 그릴 때도 있습니다.



Nicolas Party, Water Reflection, 2022 ⓒ Hauser&Wirth

Nicolas Party, Water Reflection, 2022 ⓒ Hauser&Wirth


풍경화를 그릴 때도 마찬가지로 환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전형적인 풍경과 다른 색깔을 사용하기 때문이죠. 일례로 동굴을 그릴 때에는 초록색으로 그리고, 폭포를 그릴 때에는 빨간색, 산을 그릴 때에는 보라색을 활용하는 식입니다.


파티가 이렇게 실제 사물, 혹은 풍경과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형태와 색깔로 그리는 것도 계기가 있었어요. 파스텔화를 하기로 결심하면서, 파티는 미술사 속 파스텔을 활용했던 다른 작가들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발견한 게 로살바 카리에라(Rosalba Carriera)입니다. 



Rosalba Carriera, Self Portrait, 1715

Rosalba Carriera, Self Portrait, 1715


카리에라는 파스텔화의 여왕이라고 불렸던 인물이에요. 여성화가로서는 드물게 엄청난 인기와 명성을 누렸죠. 카리에라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건, 당시 유행하던 로코코 양식을 파스텔을 이용해 그려낸 덕분이 컸습니다.


로코코는 화려한 색채, 섬세한 장식이 돋보이는 18세기 유럽 예술 양식인데요. 이 시기에는 핑크나 스카이 블루, 연한 노랑 같은 따스한 파스텔톤 색감의 옷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파스텔은 이 색감을 구현하는 데 딱 맞는 재료였어요. 당시 파스텔로 모든 작업을 하는 예술가가 드물었던 덕분에 차별점도 가져갈 수 있었고요. 이후 카리에라의 작품은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됩니다. 파티는 카리에라의 그림을 보면서 파스텔 기법이나 색감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로살바 카리에라의 초상화들

로살바 카리에라의 초상화들


그러던 중, 파스텔화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카리에라가 그림을 그리던 당시, 파스텔과 화장품이 똑같은 안료로 만들어졌고, 심지어 똑같은 상점에서 판매되었다는 것이죠. 즉, 파스텔을 얼굴에 바르면 화장인 거고, 그림에 그리면 작품이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파티는, 파스텔을 ‘환영을 만들어내는 도구’라고 봤어요. 화장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추가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림도 2차원 평면에 입체적인 형태를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한 거죠.



Nicolas Party, Landscape, 2021 ⓒ Hauser&Wirth

Nicolas Party, Landscape, 2021 ⓒ Hauser&Wirth


한편, 파스텔은 물리적으로도 환영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스텔은 분필과 비슷한 미술재료인데요. 학창 시절 기억을 떠올려보면, 분필 가루는 정말 많이 날렸습니다. 이게 건강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오늘날 학교에서는 물분필을 활용하고 있기도 하죠. 그런데 파스텔은 분필보다 가루가 더 날리는 재료입니다. 절반가량은 가루가 되어서 날아가 버리죠.


파티는 이 가루 역시, 실질적 본질 없이 먼지로만 이루어진 환영과 같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환영을 그려내는 미술작품에 활용하기에 파스텔이 가장 적합한 재료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쌓아 올린 '미술은 환영이다'라는 세계관 안에서, 그림은 결국 환영이라는 걸 또 한 번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산은 보라색으로, 폭포는 빨간색으로, 과일은 흐물흐물하게 그린 것이죠.



파스텔 작업 중인 니콜라스 파티 ⓒ Artflyer

파스텔 작업 중인 니콜라스 파티 ⓒ Artflyer


파티는 ‘그림은 환영이다’라는 것에 매우 진심이어서, 실제로 그림을 그릴 때도, 사진이나, 모델을 보고 그리지 않는다고 해요. 대부분 환영 그 자체인 ‘상상’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고, 레퍼런스가 필요할 때에는 이전 예술가들이 그린 ‘그림’을 보고 그립니다. 그림은 결국 환영이기 때문이죠.

