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ncent van Gogh, Self Portrait with Bandaged Ear, 1889
고흐의 이름, 빈센트는 기독교식 이름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와 아주 가까웠던 고흐는 기독교에 매우 심취해 있기도 했어요. 이건 고흐가 작가로 데뷔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흐는 성인이 된 스무 살 때부터 스물일곱 살 때까지 명확한 직업이나 적성을 찾지 못하고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했어요. 당시 고흐의 직업 선택에 가장 영향을 준 건 집안 어른들이었는데요. 고흐 집안 어른들의 직업은 단순했습니다. 목사가 되거나, 아니면 화랑을 운영했죠.
그중에서도 고흐의 대부였던 코르 숙부는 유럽의 유명한 화랑 소유주였어요. 1869년에 이미 화랑 지점이 일곱 개나 될 정도로 잘 나갔던 갤러리스트였는데요. 당시 성인이 된 고흐는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으니, 코르 숙부의 화랑에서 일하기 시작합니다.
코르 숙부와 숙부가 운영하던 화랑의 모습 ⓒ van gogh museum
그런데 화랑 일은 고흐 적성에 그리 맞지 않았어요. 처음엔 성실했지만, 점차 말없이 결근하는 일이 많아졌죠. 그렇게 직장을 땡땡이친 날이면 성경을 탐독했습니다. 심지어 화랑에 출근한 날에도 ‘성직자가 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내내 했었다고 해요. 몸은 화랑에 있는데, 마음은 교회에 있었던 거죠. 이윽고 무단결근도 더 자주 하게 되면서, 결국 코르 숙부의 화랑에서 잘리게 됩니다.
하지만 고흐는 그다지 개의치 않아 했어요. 좌절하거나 반성하기보다 오히려 잘 됐다, 이제 성직자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신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고,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벨기에로 선교를 떠나기도 했는데요.
19살의 빈센트 반 고흐 ⓒ van gogh museum
그런데, 고흐 성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고흐는 괴팍하고 고집이 셌던 성격이었고 일에 대한 피드백을 받으면 이를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하고 공격적으로 굴었죠. 이런 괴팍한 성격은 전부터 있었습니다. 여기에 광적인 신앙심이 더해지면서, 봉사를 온 다른 종교인들과 갈등이 생겼다고 해요. 고흐와 함께 공부했던 사람은 ‘빈센트는 복종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고 언급하기도 했죠.
이후 고흐는 어쩌면 종교도 자기 천직이 아닐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종교에 깊게 빠져드는 것과, 종교를 업으로 삼아 사회인으로 거듭나는 건 다른 일이라는 걸 깨달은 거죠. 그렇게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종교인을 그만두고 정한 직업은 예술가였습니다.
Vincent van Gogh, Women on the Peat Moor, 1883 ⓒ van gogh museum
하지만 종교에 대한 사랑은 여전했어요. 기독교의 박애주의적 시선으로 그림에 가난한 노동자, 농부들을 그렸고, 해바라기 같은 꽃을 그릴 때에도 약간 시든 모습을 그려서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이들이나 약한 존재를 묘사하곤 했죠.
이런 기독교적 성향이 잘 드러난 그림은 고흐의 초기작인 <성경이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Bible (1885)>입니다. 작품은 어두운 책상 위에 거대하고 무거운 성경 책이 펼쳐진 채 놓여 있고, 그 앞쪽에 노란 책이 하나 놓인 모습을 그린 정물화에요. 이 책들 옆쪽으로는 촛대가 하나 있는데요. 촛대 불빛이 꺼져있습니다. 꺼진 촛대는 빛이 사라졌음을 암시하면서, 고흐가 종교적 빛이나 신앙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 역할을 해요.
Vincent van Gogh, Still Life with Bible, 1885 ⓒ van gogh museum
그림에 활용된 거대한 성경책은 개신교 목사였던 반 고흐의 아버지 것이었다고 하는데요. 사실 고흐는 어렸을 때부터 목사인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보면서 마찬가지로 목사가 되기를 막연히 꿈꿔왔습니다. 그런데 성직자의 꿈을 버리고 화가가 되었죠. 그렇게 촛불과 성경을 통해서 종교를 저버린, 고흐의 상실감을 표현한 건데요.
