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셋에게 ‘현대 여성’이라는 주제는 무엇이 여성을 ‘신’여성으로 만드는가 뿐 아니라
무엇이 미술을 ‘현대' 미술로 만드는가를 보여줄 기회이기도 했다.
<메리 커샛, 현대 여성을 그린 화가> 그리젤다 폴록, 강정이 옮김

의자에 앉아있는 메리 카사트(1913), Photo: Durand-Ruel
카사트는 인상주의 화가입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어요. 활동 당시 여러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로는 유럽인이 대다수던 인상주의자들 사이에서 보기 드문 미국인이었고, 또 당시 보기 드문 여성 예술가였던 데다가, 거기에 더해 당시에는 거의 없던 비혼주의자였기 때문이죠.
이 특징들은 모두 당시 미술계에서, 그리고 보편적인 사회에서 배척받을 수밖에 없던 조건이었지만, 카사트는 이를 이겨내고 미국에 인상주의를 안착시킨 데 막대한 공을 세운 여인으로 평가받습니다.
이렇게 카사트가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 건 얼마 안 된 일인데, 오늘날엔 인상주의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작가로 손꼽히고 있었어요. 그의 예술에 어떤 점이 사람들을 매료했던 걸까요?
부잣집 첫째 딸의 험난한 예술가 도전기

Mary Cassatt, Lilacs in a Window, 1880
카사트는 184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성공한 주식 중개인이었고, 어머니는 은행가 집안 출신이었어요. 덕분에 카사트는 15살 때부터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해 좋은 수업을 받을 수 있었죠. 하지만 이 시기,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여성에게 꽤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당시 여자가 예술을 한다는 건 취미의 영역으로만 여겨졌었어요. 전업 예술가는 남자들의 직업 같은 것이었죠.
여학생들은 수업을 들을 때도 차별받았습니다. 누드모델 수업을 들을 수도 없었고, 교육 진도도 남학생들에 비해 느렸죠. 그리고 교수, 남학생, 심지어는 여학생마저도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메리 카사트는 그렇지 않았어요. 본인이 여자라는 이유로 수업에서 배제되는 건 공평하지 않다고 보고, 스스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죠. 그리고 파리로 유학을 떠납니다.

Mary Cassatt, Mother About to Wash Her Sleepy Child, 1880
이 시기 파리는 예술의 중심지였는데요. 파리라고 해서 상황이 미국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보수적이었죠. 오늘날에도 최고의 명문 학교로 손꼽히는 에콜 데 보자르에서는 1897년까지 여학생 입학 자체를 받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메리 카사트가 파리로 간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파리에는 엄청난 미술관과 젊고 아이디어 넘치는 동료 화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항상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젊은 예술가가 가득했습니다. 이들은 낮에는 박물관에서 모작하며 실력을 키우고, 밤에는 카페에서 동료들과 토론하며 새로운 예술을 고민했어요. 카사트도 이런 분위기에 섞여 그림 실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합니다.
살롱전: 카사트의 첫 번째 성과

Mary Cassatt, American - A Woman and a Girl Driving, 1881
그리고 1868년, 파리 살롱전에 입선하면서 예술가로서 커리어를 시작해요. 살롱전은 파리 정부가 주최하고 직접 심사해,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작품만 선보였던 전시입니다. 파리 도심 중심부에서 진행된 덕분에 관객도 많았고, 살롱전에 입선하느냐 여부가 예술가로서 커리어 이어갈 수 있느냐 여부가 되기도 할 정도로 예술가들에겐 중요한 전시였죠.
카사트는 살롱전 입선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도 괜찮겠다고 생각합니다. 미국보다 훨씬 까다롭고 보수적인 프랑스에서 인정받았으니, 미국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건데요.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습니다. 카사트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얼마 되지 않아, 1871년에 시카고 대화재가 발생했어요. 당시 300 명가량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만 7천 채 이상의 집이 불탔습니다. 그리고 이 화제로 카사트의 작품도 불에 타서 사라지게 되었죠.
그렇게 카사트는 가족과 함께 다시 파리로 돌아와 작품 활동을 시작하기로 합니다. 이때는 처음 파리로 갔을 때보다도 더, 마음을 독하게 먹었어요. 파리로 돌아온 후에는 1872년부터 5년 연속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하며 커리어를 단단히 구축해 나갔죠.
다시 돌아온 파리, 카사트 예술의 시작