 


[3] 니콜라스 파티가 환영을 다루는 방법

니콜라스 파티 전시 전경 ⓒ Gesellschaft

니콜라스 파티 전시 전경 ⓒ Gesellschaft


세계관은 변주될 때 팬들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파티는 이걸 잘 알고 있는 예술가에요. 그리고 두 가지 방법을 이용해 환영 세계관을 변주합니다. 첫째로는 벽화 작업이에요. 파티는 개인전이 있을 때마다 해당 미술관 벽에 파스텔로 직접 방대한 벽화를 그리는데요. 파스텔로 벽화 작업을 하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 대부분이 가루로 떨어지기 때문이죠. 책상이나 이젤에 그리게 되면 각도 덕분에 가루를 컨트롤하기가 쉽지만, 벽화는 완전히 90도로 서있는 상태에서 작업해야 해요. 그래서 가루들이 바닥에 바로 떨어집니다


그렇다 보니 다른 파스텔 작업보다도 작업이 오래 걸리고, 많은 파스텔을 필요로 하는데요. 파티는 그래피티 작업을 오래 해온 덕분에, 그림을 빠르게 그려내는 건 자신 있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진행 중인 니콜라스 파티 전시에도 다섯 개의 벽화를 5주 만에 그려냈다고 하죠.



니콜라스 파티 전시 전경 ⓒ Hauser&Wirth

니콜라스 파티 전시 전경 ⓒ Hauser&Wirth


이렇게 만든 벽화 위에는 파티의 다른 파스텔화 작품이 전시되는데요. 벽화에 만들어낸 환영과 캔버스 속 파스텔화가 만든 환영이 중첩되면서, 파티의 각 작품은 매 전시마다 새로운 문맥을 만들어냅니다. 파티는 이를 콜라주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작품이 만들어내는 환영을 전시마다 다른 모습으로 전달하고 있죠.


여담이지만 전시가 끝나면 모든 벽화 작업은 제거한다고 해요. 공들여 만든 작품을 지워버린다는 게 아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파티는 이전에 그래피티 작업을 하면서 다른 아티스트에 의해 작품이 사라지거나, 정부에 의해 지워지는 경험이 많아서 개의치 않는다고 해요. 또 세상 모든 건 언젠간 사라진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이 쿨함이 파티 작품의 매력을 더 더해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미술사 속 부엉이 모티프를 그대로 따와 그린 초상 ⓒ Hauser&Wirth

미술사 속 부엉이 모티프를 그대로 따와 그린 초상 ⓒ Hauser&Wirth


파티가 환영을 다루는 두 번째 방법은, 미술사 속 선배 예술가의 작품에서 모티프를 따오는 것입니다. 파티는 본인 작품뿐만 아니라 타인의 작품 역시 환영이라고 보는데요. 미술사를 통해 그 환영과 재현의 역사를 탐구하면서 자신을 매혹시킨 모티프를 본인 작품에 차용합니다.


그리고 이때는 나름의 규칙이 있어요. 선배 예술가가 그린 모티프와 동일하게 그려낸다는 거죠. 파티는 작품을 그릴 때 색감과 형태에 변화를 주면서, 이게 환영이라는 걸 강조하는데요. 다른 예술가들 역시 자신만의 기법과 개성을 이용해서 변화를 줘왔고, 그 방식을 추가적인 변형 없이 그대로 차용하는 게 선배 예술가들에게 표할 수 있는 경외라고 생각했습니다.



복숭아가 있는 초상, 2024 / 사슴이 있는 초상, 2024 ⓒ Hauser&Wirth

복숭아가 있는 초상, 2024 / 사슴이 있는 초상, 2024 ⓒ Hauser&Wirth


이번 국내 전시에도 한국 전통 고미술품의 모티프를 초상화 작업에 차용한 시리즈를 선보였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모티프를 그대로 차용했죠. 환영에 대한 집착과 연구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진행되는 것 같아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호암미술관 니콜라스 파티 개인전 전경 ⓒ Hauser&Wirth

호암미술관 니콜라스 파티 개인전 전경 ⓒ Hauser&Wirth


좋은 향수나 와인, 술은 시간에 따라 다른 향을 낸다는 말처럼, 니콜라스 파티의 작품 역시 시간에 따라 다른 매력을 보여줍니다. 처음 작품을 마주한 순간엔 화려한 색채와 독특한 형태에 즉각적으로 매료되고, 다음으로는 환영을 강조한 세계관에 서서히 매료되며, 마지막으로는 작품에 차용해낸 미술사적 깊이에 깊게 매료되죠. 


타고난 감각, 철학적으로 탄탄한 논리. 그리고 아는 만큼 보이는 현대미술의 즐거움을 똑똑하게 활용한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환영을 그리는 작가, 니콜라스 파티. 여러분은 그의 작품이 어떻게 와닿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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