그림의 진정성은 고흐의 당시 상황에서 완성됩니다. 이 그림을 그렸을 1885년에는 고흐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목사였지만, 형제들이 화랑을 하는 이들이 많아 화가의 생활을 잘 알고 있었고, 고흐가 예술가가 되는 걸 격하게 반대했는데요. 고흐의 고집은 완강했기 때문에 부자 갈등이 매우 심했습니다. 그런데 종교의 꿈을 꾸게 만든 존재이자, 화가를 반대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두 배로 느끼게 된 상실감을 은유적으로 드러낸 거라 볼 수 있죠.
에밀 졸라와 <삶의 기쁨>
그리고 화가가 된 고흐의 새로운 관심사를 앞에 놓인 노란 책을 통해 은유합니다. 이 책은 1884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에밀 졸라의 12번째 소설, <삶의 기쁨>이에요. 책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에밀 졸라는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전통적인 신앙이 부재한 상황에서 우리가 삶의 모든 비극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존재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요.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신앙이 필요하다고 시사하는데요.
고흐는 <삶의 기쁨>을 현대인의 성경이라 봤습니다. 그리고 가장 전통적인 종교를 상징하는 성경책과 에밀 졸라의 소설을 대비되게 배치하면서, 그간 중요했던 종교에 대한 신앙심이 아닌 예술을 통해 새로운 신앙을 찾았음을 표현하죠.
Vincent van Gogh, The Potato Eaters, 1885 ⓒ van gogh museum
고흐는 종교인과 화가가 사실상 같은 직업이라고 봤습니다.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깨달음을 주기 때문이죠. 고흐의 모든 그림은 이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1885년 남긴 고흐의 첫 대박 <감자 먹는 사람들>은 고흐 방식의 성화라 불리는데요. 하루 종일 노동하고 피곤한 몸으로 모여 앉아 감자를 먹는 농부 가족의 모습은 낮은 곳을 굽이 살피던 기독교의 박애주의 시선과 맞닿아 있습니다. 고흐는 그림에서 이들의 거친 손에 집중해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강조해 보여주죠.
당시 다른 그림들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그림으로 그리며 영원히 세상에 남게 하고, 그 아름다움을 곱씹게 만들었는데요. 고흐의 그림은 노동의 가치를 세상에 남게 하고 그 신성함을 곱씹게 만들었습니다. 당시의 그림과 목적은 달랐지만, 오히려 이것이 고흐 예술만의 독창적인 지점을 만들어내면서 오늘날까지 고흐의 예술은 관객에게 사랑받고 있어요.
2. 반 고흐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
고흐가 사랑한 사촌누나 케이트 스트리커 ⓒ van gogh museum
고흐는 비극적인 삶 때문에 사랑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에요. 하지만 고흐도 절절한 사랑을 했던 인물입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여인은 두 명이에요. 고흐의 사촌인 케이트 스트리커, 그리고 거리의 매춘부였던 시엔 호오크죠.
우선 케이트는 고흐의 사촌 누나입니다. 고흐의 나이 28살 때 케이트를 만났는데요. 당시 케이트는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상태였어요. 고흐는 케이에게 강렬한 감정을 느꼈고, 케이와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런데 그 결심은 고흐 혼자서만 한 결심이었어요. 케이트는 고흐의 구애를 완강히 거부했죠.
당시 고흐는 케이트에게 ‘당신을 만난 후 작업이 한결 나아졌다’면서 가족의 반대를 피해 헤이그로 가서 동거하자고 고집을 부립니다. 하지만 케이트는 아직 남편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어요. 그리고 고흐의 구애를 거절했죠. 그럼에도 고흐는 계속 구애를 이어갑니다.
한 번은 케이트를 만나러 외삼촌 가족이 지내는 암스테르담 목사관으로 찾아가는데요. 외삼촌은 케이트가 지금 이곳에 없다며 딸의 편지를 전해줍니다. 거기엔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어요. 고흐는 자신의 손을 램프 속에 집어넣고 케이트를 만나게 해달라고 협박해요. 하지만 화상만 입었을 뿐, 케이트를 만날 순 없었습니다. 이후 고흐는 가족들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죠.