카사트가 그린 여동생 리디아의 초상화, 1879
이 시기 카사트가 그린 그림은 대다수 여성 초상화였습니다. 그림 속 여성들은 대부분 카사트의 여동생 리디아가 모델을 섰어요. 카사트와 동생 리디아의 관계는 특별했습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자발적 독신의 삶을 살았던 자매였기 때문이었죠.
카사트는 결혼하면 화가로서의 삶을 살기 어려울 거라고 보고, 여동생과 힘을 합쳐 살아갑니다. 이전에 미국에서 여성 미대생으로서 받은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파리로 갔던 것처럼, 여성 화가로서 살아가려면 혼자 살아야 한다, 하고 결정을 전략적으로 내린 건데요. 그런데 독신 여성으로 사는 삶은 절대 순탄하지 않았어요.

Mary Cassatt, Mother and Child, 1905
살롱전에 입선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미술계는 여성 예술가에 대한 차별 어린 시선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편견은 더 강경했습니다. 그래도 카사트는 굳건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요. 그리고, 조금 새로운 방식의 여성 초상화를 선보입니다.
그동안 그림 속 여성은 두 가지로 분류되었어요. 성모 마리아로 대표되는 ‘아름다운 어머니’이거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의 기준을 모두 충족한 ‘뮤즈형 여성상’이었죠. 카사트는 이 두 가지 여성상 외에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바로, ‘일하는 여성상’이었어요.

Mary Cassatt, Lady at the Tea Table, 1883–1885

Mary Cassatt, Maternité, 1890
하지만 이 시기까지 여성이 프로페셔널한, 오늘날 커리어 우먼같은 직업을 가지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카사트는 대다수 육아 노동을 하는 여성을 그리곤 했고, 아이를 돌보는 여성이 가장 많이 그렸어요. 대신 카사트는 이것을 단순히 집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순종적인 여성으로 묘사하기보다, 아이를 기르는 ‘감정 노동적이고 육체 노동적인 일을 해내는 여성’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해서 그려냅니다.
그래서 카사트의 그림 속 여성들은 당시 미의 기준에 맞게 그려지지도 않고, 성모 마리아처럼 모성애를 강조해서 그리지도 않았어요. 그저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여성의 모습을 포착하는데 집중한 것을 볼 수 있죠.

Mary Cassatt, In the Loge, 1880
카사트는 미국에 있을 때부터 꽤 부유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덕분에, 다양한 여성의 모습을 보곤 했어요.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여성이나, 카페에서 책을 읽는 여성,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여성 등 다양했는데요. 이런 모습들은 그림으로 그려지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너무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카사트는 이런 여성들의 모습을 꾸준히 그림으로 그려냅니다. 그런 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건 단연 위의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 볼 수 있듯,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여성을 그렸어요. 여인은 검은 옷에 망원경을 들고 공연을 감상하며, 꽤 진중한 태도로 극에 빠져있는 모습이죠.
이 그림은 카사트의 최고가 작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2022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화 약 107억 원에 낙찰되었어요. 이 그림이 이렇게나 고가에 낙찰된 이유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 것 때문이 큽니다.

Mary Cassatt, In the Box, 1879
19세기 파리 오페라 극장에 있는 여성을 그려낸 그림들은 대개 ‘뮤즈형 여성상’ 그림들이었어요. 발레 공연을 하는 무용수들을 아름답게 그려낸 것이 대다수였죠. 특히, 인상주의 작가 중 에드가 드가가 대표적입니다. 드가는 아예 발레리나 연작을 내놓기도 했는데요. 연작은 상업적으로도 아주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어요. 그만큼 공연장 안의 여성은 꽤 편협한 주제로 다뤄지곤 했는데요.
카사트는 그런 공연장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공연에 빠져들어 관람하는 여성을 그려냈습니다. 그간 여성이 ‘보여지는 객체’였다면, 카사트 그림 속 여성은 ‘보는 주체’였던 것이죠. 이 지점은 당시 그려지던 다른 그림과는 다른 차별점을 가졌고. 더불어 이 작품은 카사트와 동시대를 살았던 거장, 폴 고갱의 눈에 띈 작품이 됩니다.
폴 고갱은 화가이면서 동시에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구매한 컬렉터이기도 했어요. 카사트의 작품을 보고 ‘매력적이며 힘이 있다’라고 극찬했고, 작품 구매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도 본인의 컬렉션 대부분을 팔았지만, 이 작품만은 끝까지 가지고 있었죠. 덕분에 작품은 높은 가치를 평가받으며 고가에 낙찰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인 여성 인상주의자, 메리 카사트