고흐가 그린 시엔, The Great Lady (1882), Woman with a Child on her Lap (1883) ⓒ van gogh museum
그렇게 좌절한 고흐에게 두 번째 여인이 생기게 됩니다. 거리의 매춘부이자, 네 살 연상의 ‘시엔’이었죠. 시엔과 고흐는 헤이그에서 만났는데요. 당시 시엔은 이미 아이가 있었고, 또 임신을 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모두 다른 사람이었을 거라고 해요. 더 안타까운 건,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당시 고흐는 시엔과 시엔의 자녀들에게 깊은 연민, 측은지심을 느꼈어요. 그리고 시엔과 아이들을 구원하고 삶을 변화시키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고흐는 시엔을 기독교 이름인 크리스틴이라 부르며
사랑하고 아껴주었습니다. 당시 고흐는 시엔과 약 1년간 동거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시엔과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고흐의 가족들이 이를 반대하고 나서요. 가족의 반대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Vincent van Gogh, Self Portrait, 1886 ⓒ van gogh museum
당시 고흐는 화가로 이제 막 진로를 결정한 후였고, 마땅한 후원자도 없고, 그림 실력도 뛰어나지 않았던 상황에서 결혼에, 자식 둘까지 키우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본 것이었죠. 고흐 역시 이를 알고 있었는지, 언제나 모든 이슈를 공유하던 동생 테오에게도 동거한 지 반년이 되었을 때야 시엔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고흐 아버지는 고흐를 정신병원에 넣겠다고 협박했어요. 하지만 고흐는 이번에도 완강했습니다. 자식을 정신병원에 넣으면, 나는 아버지를 경찰에 고발해, 세상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하게 하고 소송비도 부담하게 만들 것이라 말했죠. 대립은 팽팽해집니다.
이때는 고흐가 뭘 하든 늘 지지해 주던 동생 테오도 반대했어요. 형이 시엔과 결혼을 포기하고 작품에만 전념한다고 약속하면,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겠다고 말하기도 했죠. 그럼에도 고흐는 계속 사랑을 이어갔는데요. 당시 시엔의 매춘을 반대하면서 생활비가 빠르게 줄어들자, 시엔과 결혼은 무리라는 걸 깨닫고 1년 8개월의 동거 끝에 결별합니다. 이후 시엔은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해요. 고흐와 헤어진 후 몇 년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Vincent Van Gogh, Sorrow, ⓒ van gogh museum
이들의 사랑은 절절했습니다. 고흐는 시엔의 그림을 여러 점 남기기도 했는데요. 이때는 고흐가 돈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페인팅 작품은 없고, 대부분 초크를 활용해 그렸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슬픔 Sorrow (1882)>이에요. 이 그림은 여인이 그려져있는데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쪼그려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파묻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제목처럼 깊은 슬픔에 빠진 모습을 그려냈는데, 임신해서 부른 배, 축 처진 가슴, 먹지 못해 깡마른 팔다리를 통해 이 여인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를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주목할 만한 건, 작품 하단에 새겨진 글귀에요. 해석하면, “어떻게 이 세상에 버림받은 여자가 혼자 존재할 수 있나”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그림의 주제의식을 글로 표현하는 순간, 너무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게 되어 작품의 깊이가 얇아질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회화 작품이라기보다는 신문의 삽화같이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고흐는 이 그림을 여러 번 그리고, 또 글을 새겨 넣으면서 그림의 주제의식을 직설적으로 표현했어요. 그만큼 고흐가 시엔에게 느낀 감정이 컸다는 걸 헤아려볼 수 있죠.
3. 고흐의 명성을 만든 제3의 인물
Vincent van gogh, Self-Portrait with Pipe and Straw Hat, 1887 ⓒ van gogh museum
고흐 하면 평생 무명화가로 살았던 비운의 인물이라 이야기하지만, 사실 고흐는 인생 말년에 유명해지고 있었어요. 1888년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향하면서 화가로서의 큰 결심을 한 덕분인데요. 이 시기 고흐는 식사 주문 외에는 아무와도 말하지 않고, 내내 그림만 그리며 다작했습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시간엔 편지를 쓰거나 책을 읽으며 본인 예술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이어갔고요.