Edgar Degas, The Ballet Class (La Classe de Danse), 1873–1876
이후에도 카사트는 계속해서 새로운 여성상을 그림에 담아냅니다. 그리고 폴 고갱이 그랬듯, 당시 카사트와 같은 시기 활동한 남성 인상주의자들이 카사트 작품을 좋게 평가하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에드가 드가입니다. 드가는 본인은 인상주의자들의 예술관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인상주의자들이 가진 화제성을 이용하려고 인상주의 전시를 개최했어요. 그리고, 인상주의자들의 리더 행세를 하면서 유명세를 획득하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본인의 발레리나 연작도 상업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고요.

Edgar Degas, Blue Dancers, 1897
당시 드가는 오늘날 사업가들이 사업 확장하듯이, 인상주의의 개념을 확장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예술가들을 계속해서 발굴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점으로 그림 그리는 화가인 조르주 쇠라를 인상주의로 영입시키려고 시도하기도 했죠. 쇠라는 그렇게 1886년, 제8회이자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에 참여하기도 했는데요. 인상주의자들은 이에 반발했습니다. 야외로 나가 즉흥적인 붓질로 채색하는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쇠라의 점묘법은 색채학 등 과학적 요소를 고려해 정교하게 계산된 채색이 이뤄졌기 때문에 기법적으로 너무 다른 게 문제였죠. 결국 쇠라의 예술은 신인상주의라는 별도 사조로 분류됩니다. 하지만 드가는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예술가 발굴에 나서요. 그렇게 드가의 눈에 띈 것이 메리 카사트였죠.

Mary Cassatt, The Boating Party, 1893

Mary Cassatt, Little Girl in a Blue Armchair, 1878
카사트는 인상주의자로 영입하기 적절한 인물이었습니다. 인상주의자들처럼 거친 붓질도 구사했었고, 인상주의자들이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던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자발적 독신에,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는 카사트는 너무나 적절한 인물이었죠. 그렇게 드가의 제안으로 카사트는 인상주의자 전시에 참여하기 시작하고, 인상주의자들 가운데서 내부적으로 실력도 인정받으며 커리어를 이어 나갑니다. 드가와는 <파란 안락의자에 앉은 소녀>(1878) 작품을 함께 제작하며 동료로서 우정을 돈독히 쌓기도 했고요.
이렇게만 흘러갔다면 꽤 안정적으로 예술가로서 인생을 살았겠지만, 카사트는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카사트의 마지막 성과: 인상주의의 외교관

Mary Cassatt, Woman with a Pearl Necklace in a Loge, 1879
카사트는 여전히 고향 미국에 대한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어요. 파리에서 직접 경험한 인상주의의 탄생과 성공을 지켜보면서, 이 새롭고 혁신적인 장르를 미국에 가져가야겠다고 결심하죠. 그리고, 부유한 가문 출신인 집안 배경을 활용해 미국인 컬렉터들에게 인상주의 작품을 소개하고, 컬렉팅 할것을 권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카사트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건 친오빠 알렉산더 카사트였어요. 펜실베이니아 철도 사장을 역임하며 미국 산업계의 거물로 손꼽혔던 인물이죠. 덕분에 카사트는 친오빠를 비롯한 미국 내 부유한 컬렉터들과 쉽게 연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카사트가 수집을 권한 컬렉터 중 가장 잘 알려진 건 해브메이어 부부입니다. 이름은 익숙지 않지만, 미국의 설탕 정제업자로 꽤 큰 부를 쌓았던 부부죠. 이들은 카사트가 추천한 인상주의 작품을 다수 구매했어요. 그리고 이들이 구매한 작품들 다수가 훗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되었는데요. 이 컬렉션 덕분에 미국이 오늘날 훌륭한 인상주의 컬렉션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카사트의 추천으로 인상주의 작품이 미국으로 다수 넘어가면서, 미국 미술이 발전하는 계기가 된 것도 높게 평가받고요.

Mary Cassatt, Young Mother Sewing, 1900
그렇게 카사트는 인상주의의 외교관 역할을 하면서 말년을 보내는데요. 이후 66세가 되던 해, 카사트는 예술적 영감을 찾겠노라 결심하고 이집트 여행을 떠나요. 그리고 이곳에서 본 이집트 미술작품을 보고 깊은 좌절감을 느낍니다. 너무나 엄청난 예술이어서 어떤 예술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편지를 지인에게 남기기도 했죠.
그리고 이 시기, 카사트의 건강 악화까지 찾아옵니다. 당뇨, 류머티즘성 관절염, 신경통, 백내장이 겹쳤고, 70세가 되던 해에는 실명에 가까운 시력 저하가 겹치면서 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죠.

Mary Cassatt, Portrait of Mrs. Currey, 1871
그럼에도 카사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어요. 70세가 넘은 뒤에는 여성 참정권 지지 전시에 작품을 출품하며 여성의 권리 획득에 힘을 보태기도 했죠. 이런 행보는 카사트가 속해있던 상류 사회의 비난을 자아내기도 했는데, 카사트는 당연히 전혀 개의치 않고 ‘드디어 여성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때가 왔다’며 기쁨을 표했습니다. 그렇게 말년에 계속해서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한 행보에 힘쓰다가, 1926년 82세가 되던 해 세상을 떠났죠.

Mary Cassatt, Mrs. Robert S. Cassatt, the Artist's Mother, 1889
카사트의 예술은 특별합니다. 그림 속 여성이 편협한 이미지로만 소비되던 당시 사회에서, 보기 드문 여성 예술가로서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고 이를 사회 변화로까지 끌어냈기 때문이죠. 이 덕분에 1904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 공로를 인정받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훈 받기도 했어요. 외국인, 여성 화가로서 받은 이례적 영예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배척당하는 존재였습니다. 보기 드문 여성 화가인 데다, 아웃사이더로 분류되던 인상주의자였고, 본인이 속한 상류 사회에서 쉬쉬하던 여성 인권 신장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어필했죠. 또 평생 자발적 독신으로 살았고요. 단 한 가지만 보편을 거슬러도 손가락질받는 시대, 100년 전 여성 화가가 펼친 행보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기도 합니다.