덕분에 고흐는 사망 1년 전인 1889년부터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프랑스 대표 현대미술 지인 <Mercure de France>에서는 고흐의 화려한 색감, 뛰어난 관찰력을 호평했고, 1889년에는 고흐의 유화 작품 <붉은 포도밭 (1888)>이 판매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고흐가 생전에 판매한 유일한 유화 작품이에요. 이전까지는 습작이나 소품만 몇 점 팔렸고, 대부분 100프랑에 판매되었는데요. 이 작품은 언론에 고흐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하면서 400프랑이라는 고가에 판매됩니다.
Vincent van gogh, The Red Vineyard, 1888 ⓒ van gogh museum
하지만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듯이, 고흐는 예술가로서 이름을 막 알리기 시작할 때 가장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었어요. 이름이 알려지는 것과 별개로 고흐 그림은 아직 낯선 화풍이었기 때문에, 구매까지 이어지진 못 했던 거죠. 당시 고흐 그림의 판매를 맡고 있던 동생 테오는 이 사실을 고흐에게 숨기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어느 날 고흐가 연락 없이 테오 집에 들르게 되며 사실이 드러납니다.
테오 집에서, 본인 작품이 팔리지 않고 쌓여있는 걸 보게 된 거죠. 그동안 테오가 ‘이제 좀 상황이 나아질 것 같다’는 뉘앙스의 말을 많이 했었어서 고흐는 큰 충격을 느꼈어요. 이에 더해, 테오는 더 충격적인 말을 전합니다. 이제 아들이 곧 태어나서, 그림 중개 일을 더 못할 것 같다. 사실 지금 다른 직업을 알아보고 있다는 말이었죠. 고흐한테는 너무 큰 충격이었습니다. 테오가 유일하게 자신의 예술을 지지하고 도와주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테오 집에서 돌아온 후 한 달 만에 권총을 자신의 배에 쏘면서, 사망하게 돼요.
Johanna van Gogh-Bonger (1862-1925)
'몇 년만 더 버텨주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런 생각을 했던 주변인도 있었습니다. 바로, 테오의 부인, 조안나였죠. 조안나는 고흐가 테오와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모두 모아서 <영혼의 편지>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한 인물입니다. 여기엔 비하인드가 있어요. 1890년에 고흐가 죽고, 6개월 만에 테오가 사망합니다. 그러면서 당시 고흐 작품들, 편지들, 책들을 조안나가 모두 상속받게 되었는데요. 조안나는 남편 테오가 고흐의 예술을 진심으로 지지했던 걸 생각하면서, 고흐 전시를 열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고흐 작품이 본격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조안나는 고흐의 예술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선, 평론가 같은 제3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편지를 통해 고흐가 직접 남긴 말들을 세상에 공개해야겠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흐와 테오가 주고받은 편지를 선별해서 책으로 편집하죠. 그렇게 고흐 작품에 비극적 서사가 생기게 된 겁니다.
테오에게 보낸 고흐의 편지와 이를 엮어 만든 <영혼의 편지> 초판본
1914년 책이 출간된 이후부터 고흐가 본격적으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20-30년대부터는 그 유명세가 매우 높아지게 되었죠. 조안나의 예상대로 고흐가 남긴 편지들은 그 무엇보다 고흐의 예술세계를 잘 전달합니다.
음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을 달래주는 어떤 것을 그리고 싶다.
그리고 영원에 근접하는 남자와 여자를 그리고 싶다.
옛날 화가들은 영원의 상징으로 인물 뒤에 후광을 그리곤 했는데,
이제 우리는 광휘를 발하는 선명한 색채를 통해 영원을 표현해야 한다.
-1888년 9월 8일, 테오에게
농촌 생활을 그리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술과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진지한 반성을 하게 될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다.
-1885년 4월 30일, 테오에게
그의 삶은 그가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가득했지만, 편지에서 드러난 통찰력을 보면 고흐가 가진 화가로서의 재능은 단순 그림 실력뿐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보는이까지 괴로워질 만큼 진득한 자기성찰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일궈낸 것이죠.