의자에 앉아있는 메리 카사트(1913), Photo: Durand-Ruel
카사트는 인상주의 화가입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어요. 활동 당시 여러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로는 유럽인이 대다수던 인상주의자들 사이에서 보기 드문 미국인이었고, 또 당시 보기 드문 여성 예술가였던 데다가, 거기에 더해 당시에는 거의 없던 비혼주의자였기 때문이죠.
이 특징들은 모두 당시 미술계에서, 그리고 보편적인 사회에서 배척받을 수밖에 없던 조건이었지만, 카사트는 이를 이겨내고 미국에 인상주의를 안착시킨 데 막대한 공을 세운 여인으로 평가받습니다.
이렇게 카사트가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 건 얼마 안 된 일인데, 오늘날엔 인상주의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작가로 손꼽히고 있었어요. 그의 예술에 어떤 점이 사람들을 매료했던 걸까요?
부잣집 첫째 딸의 험난한 예술가 도전기
Mary Cassatt, Lilacs in a Window, 1880
카사트는 184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성공한 주식 중개인이었고, 어머니는 은행가 집안 출신이었어요. 덕분에 카사트는 15살 때부터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해 좋은 수업을 받을 수 있었죠. 하지만 이 시기,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여성에게 꽤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당시 여자가 예술을 한다는 건 취미의 영역으로만 여겨졌었어요. 전업 예술가는 남자들의 직업 같은 것이었죠.
여학생들은 수업을 들을 때도 차별받았습니다. 누드모델 수업을 들을 수도 없었고, 교육 진도도 남학생들에 비해 느렸죠. 그리고 교수, 남학생, 심지어는 여학생마저도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메리 카사트는 그렇지 않았어요. 본인이 여자라는 이유로 수업에서 배제되는 건 공평하지 않다고 보고, 스스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죠. 그리고 파리로 유학을 떠납니다.
Mary Cassatt, Mother About to Wash Her Sleepy Child, 1880
이 시기 파리는 예술의 중심지였는데요. 파리라고 해서 상황이 미국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보수적이었죠. 오늘날에도 최고의 명문 학교로 손꼽히는 에콜 데 보자르에서는 1897년까지 여학생 입학 자체를 받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메리 카사트가 파리로 간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파리에는 엄청난 미술관과 젊고 아이디어 넘치는 동료 화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항상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젊은 예술가가 가득했습니다. 이들은 낮에는 박물관에서 모작하며 실력을 키우고, 밤에는 카페에서 동료들과 토론하며 새로운 예술을 고민했어요. 카사트도 이런 분위기에 섞여 그림 실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합니다.
살롱전: 카사트의 첫 번째 성과
Mary Cassatt, American - A Woman and a Girl Driving, 1881
그리고 1868년, 파리 살롱전에 입선하면서 예술가로서 커리어를 시작해요. 살롱전은 파리 정부가 주최하고 직접 심사해,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작품만 선보였던 전시입니다. 파리 도심 중심부에서 진행된 덕분에 관객도 많았고, 살롱전에 입선하느냐 여부가 예술가로서 커리어 이어갈 수 있느냐 여부가 되기도 할 정도로 예술가들에겐 중요한 전시였죠.
카사트는 살롱전 입선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도 괜찮겠다고 생각합니다. 미국보다 훨씬 까다롭고 보수적인 프랑스에서 인정받았으니, 미국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건데요.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습니다. 카사트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얼마 되지 않아, 1871년에 시카고 대화재가 발생했어요. 당시 300 명가량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만 7천 채 이상의 집이 불탔습니다. 그리고 이 화제로 카사트의 작품도 불에 타서 사라지게 되었죠.
그렇게 카사트는 가족과 함께 다시 파리로 돌아와 작품 활동을 시작하기로 합니다. 이때는 처음 파리로 갔을 때보다도 더, 마음을 독하게 먹었어요. 파리로 돌아온 후에는 1872년부터 5년 연속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하며 커리어를 단단히 구축해 나갔죠.
다시 돌아온 파리, 카사트 예술의 시작
카사트가 그린 여동생 리디아의 초상화, 1879
이 시기 카사트가 그린 그림은 대다수 여성 초상화였습니다. 그림 속 여성들은 대부분 카사트의 여동생 리디아가 모델을 섰어요. 카사트와 동생 리디아의 관계는 특별했습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자발적 독신의 삶을 살았던 자매였기 때문이었죠.
카사트는 결혼하면 화가로서의 삶을 살기 어려울 거라고 보고, 여동생과 힘을 합쳐 살아갑니다. 이전에 미국에서 여성 미대생으로서 받은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파리로 갔던 것처럼, 여성 화가로서 살아가려면 혼자 살아야 한다, 하고 결정을 전략적으로 내린 건데요. 그런데 독신 여성으로 사는 삶은 절대 순탄하지 않았어요.
Mary Cassatt, Mother and Child, 1905
살롱전에 입선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미술계는 여성 예술가에 대한 차별 어린 시선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편견은 더 강경했습니다. 그래도 카사트는 굳건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요. 그리고, 조금 새로운 방식의 여성 초상화를 선보입니다.
그동안 그림 속 여성은 두 가지로 분류되었어요. 성모 마리아로 대표되는 ‘아름다운 어머니’이거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의 기준을 모두 충족한 ‘뮤즈형 여성상’이었죠. 카사트는 이 두 가지 여성상 외에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바로, ‘일하는 여성상’이었어요.
Mary Cassatt, Lady at the Tea Table, 1883–1885
Mary Cassatt, Maternité, 1890
하지만 이 시기까지 여성이 프로페셔널한, 오늘날 커리어 우먼같은 직업을 가지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카사트는 대다수 육아 노동을 하는 여성을 그리곤 했고, 아이를 돌보는 여성이 가장 많이 그렸어요. 대신 카사트는 이것을 단순히 집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순종적인 여성으로 묘사하기보다, 아이를 기르는 ‘감정 노동적이고 육체 노동적인 일을 해내는 여성’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해서 그려냅니다.
그래서 카사트의 그림 속 여성들은 당시 미의 기준에 맞게 그려지지도 않고, 성모 마리아처럼 모성애를 강조해서 그리지도 않았어요. 그저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여성의 모습을 포착하는데 집중한 것을 볼 수 있죠.
Mary Cassatt, In the Loge, 1880
카사트는 미국에 있을 때부터 꽤 부유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덕분에, 다양한 여성의 모습을 보곤 했어요.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여성이나, 카페에서 책을 읽는 여성,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여성 등 다양했는데요. 이런 모습들은 그림으로 그려지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너무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카사트는 이런 여성들의 모습을 꾸준히 그림으로 그려냅니다. 그런 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건 단연 위의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 볼 수 있듯,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여성을 그렸어요. 여인은 검은 옷에 망원경을 들고 공연을 감상하며, 꽤 진중한 태도로 극에 빠져있는 모습이죠.
이 그림은 카사트의 최고가 작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2022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화 약 107억 원에 낙찰되었어요. 이 그림이 이렇게나 고가에 낙찰된 이유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 것 때문이 큽니다.
Mary Cassatt, In the Box, 1879
19세기 파리 오페라 극장에 있는 여성을 그려낸 그림들은 대개 ‘뮤즈형 여성상’ 그림들이었어요. 발레 공연을 하는 무용수들을 아름답게 그려낸 것이 대다수였죠. 특히, 인상주의 작가 중 에드가 드가가 대표적입니다. 드가는 아예 발레리나 연작을 내놓기도 했는데요. 연작은 상업적으로도 아주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어요. 그만큼 공연장 안의 여성은 꽤 편협한 주제로 다뤄지곤 했는데요.
카사트는 그런 공연장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공연에 빠져들어 관람하는 여성을 그려냈습니다. 그간 여성이 ‘보여지는 객체’였다면, 카사트 그림 속 여성은 ‘보는 주체’였던 것이죠. 이 지점은 당시 그려지던 다른 그림과는 다른 차별점을 가졌고. 더불어 이 작품은 카사트와 동시대를 살았던 거장, 폴 고갱의 눈에 띈 작품이 됩니다.
폴 고갱은 화가이면서 동시에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구매한 컬렉터이기도 했어요. 카사트의 작품을 보고 ‘매력적이며 힘이 있다’라고 극찬했고, 작품 구매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도 본인의 컬렉션 대부분을 팔았지만, 이 작품만은 끝까지 가지고 있었죠. 덕분에 작품은 높은 가치를 평가받으며 고가에 낙찰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인 여성 인상주의자, 메리 카사트
Edgar Degas, The Ballet Class (La Classe de Danse), 1873–1876
이후에도 카사트는 계속해서 새로운 여성상을 그림에 담아냅니다. 그리고 폴 고갱이 그랬듯, 당시 카사트와 같은 시기 활동한 남성 인상주의자들이 카사트 작품을 좋게 평가하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에드가 드가입니다. 드가는 본인은 인상주의자들의 예술관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인상주의자들이 가진 화제성을 이용하려고 인상주의 전시를 개최했어요. 그리고, 인상주의자들의 리더 행세를 하면서 유명세를 획득하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본인의 발레리나 연작도 상업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고요.
Edgar Degas, Blue Dancers, 1897