덕분에 오늘날에는 고흐의 편지를 모아 만든 책, <영혼의 편지>가 하나의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까지 인정받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한 고흐의 숨겨진 이야기들도 다 이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용들인데요. 고흐라는 예술가의 숨겨진 진면모,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 한 번쯤 읽어보시길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1. 종교: 고흐의 정체성, 그 자체
Vincent van Gogh, Self Portrait with Bandaged Ear, 1889
고흐의 이름, 빈센트는 기독교식 이름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와 아주 가까웠던 고흐는 기독교에 매우 심취해 있기도 했어요. 이건 고흐가 작가로 데뷔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흐는 성인이 된 스무 살 때부터 스물일곱 살 때까지 명확한 직업이나 적성을 찾지 못하고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했어요. 당시 고흐의 직업 선택에 가장 영향을 준 건 집안 어른들이었는데요. 고흐 집안 어른들의 직업은 단순했습니다. 목사가 되거나, 아니면 화랑을 운영했죠.
그중에서도 고흐의 대부였던 코르 숙부는 유럽의 유명한 화랑 소유주였어요. 1869년에 이미 화랑 지점이 일곱 개나 될 정도로 잘 나갔던 갤러리스트였는데요. 당시 성인이 된 고흐는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으니, 코르 숙부의 화랑에서 일하기 시작합니다.
코르 숙부와 숙부가 운영하던 화랑의 모습 ⓒ van gogh museum
그런데 화랑 일은 고흐 적성에 그리 맞지 않았어요. 처음엔 성실했지만, 점차 말없이 결근하는 일이 많아졌죠. 그렇게 직장을 땡땡이친 날이면 성경을 탐독했습니다. 심지어 화랑에 출근한 날에도 ‘성직자가 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내내 했었다고 해요. 몸은 화랑에 있는데, 마음은 교회에 있었던 거죠. 이윽고 무단결근도 더 자주 하게 되면서, 결국 코르 숙부의 화랑에서 잘리게 됩니다.
하지만 고흐는 그다지 개의치 않아 했어요. 좌절하거나 반성하기보다 오히려 잘 됐다, 이제 성직자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신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고,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벨기에로 선교를 떠나기도 했는데요.
19살의 빈센트 반 고흐 ⓒ van gogh museum
그런데, 고흐 성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고흐는 괴팍하고 고집이 셌던 성격이었고 일에 대한 피드백을 받으면 이를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하고 공격적으로 굴었죠. 이런 괴팍한 성격은 전부터 있었습니다. 여기에 광적인 신앙심이 더해지면서, 봉사를 온 다른 종교인들과 갈등이 생겼다고 해요. 고흐와 함께 공부했던 사람은 ‘빈센트는 복종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고 언급하기도 했죠.
이후 고흐는 어쩌면 종교도 자기 천직이 아닐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종교에 깊게 빠져드는 것과, 종교를 업으로 삼아 사회인으로 거듭나는 건 다른 일이라는 걸 깨달은 거죠. 그렇게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종교인을 그만두고 정한 직업은 예술가였습니다.
Vincent van Gogh, Women on the Peat Moor, 1883 ⓒ van gogh museum
하지만 종교에 대한 사랑은 여전했어요. 기독교의 박애주의적 시선으로 그림에 가난한 노동자, 농부들을 그렸고, 해바라기 같은 꽃을 그릴 때에도 약간 시든 모습을 그려서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이들이나 약한 존재를 묘사하곤 했죠.
이런 기독교적 성향이 잘 드러난 그림은 고흐의 초기작인 <성경이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Bible (1885)>입니다. 작품은 어두운 책상 위에 거대하고 무거운 성경 책이 펼쳐진 채 놓여 있고, 그 앞쪽에 노란 책이 하나 놓인 모습을 그린 정물화에요. 이 책들 옆쪽으로는 촛대가 하나 있는데요. 촛대 불빛이 꺼져있습니다. 꺼진 촛대는 빛이 사라졌음을 암시하면서, 고흐가 종교적 빛이나 신앙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 역할을 해요.