당시 드가는 오늘날 사업가들이 사업 확장하듯이, 인상주의의 개념을 확장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예술가들을 계속해서 발굴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점으로 그림 그리는 화가인 조르주 쇠라를 인상주의로 영입시키려고 시도하기도 했죠. 쇠라는 그렇게 1886년, 제8회이자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에 참여하기도 했는데요. 인상주의자들은 이에 반발했습니다. 야외로 나가 즉흥적인 붓질로 채색하는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쇠라의 점묘법은 색채학 등 과학적 요소를 고려해 정교하게 계산된 채색이 이뤄졌기 때문에 기법적으로 너무 다른 게 문제였죠. 결국 쇠라의 예술은 신인상주의라는 별도 사조로 분류됩니다. 하지만 드가는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예술가 발굴에 나서요. 그렇게 드가의 눈에 띈 것이 메리 카사트였죠.
Mary Cassatt, The Boating Party, 1893
Mary Cassatt, Little Girl in a Blue Armchair, 1878
카사트는 인상주의자로 영입하기 적절한 인물이었습니다. 인상주의자들처럼 거친 붓질도 구사했었고, 인상주의자들이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던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자발적 독신에,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는 카사트는 너무나 적절한 인물이었죠. 그렇게 드가의 제안으로 카사트는 인상주의자 전시에 참여하기 시작하고, 인상주의자들 가운데서 내부적으로 실력도 인정받으며 커리어를 이어 나갑니다. 드가와는 <파란 안락의자에 앉은 소녀>(1878) 작품을 함께 제작하며 동료로서 우정을 돈독히 쌓기도 했고요.
이렇게만 흘러갔다면 꽤 안정적으로 예술가로서 인생을 살았겠지만, 카사트는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카사트의 마지막 성과: 인상주의의 외교관
Mary Cassatt, Woman with a Pearl Necklace in a Loge, 1879
카사트는 여전히 고향 미국에 대한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어요. 파리에서 직접 경험한 인상주의의 탄생과 성공을 지켜보면서, 이 새롭고 혁신적인 장르를 미국에 가져가야겠다고 결심하죠. 그리고, 부유한 가문 출신인 집안 배경을 활용해 미국인 컬렉터들에게 인상주의 작품을 소개하고, 컬렉팅 할것을 권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카사트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건 친오빠 알렉산더 카사트였어요. 펜실베이니아 철도 사장을 역임하며 미국 산업계의 거물로 손꼽혔던 인물이죠. 덕분에 카사트는 친오빠를 비롯한 미국 내 부유한 컬렉터들과 쉽게 연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카사트가 수집을 권한 컬렉터 중 가장 잘 알려진 건 해브메이어 부부입니다. 이름은 익숙지 않지만, 미국의 설탕 정제업자로 꽤 큰 부를 쌓았던 부부죠. 이들은 카사트가 추천한 인상주의 작품을 다수 구매했어요. 그리고 이들이 구매한 작품들 다수가 훗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되었는데요. 이 컬렉션 덕분에 미국이 오늘날 훌륭한 인상주의 컬렉션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카사트의 추천으로 인상주의 작품이 미국으로 다수 넘어가면서, 미국 미술이 발전하는 계기가 된 것도 높게 평가받고요.
Mary Cassatt, Young Mother Sewing, 1900
그렇게 카사트는 인상주의의 외교관 역할을 하면서 말년을 보내는데요. 이후 66세가 되던 해, 카사트는 예술적 영감을 찾겠노라 결심하고 이집트 여행을 떠나요. 그리고 이곳에서 본 이집트 미술작품을 보고 깊은 좌절감을 느낍니다. 너무나 엄청난 예술이어서 어떤 예술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편지를 지인에게 남기기도 했죠.
그리고 이 시기, 카사트의 건강 악화까지 찾아옵니다. 당뇨, 류머티즘성 관절염, 신경통, 백내장이 겹쳤고, 70세가 되던 해에는 실명에 가까운 시력 저하가 겹치면서 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죠.
Mary Cassatt, Portrait of Mrs. Currey, 1871
그럼에도 카사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어요. 70세가 넘은 뒤에는 여성 참정권 지지 전시에 작품을 출품하며 여성의 권리 획득에 힘을 보태기도 했죠. 이런 행보는 카사트가 속해있던 상류 사회의 비난을 자아내기도 했는데, 카사트는 당연히 전혀 개의치 않고 ‘드디어 여성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때가 왔다’며 기쁨을 표했습니다. 그렇게 말년에 계속해서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한 행보에 힘쓰다가, 1926년 82세가 되던 해 세상을 떠났죠.
Mary Cassatt, Mrs. Robert S. Cassatt, the Artist's Mother, 1889
카사트의 예술은 특별합니다. 그림 속 여성이 편협한 이미지로만 소비되던 당시 사회에서, 보기 드문 여성 예술가로서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고 이를 사회 변화로까지 끌어냈기 때문이죠. 이 덕분에 1904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 공로를 인정받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훈 받기도 했어요. 외국인, 여성 화가로서 받은 이례적 영예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배척당하는 존재였습니다. 보기 드문 여성 화가인 데다, 아웃사이더로 분류되던 인상주의자였고, 본인이 속한 상류 사회에서 쉬쉬하던 여성 인권 신장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어필했죠. 또 평생 자발적 독신으로 살았고요. 단 한 가지만 보편을 거슬러도 손가락질받는 시대, 100년 전 여성 화가가 펼친 행보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기도 합니다.