Vincent van Gogh, Still Life with Bible, 1885 ⓒ van gogh museum
그림에 활용된 거대한 성경책은 개신교 목사였던 반 고흐의 아버지 것이었다고 하는데요. 사실 고흐는 어렸을 때부터 목사인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보면서 마찬가지로 목사가 되기를 막연히 꿈꿔왔습니다. 그런데 성직자의 꿈을 버리고 화가가 되었죠. 그렇게 촛불과 성경을 통해서 종교를 저버린, 고흐의 상실감을 표현한 건데요.
그림의 진정성은 고흐의 당시 상황에서 완성됩니다. 이 그림을 그렸을 1885년에는 고흐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목사였지만, 형제들이 화랑을 하는 이들이 많아 화가의 생활을 잘 알고 있었고, 고흐가 예술가가 되는 걸 격하게 반대했는데요. 고흐의 고집은 완강했기 때문에 부자 갈등이 매우 심했습니다. 그런데 종교의 꿈을 꾸게 만든 존재이자, 화가를 반대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두 배로 느끼게 된 상실감을 은유적으로 드러낸 거라 볼 수 있죠.
에밀 졸라와 <삶의 기쁨>
그리고 화가가 된 고흐의 새로운 관심사를 앞에 놓인 노란 책을 통해 은유합니다. 이 책은 1884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에밀 졸라의 12번째 소설, <삶의 기쁨>이에요. 책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에밀 졸라는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전통적인 신앙이 부재한 상황에서 우리가 삶의 모든 비극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존재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요.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신앙이 필요하다고 시사하는데요.
고흐는 <삶의 기쁨>을 현대인의 성경이라 봤습니다. 그리고 가장 전통적인 종교를 상징하는 성경책과 에밀 졸라의 소설을 대비되게 배치하면서, 그간 중요했던 종교에 대한 신앙심이 아닌 예술을 통해 새로운 신앙을 찾았음을 표현하죠.
Vincent van Gogh, The Potato Eaters, 1885 ⓒ van gogh museum
고흐는 종교인과 화가가 사실상 같은 직업이라고 봤습니다.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깨달음을 주기 때문이죠. 고흐의 모든 그림은 이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1885년 남긴 고흐의 첫 대박 <감자 먹는 사람들>은 고흐 방식의 성화라 불리는데요. 하루 종일 노동하고 피곤한 몸으로 모여 앉아 감자를 먹는 농부 가족의 모습은 낮은 곳을 굽이 살피던 기독교의 박애주의 시선과 맞닿아 있습니다. 고흐는 그림에서 이들의 거친 손에 집중해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강조해 보여주죠.
당시 다른 그림들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그림으로 그리며 영원히 세상에 남게 하고, 그 아름다움을 곱씹게 만들었는데요. 고흐의 그림은 노동의 가치를 세상에 남게 하고 그 신성함을 곱씹게 만들었습니다. 당시의 그림과 목적은 달랐지만, 오히려 이것이 고흐 예술만의 독창적인 지점을 만들어내면서 오늘날까지 고흐의 예술은 관객에게 사랑받고 있어요.
2. 반 고흐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
고흐가 사랑한 사촌누나 케이트 스트리커 ⓒ van gogh museum
고흐는 비극적인 삶 때문에 사랑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에요. 하지만 고흐도 절절한 사랑을 했던 인물입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여인은 두 명이에요. 고흐의 사촌인 케이트 스트리커, 그리고 거리의 매춘부였던 시엔 호오크죠.
우선 케이트는 고흐의 사촌 누나입니다. 고흐의 나이 28살 때 케이트를 만났는데요. 당시 케이트는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상태였어요. 고흐는 케이에게 강렬한 감정을 느꼈고, 케이와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런데 그 결심은 고흐 혼자서만 한 결심이었어요. 케이트는 고흐의 구애를 완강히 거부했죠.
당시 고흐는 케이트에게 ‘당신을 만난 후 작업이 한결 나아졌다’면서 가족의 반대를 피해 헤이그로 가서 동거하자고 고집을 부립니다. 하지만 케이트는 아직 남편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어요. 그리고 고흐의 구애를 거절했죠. 그럼에도 고흐는 계속 구애를 이어갑니다.
한 번은 케이트를 만나러 외삼촌 가족이 지내는 암스테르담 목사관으로 찾아가는데요. 외삼촌은 케이트가 지금 이곳에 없다며 딸의 편지를 전해줍니다. 거기엔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어요. 고흐는 자신의 손을 램프 속에 집어넣고 케이트를 만나게 해달라고 협박해요. 하지만 화상만 입었을 뿐, 케이트를 만날 순 없었습니다. 이후 고흐는 가족들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죠.
고흐가 그린 시엔, The Great Lady (1882), Woman with a Child on her Lap (1883) ⓒ van gogh museum
그렇게 좌절한 고흐에게 두 번째 여인이 생기게 됩니다. 거리의 매춘부이자, 네 살 연상의 ‘시엔’이었죠. 시엔과 고흐는 헤이그에서 만났는데요. 당시 시엔은 이미 아이가 있었고, 또 임신을 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모두 다른 사람이었을 거라고 해요. 더 안타까운 건,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당시 고흐는 시엔과 시엔의 자녀들에게 깊은 연민, 측은지심을 느꼈어요. 그리고 시엔과 아이들을 구원하고 삶을 변화시키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고흐는 시엔을 기독교 이름인 크리스틴이라 부르며
사랑하고 아껴주었습니다. 당시 고흐는 시엔과 약 1년간 동거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시엔과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고흐의 가족들이 이를 반대하고 나서요. 가족의 반대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Vincent van Gogh, Self Portrait, 1886 ⓒ van gogh museum
당시 고흐는 화가로 이제 막 진로를 결정한 후였고, 마땅한 후원자도 없고, 그림 실력도 뛰어나지 않았던 상황에서 결혼에, 자식 둘까지 키우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본 것이었죠. 고흐 역시 이를 알고 있었는지, 언제나 모든 이슈를 공유하던 동생 테오에게도 동거한 지 반년이 되었을 때야 시엔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고흐 아버지는 고흐를 정신병원에 넣겠다고 협박했어요. 하지만 고흐는 이번에도 완강했습니다. 자식을 정신병원에 넣으면, 나는 아버지를 경찰에 고발해, 세상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하게 하고 소송비도 부담하게 만들 것이라 말했죠. 대립은 팽팽해집니다.
이때는 고흐가 뭘 하든 늘 지지해 주던 동생 테오도 반대했어요. 형이 시엔과 결혼을 포기하고 작품에만 전념한다고 약속하면,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겠다고 말하기도 했죠. 그럼에도 고흐는 계속 사랑을 이어갔는데요. 당시 시엔의 매춘을 반대하면서 생활비가 빠르게 줄어들자, 시엔과 결혼은 무리라는 걸 깨닫고 1년 8개월의 동거 끝에 결별합니다. 이후 시엔은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해요. 고흐와 헤어진 후 몇 년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Vincent Van Gogh, Sorrow, ⓒ van gogh museum
이들의 사랑은 절절했습니다. 고흐는 시엔의 그림을 여러 점 남기기도 했는데요. 이때는 고흐가 돈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페인팅 작품은 없고, 대부분 초크를 활용해 그렸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슬픔 Sorrow (1882)>이에요. 이 그림은 여인이 그려져있는데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쪼그려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파묻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제목처럼 깊은 슬픔에 빠진 모습을 그려냈는데, 임신해서 부른 배, 축 처진 가슴, 먹지 못해 깡마른 팔다리를 통해 이 여인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를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주목할 만한 건, 작품 하단에 새겨진 글귀에요. 해석하면, “어떻게 이 세상에 버림받은 여자가 혼자 존재할 수 있나”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그림의 주제의식을 글로 표현하는 순간, 너무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게 되어 작품의 깊이가 얇아질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회화 작품이라기보다는 신문의 삽화같이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고흐는 이 그림을 여러 번 그리고, 또 글을 새겨 넣으면서 그림의 주제의식을 직설적으로 표현했어요. 그만큼 고흐가 시엔에게 느낀 감정이 컸다는 걸 헤아려볼 수 있죠.
3. 고흐의 명성을 만든 제3의 인물
Vincent van gogh, Self-Portrait with Pipe and Straw Hat, 1887 ⓒ van gogh museum
고흐 하면 평생 무명화가로 살았던 비운의 인물이라 이야기하지만, 사실 고흐는 인생 말년에 유명해지고 있었어요. 1888년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향하면서 화가로서의 큰 결심을 한 덕분인데요. 이 시기 고흐는 식사 주문 외에는 아무와도 말하지 않고, 내내 그림만 그리며 다작했습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시간엔 편지를 쓰거나 책을 읽으며 본인 예술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이어갔고요.
덕분에 고흐는 사망 1년 전인 1889년부터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프랑스 대표 현대미술 지인 <Mercure de France>에서는 고흐의 화려한 색감, 뛰어난 관찰력을 호평했고, 1889년에는 고흐의 유화 작품 <붉은 포도밭 (1888)>이 판매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고흐가 생전에 판매한 유일한 유화 작품이에요. 이전까지는 습작이나 소품만 몇 점 팔렸고, 대부분 100프랑에 판매되었는데요. 이 작품은 언론에 고흐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하면서 400프랑이라는 고가에 판매됩니다.
Vincent van gogh, The Red Vineyard, 1888 ⓒ van gogh museum
하지만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듯이, 고흐는 예술가로서 이름을 막 알리기 시작할 때 가장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었어요. 이름이 알려지는 것과 별개로 고흐 그림은 아직 낯선 화풍이었기 때문에, 구매까지 이어지진 못 했던 거죠. 당시 고흐 그림의 판매를 맡고 있던 동생 테오는 이 사실을 고흐에게 숨기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어느 날 고흐가 연락 없이 테오 집에 들르게 되며 사실이 드러납니다.
테오 집에서, 본인 작품이 팔리지 않고 쌓여있는 걸 보게 된 거죠. 그동안 테오가 ‘이제 좀 상황이 나아질 것 같다’는 뉘앙스의 말을 많이 했었어서 고흐는 큰 충격을 느꼈어요. 이에 더해, 테오는 더 충격적인 말을 전합니다. 이제 아들이 곧 태어나서, 그림 중개 일을 더 못할 것 같다. 사실 지금 다른 직업을 알아보고 있다는 말이었죠. 고흐한테는 너무 큰 충격이었습니다. 테오가 유일하게 자신의 예술을 지지하고 도와주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테오 집에서 돌아온 후 한 달 만에 권총을 자신의 배에 쏘면서, 사망하게 돼요.
Johanna van Gogh-Bonger (1862-1925)
'몇 년만 더 버텨주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런 생각을 했던 주변인도 있었습니다. 바로, 테오의 부인, 조안나였죠. 조안나는 고흐가 테오와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모두 모아서 <영혼의 편지>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한 인물입니다. 여기엔 비하인드가 있어요. 1890년에 고흐가 죽고, 6개월 만에 테오가 사망합니다. 그러면서 당시 고흐 작품들, 편지들, 책들을 조안나가 모두 상속받게 되었는데요. 조안나는 남편 테오가 고흐의 예술을 진심으로 지지했던 걸 생각하면서, 고흐 전시를 열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고흐 작품이 본격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조안나는 고흐의 예술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선, 평론가 같은 제3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편지를 통해 고흐가 직접 남긴 말들을 세상에 공개해야겠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흐와 테오가 주고받은 편지를 선별해서 책으로 편집하죠. 그렇게 고흐 작품에 비극적 서사가 생기게 된 겁니다.
테오에게 보낸 고흐의 편지와 이를 엮어 만든 <영혼의 편지> 초판본
1914년 책이 출간된 이후부터 고흐가 본격적으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20-30년대부터는 그 유명세가 매우 높아지게 되었죠. 조안나의 예상대로 고흐가 남긴 편지들은 그 무엇보다 고흐의 예술세계를 잘 전달합니다.
그의 삶은 그가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가득했지만, 편지에서 드러난 통찰력을 보면 고흐가 가진 화가로서의 재능은 단순 그림 실력뿐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보는이까지 괴로워질 만큼 진득한 자기성찰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일궈낸 것이죠.
덕분에 오늘날에는 고흐의 편지를 모아 만든 책, <영혼의 편지>가 하나의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까지 인정받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한 고흐의 숨겨진 이야기들도 다 이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용들인데요. 고흐라는 예술가의 숨겨진 진면모,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 한 번쯤 읽어보시길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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